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확장되는 즐거움 - 삶을 마음껏 경험하고 배우라/법상스님

2014. 11. 29. 21: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 - 삶을 마음껏 경험하고 배우라

 

* 릴레이 수행일기의 주제가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음 수행 주제는 거꾸로 '일체유심조'로 마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라는 주제입니다.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에 대한 중도의 가르침으로,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대한

  릴레이 수행일기의 주제법문입니다.

  참고하셔서 보다 많은 법우님들께서 릴레이 수행일기에 함께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상을 타파하라고 말한다.
아함경의 가르침에서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다.

 

 

아상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른 아상타파의 가르침을
일부 왜곡되게 해석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고,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누리라고 하며,
무아, 무심, 무상, 무집착, 무소유를 말하는
불교의 공사상, 무아사상을
허무주의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실제 불자들 사이에서도
불교를 공부하면
집착도 다 버려야 할 것 같고,
성공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공에 치우친 것이다.

그래서 중도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불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중도의 가르침이야말로,
자칫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수 있는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는 귀한 법문이 된다.

 

진짜 불자들은 집착을 다 버리고
아무런 욕심 없이 말 그대로 조용히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성공도 하지 말고, 바라는 것도 다 버린 채,
도시가 아닌 저 먼 시골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은둔과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돈도 벌지 말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아상타파의 길이고,
소욕지족, 무아, 무상, 공의 길을 걷는 유일한 길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런 생각에 얽매여 있다면
그 또한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그 양 쪽도 다 상관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집착이 없다면
돈을 벌어도 좋고, 청빈하게 살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성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나'라는 모습을 띄고
이 세상에 태어나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귀의(歸依)하기 위함이다.
내가 나온 본연의 귀의처로
되돌아가 의지하기 위함이다.

 

즉 본래 자리인 깨달음, 자비, 지혜의
그 근원적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이유다.

 

즉,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깨닫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배우기 위해 이렇게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어진 삶을 살아나감으로써
마땅히 배우고 성장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주어진 삶과 존재를 통해
무한히 자신답게, 자기답게 살아나가야 한다.
움츠러들고, 뒤로 빼며, 허무주의에 시달려,
삶의 에너지를 낮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음에서 어떤 것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그것을 행하라.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삶의 몫이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바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따지고 판단하고 계산하지 말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면 그저 저질러 행하라.


그 행함을 통해
내가 이 기회에 배워야 할 것들을
마음껏 배우고 넘어가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하되,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라.


만약 집착하면서 행한다면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보다는
고통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집착 없이 행하라는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음을 내되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이것이다.

 

무아, 무집착, 소욕지족, 아상타파,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이 모든 가르침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의도와 의지를
꺾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어떤 영감과 직감어린 의도가 일어났다면
마땅히 그것을 저질러 실천하고 행하라.


그것이야말로 삶 자체가
수행이 되고, 명상이 되게 하는,
삶 자체를 통해 깨달아 가는 길이다.

 

그것은 업을 만들어내는 유위가 아니다.
한 생각 일어났을 때,
그저 저질러 행하는 것은 무위다.
그러나 거기에 온갖 생각과 집착과 판단 등을 동원하여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까,
성공할까 실패할까 등을 판단하게 됨과 동시에
그것은 업을 일으키는 유위로 전락하는 것이다.

 

불교의 공부는
'함이 없이 행하라'는 가르침이지,
'함이 없으라'는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무엇이든 저질러 행하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가장 쉽게 행할 수 있는,
가장 나다운 것을 행하라.

 

이 우주 법계를 밝히고,
중생과 이웃을 제도할 수 있는
원대한 원력을 밝힌 뒤,
구체적인 실천행에 대해서는
가장 자기다운 방법을 택해 저질러 행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사랑한다고 말하라.


말도 못 해 보고
마음 속에서 고민만 하다가
남에게 빼앗기느니,
사랑한다고 말한 뒤에 퇴짜맞는 편이
더욱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실현의 아픔, 사랑의 상처야말로
우리 삶에서 한번쯤 겪어 봐야 할
아름다운 공부꺼리가 아닌가.

 

어떤가.
이렇게 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이 생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를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성공을 하려면
성공을 위해 도전해 보라.


사업을 하려면 그것도 좋고,
친구를 사귀려면 그것도 좋으며,
사랑을 해 보는 것도 좋고,
무언가를 배워 보는 것도 좋다.

 

무엇이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그것을 할 때 시간 가는 것도 잊을 만큼
저절로 몰입이 되고 삼매에 들게 되는,
바로 그것을 저질러 행하라.

 

그것이 바로 무위행이며,
몰입이고, 삼매며,
자기다운 행이다.

 

만약 그것을 행하다가
실패했다면
그저 미소를 보내고는 다시 일어서라.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로 가장한 성공일 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남들의 뒷담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어떤 결과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 없이 행하고,
집착 없이 행하는 데서
큰 힘이 붙는다.

 

성공과 실패,
그 양쪽을 통해 동시에 깨닫겠다는 각오를 하라.

 

그리고 이제 행하라.
나다운 것을 마음껏 실천하라.

아상을 타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해 보라.


집착 없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상타파의 길이다.

 

자기다운 행으로써
삶을 창조하고,
삶을 경험해 나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더 큰 깨달음과 지혜와 자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없애야 할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이며,
나에 대한 상이고,
나와 상대라는 차별심이지
나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없애야 할 것은
아상과 아집이지
나 자체인 것은 아니다.

 

 

 
 
법정스님의 명상 중에서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내 내면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체를 고요히 지켜보는 일이다
조용히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지식은 지식으로부터 오지만
지혜의 슬기로움은 명상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냥 지켜보라
지켜보는 사람은 산 위에서 골짜기를 내려다 보듯이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다시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순간순간 죽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녹스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지극히 단순해 지고 순수해 진다
이때 명상은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차, 한잔, 그리고 / 오광수

 

파름하게 다가오는 차 한잔으로

세상 붙잡은 한 끈을 놓고

또르르르

차 따르는 소리가

지리산의 운해를 건너 가는데

 

방안 가득히 번지는 차향이

먼 기억 저 편에서

어긋났던 인연의 모습들을

하나씩 하나씩 낮익은 향기가 되어

조용히 불러 내고 있다

 

마주앉은 마음은 만감인데

권하는 하얀 손이 아직도 너무 고와

찻잔 잡은 내손이

보일듯 아니 보일듯 작게 떨림은

나도 모루는 지우지 못한 가슴이 있는가?

 

한모금 머금고 삼키기 전에

잔 밑에 손밭치고 앞을 보니

예전에 보았던 밝은 모습대신

다소곳 잿빛 고운 바위 하나가

지리산 푸름앞에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