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4. 13:0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무정설법의 원조 선지식인 동산양개 선사의 도수도(洞山良价渡水图).
‘지금 여기’의 거사선
‘무정설법’에 깨달은 동파거사 ②
지난 호에서는 송대의 대 문장가로서 대표적인 재가 수행자였던 동파(東坡,
1036~1101)거사가 승호선사(承皓禪師)를 저울질하려다 법 방망이를 맞고 발심하는
장면과 불인요원(佛印了元) 선사와의 ‘소똥’과 ‘방귀’ 법문을 통해 현실의
다사다난한 삶 속에서도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한 해행상응
(解行相應)의 실참수행을 해나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두 선사의 지도점검 아래 향상일로를 걸은 동파거사가 마침내
‘무정물이 설법하는 도리’를 깨닫고 오도송을 토하는 기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파거사는 많은 선지식들과 교유하며 나날이 안목이 높아져갔지만 확실하게
자성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입적을 눈앞에 둔 66세 때 비로소 동림상총
(東林常聰, 1025~1091) 선사를 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동림선사는 임제종 황룡혜남(1002~1069) 선사의 제자로 ‘마조대사가 다시
환생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혜남선사에 비견되어 ‘소남(小南)’이라고 불린
700 대중을 거느린 큰 선지식이었다.
동파거사가 황주에서 5년간의 단련부사(團練副使) 소임(사실상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여주(汝州, 지금의 河南省 臨汝)의 지사(知事)로 부임하던 중,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묵게 되었다. 여기서 동생과 친밀한 진정극문 선사와 동림상총
선사를 참문하게 되었다.
동파거사가 동림선사에게 여쭈었다.
“제가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자 하오니,
스님께서 이 미혹한 중생을 건져주십시오.”
“거사님은 어떤 큰스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저는 많은 선사님들을 친견했지만, 아직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동림선사가 말했다.
“거사님은 어찌 무정(無情)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고,
유정(有情)설법만을 들으려 하십니까?”
있는 그대로 완전한 실상의 세계
동파거사는 생명체가 아닌 ‘무정물이 설법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지라 너무나
기이하고 그 뜻이 궁금하여, 곧바로 화두와도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무정물이 설법한다고? 무정물은 과연 어떻게 설법하는가?
설법을 한다면 왜 나는 듣지 못하는가?’
거사는 이러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운데, ‘무정설법’이란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들고 말았다. 말을 타고 가고는 있었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무정이 설법하는 도리만을 참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폭포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폭포수 떨어지는 우렁찬 소리에 놀라 크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오도송을 지어 동림선사에게 편지로 보내 인가를 받고 선사의
법을 잇게 되었는데, 깨침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계곡 물소리는 그대로가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 풍경은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어젯밤 깨침으로 다가온 팔만사천 법문을
다른 날, 어떻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동파거사가 깨닫기 전에도 계곡의 폭포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산색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었건만, 왜 부처님의 법문으로 듣지 못하고 청정법신으로
보지 못했을까. 주관(보고 듣는 자)과 객관(보이고 들리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오래된 망상, 마음 밖에 대상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억겁의 고정관념, 객관세계
안에 자아가 존재한다는 전도된 착각이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완전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억겁의 꿈에서 깨어나 ‘제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바로 보게 되면, <화엄경>에서
설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법’이라는 법문과 계합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보등록>의 “산과 시냇물과 대지가 법왕의 몸을 그대로 드러낸다
(山河及大地 全露法王身)”는 선어(禪語)가 무정설법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물새와 숲나무가 모두 염불하며 법을 설한다
그렇다면 솔바람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계곡의 물소리, 산 빛깔을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 부처님의 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나’와 ‘나의 것’이 고정불변 되게 존재한다는 무시무시한 관념을
깨뜨려 무아(無我), 무심(無心)의 심경이 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때,
<인천보감>의 “늙은 소나무는 반야를 얘기하고 그윽이 깃든 새는 진여를 희롱하네
(古松談般若 幽鳥弄眞如)” 라는 깨침의 노래가 참으로 자기 살림살이로 녹아날 것이다.
이 ‘무정설법’은 동파거사를 통해 후세에 유명한 화두가 되었지만, 실은 그보다
200여년 전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의 깨침으로 확립된 공안(公案)이기도
하다. 동산양개 선사의 원조 선문답을 통해 다시 한번 무정설법을 깨닫는 기연을 만들어
보자.
동산양개 선사가 위산선사의 추천으로 운암담성 선사를 찾아뵙고, 다짜고짜 질문했다.
“무정설법에 대해 들으신 게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지.”
“스님께서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만일 내가 들었다면 그대는 내 설법을 듣지 못할텐데.”
곧이어, 담성선사가 불자를 곧추세우며 물었다.
“들은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 설법도 듣지 못하면서 하물며 무정설법이겠느냐?”
“무정설법은 어느 경전에서 나왔습니까?”
“<미타경>에서 ‘물새와 숲나무가 모두 염불하며 법을 설한다’고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양개선사가 대오하여 게송을 지었다.
기이하고도 기이하구나 (也大奇也大奇)
불가사의한 무정설법이여 (無情說法不思議)
귀로 들으면 끝내 깨치기 어렵고 (若將耳聽終難會)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알 수 있으리 (眼處聞聲始得知)
귀로 접촉하여 아는 것은 단지 소리의 티끌일 뿐이며 자성(自性)의 소리가 아니다.
눈으로 접촉하여 아는 것은 단지 형상의 티끌이며, 자성의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눈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리의 티끌이 아닌 자성이며,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도안(道眼)으로 보는 것이다. 자성은 일체에 두루 퍼져 있으므로
도(道)에 눈을 뜬 사람은 자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동파거사상.
어찌 자성이 만법을 내는 줄 알았으랴
사람이 사물과 다른 것은 언어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정(情)이 없는 사물은 생각이 없고 언어가 없는데 어찌 설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이 있든, 정이 없든 깨달은 안목에서는 모두 자성과 둘이 아닌 일체이다.
오조 홍인선사로부터 금강경 법문을 듣고 말끝에 단박 깨친 육조스님의 오도송은
만물을 나투고 거두는 자성의 묘용(妙用)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어찌 자성이 본래부터 청정한 줄 알았으며 (何期自性本自淸淨),
어찌 자성이 본래부터 나고 죽음이 없는 줄 알았으며 (何期自性本無生滅),
어찌 자성이 본래부터 구족한 줄 알았으며 (何期自性本自具足),
어찌 자성이 본래부터 움직임이 없는 줄 알았으며 (何期自性本無動搖),
어찌 자성이 만 가지 법을 내는 줄 알았으랴 (何期自性能生萬法).
본래부터 나고 죽음이 없는 자기의 성품이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거두는 근원임을
깨달은 육조대사의 사자후는 그 얼마나 통쾌한가.
일체 만법이 자성(自性)이란 이름을 가진 마음거울(心鏡)의 그림자임을 깨달으면,
꿈같고 마법같고 뜬 구름같은 객관세계가 모두 실상(實相)을 반영하는 무정설법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둥지에서 어미새를 쳐다보는 새끼는 인생의 슬픔과 연민을 자아낸다.
도도히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노라면 삶의 무상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만물 모두 선기(禪機)를 드러내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결코
자성과 둘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육조대사와 양개선사, 동파거사를 비롯한 역대 선지식들이 온몸으로 체득한 무정설법을
알음알이나 개념이 아닌, ‘눈으로 듣고 귀로 보며’ 실감하게 될 때 우리는 객관세계의
경계나 심적인 고통은 물론, 생과 사로부터 벗어난 대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월간 <고경>에 발표한 글입니다.
보고 또 봐도 좋은글
밉게 보면 雜草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 瞬間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生覺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謙遜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
稱讚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感動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香氣에 世上이 아름다워라.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必要 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이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고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消化不良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 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造物主의 配慮랍니다.
精神이 깜박거리는 것은,
살아온 歲月을 다 記憶하지 말라는 것이니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면
아마도 머리가 핑하고 돌아버릴 거래요.
좋은 기억, 아름다운 追憶만 기억하라는 것이랍니다.
바람처럼 다가오는 時間을 膳物처럼 받아들이면 .
가끔 힘들면 한숨 한 번 쉬고 하늘을 보세요.
멈추면 보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무상초
덧없이 흐르는 게 세월이라
구름처럼 흘러흘러 나는 지금
어디메뇨 마음의 님을 찾아
얽히고 설키었던 인연타래
한올 한올 풀다 겨워 돌아보니
머문자리 무상초 홀로 피어
세상사 색즉시공 구경열반 공즉시색
무상심신 미묘한 뜻 잎새끝에 달렸구나
형상없는 무딘 마음 홀연히 벗어놓고
불암 불암 개골가락 절로 흥겨우니
얽히고 설키었던 인연 타래
한올 한올 풀다 겨워 돌아보니
머문자리 무상초 홀로 피어
세상사 색즉시공 구경열반 공즉시색
무상심신 미묘한 뜻 잎새끝에 달렸구나
형상없는 무딘 마음 홀연히 벗어놓고
불암 불암 개골 가락 절로 흥겨우니
물같이 바람같이 그리 살다 나는 가리
물처럼 바람처럼 그리 살다 나는 가리
물같이 바람같이 그리 살다 나는 가리
물처럼 바람처럼 그리 살다 나는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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