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5. 16: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325년 니케아(Nicaea)공의회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확정함.>
- 삼위일체 /청화스님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18억 인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불교는 한 10억쯤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18억쯤 믿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10억쯤 믿고 있는 불교인하고
18억 믿고 있는 기독교인하고
또 10억이 훨씬 못되는 이슬람하고
그 세 종교가 서로 옥신각신 싸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 보스니아나 체첸이나 그런데는
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싸움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생각을 할 때에 우리 인간은
참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극입니다.
이 종교의 싸움, 정보화시대는 문화 문명의 싸움입니다.
기계나 전자로 만든 무기 싸움이 아니라
앞으로는 문명의 싸움입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위대한가.
가장 위대한 정보가 내내야 종교와 철학이 아닙니까.
세계를 주름잡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서
공통점(共通點)을 알아야지
그렇지 못하고서는 자기 마음도 편치 못하고
자기 가정도 잘못 다스리고
아들이나 딸들이 기독교 믿고 무슨 교 믿고 할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설득을 시키겠습니까.
억지로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도망치고 말겠지요.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배우기는 많이 배웠지만
무엇인가 갈피를 잘못 잡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어른들이
정말로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싸움판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이것은 예수가 애초에 만든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삼신일불(三身一佛)도
부처님께서 초기에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우리 중생들의 지혜가 발달되니까
중생들의 혼란스런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서기325년 제1회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및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채택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 및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의하여
기독교 핵심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기독교 주교라든가 또는 신부나 학자들이 모여서
혼란스러운 기독교 학설을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라면 유명합니다.
기독교는 가끔 이와 같이 교리가 혼란스러울 때 공의회를 엽니다.
공의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를 책정했습니다.
그것은 성부(聖父), 성신(聖神), 성자(聖子)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다,
이른바 성부, 성신, 성자, 삼위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 삼위일체설을 가장 역설하는 데가 몰몬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나 석가나 부처님이나 본래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는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석가모니는 석가모니고 부처는 부처요 그러겠지요.
그러나 근본 성품 본질적으로 볼 때는 다 하나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성부 즉, 우주를 다스리고 섭리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가운데 들어 있는,
우주 가운데 들어 있는 이른바 성령(聖靈)이 성신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생명이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신비로운 모든 것을 다 갖춘,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어디에나 있고 능하지 않음이 없는 만공덕(萬功德)이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부와 성신에 붙어서
오염되지 않은 사람 즉, 성자가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단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고
마구니(魔鬼)와 싸워서 비로소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과거 전생에 좋은 일 많이 해서
업장이 가벼웠다 하더라도
하나의 범부였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 끝에
마지막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팔만 마구니와 싸우고 대각을 성취하고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와 똑 같은 범부란 말입니다.
대각을 성취한 뒤에 부처님입니다.
그렇듯이 예수 역시 범부 중생인데
요단강 하단에서 모든 번뇌를 다 조복(調伏) 받고 깨달아서
천지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됐습니다.
참다운 신성한 우주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명실공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달마(達磨),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같은 성인들은
다 부처입니다.
우리 중생도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이 모양 이대로는 부처라고는 감히 할 수가 없으나
본래에서 볼 때는 이 못난 이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못나고 못생기고
더러는 남한테 사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용수보살 같은 제2의 석가(釋迦)란 분도
출가하기 전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를 희롱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간신히 역사(力士)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났습니다.
그때 반성하기를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를 망치는 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잡혀 맞아 죽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발심해서 출가하여 제2의 석가라 할 정도로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를 더듬어 보면
어느 누구나 다 심란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한 50년 가까이 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의로 반성할 때
과거에 조금 더 부지런하고 순수했으면 하는
그런 한심스러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대로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심스럽지만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 같이 하느님 아들이고 또 화신 부처님입니다.
삼위일체
- 일체유심조
왜 그런가 하면
나중에 또 배우게 됩니다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로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물질이고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도 물질이고
이 펜도 물질이고 한데
왜 물질이 아닐 것인가.
내 몸이나 내 패물이나 내 연필이나 이런 것도
다 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원자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원자는 뭐인가?
원자 이것은 중성자(中性子) 양자(陽子) 전자(電子)
또는 중간자(中間子) 그런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로 돼 있습니다.
소립자 그것은 뭐인가?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작은 알갱이가
모든 물질 구성의 가장 작은 알갱이가
양자 중성자 전자 아닙니까.
이제 전기 에너지가 있으므로 전등이 빛을 내겠지요.
그런데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런 차원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하면
일정한 공간성(空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전자는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모양이 안 보입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이지 일정한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라,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시간성 공간성을 갖고 있는 것을 물질이라 하므로
절대 물질은 없다고 보아야 옳겠지요.
상대성 이론에서만 보면
물질은 상대적으로는 존재하고
절대적으로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차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도 물질은 찰나 찰나 천류(遷流)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근원에 들어가 물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에너지만 빙빙 돌아서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의 특성 여하에 따라서 전자라 양자라 하는 것이지
일정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부단히 변화해 간단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酸素) 수소(水素) 탄소(炭素)가 되곤 합니다.
또 그것들이 모여서 다이아몬드가 되고 사람 몸뚱이가 됩니다.
산소 수소 탄소 그것들이 적당히 모여서 세포(細胞)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일체 물질을 구성한 근본 알맹이가
항시 움직이고 있어 무엇인가 모르는데
그런 것들이 또 모여서 된 우리 몸뚱이 이것도
일정한 실체(實體)가 없는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 가운데는 지금 세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포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에 지나지 않는 세포들의 집합체를
지금 ‘나’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 몸 이렇게 잘나게 못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성자가 볼 때는 본바탕을 봄으로
그 못나고 잘난 몸뚱이가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뵌단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부처님입니다.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두두물물이 순수 에너지 불성이요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주의 성품으로 말할 때는 법성이라 합니다.
그렇게 모양이 없는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잘나고 못나고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볼 때는 본래 모양이 없는 그 자리,
천지 우주에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 그 자리를 바로 봅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보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설사 독사(毒蛇)라도 모두 광명으로 빛나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는 못났다,
나를 배신한 저놈은 죽여야 한다,
이런 것도 역시 겉만 봐서 그럽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다
근본 바탕에서 영원적(永遠的)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님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단죄(斷罪)를 못하고
심판(審判)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톨스토이 전집(全集)도 보십시오.
우리 범부는 남을 단죄하고
나쁜 놈 좋은 놈이라고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十字架) 위에서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안했습니까.
그런 것이 뭐인가 하면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가 있고 네가 있고 하니까
나한테 삐딱한 사람은 원수고 싫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보이니까 원수가 있을 수 없고
미운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 진리가 본래 둘이 아니다
저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삼신일불]이나
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종교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성자 하면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소지가 있습니다.
불교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본래로 화신불(化身佛)이란 말입니다.
본래 기독교 사상 역시
예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인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현상계,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나쁜 놈이나 모두가 다
원래는 성자란 말입니다.
다만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은 깨달은 성자이고
스스로 성자인줄을 분명히 아는 성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는 다 성자인데
미처 번뇌(煩惱)에 가려서 깨닫지 못한 성자란 말입니다.
만약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은 성자가 아니다, 그래 놓으면
결국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구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배격도 하고 허물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앞으로는
꼭 예수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가 아니라
누구나 다 한결같이 성자다,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강 목사나 안 교수 같은 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다변 된 사회에 그냥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세계화(世界化) 하지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 하나의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화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인 불교 기독교가
이와 같이 똑 같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슬람도 내내야 똑 같은 것인데
기독교 신앙에 좀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네들을 교도(敎導) 하고 가르쳐서
참다운 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모두를 회통(會通)하는,
모두를 하나로 보는 진리의 수행자(修行者)가 할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름다운 어머니의 거짓말
솔솔솔 비린 내음과 함께 커져
오는 어머니의 얼굴!
한 입 두 입 국물을 떠 먹다 말고
아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명태 머리와 꼬리만 드시던 어머니 생각에.
어려웠던 시절
오랜만에 장에 가신 어머니는 큰 맘 먹고
명태 한 마리를 사 들고 오셨다.
그날 저녁 맛있게 명태국을 끊인 어머니,
아마도 어머니는 생선을 여덟 등분했나 보다.
국자를 이용해 가장 큰 가운데 토막은
할아버지 국그릇에,
다음으로 살이 많은 것은 할머니 그릇에,
다음 큰 것은 아버지 그릇에….
그렇게 차례대로 형, 나, 막내의 그릇에 생선
한 토막씩을 넣어 주셨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머리와 꼬리는 어머니 차지였다.
한번은 어린 막내가
“엄마는 왜 항상 머리와 꼬리만 먹어?”
하고 묻자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응, 어두육미라고
머리와 꼬리가 맛있거든…” 하셨다.
“그럼 나도 좀 줘.”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 머리와 꼬리부분을
막내 국그릇에 넣어 주셨다.
“에게 게, 살이 하나도 없잖아.
나 안 먹을래. 엄마 먹어.”
막내에게서 도로 받은 생선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어머니는 정말 맛있게 잡수셨다.
어린 우리는 그때 어머니 말씀이 참인 줄 알았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말을 참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어두육미(魚頭肉尾)라는 한자성어까지
생겨났겠지 그렇게 여겼다.
네번째 알찬 부분을 먹던
큰아들은 어른이 된 다음에야
어머니의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결혼 뒤 아내와 모처럼 시장에 가 생선을 샀다.
“머리랑 고리 부분 잘라 드릴까요?” “예.”
“아니 왜 그 맛있는 데를 버리세요?”
“네? 요즘 이걸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는 어두육미라는 말도 모르세요?”
“어두육미요?
소꼬리는 맛있는지 모르지만 생선대가리를
무슨 맛으로 먹어요.
옛날에야 먹을 게 워낙 없으니까
그거라도 끓여 먹었는지 모르지만….”
순간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아브라함 링컨의 고백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다.
그 뒤로도 아들은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명태국을 끓인다.
맛없는 물고기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그렇게도
맛있게 드시던 어머니의 그
큰 사랑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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