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2014. 12. 6. 10: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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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원철 스님
해인사로 출가했다.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불교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일반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해인사 사보 월간 <해인>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일간지와 종교계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해 왔다. 정확하고 간결한 글 솜씨로 법정 스님을 잇는 문장가라는 평을 들은 바 있다.
저서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는 타고난 얼굴은 어쩔 수 없지만 내면을 가꾸면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로 ’얼굴 부자’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뒤 ‘화두’의 신화를 한꺼풀 벗기며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일상의 이야기로 담아 낸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왕가의 명당에서 폐사지까지 스님의 눈으로 본 건축이야기 『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있네』 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선림승보전』 등 여러 권의 불교 경전을 펴냈다. 불교계의 큰 일꾼으로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을 거쳐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소임을 맡고 있다.


 

상세소개

정확하고 간결한 글로
법정 스님을 잇는 문장가로 통하는 원철 스님,
2011년 산사로 돌아간 뒤 처음 펴낸 산문집

원철 스님은 일간지와 종교계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해 왔다. 정확하고 간결한 글 솜씨로 법정 스님을 잇는 문장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서울 한복판 조계종단에서 불교계의 일꾼으로 7년간 일하다가 2011년 홀연 산사로 내려갔다. 그동안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해인사승가대학에서 학장 소임을 맡고 있다.

산사로 돌아가 처음 펴낸 이번 산문집에는 스님의 일상과 수행, 공부, 여행 단상을 담았다. 누구나의 일상처럼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힐링과 충고에 지친 요즘 우리들에게 맑은 차 한 잔 같은 ‘쉼‘, 그리고 반짝이는 ‘깨우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원철 스님은 노마드(homo-nomad) 스님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수행자라는 것, 그리고 생각의 이동과 변화에 막힘없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 이곳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에 기본한다. 늘 지금을 바로 보고 성실하자는 뜻을 ‘집’이라고 표현한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집이다. 제목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무엇이든 바로 지금 시작하면 된다. 그 생각을 놓지 않는 것이 순간을 사는 방법인 것이다.


힐링 혹은 멘토의 아픈 충고는 없지만

스님의 글에는 요즘 대세인 힐링 혹은 멘토의 아픈 충고가 없다. 스님은 어떤 깨달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잘하라고, 노력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지루하면 책을 읽고 심심하면 길을 떠나는 것이 내 나름의 행복 비결이다”라는 스님은 말처럼, 책 읽고 여행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김치 담고 빨래하고 해킹도 당하는 스님의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질 뿐이다.
이 심심한 일상 속에 사금파리 같은 반짝거림이 있다. 읽다 보면 이심전심 전해지는 ‘무엇’이 있다. 가령, 깨 잘 볶는 사람이 커피콩도 잘 볶는다, 내리는 빗소리와 올라가는 끓는 물소리에서 느끼는 경계의 아름다움, 짧은 가을이지만 겨울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백차(찻주전자에 배인 찻물을 맹물로 우려낸 차)를 대접받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 등의 문장이 그렇다. 스님은 무엇을 가르친다거나 거창한 뜻을 전하려 하지 않지만, 덤덤한 일상의 이야기는 ‘백차’처럼 천천히 흘러들어 공명을 일으킨다.


‘무심無心’이 마음을 울린다

현대인들은 너무 잘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안간힘 쓰며 노력한다. 최선, 행복, 사랑, 용서, 일……. 모든 좋은 가치들을 가지려고,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더 힘들고 피곤하고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원철 스님은 그런 우리에게 ‘무심히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겨울날, 스님은 가만히 있지 못해 뜰의 나무를 가지치기하다가 되레 나무 모양이 망가진 것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일도 일 없는 것보다 못하다. …… 모든 것을 떨군 나무와 윤곽이 드러난 산줄기의 모습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즐기는 일은 한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멋과 여유다.” 너무 바쁜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무심無心함’이 아니겠냐고, 스님은 슬쩍 말을 건넨다.


하나에서 둘을 읽는 ’마음의 눈뜨기‘

이번 산문집은 ‘중도中道’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산승에서 수도승으로 다시 산승으로 돌아간 스님의 위치가 그러하듯, 도시 - 산속 / 이동 - 머묾 / 떠남 - 만남 / 감춤 - 드러남 / 채움 - 비움 / 한 방울의 물 - 바다 / 개화 - 낙화…… 등 양변의 이야기다. 가만 보면 인생은 두 가지의 변주로 흐른다. 우리의 불행은 한 가지만 보기 때문이다. 삶 속에 죽음이 있으며, 잃었으되 얻는 것이 있고, 적은 것이 오히려 많은 것이며, 차갑지만 뜨겁기도 하고, 한 방울의 물에서 바다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중도의 지혜를 터득하면 인생의 어느 자리,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산승이건 도시승이건, 머무는 자리가 어디건 성실함을 다하는 수행자인 원철 스님을 통해 하나에서 둘을 보는 마음의 눈을 떠보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비범함

스님은 생각과 일상에 대해 솔직하다. 거리낌이 없다. 자유롭다. ‘조선스키’ ‘짚신스키’ ‘이노무스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스키 대여점 간판을 보며 상념에 빠지거나, ‘공부의 신’이 3개 국어에 능통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거나, 덥석 이불 빨래를 했다가 내리는 비에 후회하기도 한다. 겨울 찬바람을 막겠다고 외풍과 씨름하고, 서고 정리를 하다가 하루 종일 독서삼매에 빠지고, 도로에서 차가 막히자 내친 김에 근처 유명한 호두나무를 보고 가자고 핸들을 꺾는다. 또 도반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죽고 싶다‘는 속내를 보이며 애써 누른 슬픔을 꺼내 보이기도 한다. 누구나 겪을 법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수행이란 특별한 수행법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을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스님도, 평범한 우리에게도 세상은 평생을 머물러야 하는 거대한 수도원인 것이다. 평범함 속에서 잘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쩌면 그것이 비범한 삶일지도 모른다고 스님은 에둘러 말하고 있다.


‘노동’이 누구에게는 쉼이 되듯, 나에게 맞는 진짜 쉼을 찾아서

현대인들은 쉬기 위해 휴가를 낸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몰려간다. 진짜 쉼은 어떤 모습인가. 스님은 사람마다 쉬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한다. 평소 몸 놀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노동을 하거나 삼천 배를 하는 등 몸을 움직이는 것이 ‘휴休’라는 것, 스님이 경전을 읽는 것은 일이지만 잡지를 읽으면 휴식이 된다. “쉬고 또 쉬면 쇠로 된 나무에도 꽃이 핀다”는 말을 인용하며 스님은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그런 쉼’을 강조한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쉼을 통한 한 매듭은 한 켜의 나이테가 되고 한 해의 연륜이 되며 또 한 살의 나이가 된다. 겨울 시간이라고 흐르지 않을 리 없지만 섣달은 흐르는 걸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런 정지된 느낌이 세밑 무렵의 또 다른 산중의 맛이다.”


어제와 같지만 다른 오늘, 2015년 새해를 시작하는 용기

시작과 끝이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말은 익히 들어온 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고. 아름다운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지혜와 격려다. 스님은 이런 말도 일상에서 길어 올린다. “겨울 준비로 김장을 했다. 자연산 배추는 별로 볼품이 없지만 어디에 내놓더라도 맛과 향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배추걷이가 끝난 휑한 빈 산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이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이다.”
배추의 죽음이 아니라 김치의 시작을 보라는 스님의 혜안이 머릿속을 환하게 한다. 배추로서 끝낼 것인가, 김치로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다.


책속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토忍土, 본래 참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땅이다. 한 단계 낮추어 감인堪忍이라는 완곡한 표현도 사용했다. 참지 못할 고통이 없는 땅인 까닭이다. 이 세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괴로움이 적당히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는 의미다. (101쪽)

계절의 흐름을 읽듯 인생의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짧은 가을이지만 겨울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인생의 중년기도 길지 않지만 한 호흡 고르면서 준비하는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76쪽)

올겨울에도 ‘보온이냐? 통풍이냐?’ 해묵은 과제를 붙들고 씨름해야 할 것 같다. 등산복 광고처럼 보온도 되고 통풍도 되는 ‘고어텍스 문’을 만난다면 이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터이다. (133쪽)

눈길을 걸으면서도 뒤에 남는 발자국까지 걱정하지 말라. 사실 그냥 당신 갈 길만 유유히 바르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은 뒷사람의 몫이다. 설사 앞사람의 발자국을 똑같이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같은 길이 아니라 뒷사람이 새로 가는 길일뿐이다. (152쪽)

대낮까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스스로 너무 처져 버린 느낌이 싫어 찻상을 당기고는 물을 끓였다. 끓는 물은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고 비는 내려오면서 소리를 낸다. 두 소리가 방문을 경계로 묘하게 어우러진다. (265쪽)

‘해야 할 일’은 알겠는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도대체 뭐였지? 그리고 냉정하게 살펴보건대 해야 할 그 일이 하고 싶은 그 일을 방해한 적이 있었던가? 괜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나누는 순간 그것이 불행의 시작은 아닐까? (255쪽)

같은 그릇이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주전자가 되기도 하고 차관이 되기도 한다. 주전자가 차관이 되는 것처럼 번뇌가 바로 깨달음으로 바뀌는 것이니, 범부의 모습으로 성인이 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165쪽)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마당 한편의 화강암 수곽은 12월이 되면서 물을 담는 본래 역할을 끝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제 몸을 말리고 있다. 설사 생명 없는 돌이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쉼이 해마다 있었기에 그 자리를 오늘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249쪽)

산다는 것은 결국 드러냄과 감춤의 반복이다. 출근이 드러냄이라면 퇴근은 감춤이다. 화장이 노출을 위한 것이라면 민낯은 은둔을 위한 것이다. 피부를 밤새 쉬게 해줘야 화장발이 잘 받는 것처럼 퇴근 후 제대로 은둔해야 이튿날 자기역량을 마음껏 노출시킬 수 있다. 도시적 일상이 노출이라면 주말을 이용한 잠깐의 템플스테이는 재충전을 위한 은둔이라 할 수 있다. 연휴와 휴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현실은 제대로 된 노출을 위해 어떤 형태로건 은둔을 위한 나름의 처방책을 가져야 할 만큼 복잡다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어쨌거나 노출로 인한 피로와 허물은 은둔을 통해 치유하고, 은둔의 충전은 다시 노출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는 선순환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4쪽)

이 세상 전체가 80년 평생을 머물러야 하는 거대한 총림이요 또 수도원이다. 서로 의지하며 또 참지 않고서는 함께 살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선 붙박이건 떠돌이건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것은 나와 남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까닭에 법연 선사는 이런 소박한 구절을 남겼다. “20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 보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192쪽)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 그는 수행 생활을 하면서 늘 크고 작은 일 앞에서 결단이 필요할 때마다 농담처럼 이 말을 내뱉곤 했다. 선방을 전전하던 선객답게 현실문제도 늘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마음으로 실타래같이 꼬여가는 번뇌를 일거에 해결하곤 했다.
(87쪽)

 

 

중국의 4대 정원

 

北京 頤和園(북경 이화원), 承德 避暑山莊(승덕 피서산장),

 

 蘇州 拙政園(소주 졸정원), 蘇州 留 (소주 류원) 인데.

 

2개의 황가정원이고 2개의 민가정원인데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이 바로 황가정원이고

 

소주의 졸정원과 유원이 민가정원에 속한다)

 

 

제1탄 황실정원

 

승덕 피서산장(承德避暑山莊)

 

 

북경에서 180km 떨어진 화북평원과 몽골고원의 접경지역에

 

몽골를 견제하고 사냥과 피서를 함께 할 곳으로 선택한 곳으로

 

만리장성과 같이 높고 긴 벽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열하행궁(熱河行宮), 승덕리궁(承德離宮)이라 불리우는

 

564만㎡나 되는 넓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벽의 길이는 10㎞에 이른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703년 세운 여름궁전으로

 

넓이는 이화원(頤和園)의 약 3배정도이다

 

 

강남(江南)의 풍경을 모델로 하여

 

청의 강희제(康熙帝) 1703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87년간에 걸쳐서

 

1790년 건륭제(乾隆帝) 때에 완성되었다.

 

 

오래된 궁전이지만

 

난무라는 나무를 사용하여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보존도가 좋다

 

 

역대 황제의 대부분이 베이징의 더위를 피해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 동안 이 지역에서 정무를 집행하였기 때문에

 

2의 정치의 중심지이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조선,몽골,만주,티벳 등 사절단이 모여들던 곳이다

 

 

청나라때 가장 번성했던 건륭과 강희황제로 인해

 

열하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건룡황제 60세 생일과 70세 생일 건륭황제 어머니 80세를 치르면서

 

열하가 더욱 활기를 띄게되었다.

 

 

1860년 연합군의 전쟁을 피해 함풍제를 따라 승덕에 왔을때

 

서태후가 거처했던 방도 있고

 

 

또한 함풍제는 북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승덕에서 병사했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황제가 거처하던 궁전과 업무보던 곳은 작지만

 

사냥터,,호수 모두 합하면 상당히 큰 황실정원이다.

 

 

 피서산장은 4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궁전구(宮殿區), 수원구(水苑區), 평원구(平原區)와 산구(山區)이다.

 

 산장 전체의 정문이며, 궁전구의 정문인 여정문(麗正門)

 

성벽의 일부이다.

 

 

외오문(外午門)을 지나면,

 

피서산장이라는 편액이 걸린 내오문(內午門)이 나온다.

 

 이 피서산장문을 들어서면 소나무를 심은 중정(中庭)이 나온다.

 

 

  그 앞에 담박경성전(澹泊敬誠殿)이 있다.

 

이 건물 뒤에는 사지서옥(四知書屋)이 있는데,

 

이곳은 황제가 대신을 불러놓고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했던 곳이다.

 

 이 궁전구의 제일 구석에 운산승지루(雲山勝地樓)가 있다.

 

이 구석진 곳을 벗어나면 눈앞에 수원구의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수원구는 특히 강남의 뛰어난 풍경을 모방해서 조성했다고 하는데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하다.

 

수원구의 북쪽으로 평원구가 있고

 

이곳은 만수원(万樹園)과 영우사(永佑寺)가 주요 볼거리이다.

 

피서산장과 주위의 티벳불교 사찰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고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熱河)일기의 일부

 

연암 박지원은 이때 축하 연행사의 일행으로 팔촌형을 따라

 

이곳을 방문합니다.

 

정식 연행사는 아니었고 한마디로 잘 나가는 8촌 형의 빽으로

 

그저 묻어 간 것이지요.

 

       이 때 연행사가 연경-지금의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아뿔싸!

 

황제는 이미 여름 행궁인 피서산장으로 떠난 후였습니다.

 

       청 황제의 축하 사절단이 생일 잔치에 지각한다.

 

생각만해도 아찔하였겠지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마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꽁지에 불이 나게 승덕으로 황제를 따라 갑니다.

 

       홍수가 나 물이 불은 9개의 강을 하루 밤새에 목숨을 걸고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가 씌여진 배경입니다

 

      연행사가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하여 황제를 배견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 마침 반선대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황제가 절을 하라고 하니 인사는 해야겠는데,

 

당시 조선은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고 있는 상황이라 절을 하였다가는

 

      조선에 돌아가서

 

언론?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절을 못 하고 쭈저주저 하니 황제가 화를 벌컥 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다리가 후들후들 털썩 주저 앉아 절을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는 반선대사가 일행에게 불상을 하사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또 사단이 났습니다.

 

황제의 면전에서 아무리 중이 주는 선물이라도 받기는 받았으니

 

소중히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한양의 논객들이 임금에게 상소질을 할라치면 여간 골치가 아플 것이 아니거든요.

 

연행사 일행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한 끝에 묘안을 냈는데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실수를 가장하여 슬쩍 강에다 빠트리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선물로 받은 불상을 실제로 강물에 빠뜨렸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이상 오래 전에 읽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한 책 중에서

 

생각나는 이야기 한토막이었습니다. ^

 

       하여간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황제가 반선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피서산장의 水苑區

궁전구를 빠져 나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수원구는 

이화원의 곤명호처럼 광활하게 넓지는 않지만 몇개의 호수들이 각기 다른 분위기를 내며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연우루(煙雨樓)나 금산(金山) 같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조성하여 황제가 연회를 베풀거나 자연을 감상하고 

수렵을 할 수 있도록 꾸며 놓은 경원구는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자연미가 그대로 느껴지게 설계되었으며

지금도 사슴이 뛰어 놀고 관광객들이 뱃놀이를 하며 자연을 즐기는 곳이다. 

호수 가운데에는 동해의 신선봉을 본뜬 3개의 섬을 쌓았으며

섬과 호숫가를 둑으로 연결해 놓았고 섬 위에는 궁전이 있고 호반에는 정자가 있다. 

동궁 북쪽 수문 위, 샤후(下湖)와 인후(銀湖)를 잇는 수로의 돌다리 위에는 3개의 정자가 있다.

 

연우루 (옌위러우煙雨樓)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강남지방을 순례할때 자싱[가흥 嘉興] 옌위러우[煙雨樓]의

 비 내리는 모습에 매료되어 피서산장에 연우루 누각을 짓게 하였다.

 1780년 착공하여 1781년 완공된 뒤 건륭제가 서재로 꾸민 청양서옥(靑陽書屋)에서

 책을 읽거나 궁녀들과 놀이를 즐기면서 비 내리는 경관을 감상하였다고 한다.  

 

2층에는 검은 바탕에 건륭제의 친필인 금박 글씨 '옌위러우'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으며

빨간 기둥과 회색 기와는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칭롄도에는 뽕나무·느릅나무·소나무·은행나무와 라일락 등이 사철 푸르고,

여름과 가을이면 호수 가득 연꽃 이 환상으로 피며 연꽃향이 사방으로 퍼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특히 우기철이 되면 가랑비가 흩날리고 안개가 묘연하여 남다른 풍치를 더한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강남지방의 뛰어난 풍경을 반해서 항주모방해서

산책로를 조성했으며 넓게 펼쳐지는 수면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다리 위의 정자, 그리고 주변의 수목들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안원묘 (安遠廟, 안위앤마오)

피서산장(避暑山庄) 북동부쪽에 있는 안원묘는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64년에 좌우 대칭으로 창건된 몽골양식의 건축물이다.

사원 내에는 3개의 정원이 제1정원은 제법 넓고

제2정원은 한(漢)과 티베트의 양식이 융합되었고 

제3정원은 70칸의 회랑(回廊)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원묘의 중앙에는 중심건물인 푸두전[普度殿]이 있고, 평면은 '회(回)자'형이다.  

이것은 몽골족사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도망법식(都網法式)이다.

 

보락사 (普樂寺/普乐寺)

베이징의 천단공원의 상징인 기년전[祈年殿]을 연상케하는 보락사의 쉬광거(旭光閣) 지붕에는

 빛나는 황색 유리기와를 얹었고 상층 꼭대기의 중앙에 동(銅)으로 만들어 도금한

보정(寶頂)이 우뚝 솟아 우산이 펼쳐진 모습이다.  

 

2층의 둥근 나무기둥이 누각을 지탱하는 각층마다 

12개씩 모두 24개의 나무기둥 사이에는 만다라(曼茶羅)가 있으며

중간에 동으로 만들어 도금한 남녀가 껴안고 있는 상락왕불(上樂王佛)이 있다. 

이 상락왕불은 환희불(歡喜佛-남녀교합상)이라고도 부르는데

티베트불교의 밀종(密宗)이 숭배하는 신상(神像)이다. 

누각의 높이는 23m로 2층의 안쪽과 바깥쪽에 금봉(金鳳)과 금룡(金龍)이 있으며

 3층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4층에는 여의주(寶珠)를 입에 물고 있는 커다란 용(龍)이 있으며 

이들 용봉과 연꽃, 구름 등의 조각무늬는 매우 생동감이 있으며 보기 드문 진품으로 꼽힌다. 

 보락사는 '하늘이 함께 기뻐한다'라는 의미로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66년에 창건되었다

 

보타종승지묘 (普陀宗乘之庙)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때 완공된 보타종승지묘사원은 

건륭제가 어머니 황태후의 80세 생일을 축하하여 세운 곳으로

外八廟(외팔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모방하여 지어 (小) 포탈라궁이라고도 하는 보타종승(普陀宗乘)은

 티베트어 포탈라궁의 음역(音譯)이다. 

 

 보타종승지묘는 여러사원들이 각기 아름답고 조화롭게 어울려 있지만

그중에서도 높이 18m의 대홍대(大紅臺)는 크고 높은 현대식 건물과 다름없이

 겉모습은 그냥 평평하고 밋밋하고 다만 색깔이 특이한 건물일 뿐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回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사원이 하나 있고 그 겉을 3층짜리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며

그 3층 건물은 현대식의 겉모양과는 달리 전통적 양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 

 대홍대는 현재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에는 불당, 2층에는 티벳 불교관련 법구,

3층에는 몽골 민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천막(파오)등이 전시되어 있다. 

 보타종승지묘 입구에 건립된 오탑문은 문이 3개 달린 티베트식 백대(白台) 위에

 홍(紅)·녹(綠)·황(黃)·백(白)·흑(黑) 5색의 작은 불탑을 세웠졌으며

5색은 티베트불교의 홍교·녹교·황교·백교·흑교등 5교파를 상징한다. 

 

 피서산장의  평원구(平原區)
수원구의 북쪽으로 평원구가 있고 만수원(万樹園)과 영우사(永佑寺)가 주요 볼거리이다. 

피서산장의 사리탑은 1751년 건륭제(乾隆帝) 때 벽돌로 쌓은 누각식(樓閣式)탑이다.

평면은 8각형이고, 모두 9층이며 전체 높이는 70m이다.

각 층의 처마에는 노랑색과 녹색 등의 유리기와를 얹었고, 탑 꼭대기에는 도금한 탑찰(塔刹)을 세웠다. 

 영우사 사리탑은 전체적으로 탑의 색채가 선명하여 눈에 잘 띄며,

무성한 수풀 속에 높이 솟아있어 피서산장의 표지(標識) 역할을 한다.

 

열하성황묘(热河城隍庙) 

피서산장 주변에 있는 최고의 도교사원으로 정전(正殿)에는

건륭제가 친필로 쓴 '복음암강(福荫岩疆)'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사당 내에도 건륭제가 직접 지은 '열하초건성황묘념향첨례팔운(热河初建城隍庙拈香瞻礼八韵)'의

서문이 적혀있는 석비에는 열하성황묘 축조의 처음과 시작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봉추산 경추봉 ( 棒槌山  磬錘峰 칭추이펑 )

普樂寺 뒷산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산으로 멀리서도 뚜렷이 보이며

 경추봉은 깎아지른 산봉우리 위에 신비하게 솟은 높이 38m 거대한 돌기둥이이다.  

단단한 돌이 아닌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바위로 큰 바람이 불면 넘어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형상이다.

  예전에 누군가 공들여 세워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신기한 경추봉에서 승덕시내와 피서산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빵추이산 전경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庙)

 

 

성밖으로는 티벳불교인 외팔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庙)라고도 부르고

작은 포탈라(小布达拉)궁라고도 부른다.


승덕은 건륭 35년(1770년) 건륭 60세와 황태후 80세 생일의 연희를 베풀었던곳이다.


서장,청해,신장,몽고족장들이 승덕으로 축하 해주러왓다.


두번이나 승덕에서 대 연회를 열어 건륭이 특별히 명령하여

티벳의 부달라궁을 본따 작게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庙)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티벳에서 딜라이라마가 오면 예를 갖추어 머물게 했던 곳이다.


티벳의 포탈라궁을 본따 만들어 포탈라궁이라부르며

3층위에 다시 누각을 만들었다.


다시 작은 9층탑을 두개를 만들고 그 9층탑을 사이에 두고

5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계단을 따라 한층한층 올라갈수 있으며 층마다 특징이 다르다.

지붕은 황금으로 만들어서 뻔쩍뻔적 빛났다.


승덕에는 피서산장 이외도 외팔묘가 있는데


이는 장족들이 전해준 티벳불교를 말하며 12개절을 지어

12개의 외팔묘가 있었으며

중일전쟁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8개의 외팔묘만 남아있다.


그중에 판첸라마를 위해서 지은 소부다라궁이 있는데

티벳의 붓다라궁을 모델로 지어서 건축양식이 비슷하며 소부다라궁이라한다.


멀리서 보면 그냥 네모만 흰 건물이지만

104개의 개단으로 올라가야만 목조건물 궁전으로 들어 갈 수 있으며

3층목조건축 성전이 나온다.


밖은 티벳의 사찰 모습이지만 일단 안에 들어서면

다시 목조로 지어져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1층에는 한번도 오지 않아 앉지 못했지만 판첸라마를 존중하는 뜻으로

중앙에 만들어놓은 방이 있고 옆으로는 티벳트의 5대 불상을 전시해두었다.


2,3층은 전시실로 이용되고 옥상으로 나가면

금빛을 칠한 황금지붕이 우리를 반겨준다.


무려 일만냥이 들어갔다는 황금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불교의 상징인 코끼리도 황제를 맞이하기위해 무릎을 꿇고 있고

황제가 머리를 숙일수없어 다석개의 오탑를 지붕에 만들어놓았다.


 

 

 

 

 

수미복수지묘 (須彌福壽之廟)

 

 

티벳의 타실훈포사원을 모방한 이 사원은 선행궁)이라고도 하며,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80년에 창건되었다. 

건륭제의 칠순때 티벳의 지도자인 판첸라마6세가 승덕의 피서산장을 찾아와서

그의 생일을 축하해준데 감사의 뜻으로 티베트의 행정소재지인 시가체의 타시룬포사를

모방한 행궁을 짓게 하였다. 

 

이 사원은 당시 티베트 정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다민족 국가의 통일을 견고히 다지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는 보타종승지묘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으며

 보타종승지묘에서 보는 수미복수지묘의 경관이 매우 좋다.

이곳은 연암 박지원 선생이 티벳의 종교 지도자 판첸라마 6세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수미복수묘

뒤로 빵추이산 전경이 보인다

 

수미복수지묘(须弥福寿之庙)


우리들이 잘 아는 연암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중에 관련된

황제가 신하에게 명하여 조선사신들을 만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수미복수지묘이다 

 

 

 

보녕사 (普寧寺/普宁寺)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55년에 창건된 보녕사는 중간에 위치한

주전(主殿)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을 경계로 앞쪽 한족불교사찰(漢族佛敎寺) 양식,

 뒷쪽은 티베트사원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 있는 대승지각(大乘之閣)은 普寧寺의 중심 건물로서

 주변 건물들과 함께 티베트불교의 우주관을 나타낸다.  

높이 36m의 목조 누각식 건물로 밖에서 보면 앞은 6층이고 뒤는 4층이고,

좌우는 5층인 독특한 티베트불교 건축 특유의 양식이다.

 

누각 앞쪽에는 중국어·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로 각각 '대승지각'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보령사 천수천안관음보살은 22m 높이로 소나무, 측백나무, 느릅나무, 자작나무, 삼나무 등

5가지 목재를 사용했고 연화좌(蓮華坐)위에 두 손을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등 뒤로 나와있는 40개의 손에는 각각 하나의 법기(法器)를 들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목조불상이다. 

 또 보녕사에 있는 마니차(法輪)  불교 경전을 넣어 놓은 둥근통으로 티베트 민중의 신앙도구다. 

 마니차를 한 번 돌릴 때마다 법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하여

오체투지와 함께 티벳의 대표적인 수행 중 하나라고 한다.

 

 

 

 

 

 

 

중국의 4대 정원

 

北京 頤和園(북경 이화원), 承德 避暑山莊(승덕 피서산장),

 

 蘇州 拙政園(소주 졸정원), 蘇州 留 (소주 류원) 인데.

 

2개의 황가정원이고 2개의 민가정원인데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이 바로 황가정원이고

 

소주의 졸정원과 유원이 민가정원에 속한다)

 

 

제2탄 황실정원

북경 이화원(頤和園)

(中國 北京市 海定區 新建)

 

이화원(頤和園)은 북경 서북쪽 16km에 있고 2.9(88만평)

중국 최대 규모 황실정원이자 여름별궁이다.

()나라가 1153년 서호(西湖)의 옹산(瓮山)에 행궁을 지었고,

()나라가 1292년 관개저수지로 개발했으며,

6대 건륭제가 1750~1764년 호수를 넓히고 청의원(清漪園)을 만들었다.

 

 18602차 아편전쟁 때 모두 불탔으나,

9대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가

1886~1895년 광서제때 확장 재건하여 이화원으로 바꾸고

 1908년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3/4를 차지하는 2.2의 곤명호(昆明湖)

작은 호수를 확장하여 항주(杭州)의 서호(西湖)를 모방하여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인데 막대한 재건비용과 해군예산의 유용으로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파낸 흙을 60m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이 만수산(萬壽山)이며,

수많은 전각(殿閣), 사원(寺院), 회랑 3,000여 칸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곤명호에는 신선의 섬인 봉래, 방장, 영주를 상징하는 3개의 인공섬이 있다. 

 

발음이 화평로(和平路, 순조로운 인생의 길)와 같다.

 마당에는 건륭제가 옮겨 온 중국 최대의 정원석인 청지수(靑芝岫)가 있는데,

패가석(敗家石)이라고 하여 중국인들은 사진도 찍지 않는다.

서태후는 유언으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1903년 중국에서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장소인데, 내부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

 서난각은 침실이며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낙수는 논어의 知者樂 仁者壽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에서 유래했다.

 

낙수당(樂壽堂)은 이화원에서 가장 호화스럽게 지어진 건물로

건륭제가 1750년 모친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최초로 건립했으며

 서태후가 침궁(寢宮)으로 사용했다.

 

호숫가 낙수당(樂壽堂)의 정문에는 수목자친(水木自親) 편액이 있다.

 

낙수당(樂壽堂)은 서태후의 침궁으로 중국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다.

 

((사슴(鹿)은 발음이 和平路(순조로운 인생의 길)와 같다.

 

광서제는 1908년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여름에는 옥란당,

 겨울에는 자금성 옆 북해공원인 중남해의 섬에있는 영대(瀛臺)에 연금되었다.

 

옥란당 옆 의예관(宜藝館)은 광서제의 황후를 감금하던 장소이다.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인 광서제는 4살에 왕위에 올랐다.

서난각은 광서제의 침실(寢室)이었다.

3건물은 모두 후문이 있었으나 벽돌로 막고,

담장을 여러 겹 쌓아 외부와 차단하였다.

현재 담장은 철거되었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옥란당(玉瀾堂)

호숫가에 자리한 사합원(四合院) 형식의 건물로 1892년 중건된 황제의 침궁(寢宮)이다.

옥란당에는 광서제의 자단보좌(紫檀宝座)가 있는데,

무술변법(변법자강 운동) 실패로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유폐(幽閉)되었던 곳이다.

부속건물인 동난각(東暖閣)은 감금당한 광서제가 조식(朝食)하던 곳이고,

 

서난각은 광서제의 침실(寢室)이었다.

3건물은 모두 후문이 있었으나 벽돌로 막고,

담장을 여러 겹 쌓아 외부와 차단하였다.

 

현재 담장은 철거되었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광서제는 1908년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여름에는 옥란당,

겨울에는 자금성 옆 북해공원인 중남해의 섬에있는 영대(瀛臺)에 연금되었다.

옥란당 옆 의예관(宜藝館)은 광서제의 황후를 감금하던 장소이다.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인 광서제는 4살에 왕위에 올랐다.

1898년 군권을 장악하고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원세개의 밀고로 개혁운동은 103일 천하로 끝나고 무술정변으로 유폐되었다가,

서태후가 74세로 죽기 2일전에 38세로 독살 당했다. 

 

 

석가루(夕佳樓)는 옥란당과 의예관 사이 호숫가에 있는 2층 건물이다. 

 

동궁문(東宮門)은 이화원의 정문으로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며,

이화원(頣和園) 편액은 청11대 광서제의 친필인데,

낙관이 5개이며 주변에 황룡을 양각하였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東八所)가 있었다.

인수문(仁壽門)은 이화원의 이중 궁문(宮門)으로

편액(扁額)은 한어와 만주어로 쓰여 있다.

인수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태호석이 가로막고 있고,

마당 중앙에는 건륭제때 만든 청동 기린이 있다.

기린(麒麟)은 전설상의 사악을 퇴치한다는 상서로운 동물로 용머리,

사슴뿔, 사자꼬리, 소 발굽에 용 비늘이 덮여 있다

 

인수전 앞 좌우에는 용과 봉황이 있는데,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배치했다.

인수전(仁壽殿)1750년 건축된 근정전(勤政殿)으로

1888년 중건하면서 개칭하여 서태후가 정무를 보았는데,

어진정치를 하면 장수한(仁者壽)는 뜻이다 

 

 인수전 정면 중앙의 건륭제때 만든 전설속 동물인 청동 기린(麒麟)

 

곤명호 건너편의 불향각과 마주보고 있는 함허당(涵虛堂)은 건륭제 때

강서성의 등왕각(滕王閣)을 모방한 3층짜리 망섬각(望蟾閣)으로

서태후가 곤명호에서 실시하던 해군훈련을 지켜보던 장소였으나,

 중수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다.

남호도(南湖島)까지 연결된 17개의 아치형 석교로서

8m, 길이 150m이며, 난간에는 모양이 조금씩 다른 544개의 돌사자가 있다.

항주(杭州) 서호의 장교(長橋)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남호도(南湖島)에는 용왕묘, 함허당,

부원당(鉴远堂), 월파루(月波楼) 등이 있는데,

동우(銅牛)는 구름문양이 조각된 석좌 위에 앉아 있는 청동 황소상으로,

1755년 곤명호의 확장공사를 끝낸 건륭제가 제방이 수해로부터 안전하길 기원하며,

전자(篆字)체로 금우명(金牛銘)을 새겨서 설치했다.

 

인공섬 남호도(南湖島)와 길이 150m, 8m17공교(十七孔橋).

 

17공교(十七孔橋)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장교(長橋)를 모방했다.

 

교두와 난간기둥의 544마리 돌사자는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청나라 동우(銅牛) 앞에 21세기 러버덕(고무오리)이 잠시 나타났었다.

 

해군훈련을 관람했다는 함허당에서 바라본 곤명호와 만수산의 불향각.

 

 

곽여정(廓如亭)24개의 원기둥과 16개의 사각기둥이 있는

 130의 중국에서 가장 큰 팔각정이다.

 

三步一回 五步一折 돌고 꺽일 때마다 경치가 새롭게 전개된다.

 가히 중국정원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9대 함풍제의 후궁으로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西太后, 자희태후)

 

 

 

 

 건륭제는 시(((((((()

8(八趣)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는데,

 가경제가 개축하면서 해산원(諧山園)을 해취원으로 개칭했고,

 1860년 전소되어 광서제 때 개축했는데,

대희루는 폭 17m, 높이 21m로 천상과 인간세상,

지옥의 장면을 동시에 공연할 수 있는 입체적 무대로써 경극의 요람이었다.

해취원(諧趣園)은 정원중의 정원(園中之園)이라 불리는 곳으로,

강소성의 기창원(寄暢園)을 모방하여 강남 사가(私家) 원림의 특징을 지녔다.

 덕화원(德和園)은 대희루(大戱樓), 이락전(頤樂殿), 경선당(慶善堂)으로

 구성된 경극 관람용 건축군이다.

 

건륭제가 건립한 이춘당(怡春堂)을 경극애호가인 서태후가

 1891~1895년 중국의 최대의 경극장(京劇場)으로 개조하였는데,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피서산장의 청음각(淸音閣)과 함께 3대 경극장으로 꼽힌다.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라"고 참회했으나,

1928년 공산당 혁명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훼손되었다.

 

 

서태후가 건립한 대희루(大戱樓)는 중국 3대 경극공연장중 가장 크다.

 

관람석인 이락전(頤樂殿)에는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가 탔던 중국 최초의 독일제 자동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