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0. 12:2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 일러스트=이승윤 |
어울리는 법 / 도진스님
관아의 현감으로 부임했던 주 거사(周居士)가 간만에 황룡산(黃龍山) 산당(山堂)으로
도진(道震) 선사를 찾아왔다. 주 거사는 오랜 기간 스님께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작은 선물 꾸러미를 환한 웃음으로 받아주며 도진 선사께서 물었다.
“그래 한 고을의 목민관 노릇을 해 보니 어떤가?”
“스님, 그게….”
주 거사의 표정이 영 시원찮았다.
“사람들이 다들 제 맘 같지 않더군요.”
도진 선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맘먹는 게 서로 다르다…. 그래, 어떻게 다르던가?”
“저는 어떻게든 백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살갑게 다가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관원들도 백성들도 마음을 열기는커녕 꼬투리나 잡히지 않을까 싶어 눈치 보기 바쁘고,
저에게 무슨 빈틈이 없나 싶어 뒤에서 웅성거리기 일쑤입니다.
저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되는지 피하고 도망가기 바쁩니다.
한 고을의 수장이라지만 외톨이나 다름없더군요.”
“자네가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도 그들이 두려워하고 피한다?”
“그렇지요.”
“아니야, 자네가 잘못 알고 있어.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보세. 숲에 호랑이나 뱀이
지나가면 올빼미와 솔개가 난리가 나. 사실 뱀과 호랑이는 올빼미나 솔개를 잡아먹지 못해.
그런데도 무슨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온 숲이 떠들썩하게 소란을 떨지.
자, 이게 누구 탓일까?”
“올빼미와 솔개가 공연히 부산을 떠는 것이지요.”
“아니야, 올빼미와 솔개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 호랑이와 솔개가 서로 잡아먹지는
못하지만 그럴 마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야. 기회만 된다면 서로를 잡아먹고 싶어 하지.
그래서 그 난리야. 까치와 참새가 스스럼없이 소와 돼지를 타고 노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로를 해치려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주 거사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럼 제가 관원이나 백성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먹어서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도진 선사가 근엄한 목소리를 타일렀다.
“언짢게 들을 것 없네. 유가(儒家)에서도 수신(修身)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하라 하지 않던가? 모름지기 근본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야.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허물만 탓하는 건 학자(學者)의 자세가 아니지.
자신의 마음과 언행을 바루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루겠는가?
게다가 자네는 불법에 마음을 둔 사람이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안다는
사람이 남 탓을 하고 세상 탓을 한단 말인가?”
부끄러움에 주 거사가 고개를 숙였다.
도진 선사는 손자를 달래는 할아버지처럼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당나라 때 조주 종심(趙州從) 선사라는 분이 계셨어. 말년의 어느 겨울날, 스님이
점심공양을 마치고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지.
절집에서는 자신의 음식을 조금씩 떼어 그것을 짐승들에게 보시하는 풍습이 있어.
그걸 생반(生飯)이라고 해. 그래, 원주가 스님들의 생반을 모아 늘 모이를 주던
바위로 걸어갔지.
그러자 바위에 줄줄이 모여 모이를 기다리던 까마귀 떼가 후다닥 하늘로 날아올랐어.
그때 조주 선사께서 원주를 불렀어.
‘먹을거리를 들고 찾아가는데 까마귀들이 왜 날아가 버리지?’
너무도 흔히 겪는 일이라 원주의 반응은 시큰둥했어.
‘제가 무서운가보지요.’
별 걸 다 물으신다는 투지. 짐승이 사람보고 도망가는 건 당연하다는 거야.
헌데 노스님이 정색을 하고 지팡이를 들었어.
‘이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난데없는 불호령에 원주가 얼어버렸지.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자 종심 선사가
조용히 입을 떼셨지.
‘입장을 바꿔서 자네가 나에게 물어보게.’
합장을 하고 원주가 물었어.
‘먹을거리를 들고 찾아가는데 까마귀들이 왜 도망가지요?’
그러자 종심 선사가 합장을 하고 한껏 허리를 숙였어.
‘생명을 해치려는 마음이 저에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수행자의 자세야.”
주 거사가 무릎을 꿇었다.
“스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래야지.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해. 세상은 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고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아. 내가 남을 의심하면 그 사람도 나를 의심하고, 내가 만물을
잊어버리면 만물도 나를 잊게 된다네. 내가 이해득실을 따져 사람을 가리지 않으면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제 발로 다가오게 되어 있어.
옛날에 엄양 존자(嚴陽尊者)라는 분은 손에 음식을 들고 있으면 호랑이와 독사가
다가와 그 음식을 먹었데. 그렇게 위험하고 포학한 성질을 가진 짐승과도 늘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얼까?
궁극에는 ‘나’와 ‘너’를 나누던 마음을 말끔히 털어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야.
그걸 무심(無心)이라고 해.”
주 거사가 합장하고 여쭈었다.
“그러면 무심이 곧 자기 자신을 닦고, 한 가정을 편안히 하고, 나아가 국가를 바르게
경영하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근본 원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나’와 ‘너’를 나누던 마음을 떨쳐버려야 이해득실을 따지던 분쟁과 선악시비를 가리던
소란이 비로소 잠잠해지는 거야.
그래야 자타(自他)와 상하(上下)가 온전히 한 무더기가 되어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지.
물론 단박에 그렇게 되지는 않지. 하지만 항상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해.
당나라 때 방온 거사(龐蘊居士)가 이런 게송을 남기셨어.
그저 만물에 무심하기만 하면
온갖 것이 에워싼들 뭐가 문제랴
무쇠 소는 사자의 고함도 겁내지 않나니
나무장승이 꽃과 새들을 바라보듯 한다네
나무장승은 본래 스스로 무정한 것
그래서 꽃과 새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지
그저 이렇게 마음도 경계도 여여하다면
깨달음의 길 달성하지 못할까 뭔 걱정이랴
자네는 재가자야. 기왕이면 방 거사처럼 무심으로 세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살게나.”
주 거사가 환하게 웃으며 절을 올렸다.
“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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