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 - 강병균 교수

2015. 1. 25. 17: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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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 강병균 교수

 

 

 

 

2015.01.19

 

 

- 이렇게 맛있는 걸 어찌 안 먹을 수 있는가?
  안 먹느니 차라리 열반에 들겠다

- 고발되기 전의 악(惡)은 선(善)이다


육식은 고기를 먹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고기는 넓게는 동물성 식품을 뜻하고,

좁게는 유제품을 제외한 동물성 식품을 뜻한다.

따라서 어느 경우든지 고기는 길짐승은 물론이고

날짐승, 물짐승, 물고기, 파충류, 양서류, 곤충, 벌레까지 다 포함한다.

채식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므로 물고기,

 

물짐승, 길짐승, 날짐승, 파충류, 양서류,

곤충, 거미, 벌레 등 일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채식이란 사생(四生 태생·난생.습생·화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I. 농업과 재앙

 



인류는 1만 년 전에 농경을 시작하였다.

농경 전에는 작은 가족·씨족집단으로 살며 수렵채집을 하던 것이,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섭취식물의 종류는 줄었을지 몰라도)

풍부한 먹을거리로 인구가 늘었다.

(자연계에서도 사자, 호랑이, 표범, 치타,

늑대, 이리, 하이에나, 곰 등 육식동물은 수가 적다.

초식동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고기와 달리 곡물은 장기간 저장이 가능하므로, 대장장이, 도공, 목수, 갖바치,

의복제작자 등 여러 전문직종이 등장하였고 계급도 등장하게 되었다.

부가 축적되면서 약탈과 전쟁이 일어났다.

(동물사냥이나 곡물약탈이나,

남이 축적한 에너지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일이다.)

늘어난 인구로 인하여 전쟁은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세계적인 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의 발명이 인류 최악의 발명이라고 한탄한다.

사실 지난 만 년간의 인류역사를 보면 참혹한 전쟁들로 점철되어 있다.

피가 강을 흐르고 흘러

나무공이가 떠다녔다는 동이족 치우천황과 화족 헌원 간의 탁록대전부터 시작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대량학살, 진·한·수·당·송·원·명·청·중공의 통일전쟁과,

그 사이의 분열혼란기의 전쟁들과, 일본 전국시대의 수백 명 영주들 사이의 전쟁과,

그리스와 소아시아 사이의 트로이 전쟁으로 시작된 지중해 지역의 끝없는 전쟁,

중세유럽의 나라와 나라 사이의 끊이지 않는 전쟁과,

수천만 명이 학살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 3백만 명이 살해당한 한국전쟁,

4차례의 이스라엘·아랍 전쟁, 백여만 명이 살해된 이란·이라크 전쟁,

그리고 최근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 등 헤아릴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이게 다 농업으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농업이 초래한 안 좋은 일들이 있다.

물이 필요한 농업은 특히 논농사는 인구를 강가 평야로 집중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삼재(三災)를 호(胡)되게 당했다.

물이 넘치면 홍수로, 바람이 불면 돌개바람·강풍·태풍으로,

불이 나면 화재로 떼죽음을 당했다.

화전 등 농경지확장을 위한 산림파괴는 홍수발생을 촉진했다.

중국고대의 전설적인 성왕(聖王) 요·순의

최대 업적은 황하유역의 치산치수(治山治水)였다.

‘굶어죽느냐 아니면 삼재로 죽느냐’는,

 

인류문명여명기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재(災)자는 물 ‘수(水)’자와 불 ‘화(火)’자의 결합이다.

알 수 없는 옛날부터 홍수와 화재는 모든 재앙 중에 으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나면 그 피해는 가중되었다.

동물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기 위해 소·말 등 대형동물을 길렀으며

잉여농산물로 개·돼지·닭 등의 가축사육이 늘어났다.

붙박이 삶과 밀집된 거주지는 동물질병이 사람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게 했으며,

병을 쉽게 전염시켜 콜레라·장티푸스 등 수인성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게 했다.

어린아이들은 많은 수가 수두·홍역·마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필자의 친구 할머니는 20명을 낳았는데 그중 열 명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예전에 어린아이의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이 질병들의 기원은 가축질병이다.

가축을 기르지 않은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들은 가축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여온 수두·홍역·마마에 걸려 인구의 반 이상이 죽어나갔다.

중남미제국들의 식민지화는 무력보다도

전염병에 의한 인구급감이 사실상의 이유라는 설도 있다.

쌀·보리·밀 등 수확률이 좋은 단일작물로의 편중은 기상이상으로 인한

가뭄·흉년 발생 시 대량아사를 초래했다.

비교적 최근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중국사서들은

쌀이 주식인 조선과 중국의 대량아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농경이 초래한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 비물질적인 즉 정신적인 비극이다.

수렵채집 기에는 인간은 자연과 하나였다.

농경으로 자연과 유리된 인간(人間)은 인간(人)들 사이(間)에서 살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의식에는

자연(하늘·땅·물·바람·산·바위·바다·강·동물·식물)이

들어오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마음(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다른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는 경우,

정신분열증이 생겼다. 농경으로 사람 수만 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속의 의식 수도 늘었다.

한 사람의 마음은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사실은 수많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마치 인도 보리수나무와 같다: 보리수군락은 겉으로는 다른 나무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땅 밑에서 뿌리로 연결된 한 나무이다.

의식의 발달은 의식을 통한 타인(의식)과의 관계의 발달이다.

이 점은 대승불교의 말라식·알라야식·무구식 발견과

프로이드의 이드·자아·초자아 발견과

융의 집단무의식 발견에 나타나 있다. )

악마가 있다면, 악마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인간을 죽이려면 하나씩 찾아가야 했는데,

이제 모여사니 한꺼번에 다 죽일 수가 있었다.

삼재로 죽이고, 가뭄으로 죽이고, 전쟁으로 죽일 수 있었다.

이 모든 재앙, 즉 삼재·질병·전쟁에 대해서

누군가 책임질 희생양이 있어야 하니 악마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재앙은 상당부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일(人災)로도 볼 수 있다.

이 측면에서 악마는 더욱 인간의 창작품이다.

과학기술 발명·발전이 없었으면

인류는 아직도 질병과 삼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것이다.

삼재의 주범인 수·화·풍을 길들여 거기서 수력·화력·풍력 에너지를 뽑아 쓰고,

항생제를 발명하여 세균성 전염병을 굴복시켰다.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폐병에 걸려 핏기 없는 흰 얼굴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창백안면문학청년종’은 지금은 다 멸종하고 말았다.

의학발전의 놀라운 힘이다.)

실로 인류역사는 예측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류역사상 모든 예언서들의 처참한 실패에서 보듯이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신과 악마가 벌이는 우주전쟁의 대(大)서사시를 통해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처참히 실패했다.

오로지 (자연·인문·사회)과학기술의 발달만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과거를 밝히고, 미래를 밝힐 것이다.

종교경전에는 과거가 들어있지만 (아득히 더 먼) 과거를 밝히지 못했고,

(업데이트 되지 않은 아주 먼) 과거만 들어있으므로 미래도 밝히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종교경전에도 진화론과 우주팽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 주목하면

인간의 종교에 대한 수만 년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수 있다.

종교가 기여하는 점이 있다면 종교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II. 육식과 농경



수렵채집기에는 예상외로 고기섭취를 많이 하지 못한다.

 

사냥성공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렵채집 지역의 인구밀도가 낮다.

농경으로 생긴 여유작물과 볏짚, 보릿짚, 밀짚, 콩깍지, 콩잎, 콩 줄기,

옥수수 줄기, 쌀겨, 밀겨 등 농업부산물을 이용해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중국은 일찍이 농사혁명이 일어나 일찍부터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풍부한 음식 찌꺼기로 돼지를 길렀다.

많이 먹고 풍성히 배설한 영양가 풍부한

인분(人糞 사람 똥)을 먹여 키운 돼지를 ‘똥’돼지라고 한다.

이 가축을 잡아먹는 것이 육식의 시작이다.

돼지도 잡아먹고, 개도 잡아먹고, 양도 잡아먹고,

닭·오리·거위도 잡아먹는다.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그래서 잡아먹히는 동물의 절대적인 수는 물론이고 일인당 고기 섭취량도 적다.

농업이 발달하면 잉여농산물(剩餘農産物)과

교환하기 위한 물고기를 잡는 어업이 발달한다.

일찍이 논농사혁명이 일어난

중국·한국·일본과 동남아시아인들의 물고기 섭취량은 대단히 크다.
 
논농사의 시원지인 인도는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데,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이론에 의하면 살려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암소는, 농경에 노동력과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수소(牛) 생산공장이니 공장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유는 영양가 있는 음식이며,

말린 소똥은 훌륭한 무연(無煙) 연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 가르친 고대 힌두교 성자의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신에, 암소는 수소를 낳고, 수소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농산물은 돼지를 키우고,

돼지는 인도인들에게 잡아먹혔다.

이처럼 인도와 중국 등 농경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

반면에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목축에 의존하던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척박한 토양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돼지에게 줄 곡물도 부족했고,

나무열매와 식물뿌리를 제공하는 숲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육하던 소·염소·양은 노동력과 우유를 제공하지만,

돼지는 고기 이외에 제공하는 것이 없는

비경제적인 동물이므로 돼지사육을 안 하는 것이 집단에 이익이다.

그래서 돼지고기 금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소·염소·양을 잡아먹었다.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와 뉴기니의 대인문화(大人文化)는

마을의 부자가 오랜 기간 모으고 기른

많은 수량의 재물과 돼지를 한꺼번에 마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부의 재분배정책으로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의

 

‘대인(大人 bigman)이라는 칭호에 대한 허영심’을 부추겨서

집단내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집단무의식적인 제도로도 볼 수 있다.

대인이라는 칭호는, 요즘 말로는,

 

‘기부의 달인’ 또는 ‘기부의 황제’라는 칭호이다.

대인문화는 북아메리카 해안지방에 살던

콰키우틀족 등의 인디언들에게도 포틀래취(potlatch) 문화로 나타났다.

 

  

▲ 타밀 나두(Tamil Nadu) 사원의 '염소제물' 소위 희생양(scapegoat)이다.

인간의 죄를 모두 뒤집어쓰고 죽는 염소.

 

 

 

 

 

 

 

 

 

 

 

인도는 부처님 당시에 대규모 동물희생제의가 실시되었다.

부처님이 암소 500마리, 수소 500마리 등을 희생해서 큰 제사를 지내려는

왕을 설득해서 포기하게 하는 일화가 불경에 남아있다.

희생제의(犧牲祭儀)로 살해된 고기는 그냥 버렸을까?

 

분명 사람들이 먹었을 것이다.

특히 성직자들이 먹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부 성직자들은 교활하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여 사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자나 호랑이나 늑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누·노루·사슴·임팔라는 소질을 살려 더 빨리 달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간은 머리와 손을 써서 총을 발명하면 될 일이다.)

이는 분명 대인문화와 같이 부의 재분배기능을 한 것이다. 

인도에서 육식금지 문화가 생긴 것은 농업과 연관이 크다.

인도에 인구증가와 인구집중이 일어나

도시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육식금지가 생겼을지 의문이다.

떠돌아다니는 (종교적인) 거지집단인

 

사문(沙門 스라마나 sramana)들을 먹일 음식은

농업발전과 인구증가·인구집중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농업으로 인하여 음식이 늘고 농사에 쓰는 가축이 증가하였다.

잡아먹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농사용 가축을 잡아먹으면 농사에 지장이 생긴다.

둘째, 농산물 생산으로 먹을 음식이 충분하다.

사문들이 사람들에게 육식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육식을 하게 되면 가축을 잡아먹어 특히 소를 잡아먹어,

 

농사를 망치게 되고

그러면 제일 먼저 굶어죽는 것이 거지들인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은 결국 죽는다.

죽은 동물은 동물사체 처리를 담당하는 하위 카스트가 먹어 치웠다.

그러므로 어찌되었건 농업은 사회 전체적으로 육식을 증가시켰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전에 시골 할머니 집에서 살던 어느 해 겨울,

머슴 형이 잡아온 꿩고기 맛을 잊지 못한다.

방울방울 노란 기름이 동동 뜬 꿩고기국의

그 환상적인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채식을 한 지 오래인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이다.

머슴 형은 밤에 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정성들여

작은 송곳으로 작은 콩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싸이나(청산가리)를 조금 넣은 다음 촛농으로 구멍을 막아,

꿩이 옴 직한 곳에 두면 꿩이 먹고 중독되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잡혔다.

바람이 불면 문풍지가 비명을 질렀고, 촛불은 불길하게 흔들렸으며,

그 다음날 꿩은 비명도 못 지르고 죽었다. 시린 하늘 아래 하얀 눈 위에서.

그리고 잡아먹은 인간들은 꿩 기름 바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예로부터 짐승이나 인간이나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그래서 생긴 속담이 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바께쓰에 시뻘건 액체를 담아왔다.

인근에서 도살한 소피였다. 선짓국을 끓여, 큰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둘러앉아,

구멍이 숭숭 뚫린 소 피덩어리를 맛있게들 먹었다.

꿩고기든지 닭고기든지 쇠고기든지

한번 고기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간의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이다.

그러므로 농사꾼들은 ‘저 소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결심 또 결심했을 것이다.

맛있게 먹고 조만간 굶어죽느냐 아니면 맛없는 곡식을 먹고 길게 사느냐,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지만 갈 길은 외길로 뻔했다.

이 못 잡아먹은 고기에 대한 한은, 수십 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입에 달고 살던,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로 남아있다. 여기서 고기는 물론 쇠고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소 도살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쇠고기에 대한 갈망은, 한반도에서, 적어도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한다.



III. 육식을 하는 이유



육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맛이 있어서이다. 맛이 없다면 누가 먹겠는가?

둘째는 인간이 오랜 기간 고기를 먹어왔기 때문이다.

물고기 시절까지 치면 아마 적어도 5억년은 먹었을 것이다.

셋째는 고단백질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풍부한 단백질원이자 필수아미노산원이자 비타민원이다.

혹자는 고기가 몸에 익어서 안 먹으면 허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이 알아서 적응한다.

인도인들의 40%가 채식을 함에서 알 수 있듯이, 습관이 중요하다.

또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신적으로 습관을 들이기 나름이다.

성장기에 고기를 안 먹으면 발육이 부진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성장한 후에는 안 먹으면 된다.

그럼 육식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는데,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개, 걸, 윷도 있다.

포유류를 먹지 않고 물고기를 먹는 방법도 있으며, 먹는 양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절대, 모두 먹거나 하나도 안 먹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다.

 


IV. 육식의 현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간 불교국가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스님들은 육식을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스님들의 육식이 보편화되었다. ‘

음주식육 무방반야’

(飮酒食肉 無妨般若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지혜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경허(1849~1912) 스님의 무애(無碍)가풍이 한반도를 휩쓴 여파라고 한다.

그 가풍이 무르익어 성춘(盛春)의 흐드러진 벚꽃처럼 만개(滿開)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한국 선불교는 거의 다 경허스님의 후손들이다.

스님들이 식당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심

지어 절에서 고기요리를 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산 생명에 산 채로 칼질을 해대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능지처사형을 가한,

야만적인 회까지 먹는다.

물고기에 칼질을 하기 전에,

물고기 대가리를 큰 칼 측면으로 때려 기절시키기도 하지만,

해체가 끝난 후 깨어나 (몸통은 사라지고 꼬리지느러미와 뼈와 머리만 남은 채로)

접시 위에서 입을 뻥긋뻥긋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아침저녁으로는 물고기를 제도한다고 목어(木魚)를 치고,

포유류를 제도한다고 북을 치고, 새를 제도한다고 운판(雲版)을 치고,

습생(濕生) 물고기와 태생(胎生) 포유류와 난생(卵生) 조류의 자애로운 아버지인

사생자부(四生慈父) 부처님을 큰소리로 부르며 예불을 드린다.

“정신적으로 제도는 안 해주어도 좋으니,

제발 물질적으로 잡아먹지나 말아 달라”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V. 육식금지가 생긴 이유



그런데 왜, 불교에는 육식 금지 계율이 생긴 것일까?
 
첫째, 철학적인 이유가 있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

하나같이 고귀한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

겉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털과 비늘로 뒤덮이고, 네발로 걸어 다니고, 배로 기어 다니고,

비린내를 풍기고, 땅위의 음식을 먹을지라도 속에는 불성이 있다.

그러므로 잡아먹을 수 없다.
 
둘째, 다른 종교와의 경쟁이 있다.

신을 섬기고 아트만을 믿는, 즉 유신론(有神論)과 유아론(有我論)을 믿는

베다교와 힌두교가 모든 생물은 아트만이 있다고 육식을 금지하는데,

힌두교의 대척점에 있는 무신론(無神論)과 무아론(無我論)을 믿는

불교가 육식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불교와 가장 가까운 불살생의 자이나교가 육식을 금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자이나교 승려들은 미물인 곤충들조차, 모르고라도, 죽일 수 없다고

길은 비로 쓸고 다녔고 입에는 마스크를 했다.

그러니 더욱 불교가 육식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자이나교 나형(裸形 nude) 수행자. 자이나교 창시자 마하비라는

평생 벗고 지냈으며,부처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벌거벗은 것은 한 벌의 옷도 소유하지 않는 철저한 무소유의 상징이다.

물론 추운 곳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벗은 것이 부자연스럽고,

오히려 입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셋째,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 육식금지는 ‘농경문화와 인구증가’로

촉발된 전쟁으로 인한 살육에 대한 총체적인 반발일 수도 있다.

넷째, 윤회론이다. 힌두교이건 자이나교이건

불교이건 인도종교는 모두 윤회론을 가르친다.

인도하면 윤회론이다.

그러니, 잘못하면 환생한 선망(先亡) 조부모, 부모, 형제, 자식, 배우자,

친척, 친구, 조상을 잡아먹는 꼴이니 육식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도 윤회를 믿었으며 채식을 했다.

고대 이집트에도 윤회론이 있었으며,

이집트에서 비교(秘敎)에 입문한 피타고라스가 세운 교단은

윤회를 가르쳤으며 육식을 금했다. 피타고라스는 전생을 기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 유포르부스(Euphorbus)라고 하며 그 이름까지 밝혔다!

다섯째, 중생에 대한 자비 즉 사랑 때문이다.

초기불교에 비해서 대승불교는 범망경 등에서 육식을 철저하게 금한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없앤다는 것이 이유이다.

대승불교는 자비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므로 당연한 일이다.

내일 잡아먹을 심산이면서 오늘 사랑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고 사자후를 했다.

병문안을 온 아라한으로 대표되는 소승불교승려들에게 한 얘기였다.

“얼마나 잘못 살았으면 병이 나느냐?”는 뉘앙스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니, 유마거사를 하늘같이 섬기는 대승불교도들로서는,

중생의 고통을 같이하지는 못할망정

자기가 살겠다고 중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VI. 육식의 피해



꼭 종교적인, 철학적인 이유가 아닐지라도 육식에는 여러 가지 해로운 점이 있다.

1. 육식은 효율이 낮다. 삼인분의 곡물을 소비해 일인분의 고기를 생산한다.

세 명이 먹고 살 걸 한 명만 먹는 꼴이다.

사람들이 육식을 줄이고 (줄인 만큼 기부하면) 전 세계 식량문제는 다 해결된다.

2. 메탄가스는 대부분 동물인분에서 생긴다.

동물분뇨로 인한 수질오염, 토양오염, 지하수오염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다.

축사에서 생기는 배설물 양은 어마어마하다.

3. 육식은 각종 성인병을 유발한다.

당뇨병, 비만증, 고혈압, 혈관비대, 심장질환, 전립선질환 등등 끝이 없다.


4. 육식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육식증가로 지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열대우림이 매년 북한면적만큼 사라지고 있다.

목초지를 조성해서 맥도날드에 납품할 소고기를 만드는 것이 주요 이유이다. 
 
5. 동물학대를 유발한다. 지구상에는 사람 수보다

소·돼지·양·닭 등 가축 수가 더 많다.

사람은 73억 명(名)이고 가축은 214억 두(頭)이다.

 

 

 

 

 

 

 

 

 

 

▲ 아기 고릴라를 안고 있는 어미고릴라와 쌍둥이를 안고 있는

어미 고릴라.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이런 고릴라를 잡아먹는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기도 했으니 그리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소는 3년을 넘기지 않고 도축된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쇠)고기를 먹일 때 생기는 광우병에 걸리지 않게.

우리나라 소들은 평생 밖으로 산책 한 번 못 나가고,

좁은 우리에 갇혀 살다 도살되어 비싼 한우고기로 팔린다.

닭은 몇 달 못 산다.

닭은 몸도 못 움직일 정도로 비좁은 일조용(一鳥用)

닭장에 갇혀 밤낮으로 죽도록 알만 낳다가 목이 잘린다.

 

그 수가 190억 마리에 달한다!

일조용 닭장이 좁은 이유는 한정된 공간에 닭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기 위한 것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며,

한 마리씩 분리해서 사육하는 이유는 서로 쪼며 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닭장에는 24시간 동안 전등이 켜진다. 그래야 알을 더 많이 낳기 때문이다.

갇혀 살기는 돼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축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형언도를 받고,

태어나자마자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자식을 낳고 사는 사형수(獸)들이다.

그런데 자식은 낳아도 결혼은 없다!

주사기로 정액을 주입해 인공수정으로 임신을 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고기는 모두 아비 없는 호로자식(胡虜子息)들이다.

북한 강제수용소와 소련 강제수용소는 잔혹함으로 악명 높지만,

가축은 더 심한 대접을 받는다.

죽도록 우유만 생산하고, 알만 낳다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다.

해마다 자그마치 100억 마리의 가축이 도살된다.

(가축들이 운동을 못하게 가두어 키우는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래야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고기가 부드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맛이다! 맛! 맛이 문제다!) 지구는 동물들의 아우슈비츠이다.

우리가 육식을 많이 할수록 아우슈비츠 수용소 행 동물들이 늘어난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사생자부(四生慈父 모든 동물의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아침저녁으로 독송을 하는 것은 위선이다.

6. 정신분열증을 유발한다.

건성건성 불교를 믿으면 모를까 심각하게 믿기 시작하면,

중생을 사랑한다 하면서 잡아먹어야 하니,

정신분열증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종교적)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VII. 부분적인 육식허용이 생긴 이유



그런데 여러 가지 안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삼정육(三淨肉, 자기를 위해 잡는 것을 보지 않은 고기,

자기를 위해 잡는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

자기를 위해 잡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고기)이라고

조건부로 육식을 허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얻어먹는 주제에 음식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감지덕지 하고 먹을 일이다.

빌어먹는 출가자 주제에 음식을 보시하는 재가자들에게

“이 음식 안 된다 저 음식 안 된다, 이 음식 달라 저 음식 달라” 하며

지나치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고려로 인해서,

(고기가 들어 있을지라도) 주는 대로 받아먹게 한 것이다.

일부 전승에 의하면 부처님도 돼지고기를 드셨으며,

 

마하가섭은 사람고기도 드셨다.

그는 문둥병자의 공양을 받는 중에 발우에 떨어진 문둥병자 손가락을 먹었다.

기독교 구약의 야훼 하나님은 자기에게 바치는 동물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족히 84,000가지는 됨직한 규정을 모세오경 중 레위기에 적어놓았다.

예를 들어 레위기 22장에 의하면,

야훼는 자기에게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눈이 먼 것, 종기가 나거나 습진에 걸린 것, 비루먹은 것,

그리고 고환이 상하였거나 치였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자기에게 바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 것은 너희들 몫이라고 한다.

‘야훼 하나님이 (또는 야훼를 판 제사장들이) 동물고환도 드셨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에 비하면 3가지 고기만 허용한 부처님은 얼마나 실용적이고 자비로운 분인가!

그것도 고기의 종류와 품질은 따지지 않고,

 

‘먹는 사람을 위해 잡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도살의도만 문제 삼으셨다! 사두! 사두! 찬탄의 소리가 아니 나올 수 없다!

둘째, 산에서 수행을 하다가 혹은 여행 중에 마을은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승려들이 산에서 길에서 죽은 짐승을 보면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답이다. 산 사람 목숨이 중하지 죽은 동물 사체가 중요할 리는 만무하다.

예수님 말씀대로,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됨에 따라 발생하는 가지가지 상황이 발생하고

그 상황을 각기 자기 유리할 대로 해석해서 그렇지,

그 근본 뜻을 헤아리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

육식금지의 근본 뜻은 살생을 조장하지 않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기섭취를 반으로 줄이면,

 

살생이 반으로 줄어들 것은 명확하다.

종교인은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부처님이 삼정육(三淨肉)을 정하기 이전의 부처님 마음을 헤아리고 느껴야 한다.

선정을 닦으면 자신의 행위 뒤에 숨어있는,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인, 미세하고 미묘한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각자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모든 선(善)의 출발이다.

선은 앞뒤 가리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인의 마음자세이자, 인류종교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종교와 관계없이 성립하는 황금률(黃金律)만 따라도 행복은 절로 온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기위해 출세하신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옭아맨다.

불교인들은 계금취견(戒禁取見)이란

 

타종교교리를 말한다고 큰소리치며 굳게 믿지만,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헛소리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종교에 관계없이 다 계금취견이다. 인류역사에서 등잔 밑이 밝은 적은 결코 없다.

특히 종교의 역사가 유별나게 그렇다. 

 


VIII. 육식의 모순: 참나와 불성을 잡아먹는다



모든 생물이 참나(眞我)와 불성(佛性)이 있다면서 왜 잡아먹는가?

만약 지능이 모자라서라면, 인간도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잡아먹어도 되는가?

정박아(精薄兒)와 지진아(遲進兒)는 잡아먹어도 되는가?

전교 꼴등은 학교에서 잡아먹고, 수능 꼴등은 전 국민이 잡아먹어도 되는가?

부처님이 동물 해골더미를 가리키며

“긴긴 윤회 중에 저들은 다 한번쯤은 우리 부모였다,

그러므로 동물을 잡아먹지 말라”고 하셨다.

할 수 없이 먹는다 해도, “되도록 육식을 하지 말자”고 “육식을 줄이자”고

캠페인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식인종의 나라에 가서 전법을 할 때 사람고기를 주면 먹을 것인가?

사람을 사육해서 잡아먹는 것을 알면서도 먹을 것인가?

인육을 안 먹어도 좋다는 선택권이 있어도 그리 할 것인가?

밥과 김치만 먹으면 뭐가 문제인가?

우리나라 불교인들이 하는 “동물은 모두 참나가 있다”는 주장은 말뿐이다.

오히려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는 서양인들이 동물을 더 보호한다.

많은 경우에 고상한 철학은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이 아니라 행을 보라”고 하셨다.

동물입장에서는 “우린 참나는 없어도 좋으니,

제발 잡아먹지만 말아 주세요” 할 게 분명하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동물은 (무한 번의)

‘참나 +살해’ 세트와 (무한 번의) ‘無참나 +선종(善終)’ 세트,

이 둘 중 어느 걸 택할까? 당신이라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할까?

자비심의 대보살 산티데바의 글 ‘입보리행론’을 읽어보라.

지금 한국불교는 ‘웰빙불교’로 전락하고 있다.

뜻(철학)도 행(行)도 무사안일로 흐르고 있다.

독재정권에 빌붙어 잘 사나, 세속에 빌붙어 잘사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참다운 종교인이라면 둘 사이에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최고권력을 버리고,

그리고 호화주택과, 가지가지 고기로 만든 산해진미와,

가볍고 부드러운 옷과, 포근한 잠자리와,

 

귀여운 아들과, 아름다운 처와 첩들을 버리고.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름다운 우리 ‘말’인 '참나'만 남고,

나머지 ‘행’과 ‘뜻’은 다 사라졌다. 철학도 사라졌다.

속인들과 외도들의 머리를 '꽝' 쳐서 멍하게 충격을 줄

‘행’도 ‘말’도 ‘뜻’도 다 사라졌다. 오히려 과거보다 못해진 지 오래이다.

조계종 국회인 종회에서는 승려 간에 막말이 난무하고,

조계사 경내에서는 승려 간에 폭력이 벌어진다.

같은 승려들끼리 남의 재물을 빼앗겠다고 도박을 벌인다.

고위승려들이 해외원정도박도 다닌다. 이 모든 일이 육식과 관련이 없을까?

육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그 몸을 빼앗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처럼 새끼를 낳고 젖을 주어 기르는 생명체를,

그리고 죽기 싫어 도망가는 생명체를 강제로 죽여

잡아먹는 일이기에 폭력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 實有佛性, 모든 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부처님 성품이 있다)을 말할 때,

거기 중생들 사이에 차별이 있는가?

만약 차별을 둔다면 인간은 천인(天人 하늘나라 사람) 아래다.

그럼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듯이, 천인이 인간을 잡아먹어도 되는가?

일부 불교인들은 천인은 외계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차별을 둔다면,

 

인간과 초고등 외계인들 사이에도 차별이 생긴다.

차별을 둔다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참나와 불성을 부인해야 한다.

동물도 ‘참나’를,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면서 잡아먹는다면,

인간을 잡아먹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동물을 직접 죽여서 잡아먹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사 먹으면, 반드시 잡아 파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 문제다.

그러므로 고기섭취를 줄여야 한다.

자기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개고기를 안 먹는다.

안 그러면 자기 개 보기에 미안할 거다.

농부들은 자기 소를, 팔면 팔았지, 잡아먹지는 못했다.

같이 농사를 지으며, 송아지 받아주며, 정이 들었는데 차마 잡아먹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지금도 인도 농부들에 의해서 지켜진다. 인도주의의 발로이다.

불교인들은 힌두교를 온갖 우스꽝스러운 신을 믿는다고 무시하지만

그 행에 있어서는, 최소한 육식문제에 있어서는,

불교가 더 문제이다. 절 앞에는 고기집이 즐비하고,

절 계곡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것도 불교신자들이 벌이는 일이다!

어느 날 고등 우주외계인의 침략을 당해 인간이 식육동물로 전락하면 어쩔까?

그 초고등 생물들인

외계인들이 타방불(他方佛 다른 세계의 부처)을 섬기는 불교신자들이었다면?

그리고 자기들끼리 육식을 금하느냐 마느냐로 토론을 했다면,

게다가 그 육식이 대부분 사람고기라면?

그러다 결국 ‘잡아먹어도 무방하다’고 결론이 나서,

사람대표가 우리도 당신들처럼 불성이 있으니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중국식당의 산 채로 뇌가 열린 원숭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어도 잡아먹었다면?

“얘들이 시끄럽게 짖네” 하면서.

식인을 금하는 것은 인육에 신비한 아트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맛이 들리면 사람을 죽일까봐’,

‘맛에 중독되면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침을 흘릴까봐’,

‘맛에 눈이 멀어 인권에 대한 학대가 일어날까봐’ 그러는 것이다.

요즈음 가끔 식인 뉴스가 나는 걸 보면 그렇다. 사람을 죽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요리해 먹는 흉악범들이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체는 다 평등하다는 철학에 기반한 것이다.

인류역사는 무수한 식인사례를 증언한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인들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스페인이 아즈택을 점령했을 때 광장에 쌓인 수십만 구의 유골을 보았다.

아즈텍 제국에는 가축이 없었다.

사람 외에 잡아먹을 고기가 없어서 잡아먹었다는 설도 있다.

생명체는 정말 평등하다. 침팬치와 인간은 유전자가

99%나 일치하며 (비슷하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혀 비슷하게 생기지 않은,

 

미물인 초파리의 유전자도 60%나 인간과 일치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을 두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부처님이 “모든 동물은 전생에 한번쯤은 다 우리 부모였다”고 하신 말씀이

유전자학과 진화론 측면에서 보면 맞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과거 수십억 년 전에서 수백만 년 전까지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부모로 두었다!

그러니 지구촌 생물들은 다 가족이다. 그러니 어찌 평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IX.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다 좋은데, 절 밖 식당에는 고기 없는 음식이 별로 없다고 애로점을 토로한다.

그럼 ‘되도록’ 고기가 없는 음식을 먹으면 된다.

‘되도록’ 고기가 적게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된다. 오십 보와 백 보는 다르다.

국수류와 비빔밥과 된장국, 순두부 등을 먹으면 된다. 이 정도 음식이면

부처님이 드시던 음식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어느 해 흉년이 들자 ‘말 먹이’를 드신 적이 있다.

아마 당신은 ‘말 먹이’를 먹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국수류도 고기로 국물을 낸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다시 강조하자면 오십 보와 백 보는 다르다.

“사람이라면, 특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작은) 죄를 안 짓고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큰) 죄를 짓자” 하면 누가 동의하겠는가? 먹어도 되도록 줄이면 된다.

만약 당신이 하루 세 끼를 먹는다면, 끼니 수는 줄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기 섭취량을 삼분의 일로 줄이면 된다. 부처님은 하루 한 끼만 드셨기 때문이다.  

‘먹자, 안 먹자’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무수한 등급이 있다.

“안 먹을 수 없으니 마구 먹자”가 아니라, "할 수 없이 먹으니, 되도록 적게 먹자

또는 되도록 먹지 말자"가 정답이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로로 잡을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도 되는 건 아니다.

항복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에도 등급이 있다.

우발적인 홧김살인과 계획적인 연쇄살인은 다르다. 범죄에도 등급이 있다.

바늘도둑과 소도둑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육식을 해도,

되도록 고등동물은 먹지 말고 물고기를 먹는 것이 좋다.

일본인들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1685년에 생류연민령을 내린 이후 수백 년 동안)

주로 물고기만 먹고도 노벨상도 스무 명이나 타고,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우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리고 감히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중국본토를 점령하고,

동해에서 아라사의 발틱함대를 격멸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맞대결을 하고, 못하는 게 없다.

사찰식당 음식은 절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고기를 요리하는 것은 문제이다.

독살이 토굴살림에서 고기요리를 하는 것은 변명할 길이 없다.

습관과 맛, 이 둘 이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고기가 요리하기 훨씬 더 편하다고?

그걸 이유라고 드시는가? 차라리,

“한 겨울에 아랫목에 앉아

 

윗목에 있는 밥을 가져다 먹기 귀찮아서 굶어죽었노라”는

게으름뱅이 귀신의 말을 믿겠다. 

맛이, 맛에 대한 집착이 문제이지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육식을 줄일 수 있다.

특히 자기가 손수 요리하는 경우,

버섯 감미료, 표고버섯, 두부, 콩 단백질, 우유, 치즈, 채소, 국수, 된장국 등으로

얼마든지 맛있고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서양인들은 채식주의자가 많고,

 

채식도 메뉴가 많다. 설마 처음부터 그리 많았겠는가?

누군가 시작을 했고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동참한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거꾸로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불교인들이 나서서 채식운동을 벌어야 하다.

그러면 덤이 있으니, 광우병과 조류독감에 안 걸린다.

티베트의 해발 수천 미터 고산지역처럼,

환경이 열악해서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환경이 양호해서

‘어쩔 수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있게’ 먹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이 먹을 게 없을 때, 개, 돼지, 닭, 오리, 토끼를 잡아드실까

아니면 아사를 택하실까?, 자문(自問)해 보시라.

당신의 답이 명확하다면, 당신의 행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X. 정 먹을 거면 조용히 먹어야 한다.



만약 먹을 양이면,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무리 해도 그 황홀한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피치 못할 이유로, 또는 말 못할 사정으로 꼭 드셔야 한다면,

첫째, 절대로 동물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지 마시라. 
그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시라.

둘째,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지 마시라. 
그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먼저 지금까지 먹은 동물들의 명복을 비시라.

셋째, 모든 동물의 스승이 되자고 주장하지 마시라. 
외계인이 당신 가족을 잡아먹어 놓고, 
그리고 당신도 잡아먹을 예정이면서 당신의 스승을 자처하면 당신은 용납하시겠는가?

넷째, “먹히는 것은 육신이지 마음이 아니다.

참나, 주인공, 불성은 조금도 손상된 바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동물의 육신을 먹는 것은 무방하다”라고 주장하지 마시라.

무서운 논리이다. (그런 논리라면 사람을 잡아먹어도 무방할 것이다.)

정신·육체 이원론의 무시무시한 일면이다. 이런 식으로 위선자가 되지 마시라.

조용히 자신의 위선을, 나약함을 인정하시라.

그리고 드시라. 아무 말 없이! 잡아먹히는 동물입장에서 보면 ‘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생각해 주는 척하며

왜 (잡아)먹느냐는 말이다.

 


XI. 채식 16단계



동물을 먹어도 차이를 둘 일이다.

무엇보다도 육식을 해도 사람을 안 먹는다.

(특히 자기 자신과 가족을 안 먹는다.

옛날에 지독한 흉년이 들어 사람고기를 먹을 때에도 차마 자기 자식은 먹지 못하고

남의 자식과 바꿔먹었다.

 

고강도 단식 같은 고행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먹는 행위이다.)

영장류를 안 먹는다. 특히 침팬지나 보노보를 안 잡아먹는다.

지금도 아프리카인들은 이들을 잡아먹는다. 원숭이도 잡아먹지 말자.

포항공대 수학과 원로 교수님의 증언이다.

지금은 은퇴하신 이분이 수십 년 전에 중국여행 중에 경험한 일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식당에서 작은 원숭이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떠먹는데,

꽁꽁 묶인 원숭이가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사람이 할 짓인가?

 

생긴 것도 비슷한 동물이 정수리가 열린 채 울고 있는데,

그 동물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동물들이 태연히 잡아먹다니!

코끼리, 돌고래, 물소를 안 먹는다.

코끼리는 가족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곡을 하며,

사단칠정(四端七情)도 있다. 돌고래는,

몸에 이상이 생겨 가라앉는 동료를

 

자기 등에 업고 물위로 밀어 올려 숨을 쉬게 한다.

물소는 사자의 공격을 당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

개를 안 잡아먹는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사랑과 충성을 바친 동료이자 부하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는가?

돼지를 안 먹는다(돼지는 무척 지능이 높고 청결하다.

 

사람이 더럽게 키울 뿐이다.

동양문명의 초기에 돼지는 거주지에 침투하는 뱀을 잡아먹으며 인류를 보호했다.

그래서 서양과 달리, 뱀은 동양신화에서는 서양신화에서처럼

하나님과 맞장 뜨는 높은 지위가 없다.

 

돼지도 못 당하는 주제에 뭔 힘이 있겠는가?).

소를 안 먹는다. 송아지 등심구이용으로 송아지를 빼앗기고

먼 산을 보며 꺽꺽 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슬픈 큰 눈을 보고도 잡아먹을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문어를 안 먹는다(거울에 비친 자기모습을 알아볼 정도로 지능이 높다.

포항 죽도시장에 가서 문어를 사면 산 채로 가마솥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삶아준다.

화탕지옥이 따로 없다. 차마 못 할 짓이다).

말을, 당나귀를 안 잡아먹는다

(당나귀는 이솝우화 등 여러 우화에 등장하는 영특한 짐승이다).

까마귀를 안 잡아먹는다(까마귀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

가지를 꺾어 잎을 떼고 끝을 구부린 다음 나무구멍에 넣어 벌레를 꺼내 먹는다.

밑부분에 벌레가 떠있는 컵에 돌멩이를 넣어 수면을 높여 벌레를 잡아먹는다).

물고기를 안 잡아먹는다.

특히 치어를 입속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구중부화어류(口中孵化魚類 mouthbreeder)를 안 잡아먹는다.

그럼 남는 것은 식물뿐이다.

피치 못해 (잡아)먹는 경우는 지금까지 나열된 역순으로 잡아먹는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걸로 시작해서,

서서히 난이도를 높여가며 단계별로 실천한다.

제1단계: 사람고기를 먹지 않는다.

옛날에 죽은 가족을 먹은 풍습이 있었다.

가족을 자기 몸속에 묻는 효과가 있었다.

이제 내 몸이 되었으니 영원히 같이 산다는 뜻이었다.

부인이 임종할 즈음 금슬이 좋았던 남편과의 대화이다.

“부탁이니 제가 죽으면 절 드세요.

 

잊지 말고 꼭 드세요.”

남편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알았소, 걱정 마오, 내 꼭 그리하리다.”

인류역사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일은 생각보다 흔히 일어났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중국의 유구(悠久)한 식인문화가 문학작품으로 표현된 것이

노신의 명작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이다.

주인공은 마을사람들과 자기 가족이 자기를 잡아먹을까 두려워한다.

심지어 마을 개까지 자기를 보면 군침을 흘린다고 망상을 한다.

제2단계: 애완동물을 잡아먹지 않는다.

옛날에는 가끔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제3단계: 고등동물을 먹지 않는다.

개, 소, 물소, 돼지, 양, 염소, 말, 당나귀, 낙타,

 

 

원숭이,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 코끼리, 돌고래,

 

고래,

까마귀, 문어를 먹지 않는다.

제4단계: 야생동물을 먹지 않는다.

토끼, 노루, 고라니, 사슴, 엘크, 산돼지,

 

버펄로, 호랑이,

 

늑대, 박쥐, 곰 고기를 먹지 않는다.

특히 곰쓸개를 먹지 않는다. 쓸개즙생산방법은 매우 잔인하다.

곰을 우리에 가두고 쓸개에 관을 꼽아 쓸개즙을 뽑는다.

제5단계: 조류를 먹지 않는다.

꿩, 닭, 오리, 거위, 칠면조,

청둥오리, 기러기, 비둘기를 먹지 않는다.

특히 푸아그라(foie gras)를 먹지 않는다.

푸아그라 생산방법은 몹시 비인도적이다.

강제로 거위 입을 벌려 고정시키고 먹이를 마구 주입한다.

그 결과 비대해진 간을 배를 열고 꺼내 먹는다. 
 
제6단계: 연체동물을 먹지 않는다.

오징어, 꼴뚜기, 문어, 낙지,

세발낙지, 해파리를 먹지 않는다.

제7단계: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참치, 꽁치, 청어, 갈치, 멸치,

 

홍어, 명태, 전어, 준치, 광어,

옥돔, 참돔, 장어, 메기, 미꾸라지, 모래무지, 빠가사리,

가물치, 고등어, 잉어를 먹지 않는다.

돈이 많으면 상어지느러미를 먹지 않는다.

어부들은 상어를 잡아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다시 바다로 던진다.

사지가 잘린 상어는 바닷물을 피로 붉게 물들이다 질식사해서 죽는다.

상어는 움직이지 못하면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제8단계: 갑각류를 먹지 않는다.

게, 가재, 새우, 왕새우를 먹지 않는다.

제9단계: 패(貝 조개)류를 먹지 않는다.

굴, 전복, 꼬막, 홍합, 조개, 피조개, 가시조개,

대합조개, 소라, 고동 등을 먹지 않는다.  

제10단계: 달팽이를 먹지 않는다.

식용달팽이, 민달팽이, 물달팽이,

산달팽이, 우렁이를 먹지 않는다.

  
▲ 달팽이

 

 

 

 

 

 

제11단계: 곤충과 벌레와 지렁이와 개미를 먹지 않는다.

 

메뚜기와 번데기를 먹지 않는다.

 

메뚜기와 번데기는 필자 어린 시절의 주요한 간식이었다.

 

할머니가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잣느라 물레를 돌리면

 

실이 다 풀리는 순간

 

번데기가 물레 밑에 있는 뜨거운 물에 떨어져 익혀졌다.

 

그러면 옆에서 지켜보다 낼름 건져먹었다.

 

메뚜기는 귀중한 벼를 먹고 자랐으니

 

메뚜기볶음은 벼가공식품이다.


예수의 스승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를 먹고 살았다.

 

바퀴벌레를 먹지 않는다.

 

태국사람들은 엄지손가락만 한 대형 바퀴벌레를 볶아서 판다. 

 

벌레 구이는 우리나라 오징어 구이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사서 맛있게 먹는다!


지렁이를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물고기 미끼로 쓰더라도 이 사실만은 기억해야 한다. 


돈이 많으면 모기눈알요리도 먹지 않는다.

 

박쥐는 하룻밤에 평균 2천~3천 마리의 모기를 잡아먹는다.

 

모기 눈알은 소화가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배출된다.

 

동굴 속에서 박쥐의 배설물을 모아 모기 눈알을 채취한다.

모기 눈알 요리는 수프의 일종인데
음식재료가 비위생적이어도 맛만큼은 기가 막히다. 
 
특히 씹을 때 눈알이 터지는 쾌감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할 수 없다. 
 
이 음식은 국빈 대접용 메뉴로 사용되는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이 요리를 대접받았다고 한다.

제12단계: 파충류와 양서류를 먹지 않는다.
 
뱀과 개구리를 먹지 않는다. 
 
도마뱀, 도롱뇽도 먹지 않는다. 
 
술로 담가 먹지도 않는다. 
 
황소개구리 청개구리는 말할 것도 없고, 
 
불란서 산(産) 식용개구리도 먹지 않는다. 
 
독사는 물론이고 구렁이도 먹지 않는다.

제13단계: 유정란(有精卵)을 먹지 않는다.
 
새알이건, 게 알이건, 
물고기 알이건 수정된 알은 먹지 않는다. 
 
개구리 알, 도롱뇽 알도 먹지 않는다. 
 
돈이 많으면 캐비어도, 모기알도 먹지 않는다.  
  
제14단계: 고급과정: 유제품과 무정란을 먹지 않는다.
 
우유, 치즈, 버터, 수정되지 않은 새알, 물고기 알 등 
 
일체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다. 
 
이건 매우 조심해야 한다. 
 
신중히 생각하라.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느냐만, 
 
어릴 적부터 이 길로 들어서다가는 잘못하면 굶어죽는다. 
 
모유와 우유를 안 먹고 살길이 있는가? 
 
육식 반대는 살생반대인 데 비해서, 
 
유제품은 동물학대 반대이다. 

불교계율에서 가죽제품을 금지한 것은
 
동물학대에 반대한 것이므로 유제품섭취금지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우유죽을 드시고 일주일 만에 정각을 이루셨음을 기억하라! 
 
이 길로 가기로 결정한 분도, 최소한, 
 
깨달음을 얻기 며칠 전에는 필요하다면 먹어도 무방하리라! 

제15단계: 원수를 잡아먹지 않는다.
 
전라도에서는 원수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난다. 
 
‘잡아먹을 놈’, ‘삶아먹을 놈’, ‘튀겨먹을 놈’, 
 
‘볶아먹을 놈’이라는 욕들이 그 증거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 들은 욕들이다. 
 
원수를 안 잡아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시인들은 적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증오 때문이 아니라, 
 
적을 존경해서 그랬다. 힘이 강한 적을 잡아먹으면, 
 
적의 힘이 자기에게 옮겨온다고 믿었다.

원수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을 품위 있게 표현하자면,
 
소위 달마스님의 ‘보원행(報怨行)’이다.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원수를 잡아먹지 말라는 뜻이다. 

제16단계: 잡아먹지 않는 모든 동물들과 원수들을
 
자비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적고 보니 인간이 (잡아)먹는 동물이 이렇게 많을 줄 꿈에도 몰랐다.
 
이게 다가 아닌데도 말이다. 위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 가장 효과적인 순서와 방법을 따르면 된다. 

16가지, 이걸 다 할 수 있으면 해탈이다. 이토록 동물을 사랑하는데,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누군들 사랑할 수 없겠는가? 
 
소위 자비심해탈(慈悲心解脫)이다. 
 
요즘 말로는 ‘애해탈’(愛解脫)이다. 

채식을 하는 사람(a person)이 육식을 하는 사람(a person)보다
 
더 나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이라 
 
오히려 육식을 하는 사람(a person)이 채식을 하는 사람(a person)보다 
 
사회와 국가와 인류와 자연계에 더 유익한 사람일 수 있다. 
 
육식은 인간의 종교·철학의 많은 부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중요한 하나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뜻은, 
 
이 중요한 부분에 대해, 먹기 전에, 다시 한 번 사유를 해보자는 것이다. 
 
큰 머리를 지닌 인간은 사유를 통해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가 안팎의 경험과 어우러져 통합적·직관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자비심이다. 

A herbivore need not be a better person than a carnivore.
 
Since evaluating a person engages multiple aspects of the person, 
 
a carnivore can contribute more than a herbivore to the society, 
 
the country, the world, and the nature. 
 
Carnivorism is 
 
just a portion of religion and philosophy; but an important one. 
 
My intension of writing this article is encourage people 
 
to give a thought 
 
to carnivorism before people kill and eat other animals. 
 
Because big-brained humans grow on contemplations, 
 
which manifest themselves as compassion 
 
in the form of intuition and consilience.    
 
 
 


XII. 지혜와 자비의 개발과 실천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에게는 본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키워가는 것이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완전한 지성과 사랑, 즉 지혜와 자비를 지닌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지혜와 자비가 있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위선을 저지르게 된다. 
 
우리가 다른 동물들의 삶의 의지와, 아픔과, 비참한 처지와, 
 
우리와의 동질성을 깨닫고 느껴 이해와 사랑이 생기는 것이지, 
 
처음부터 즉 아메바 시절부터 완벽한 형태의 지
 
혜와 자비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발견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느끼는 마음과 이해하는 지혜는 생기는 것이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진화하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해진 방향성이 없는 진화의 세계에서 그리고 이정표 없는 진화의 노상에서,

 

부처님이 이미 걸어가신 진화의 길을 부처님이 남기신 이정표를 따라

 

우리가 따라 걸을 수 있음이 어찌 고맙고 희유한 일이 아닐 소냐.

 

뒷길을 물려받은 우리의 의무는 앞길을 개척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