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방법 / 청화스님

2015. 2. 20. 17: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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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방법(方法) 

 

이제 선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 선(禪)의 방법(方法)

  

1. 공안선(公案禪) :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며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하는 선(禪).

2. 묵조선(黙照禪) : 화두(話頭)없이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禪).

3. 염불선(念佛禪) : 자심(自心)을 비롯한 존재[一切存在]가 본래로 부처요,

우주의 실상(實相)이 바로 정토(淨土)임을 관념(觀念)하며 닦는 선(禪).

선의 방법은 먼저,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

즉, 공안선(公案禪)이 있고

또는 잠자코 참선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있고

또 부처님 생각을 여의지 않고 닦는 염불선(念佛禪)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으나

편의적으로 이렇게 나누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안선, 이것은 간화선(看話禪)이라, 화두를 드는 선입니다.

공안(公案)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즉, 관청에서 나오는 공문서는 하나의 법규니까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공안은 도인 즉, 성인들이

우리 중생에게 공부하게 하는 하나의 문구

즉, 상대를 떠나버린 절대적인 훌륭한 문구를 공안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이 우리에게 분별시비를 없애고

우리를 성불로 인도하는 어려운 말로는 격외(格外)라,

상식을 떠나버린 짤막한 문제를 내주면

그것을 우리가 문제시 해 가지고

우리 마음을 불심(佛心)으로 접근시킨다는 말입니다.

공안이나 화두는 같은 뜻입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 이것은 의심을 참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냥 보통으로 하는 의심은 화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면목 자리, 본래 근본자리,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 생명은 무엇인가?

또는 진여불성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우리 중생의 미정(迷情)을 헤치고서

참다운 깨달음을 증(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화두는 천 칠백 공안 모두가

본래면목을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분명히 들어야 만이 화두가 됩니다.

그걸 들지 않고 의심만 하게 되면

기가 올라와서(上氣) 참선이 어렵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중 안거를 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언제 한번은 법랍도 많은 어떤 스님이 태안사에서 삼년결사 땐데,

정진을 하면서 항시 머리를 만지며 안절부절 하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곧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일 년 반 정도를 가까스로 견디더니

나중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포기해 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외에도 참선 중에 상기(上氣)되어

주저앉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면은

마음을 훤히 열어서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고,

내 마음자리에는 무한무량의 공덕이 갖추고 있다,

자기 마음에 들어있는 무량공덕을 분명히 믿고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참선의 의심이라는 것이

그냥 보통 상대적인 의심이 아니라,

그 한없는 공덕 자리를 우리가 참구해야 됩니다.

그 자리가 참구하는 의심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래야 화두하는 것이지

덮어 놓고 의심하면,

믿음은 편하지만 사실 의심이란 것은 괴로운 작업입니다.

사람끼리도 못 믿고 의심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따라서 상대적인 의심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자화두(無字話頭)나 이뭣꼬 화두(是甚麽)나

다 진여불성자리를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한테 주신 것이고,

또는 화두를 빨리 타파하라는 것이지

죽으나 사나 죽을 때까지 들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자나 깨나

의심할 것이 없어도 의심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도 몇 년 동안 의심하느라고 혼이 낳습니다.

여러분들 참선하신 분들은 누구나 생각하시겠지요.

따라서 화두를 든다고 생각할 때는 그 시심마,

중국 음으로는 시삼마라 하고 우리 음으로는 시심마가 됩니다.

그 뜻은 “이뭣꼬”인데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한 물건 자리, 이른바 자기 불성자리를 뜻합니다.

그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묵조선(黙照禪)이라,

지금 한국에는 원불교 이외는 묵조선이 별로 없으나,

일본 선방에서는 화두를 드는 임제종보다

화두 없이 잠자코 명상식으로 마음 비추어 보는 묵조선이 대등합니다.

그리고 황벽종은 주로 염불(念佛) 화두(話頭)를 합니다.

일본은 지금 선이 세 종파가 있습니다.

묵조선은

화두 없이 자성불성(自性佛性)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입니다.

중국 동산 양개스님 같은 분도 말하길,

분명히 자성불성을 비춰 보라고 했는데

지금 일본사람들이 하는 묵조는

묵묵부답하니 무념무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침도 많이 나오고

자기가 어디까지 간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일본에서 나오는 책들을 참고로 보는데

너무나 따분하고 생기가 빠져있단 말입니다.

화두를 드는 간화선(看話禪)도

임제스님이 화두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대혜(大慧)스님 때 가서 화두가 정착됩니다.

따라서 그런 조사스님들은 어디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후대인들이 괜히 정형화 시켜가지고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

이렇게 분별시비를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그 당시 중국 것은

다 좋다고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보조국사는 위대한 스님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스님이지만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준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세계가 그야말로 하나의 진리로 나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우리 불교가 하나가 되어

다른 민족과 대화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치우치게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도 아랍세계가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보십시오.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같은 것은

결국 법집(法執)에 불과합니다.

법집이 되면 불교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그런 것들은

우리가 배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자기 식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두하는 사람은 화두가 아니면 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석가모니가 화두를 했습니까,

달마스님이 화두를 했습니까,

육조스님이 했습니까.

여기 계신 스님들이나 여러분들은 모두 엘리트들입니다.

대부분이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실 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세계 종교를 우리 품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조선도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본래 자기 면목을 비춰봐야 참된 참선이 되겠지요.

자기 면목을 떠나면 참선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진여불성을 즉, 본체를 여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아미타불을 부르나, 하느님을 부르나 상관없이

다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선(禪)이 됩니다.

염불선(念佛禪), 이것은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본래부처(本來是佛)요,

또 우주의 실상이 바로 정토 극락세계임을

관념하며 닦는 선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이 오염되면 바로 지옥이 되고 악이 됩니다.

지옥이라 할 때는 두 차원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만 따지는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우면 지옥이지

별도로 지옥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존적인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가 가상이지만 있듯이,

개나 소나 돼지들의 축생계가 가상이지만 있듯이

지옥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보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의 영적세계로 해서 고통 받는 세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도 지옥이고,

또 현재 마음도 남 미워하고

남 죽일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지옥스런 마음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삼천대천세계가 화장세계라,

사실 우리 중생이 몰라서 그렇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요, 화장세계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의 어두운 삼독심(三毒心)으로 보니까

우리가 더럽게 본단 말입니다.

그러면 극락은 어디 따로 있는 것인가?

극락이란 지역적으로 따로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만 사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천(色界天)에 있는 정거천(淨居天)이

바로 성자들이 사는 하늘이 있습니다.

원래 우주란 것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에

이 법계(法界)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무량무변한 세계에 있어서 성자는

어디에 있으나 극락을 수용합니다.

그런 성자만 사는 정거천(淨居天)이 이른바 극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락은 우리 마음의 번뇌를 떠나버리고

‘나’라는 생각을 떠나 버려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시고 내 몸 밖에 따로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자성불(自性佛)이라,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부처님은 어디 안 계시는 곳이 없다[無所不在],

이렇게 생각하면서 부처를 찾아야

진정한 염불선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선(禪)이란 개념 자체가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품을 떠나버리면

화두를 드나 무엇을 하나 그것은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젊은 분들은

몇 마디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우리 같은 한문 세대들은 사고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하니까

꼭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고집해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종단의 종헌을 보면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도의(道義)스님이나 태고(太古)스님 정도로 밖에

언급이 없단 말입니다.

원효대사가 도(道)가 더 높은지

도의스님이 더 높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다 참선<도(道)>을 통했다고 봐야지요.

우리는 지금 그러한 형식 논리에 취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결국은 자기 마음도 좁아지고

우리 종단도 자꾸 풍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하겠지요,

부처님 한 분을 우리 종주로 모시고

원효나 의상이나 도의스님 등을 우리 선배로 모시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이유로 꼭 종파를 따로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 가지고 싸운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안선, 화두를 의심하는 선이나,

또는 화두 없이 그냥 명상적으로 잠자코

부처님을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비춰보는 묵조선(黙照禪)이나,

또는 의심하는 화두(話頭) 대신에

우리가 부처임을 확신하는 염불선(念佛禪),

일체가 부처임을 확신하고 닦는 선입니다.

내 마음이나 우주만유의 본래면목이 본래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입니다.

저는 항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부처님 이름에 대해서도 우리는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대개 부처님 명호에 대해서 관점이 산만합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는 분들은 지장보살의 공덕이 더 높다,

어느 선방에서는 지장보살을 만불로 모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아마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이

다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부처님자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의 순수한 진여불성자리,

그 공덕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로운 쪽으로 봐서는 관세음보살,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쪽으로는 지장보살,

그러고 총대명사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각기 따로 있다면

불교는 다신교(多神敎)라, 별로 좋은 종교가 못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이름부터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부처님은 무량공덕(無量功德)이기 때문에

보살이나 부처님 이름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처님 공덕 가운데서

그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

하늘에 있는 별을 떠올리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이 산에 있으면 산신(山神)이고

물에 있으면 용왕(龍王)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해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원주의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고

달마에서 육조까지 다 그런 법문입니다.

공안선이나 묵조선, 염불선 등은

모두 다 최상승선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다 좋습니다.

부처님을 생명으로 수용할 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면

불안의식도 줄어들고 말입니다.

또 우리 감성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수 보살도 이행문(易行門)이라,

용수보살의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에 보면은

난행문(難行門), 이행문(易行門)이라,

자기 힘만 믿고서 나는 본래 부처니까 내 힘만 믿고 간다,

자기 힘만 믿고서 공부하는 것을

난행문이라, 어려울 난(難)자 애쓰고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공덕을 믿고 나도 원래는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가는 쉬울 이(易)자 쉬운 문입니다.

이렇게 두 문을 나누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덕을 믿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공덕을 믿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감성이란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우리가 객지에 나가서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보십시오.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는 그 향수는

얼마나 맑고 순수합니까.

그렇듯이 우리 마음의 고향이 부처님인데

부처님은 하나의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인데,

내 생명의 고향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를 간절히 흠모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법화경에서도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심회연모(心懷戀慕)라,

간절하게 갈앙하고 연모하는 그 마음이

우리 선근을 증장시키고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의 뜻이 있는 것이고,

또 아미타경에 보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그러한 한 생각이

극락왕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한 생각으로 해서 무엇이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

새도 죽을 때는 가장 아름답고 슬픈 소리로 운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도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선량해집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가 선량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을 때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 가르침 따라 부처님은 분명히 계시고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서

일심(一心)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면

그 마음으로 극락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이니까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렇게 우리 감성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을 소외시키고

내가 부처니까 내 힘으로만 성불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팍팍하고 힘이 듭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도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의 17억이나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강렬한 신앙이 나오겠지요.

너무 맹목적인 점들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이치를 알고 믿으면 참 좋은 것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마음을 담아서 하는 인사는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좋은 덕담 많이 하시고 가족들과 함께 
넉넉하고 여유로움을 즐기시면서
행복 가득한
설 연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운 우리님들~~
올 한해 건강하시고
뜻 하시는바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대 오는 길 등불 밝히고 / 이해인 詩 --
내 가슴 깊은 곳에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언제든지 내가 그립걸랑
그 등불 향해 오십시오

오늘처럼 하늘빛 따라 슬픔이 몰려오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기쁨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삶에 지쳐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빈 의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허전해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한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의 좋은 친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대 내게 오실 땐
푸르른 하늘빛으로 오십시오
고운 향내 전하는 바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대 내게 오시기 전
갈색 그리운 낙엽으로 먼저 오십시오
나 오늘도 그대 향한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