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성철 큰스님

2014. 10. 21. 09: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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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


원시경전에서의 중도사상 / 성철 큰스님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선(禪)과 교(敎)를 통하여
일관된 최고원리가 중도사상(中道思想)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는데
대중들도 대개는 이해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붙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원시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경전 그 자체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되고 불교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들의 성립시기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범어본(梵語本)을
언어학적, 문법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이 경전들이 부처님 당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돌아가신 후 5~6세기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조스님께서도 부처님 돌아가신 후 천여 년 뒤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부처님 근본사상은 중도(中道)라고 법문한 것이
부처님 뜻과는 관계없는 거짓말이 되어 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친히 하신 말의 기록이 아니라
돌아가신지 5~6백년 뒤에 성립된 경전을 인용하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다”고 주장하여
불교계가 크게 당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 합니다.

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경전 연구를 거듭한 결과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은 아니다”고 하는

확증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면 우리 불교의 초가경전으로 대․소승에서 함께 인정하는 「아함경」은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인가 하고 연구해 보니
「아함경」 조차도 모두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판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불교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될지 모르게 되어
학자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신다면 물어나 보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우정백수’라는 분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蹟)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 사상을 참고하고
셋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들을 기둥삼고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알려고 우리가 노력해야지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如是我聞)”고 시작한다고 해서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한 경전이라고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학자들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어디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여
불교의 근본사상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원시경전인 「아함경」도 대승경전도 아닌
율장(律藏)을 학자들이 많이 신빙(信憑)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율장을 보면 시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문법학적으로나
부처님 당시부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내려온 것으로서
혹 중간에 오면서 가필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봐서는 가장 부처님 말씀에 정확하지 않은가 하고
학자들이 판단을 내렸습니다.

율장 가운데서도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통칭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편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율장의 초전법륜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 (二辺)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하였다.」

출가(出家)라는 것은 꼭 승려가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인도 당시에는 집을 나가 도를 닦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를 전념으로 닦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변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예를 들면 고(苦)와 낙(樂)이라는 것입니다.
이변이라 하면 시비와 선악, 있음과 없음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고와 낙”을 예로 들었느냐 하면
부처님 당시 실정에 비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였으며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행주의자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병을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이든 간에 확증하고 있으니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욕락(欲樂)과 고뇌(苦惱)의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는 여래에 의하여 정등각(正等覺)되었다」

이 중도대선언은 남전대장경 중부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오분률(五分律)․사분률(四分律) 등에도 기록되고 있으나
남전대장경파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이변을 떠난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세계의 어느 불교학자이든 간에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경전 성립사적으로 보아서 율장보다도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서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타니파아타의 피안도품(彼岸道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변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러므로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 년 뒤에 성립되었든지 간에
어떤 경전이든지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에서 말한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선종 등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잘 몰라서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소승불교만이

부처님 불교가 아닌가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뒤에는
대승비불설은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명치(明治) 말엽에서
대정(大正)초기인 20세기 초엽에 성행했습니다.

그러면 인도에 있어서 용수(龍樹)보살이나 마명(馬嗚)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하여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판명되므로 해서
그런 주장은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때까지 있었던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바로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각자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니
이 시대를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18 또는 20 부파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각 파가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서
이것이 불교다 저것이 불교다 하여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모두 어느 한쪽에 집착한 변견이었으니 이것이 소승불교입니다.

대체로 보면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무견(無見)으로 갈라졌는데
대중부(大衆部) 계통에서는 무견(無見)을 주장하는 파가 좀 있기는 있어도
상좌부(上座部) 계통에서는 모두가 유견(有見)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시대에 있어서는 변견으로 근본을 삼았고
소승경전도 그 당시 자기네들이 편집하고 전해 내려오면서
많이 가필(加筆)하고 개필(改筆)하였습니다.
이것이 저간(這間)의 사정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저술하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를 천양하였습니다.

중도(中道)!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제자 제바존자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일생을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셔버리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오륙백 년의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는 정통이 아니며 대승불교가 정통인 것입니다.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제자들이 있었던
불멸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라 하고
그 후부터 불멸 후 백 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말하고,
부파불교는 소승불교로서 불멸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까지
사오백년 사이를 말하고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그런데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써 중도사상이 하나도 없는데 반하여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교설이 설하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부처님 사상을 오해한 변질된 불교이며
정통의 불교는 아니라는 것은 요즈음 와서 학자들이 다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공적이 제일 큰 사람은
‘우정백수 박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봄보다 아름답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가을 분위기는
    정을 느끼게 하며 친근감을 주고,

    청명한 가을하늘을 향해 해 맑게 핀 코스모스를 보면
    정녕 가을은 봄보다 아름답습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속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생각이 스며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이 할 일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려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어느 곳이든 발이 닿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이름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름 모를 풀꽃도 우리를 일깨우는 것을 보면,
    천하보다 귀한 우리들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내합니다.
    자연은 기만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진실합니다.
    자연은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가을은 온 산천의 수많은 단풍들로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단풍 한 잎을 보면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알아낸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가을에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미래도 좀 더 멀리 내다보게 되고,

    오늘의 내 모습도 세심히 살펴보게 되며,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관심도 더해집니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가을입니다.

    가을이 되어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이 자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의 무한함에 감사하게 됩니다.

    맑고 투명한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우리는 진실의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귀한 손님을 맞게 됩니다.

    가을은 우리를 외롭게 합니다.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이 고개를 들며
    생명의 유한함에 더욱 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추수려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가을이 물 드는 하늘가에

      비록 오늘의 삶이 힘겨울지라도 하늘을
      바라볼 때면 늘 힘이 되어주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 맴도는 하늘가에
      파아란 마음으로 메아리치는
      늘 푸른 가을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하늘이 너무 파래 눈물이 날 때면
      사랑이 가득한 메시지로 늘 힘이 되어주는

      지란지교 참사랑으로 언제나 반겨주는
      한 송이 들꽃처럼 행복이 가득한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그대와 나 멀리 있다 하여도 늘 같은
      하늘아래 상큼한 공기 마시며 오늘을
      이야기 할 수 있음에 감사 드리며

      늘 처음처럼 설레이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노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늘 푸른 여름향기 가득했던 날들이여
      늘 힘이 되어주는 내 사랑하는 님이여

      여름향기가 아쉬운 작별을 이야기하는
      쓸쓸한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시는지요.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배경에서 해와 달의
      아름다운 정겨운 이야기들이 한 여름밤의
      꿈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피어납니다.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 같은 인생이여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정 나누며 살아도
      부족한 우리네 삶의 여정이기에

      늘 우리는 하나요 늘 사랑도 하나여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그대와 나
      귀뚜라미 노래하는 가을의 향기 속으로

      사랑과 행복이 어울림 되어 기쁨이 가득한
      사랑으로 풍요로운 가을의 향기를 나눌 수 있는
      지란지교 참 사랑 이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나 그대에게 그런 가을사랑이고 싶습니다.
      나 그대에게 그런 기쁜 사랑이고 싶습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