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의 종조 천태 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중국 허난성 광산현의 정거사. 명대(明代)의 사찰 양식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 정거사 입구에 높이 자란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사찰의 연륜을 대신 말해준다.
14~18일 중국에서 불교 천태종(天台宗)의 뿌리를 훑었다. 2000년 전,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불교가 전해질 때는 교종(敎宗)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1600년 전, 인도의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선종(禪宗)을 전했다.
이후 중국 불교는 선종과 교종이 때때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흘렀다. 선종과 교종의 융합, 그 중심에 천태종의 종조(宗祖) 천태 지자(天台 智者·538~597) 대사가 있다. 중국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백마사(白馬寺), 선종의 본산인 쑹산의 소림사(少林寺), 천태 지자 대사가 깨달음을 이룬 대소산의 정거사(淨居寺)를 순례했다. 한국불교에도 종종 논란이 있다. “교종이냐, 선종이냐.” 그러나 천태 대사의 가르침 속에서 선(禪)과 교(敎)는 하나로 흘렀다.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뤄양은 중국의 8대 고도(古都) 중 하나다. ‘중국 최초의 사찰’로 전해지는 백마사로 갔다. 사찰 규모는 상당히 컸다. 정문 앞에는 백마의 석상이 서 있었다. 왜 절 이름에 ‘백마(白馬)’가 붙었을까.
서기 67년이었다. 중동 땅에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진 지 30~40년 후였다. 당시 중국에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황제 명제(明帝)의 꿈에 금빛 사람이 하늘에 나타나 황궁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황제는 곧 사신을 인도로 보냈다. 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도로 가는 길은 무척 험했다. 10명이 길을 떠나면 고작 2명만 살아서 돌아올 정도였다.
험한 길을 가던 사신들은 중앙아시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두 사람의 인도 승려를 만났다.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었다. 사신은 그들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흰 말에 싣고 돌아왔다. 이듬해 황제는 수도인 뤄양에 중국 최초의 사찰로 전해지는 백마사를 지었다. 목숨을 건 여정에서 경전을 싣고 온 백마의 공로를 기리는 절 이름이었다.
백마사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앞의 풍경이 특이했다. 뜰 좌우에 커다란 봉분(무덤)이 둘 있었다. 사찰 안에, 그것도 법당 앞에 무덤이 있다니 놀라웠다. 가섭마등과 축법란의 묘였다.
15일 백마사에선 대한불교천태종 산하의 한국원각불교사상연구원과 중국불교문화연구원이 공동으로 ‘불교 교육과 사회발전’이란 주제로 ‘한·중 불교 포럼’을 개최했다. 천태종이 표방하는 ‘애국 불교, 생활 불교, 대중 불교’의 기치에 중국 정부와 중국 불교계는 큰 관심을 표시했다.
정거사 안의 대웅보전. 법당 안에서도 천장의 서까래 사이로 기와가 훤히 보인다. 명대의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정거사에는 현재 관리인만 살고 있다.
◆선종의 본산, 소림사=16일 쑹산의 소림사로 갔다. 소림사는 ‘선종(禪宗)의 원류’를 자처하는 사찰이다. 백마사 이후 400년간 중국에는 숱한 사찰이 생겨났다. 당시 중국 불교는 교리와 경전, 불사(佛事)에 치중하는 불교였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 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 그러한 중국 불교에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소림사 뒷산의 달마굴에서 9년간 면벽수행하며 제자(혜가)를 통해 선종의 법을 전했다. 부처의 법이 경전의 문자가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일깨운 것이다. 이후 달마의 가르침은 이조 혜가(慧可), 삼조 승찬(僧瓚), 사조 도신(道信), 오조 홍인(弘忍), 육조 혜능(慧能)을 거치며 중국 남녘에 선종의 꽃을 활짝 피웠다.
반면 황실을 중심으로 한 북녘에는 교종의 세력이 강했다. 이후 선종과 교종은 서로 충돌하고, 반목하고, 논쟁하며 중국 불교사 속에서 함께 흘러갔다.
◆선과 교의 융합, 천태종 발상지 정거사=쑹산에서 버스로 7시간이 걸렸다. 허난성 광산현(光山縣)의 정거사로 갔다. 시골길이었다. 한참을 달렸더니 대소산의 정거사가 나타났다. 천태종의 발원지다. 사찰 건축양식이 무척 독특했다.
광산현 정거사 연구위원회 왕조우첸(王照權) 국장은 “명대(明代)의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찰은 중국에서도 무척 보기 드물다”고 말했다.
정거사 정면 벽에는 ‘佛光普照(불광보조) 法輪常轉(법륜상전)’이란 여덟 글자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붓다가 설한 법(法)의 바퀴는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가 울고, 그래서 바람이 분다.
달마 대사가 중국 땅을 밟은 지 200년 후였다. 천태 지자 스님은 대소산에 가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펴는 혜사(慧思) 대사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 혜사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영산(인도에서 붓다가 법문을 했던 축령산)에 있을 때 함께 법화를 들었더니 숙세(夙世·전대)의 인연을 따라 이제 다시 왔다.”(『속고승전』)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얘기다. 혜사 대사는 천태의 비범함을 그렇게 꿰뚫어 봤다.
14일간 정진하던 천태 스님은 ‘법화경’을 독송하다 ‘여러 부처님은 다같이 찬탄한다.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을 가지고 공양한다고 이른다’는 대목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 대목을 암송하며 정거사 대웅전에 들어갔다. 오래된 기와, 그 위에 쏟아지는 볕이 따갑다. ‘꾸룩, 꾸루룩’하고 뒷산에서 새가 운다. ‘휘~이~익’ 바람이 분다. 이 모두가 화신불(化身佛)이다. 햇볕이 부처이고, 새가 부처이고, 바람이 부처다. 수없이 많은 화신불이 각자의 에너지와 소리로 법을 설한다. 그렇게 여러 부처가 다같이 찬탄한다. 그 찬탄 속에 녹아 드는 것이 수행이다. 그것이 참된 정진이다.
깨달음을 얻은 천태 스님은 7년간 대소산에 머물렀다. 이후 스님은 ‘천태종(天台宗)’을 열었다. 천태종은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최초의 불교 종단이다. 후에 천태 대사가 난징(南京)으로 가 와관사란 절에서 법을 펼 때는 많은 사람이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난징은 진나라의 수도였다. 진나라 황제는 신하들에게 “1주일에 한 번은 꼭 와관사에 가서 천태 대사의 법문을 들으라”고 명했을 정도다.
천태 대사는 선(禪)과 교(敎)를 둘로 보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전을 읽고 외기만 하면 교(敎)에 갇히고 만다. 또 경전을 외면한 채 좌선만 한다면 ‘나만의 선(禪)’에 갇히기 십상이다. 깨달음을 문자로 기록한 경전은 일종의 답안지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세상이 어떻게 숨을 쉬는가,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안지다.
그럼 선과 교는 언제 하나가 되나. 경전의 문자를 보면서 “아하! 그렇구나”하고 문자 속의 이치를 깨칠 때 교(敎)와 선(禪)이 하나가 된다. 그것이 수행이다.
교(敎)는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내비게이션이고, 그 길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게 선(禪)이다.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엉뚱한 길에서 헤매기 쉽고, 아무리 정확한 내비게이션이 있더라도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무려 1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천태 대사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뤄양·광산(중국)=글·사진 백성호 기자
◆천태종(天台宗)=594년 중국 수나라 때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선(禪)과 교(敎)를 통합하여 만든 종파다. 국내에선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국청사에서 처음 천태종을 열었다. 이후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소실됐다가 근세에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1911~74)에 의해 중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