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6. 19: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견성이 교외별전이다 / 춘식스님
선에서 따로 수행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라는 경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도다.
승속을 나누지 않고 세간 속에서 출체간사를 밝히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청원행사스님께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하고 물으니 "여릉의 쌀값이 얼마더냐?" 라고 대답하거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하고
물으니 "내가 청주에 갔을 때 장삼을 지었는데 그 무게가 7근이더라" 하고 답한 것이 그러하다.
불법이나 열반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기 이전,
세상사 그대로 그 이름이 불법이고 열반이다. 생사를 모르니까 그것을 생사라고만 여기고
생사가 일시에 열반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불법이라고, 선이라고 이야기 하기 이전이 선이다. 우리는 선이라는 相, 선정과 같은 상에
집착하는데 그것은 선정이라든지 해탈과 같은 것은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있고,
규정지어진 바가 있는데, 참된 선은 그 경계가 없다. 선에는 두가지 상이 없다.
중생이 스스로 세간상과 열반상을 나누어 볼 뿐, 부처님의 깨달음에서는 그 둘 전체가
하나의 세상이다. 그러면 그 하나의 세상이 무엇이냐? 거기엔 부처라는 것도 없다.
지금 중생 이대로 이것이 부처다. 그렇다면 중생 또한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 깨달아야만 알 수 있지 어떠한 논리와 이치로 말해봐야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實이 아니고 공임을, 꿈과 같은 것임을 몰록 깨달아야
내 모든 의심이 녹아버리고 부처님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을 증득해야 이 세상 삼라만상 부처도 없고 부처 아님도 없는 두가지 상이 없게 된다.
부처보다 뛰어난 것이 중생이고, 중생보다 뛰어난 것이 부처다.
삼라만상 일체가 원융자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전부가 다 자기 손바닥 안이다.
한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신다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세계가 자기의 집이고, 자기가 수용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도 자기가 수용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이해로 아는 것은 구경이 아니다.
격외선지와 교외별진이 바로 부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견성이 교외별전이다. 나 자신의 견성을 떠나서는 만법이 절대로 옳지 않다.
나 하나가 어긋나면 우주 전체가 잘못되는 것이다. 내 한생이 올바로 되었을 때,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된다.
자기를 빼놓고 마음이다 부처다 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다.
자기 하나가 깨달았을 때 온 세상이 성불 하는 것이다.
참된 법은 법과 법 아님이 없다. 참된 선정은 선정에 듦도 남도 없다.
중생이란 견해와 부처라는 견해 이 두가지를 다 버려야 한다.
우리가 묻고 대답하는 일상사 그대로가 다 부처이고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우리 업식으로 구획을 나눈 것이다. 비유하자면 하나의 종이로
생을 만들고 사를 만들었다면 생도 종이고 사도 종이니 무슨 생사를 말 할수 읶겠느냐.
이 우주 삼라만상은 자기 자체로 언제나 본연 그대로다. 이것이 크게는 우주 전체로
나타나고 작게는 티끌로도 나타나면서 천변만화하지만, 두개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깨달아서 그 마음을 지켜가는 그것이 견성이다. 지킨다고 해서 도에 집착하여
그 도를 지켜나간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가 잘된다 했다하다가 공부가
퇴타했다 하는 것은 공부를 이루기 이전의 이야기다.
구경의 나를 돌아오는 데 무슨 공부가 따로 있겠느냐. 그래서 대통지승불이 십겁동안
도량에 앉아 있어도 성불하지 못햇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이미 부처인데 성불하려
하기 때문에, 이미 부처인데 수행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공부는 구경에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달마대사가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 했던 것처럼 실제로 우리가 깨달아 이루어야 할
부처란 것은 없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햇으니까 부처가 있는 것이다.
깨달으면 온 시방법계에 부처 아닌 것이 없는데 다시 성불할 부처가 어디 있겠느냐.
다시 성불할 부처가 있다면 완전히 깨달은 것이 아니다.
부처가 없다는 소리는 모든 것이 하나란 말이다. 이것은 있다 없다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에 집착하니까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일체를 放下하고 홀로 갈 때, 우주 삼라만상과 자기가 한 몸이 될 때 자기 자성인 것을
깨우친다. 도는 오염된 곳에 처해도 늘 깨끗하여 (염처상정處染常淨) 물들지 않는다.
선이라 하는 것은 이미 선을 떠난 것이고, 도는 도를 떠난 것이 진짜 도이다.
큰 스님들이 누가 도를 말하면 '아니다'하고 하는데 그 '아니다'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자성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일체의 인생사가 모두 자기의 사젓 가운에의 일이고, 내 마음 속의 꿈이다.
그렇게 관하면 다시 다른 무엇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것들이 모두 實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견성 성불이다. 견성성불이 따로 용뿔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관하면 우주전체가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운명과 인과법칙마저 환이다. 그래서 도인에게는 천국과 지옥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 있어도 그것이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환인 줄을, 자기
자신인 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가 없어진다.
말로만 견성을 떠들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유자재해야 견성이다.
강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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