2014. 9. 23. 17:0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완성시킨 수행자
碧牛岩度|전 조계종 교육원장 ․ 백양사 청량암 주석
고백하건대, 나는 광덕 큰스님을 처음 뵙는 그 순간부터 짝사랑했다. 내 나이 스물여덟인가 아홉일 때, 젊은 출가자들 오륙십 명과 함께 해남 대둔사로 수련회를 갔을 때다. 스님께선 그때 대불련 학생들을 데리고 와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탄허스님께서 특강을 해주시는 것을 보았는데, 철야정진할 때 직접 죽비를 잡고 학생들과 함께 1080배를 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도 스님의 죽비에 맞추어 함께 절을 했는데, 깨끗한 외양에 엄해 보이기도 했던 스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스님의 위엄 당당한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큰스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제대로 사는 수행자가 되고자 발심을 했다. 뭐라 할까, 같은 출가자로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할까, 그분을 모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이 스님과 첫 인연이었다. 그때는 내가 말을 붙일 처지도 아니고 해서 말 한마디 없이 그냥 헤어졌으나, 스님에 대한 내 짝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뒤 내가 서른여섯이 되었을 때 종단에서 감찰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스님은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종단의 대소사를 몸소 챙기고 있었다.
나는 그때 스님이 종단을 위해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애종심(愛宗心)이란 바로 저런 거로구나’하고 속으로 감탄을 하며 배우려고 했다. 그 당시 종단과 동국대와의 사이에 마찰이 생겨 총무원을 아예 동국대로 옮겨 일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스님은 큰 수술을 받은 후여서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어려운 시기였는데, 어느 날 사무실에 갔더니 깡통에 든 오렌지 주스를 드시고 계셨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건물의 사무실에서, 홀로 찬 주스 한 병으로 끼니를 때우며 종단을 위해 부종수교(扶宗樹敎)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다시 한번 스님의 충정을 가슴 깊이 느꼈다.
나는 그때, 대둔사 수련회에서 스님의 모습을 보고 발심을 했듯, 종단에 몸담고 일하면서 스님의 헌신을 바라보며 재발심을 했다. 떠돌이 수행자에 불과했던 나는 큰 선지식이 되어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종단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교육원장으로 있을 땐가 동국대 역경원장이신 월운스님의 칠순연에서 축사를 한 적이 있다. 종단 일을 오래 보았던 내가 그 당시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아 매우 울적할 때여서 축사를 하다 그만, 시 한 수를 읊고 말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울적한 심사를 담아 잠깐 부른 노래였는데, 나중에 어떤 이가 그때 일을 상기하면서, “스님, 그때 마음이 아주 울적하셨나봐요.” 했다. 아마 종단의 이런저런 일로 울적했던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종단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말없이 티없이 살고 싶은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광덕스님께서 종단을 붙들고 애종심으로 순수하게 몸 바쳐 일했던 것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보살정신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고, 또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본다.
내가 종회의원을 할 때 보니까, 스님은 아주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이상적이라 하여 스님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밤을 세워가며 조계종 종헌 ․ 종법의 기초를 만들어 놓고 손질을 다한 것은 오로지 스님이었다. 말 그대로 종단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고 그 일은 역시 스님이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회가 열릴 때마다 스님이 발언하시는 것을 유심히 들었다. 그때마다 ‘참으로 멀리 내다보시는구나’하는 속 감탐을 하곤 했다.
스님의 속을 잘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스님께서 너무 이상적이다하여 몰아붙이기도 했으나, 종교라 하는 게 본디 현실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나도 그런 이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스님의 생각을 지지했고, 또 그런 높은 이상을 견지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종단 일을 도맡아 능숙하게 처리하셨던 스님이 무척 좋게 보였다. 아마 평소 스님을 흠모하고 따르다 보니 모든 게 좋아 보였던 까닭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스님의 헌신적인 종단 사랑이 내게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고백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 스님을 따랐고 짝사랑한 게 사실이다.
내가 총무국장을 한 뒤 조금 쉬다가 교무부장으로 다시 종단에 나갔을 땐 스님께선 종단 일선에서 물러나 종로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 창립하여 포교에 몰두하고 계셨다. 가끔 종단 일을 자문하러 가면, ‘나는 종단 일 모른다’라고 한마디로 거절하면서도 금방 애종심이 발동해 자세히 가르쳐 주곤 했다.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친절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스님의 종단 사랑이 유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종단 일을 오랫동안 하면서 스님처럼 큰 일 한 것은 별로 없으나, 실수한 것도 없었던 것은 이렇듯 스님께 자문을 구하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스님께선 설이나 명절 끝에 인사를 드리러 가면, 별 말씀은 없었으나 좋아하시는 눈치가 역력했다. 물론 그 어른이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나를 대했던 눈빛이 따뜻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언젠가 갈매리 보현사에 계실 때 찾아갔다가 부재중이시라는 말만 전해 듣고 돌아온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두문불출하고 ‘천수주력(千手呪力)’을 하신다는 얘길 전해 듣고, 편찮은 몸을 이끌고도 끊임없이 수행정진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시는구나 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고금을 막론하고 수행자의 본분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있다 할 것이다. 먼저 수도(修道)해서 자기완성을 하고 다음에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수행자의 사명이다. 상구보리는 자기완성이요, 하화중생은 사회완성이다. 출가 수행자의 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철저히 실현하는 데 있다. 스님은 수행자의 사명이자 의무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철저하고 열렬히 실현했던 이 시대의 참다운 선지식이시다.
잠실 불광사에 계실 때 정초에 세배를 하러 가거나, 오며가며 들러보면 몸이 편찮아 누워 계시면서도 원고를 받아쓰게 하는 모습을 뵙곤 했다. 스님의 하화중생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포교원장 시절에 가끔 들르면 전보다 더 살가운 눈빛으로 맞곤 했다. 당신이 적접 포교현장에 있으면서 느낀 것도 많았을 것이니. ‘종단의 포교를 맡았으니 잘하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것은 스님이 종단 일선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종무에 임할 때, 참신하면서도 포교에 역점을 둔 종단을 꿈꾸었던 지난날의 생각이 떠올라서였을 것으로 짐작했다.
스님은 말할 수 없이 다정다감하다가도 때론 무섭도록 차가웠다. 공적인 일로 대할 땐 차가웠고, 사적인 일로 마주했을 땐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던 분이었다.
몇 번의 큰 수술을 거쳤던 터라 몸은 말할 수 없이 약해 보였으나, 스님은 언제나 깨끗한 학체(鶴體)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스님께서 당신이 지녔던 모진 병고를 초월해서 형성했던 것은 전생의 인연과 금생의 수행력으로 뚫고 나간 용맹정진으로 이룩한 불사라고 본다.
어떤 일이든, 본디 인연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인연이 있어도 수행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세상사 이치다.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동체대비에 흠뻑 빠졌다 나오지 않으면 그렇듯 중생을 향한 뜨거운 자비가 나올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스님의 도(道)에 대한 체증(體證)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스님은 진정 이 시대의 선각자요 불법의 주인공이었던 분이다. 종단의 일을 하면서 그랬고, 서울 강남의 지역 인구를 흡수해서 불교신도를 새로운 차원으로 교화하여 우리 불교에 새 길을 열고 가신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스님은 또 혁명가적 기질을 다분히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종단 정화세력의 중심에 있다가 홀연히 길을 바꾸어 포교로 완전히 탈바꿈한다는 것은 혁명가적 기질이 없으면 안 된다. 그만큼 순수했고 뜨거웠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종단에 연연하지 않고 딱 물러서서 시중 한가운데 서서 그 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포교에 헌신하셨다는 것은 이 시대를 주인공으로 살다 간 분의 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얼마 전 안성 도피안사 개산 10주년 때 법사로 초청을 받아 가보고 나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람을 새로 일구어 스승을 개산조로 모셔 놓고, 부처님처럼 스승을 모시는 송암스님을 보고, 광덕스님께선 정말 복과 지혜를 함께 구비한 분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 오랜 경험으로 보면 스승을 잘 만나는 것도 큰 복이지만, 좋은 제자를 만나는 것도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제자를 잘 만나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송암스님의 스승을 모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 모든 젊은 스님들의 귀감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삶을 살다간 사람은 죽어서도 짙은 행기를 낸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수행자에게 부과된 의무와 사명의 삶을 완성시켰던 스님의 향기는,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났어도 여전하다. 그것은 스님이 남기신 지혜의 향기요, 스승을 부처님처럼 받들어 모시는 한 제자의 스승에 대한 흠모와 존경에서 빚어진 향기다.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향기가 아닐 수 없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46년 여름 안거 후 백양사 청량암에서
암도 분향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결국 하늘 아래에 놓인 건 마찬가지인 것을
높고 높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이 하찮은 생물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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