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방식이 마음이다

2014. 9. 23. 17: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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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방식이 마음이다

곧잘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본마음은

깨끗한 유리와 같은 것인데

 

욕심으로 얼룩진 때가

달라붙어 더럽혀진 것이니

때를 닦아내면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것은

유리와 같은 실체가 아니다.

 

마음은 천변만화한다.

한순간도

그냥 있는 법이 없다.

 

 

 

그러면

왜 마음이 그렇게 달라지는 것일까.

바로

관계방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고객을 만난다.

부모 형제를 만난다.

그때마다

마음은 달라진다.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을 봐도

여자로 볼 때와

환자로 볼 때는 또 달라진다.

 

여자로 볼 때는 욕정이 일어나고

환자로 볼 때는 연민이 일어난다.

그 순간의

관계설정에 따라 마음이 전혀 달라진다.

 

 

 

일을 할 때도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다 던져서 일을 할 때와

대충대충 건성으로 일을 할 때,

마음은 달라진다.

 

일에 대한

관계방식에 따라 마음은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실체가 없다.

관계만 남는다.

관계, 관계방식 그것이 마음이다.

양심(良心)이란 것도

내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양심은 내 속에 없다.

 

‘나’라는 것은 관계의 한끝,

인연의 한끝을 쥐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양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양심

관계 속에 있다.

나와 너,

주객의 관계 속에 있다.

 

그 관계가

정합적이고 순리적일 때 양심이 일어난다.

양심이란 말

자체가 관계적인 개념이다.

 

관계할 대상이 없다면

양심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수행(修行)이란 말을 쓰는 것도 그렇다.

행(行)을 바로잡는다고 했지

마음을 닦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行)이란

관계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수행이다.

 

‘내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바로잡는 것,

관계방식을 정확하게 가져가는 것,

그것이 닦는다는 의미다.

’라는 것의 실체는 없다.

그래서

인연지소생(因緣之所生)’이라고 한다.

무수한 관계,

관계방식의 총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

바뀐다는 것은

관계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세계에서 최고의 경전인

‘금강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중생상(衆生相)을 떨치라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너의 대립관계,

수자와 중생의 우열관계를 떨치고

평등한 관계의 지평에 설 때

무상(無上)의 지혜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관계방식을 바로잡지 않고

지혜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면

처처불생(處處佛生)’이라는 말도 그렇다.

 

 

 

부처

내 속에서 생(生)하는 것이 아니다.

처(處)에서,

관계에서 생(生)한다는 것이다.

 

(事)이란 것

자체가 관계적인 것이니까

일에서 불공을 하듯

‘나’라는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자신을 완전연소할 때,

거기에

부처가 응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관계 속에서의 완전연소,

그것을 나 없음,

무아(無我)’로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을

하나님처럼 섬기라’는 것도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보이는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바른 믿음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영남대 배영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