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 김태환

2014. 9. 17. 09: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질문 :

화두로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화두법이 아닌 방법으로 공부하신 선생님의

화두법에 대한 의견을 구합니다.

 

답변 :

반갑습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확인한 것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정직할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공부할 때에 저에게 풀어야 할 화두는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불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와 성인들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 진리는 곧 나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의 실상은 어떤 것인가?”

어찌 보면 대단히 막연한 것이었죠. 그저 궁금하고, 그저 갑갑할 뿐이었죠.

내 스스로의 사유나 노력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궁금하고 갑갑하긴 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에 스승님께서 “이것이 바로 선이다.” 하시며

방바닥 치시는 소리를 듣는 순간 확 뚫리며 궁금함과 갑갑함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쭉 지금까지 이렇게 상쾌합니다. 아무 의식이나 생각이 없어도 다른 일이 없고,

생각을 일으키고 주의를 기울여도 역시 다른 일이 없습니다.

저의 공부 경험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뒤 <전등록>을 보니 저와 같은 식으로 경험하신 분들의 말씀들이 많이 실려 있고,

그분들의 심경을 드러내신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대체로 공감이 가더군요.

화두공부에 관해서는, 화두공부의 제창자이신 대혜종고 스님의 화두공부에 대한 말씀이

모두 <서장>에 실려 있습니다. 서장을 정밀하게 번역하면서 살펴보니 대혜스님이

말씀하신 화두공부 역시 진행되는 상황이 저의 경험과 다름없음을 알 수 있더군요.

“생쥐가 소뿔 속에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문득 확 뚫리면,

그대로 쭉 막힘없이 열려 있으며, 모든 차별 경계 속에서 어떤 차별도 없이 한결같다.”

대혜종고가 말하는 화두공부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혜종고가 경계하고 있는 두 가지 삿된 길로는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치나 도리로 이해하는 것이고, 하나는 고요한 경계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삿된 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을 저도 늘 강조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마치 제각각의 화두가 제각각의 문제이고, 그 제각각의 문제에 대한 제각각의 해답이

있는 것처럼 화두를 이치나 도리로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삿된 길입니다.

이렇게 이치를 분별하는 사람들은 선과 마음에 관한 나름의 이론을 세워놓고 그 이론에

모든 말들을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나 도리는 모두 분별이요 망상일 뿐인데도

매우 그럴 듯이 정리되어 있으니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한 가지 의심일 뿐이고, 천 가지 만 가지 말씀의

낙처(귀착점)는 다만 하나라는 것이 대혜종고의 말씀입니다.

 

또, 화두를 붙잡고 고요히 앉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아무 잡념이 없이 마치 텅빈 것과

같으면서도 또렷이 깨어 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화두를 붙잡고 있지만,

내용은 이른바 묵조선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고요히 잡념이 없으면서도 또렷이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이 조작하여 만든 차별경계일 뿐인데도, 다만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는 즐거움에 빠져서, 이러한 상태가 진실한 본래면목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조선은 대혜종고가 가장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화두를 붙잡고 공부하는 간화선에 관해서는 저의 경험이나 가르침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대혜종고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의 간화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제가 쓴 <간화선 창시자의 선>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화두는 곧장 이 마음(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입니다.”하고 말할 때에도 역시

곧장 이 마음(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이렇게 눈앞에 언제나 드러나 있지만,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고, 긍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마음에 문득 통달하면 마음은 이름일 뿐,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시끄럽고 고요하고 깨어 있고 잠자는 곳에 따로 마음이랄 것도 없고 마음이 아니랄 것도

없습니다. 한결같이 끊어짐이 없으며, 티끌만한 물건도 없습니다.

어떤 이치나 도리도 없으며, 다만 매 순간순간 인연따라 응함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라는 말을 화두 삼아 관심을 두어 보십시오.

언젠가는 확인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 법정스님

 

나  무 (1)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잎을 펼치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훌훌 옷을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그대.

 

나  무 (2)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앉아도

그저 무심하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 쯤 꺾여도

끄덕없는 표정으로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에

나비와 벌이 찾아와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백한 그대.

 

나  무 (3)

 

한 여름 발치가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닌 그대

 

이것 저것 복잡한 분별 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게 무심히

그대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