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수행자는 사람 가운데서 향기로운 꽃이다

2014. 12. 20. 12: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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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는 사람 가운데서 향기로운 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바로 ‘우주의 생명의 빛’이란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다른 말로 하면 무량광불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수행자는
사람 가운데서 향기로운 꽃이다[念佛修行者 是人中芬陀利華],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다른 부처님 이름이나 다 똑같지만,
특히 아미타불은 광명의 상징인 생명이란 말입니다.

염불수행자는 그런 향기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그 위대한 보살들이 아주 훌륭한 도반으로 압니다.
벗이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존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보통사람이 벗이 되어도 좋고
공부 잘하고 총명한 사람이 벗이 되어도 축복된 일인데,
하물며 대우주의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이나
우주의 지혜의 상징인 대세지보살 같은 대보살들이
우리의 도반이 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축복되겠습니까?

『능엄경』은
참선할 때도 꼭 참고로 해야 할 훌륭한 경전입니다.
이『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념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만약 중생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명호)를 외운다면
살아서 현생에라든가 죽은 뒤에라도
틀림없이 부처님을 뵙는다는 말입니다.


- 부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반드시 뵈올 것이다

우리의 본래생명은 본래 부처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나 우리 몸속에,
또 우주 가운데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어디에나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껍데기, 겉만 보니까 모르는 것인데
그 실상 성품으로 본다면
우주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더 근원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부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인은 별종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인데
마음이 깊어지고 맑아져서
본래의 생명을 깨달은 분이 바로 성인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사람들도 성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금생에 태어난 것은
다른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가 꼭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위가 높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것은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목적은 인격의 완성입니다.

『능엄경』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념불(憶佛念佛)이라,
만약 중생이 마음에 부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염불이나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면,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반드시 부처를 뵙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어떻게 부처를 뵈올 것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디에 고유하게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의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빛이란 말입니다.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광명을 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하는 가운데도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 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우주의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의 광명이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 모양이 있는 가운데에는 참다운 행복이 없다

우리 중생들이 성자는 미처 온전히 못 된다 하더라도,
정말로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면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부처님의 광명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불경 중에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자기 앞에 훤히 나타나 계시는 경입니다.

반주는 인도 말인데,
음역하면 부처 불(佛)자 설 립(立)자,
부처님이 나타나 서서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광명만 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바란다면,
부처님 자리란 만능의 자리이고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 모양으로 모두가 다 보일 수도 있고
부처님이 하나하나 백만 천만 수십억의 부처님 모양으로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진리는
그렇게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얕아서
없는 것을 억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는 가운데에는 참다운 행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것을 전도(顚倒)하고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불교인들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만 이것이다 저것이다 알아서는
우리한테 행복이 올 수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매서운 윤리적인 결단을 해서
우리 스스로 깊은 명상에 잠겨야 합니다.

억불념불(憶佛念佛)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이것도 그냥 한번 두 번으로 금생이나 내생에서
부처님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염불을 외움으로써
깊은 명상에 든단 말입니다.
명상에 들어야 금생이나 전생에 지은 번뇌가 녹고,
그것이 녹아지면 맑은 거울에 모양이 제대로 비춰오듯이
부처님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거울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때 묻어 있는 것인데,
무엇에 때 묻어 있느냐 하면
자기라는 지독스런 관념 때문에,
그것이 고집이 되어서
지나친 이익도 생각하고 폭력도 휘두르고 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을 근원자리에 모신 명상을 통해 해탈의 길로...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법이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우주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名號)를 끊임없이 부르고 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속해야 이른바 삼매가 되어서
명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삼매란 명상입니다.
명상은 아무것이나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명상은
부처님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인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같이 훌륭한 명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방법으로 명상을 하시더라도
그 근원은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명상의 근원자리에다 모시고서 명상을 하셔야
명상도 잘 되고 해탈의 길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범부가 성자의 길로 차근차근 바뀌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금생에 산 보람이 있고
무상대도(無上大道)인 부처님 법을 만난 의미가 있습니다.

- 불기 2545년 5월 부처님 오신 날 법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