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十牛圖와 게송偈頌

2015. 3. 7. 21: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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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十牛圖와 게송偈頌

 

 -곽암의 십우도, 보명의 목우도, 목상도-

 

1. 곽암의 십우도

 

① 심우尋牛 : 소를 찾아 간다.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본성을 잃고 찾아 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의 입문이 된다.  

 

茫茫撥草去追尋 水闊山遙路更深(망망발초거추심 수활산요로갱심)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晩蟬吟(역진신피무처멱 단문풍수만선음)
힘 빠지고 정신 피로해 소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나뭇가지 매미 울음뿐


② 견적見跡 : 발자국을 찾는다.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水邊林下跡偏多 芳草離披見也麽(수변림하적편다 방초리피견야마)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縱是深山更深處 遼天鼻孔怎藏他(종시심산갱심처 요천비공즘장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③ 견우見牛 : 소를 본다. 

 


동자승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소의 앞모습을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에 가까웠음을 뜻한다.

 

黃鶴枝上一聲聲 日暖風和岸柳靑(황학지상일성성 일난풍화안유청)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 지저귀고 햇볕 따사하고 바람 서늘한데 언덕엔 푸른 버들

只此更無回避處 森森頭角畵難成(지차갱무회피처 삼삼두각화난성)
더 이상 빠져나갈 곳 다시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④ 득우得牛 : 소를 붙잡는다.

 


 동자승이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見性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竭盡精神獲得渠 心强力壯卒難除(갈진정신획득거 심강력장졸난제)
온 정신 다하여 이 놈을 잡았으나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有時재到高原上 又入煙雲深處居(유시재도고원상 우입연운심처거)
어느 땐 고원高原 위에 올랐다가도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누나.


⑤ 목우牧牛 : 소를 길들인다.

 


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鞭索時時不離身 恐伊從步入埃塵(편삭시시불리신 공이종보입애진)
채찍과 고삐 늘 떼놓지 않음은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 봐.
相將牧得純和也 羈鎖無拘自逐人(상장목득순화야 기쇄무구자축인)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절로 사람 따르리.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흰 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때이다.

騎牛이彭欲還家 羌笛聲聲送晩霞(기우이리욕환가 강적성성송만하) 
소 타고 유유히 집으로 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 저녁 놀에 실려 간다.
一拍一歌無限意 知音何必鼓脣牙(일박일가무한의 지음하필고순아)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러니 곡조 아는 이[知音]라고 말할 필요 있겠는가.
            
⑦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를 잊고 자아만 남는다.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騎牛已得到家山 牛也空兮人也閑(기우이득도가산 우야공혜인야한)
소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소 또한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紅日三竿猶作夢 鞭繩空頓草堂間(홍일삼간유작몽 편승공돈초당간)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띠 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있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 소와 자기 자신 모두를 잊는다.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 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鞭索人牛盡屬空 碧天遼闊信難通(편삭인우진속공 벽천요활신난통)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紅爐焰上爭容雪 到此方能合祖宗(홍로염상쟁용설 도차방능합조종)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返本還源已費功 爭如直下若盲聾(반본환원이비공 쟁여직하약맹롱)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을 것을. 
庵中不見庵前物 水自茫茫花自紅(암중불견암전물 수자망망화자홍)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⑩ 입전수수入廛垂手 :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다.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露胸跣足入鄽來 抹土塗灰笑滿腮(노흉선족입전래 말토도회소만시)
맨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

不用神仙眞秘訣 直敎枯木放花開(불용신선진비결 직교고목방화개)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윈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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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1 -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십우도2 - 견적(見跡: 자취를 보다)

십우도3 - 견우(見牛: 소를 보다)

십우도4 - 득우(得牛:소를 얻다)

십우도5 -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십우도6 -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 로 돌아가다)

십우도7 - 망우존인 (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십우도8 - 인우구망 (人牛俱忘: 소와 사람, 둘 다 잊다)

십우도9 -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십우도10 -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십우도1 -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십우도(十牛圖)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십우도(十牛圖)를 보기로 하자. 사찰을 찾았을 때 주존이 모셔진 법당의 외벽에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그려지는 벽화가 팔상도와 십우도이다. 십우도는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소에 비유하여 일찍부터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는 일을 소 찾는[尋牛] 일로 불러 왔다.

소의 상징은 참생명, 참 나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소를 찾는다 함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신행자를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열 단계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십우도라고 부른다. 십우도는 송(宋)의 보명(普明)의 십우도와 곽암(廓庵)의 십우도 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곽암의 십우도가 주로 그려지고 있다. 이번 호에는 십우도 가운데 발심수행자가 열의로써 공부에 임하는 것을 상징하여, 소를 찾는 동자가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묘사 되는 첫 번째의 심우와,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소의 발자국으로 상징하여 그린 두 번째의 견적을 그림과 그에 대한 곽암 선사의 게송을 함께 살펴 보겠다. 1)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아득히 펼쳐진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마음 피로해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단풍나무 매미 소리뿐. 이 말을 해설하면, “수풀 우거진 광활한 들판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길도 없는 산 속에서 헤메는 것처럼, 본심(本心)을 찾는 건 아득하다. 엄습해 오는 절망과 초조감, 들리는 건 처량하게 우는 늦가을 해질녘의 매미 소리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청정 자성(淸淨自性)을 찾는 길은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음을 역대의 많은 조사스님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사들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오히려 진정한 탐구의 시작이었음을 체험을 통한 지혜로 일러 주신다. 그래서 십우도에 그려지는 주인공은 소년(동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즉, 불필요한 많은 정보들로 가득 채워진 어른의 모습이 아닌 사춘기의 소년과 같이 정신과 신체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면서 과거로 부터의 구속감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오롯하게 탐구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동자가 쥐고 있는 고삐는 정진력을 상징하고 수풀은 우리가 욕망으로 인해서 소(本性)를 잃어버린 곳임을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다.

 

 

 

 십우도2 - 견적(見跡: 자취를 보다) 2) 견적(見跡: 자취를 보다)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이 말은, “천지가 하나의 손가락, 만물이 한 마디 말이며 보이는 것마다 소의 발자국 아닌 것이 없고, 들리는 것마다 소의 울음 아닌 것이 없으며, 소를 가린 무성한 수풀조차도 실은 소의 자취이고, 소가 아무리 심산유곡에 있다 해도 하늘까지 닿는 그 기세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의 심우에서는 마음의 욕망이 곧 우거진 숲이라 했는데, 견적에서는 풀밭에서도 소 발자국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사실 소는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소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래서 선사들은“찾는 자가 찾는 그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십우도 두 번째 그림인 견적에서는 소를 찾는 동자가 고삐를 잡고 숲길 사이로 보이는 소의 발자국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이 의미를 전해 준다.

 

 



십우도3 - 견우(見牛: 소를 보다) 십우도 (十牛圖)가 중생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소에 비유하여 마음을 닦고 찾아가는 과정임을 지난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실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쏟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만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이 자신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질적인 자신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잘 먹고 산다고 생각한들 또는 못 먹고 산다고 생각한들 이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몸은 진짜 음식을 필요로 하지 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짜 물이 필요한데 물에 대한 그림이나 화학방정식은 갈증을 풀어줄 수 없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이 이르기를, “그대가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소[淸淨自性]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 지난 호의 ‘심우’와 ‘견적’에 이어 이번에는 ‘견우’ ‘득우’를 곽암 선사의 게송과 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과 함께 그림을 보도록 하자 3)견우(見牛: 소를 보다) 견우(見牛). 밀양 표충사 벽화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가 언덕엔 푸른 버들 이곳을 마다하고 어디로 갈거나 늠름한 쇠뿔(頭甬)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지저귀는 노란 꾀꼬리, 봄바람에 살랑 거리는 푸른 버들, 물을 벗삼는 아리따운 물새, 모두 법문을 설하고 있지 않는가? 산은 흰 구름을 두르고 물은 달을 담았으니 하나하나가 소의 오묘한 자태라서 붓으로 표현할 수가 없구나. 견우, 찾아 나섰던 소를 보았다. 즉 진심(眞心)을 보았다. 실상은 내가 소를 보았다기보다도 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가 곧 자신이라 한다면 찾는 자가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벽화로 표현된 ‘견우’는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우측 근경에 비스듬이 자리잡은 바위의 표현 너머에 홍의(紅衣)의 동자가 우측 숲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소를 보고 있으며, 그 숲 뒤로 폭포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십우도는 이렇게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벽화를 보면 어떤 것은 소머리 부분이 그려진 경우가 있고 어떤 것은 소꼬리 부분이 그려진 경우가 있다. 전자는 게송의 ‘두각(頭角)’이라는 표현에 의거하여 그린 것이고, 후자는 ‘그리기가 어려워라’라는 게송의 내용에 따라 소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려진 부분이 이렇게 다르긴 해도 그 뜻에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십우도4 - 득우(得牛:소를 얻다) 득우(得牛). 밀양 표충사 벽화  4) 득우(得牛:소를 얻다) 온 정신 다하여 그 소를 붙잡았지만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高原)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만다네 마침내 자기와 세계를 잊어 일체가 모조리 없어졌을 때 홀연히 나타난 소 그러나 예부터 젖어온 기질을 모조리 없애기는 어렵구나. 어떤 때는 자기도 없고 부처도 없고 세계도 없는 명백한 곳에 이르고, 어떤 때는 다시 대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들어가는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는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는 나의 외부 어디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핵심이었다.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소를 찾는 길이었다. 벽화로 표현되는‘득우’는 그 배경이 다양하게 그려지지만 동자가 소를 묶어 붙드는 모습에 있어서 표현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도판 역시 우측 하단부에 언덕을 그려 화면을 안정시키고 동자가 소를 밧줄로 묶어 붙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배경으로는 폭포와 함께 산수의 표현이 저 멀리까지 아스라이 그려져 있다. 이런 표현이 소가 발견된 환희로 가득 차 출렁이고 있음을, 어디에도 참 존재[眞我, atman] 는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십우도5 -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목우. 설악산 신흥사 벽화 5)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목우는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예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본 호의 그림과 같이 유유히 소를 먹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벽화는 옥색 초록빛인 뇌록(磊綠)의 바탕 위에 먹선(墨線)으로 그린 다음 채색을 하는 순서로 그려진다. 도판을 보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뻗어 나간 나무 아래에 소를 먹이는 목우자(牧牛子: 소를 먹이는 이, 고려 시대의 지눌 스님은 스스로 목우자라 하였다)가 다소 고개를 숙인 수용적 자세로 앉아 있고 그 앞에 소는 풀을 뜯고 있다. 다섯 번째인 목우도는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함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채찍과 고삐 잠시도 떼어놓지 않음은 제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 들어갈까 두려운 것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저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앎’은 쉬워도 그렇게 ‘됨’은 지극히 어렵구나, 끊임없이 닦고 익히면 마침내 마음과 대상이 일치하여 잡된 것이 하나도 없는 순수함에 도달하나니, 오묘한 경지가 절로 나타나 꽃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함께 꽃이고, 버들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모두 버들이니, 이제는 영원히 나눠질 것 없네. 채찍은 각성(覺醒)의 상징이다. 그리고 고삐는 내면의 수양을 뜻한다. 각성과 수양은 정진하는 이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각성이 없는 수양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수양만으로는 기계적이고 습관적이 될 뿐이다. 그래서 먼저 각성이라는 채찍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 수양이라는 고삐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훈련이 필요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하나의 수단이다. 마지막에는 여기에서도 빠져나와 그 각성이 자연스러우며 수행 속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墨動靜) 안에서 그저 계속 일어나는 현상이 될 때 그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 때에는 고삐를 풀어 줘도 주인을 잘 따를 것이다.

 

 

 

십우도6 -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 로 돌아가다) 기우귀가. 설악산 신흥사 벽화 6)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 로 돌아가다) 기우귀가는 길들여진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다. 역시 뇌록의 바탕 위에 동일한 기법으로 그려졌다. 좌측 상단에서 역삼각형으로 흘러내린 깎아지른 절벽을 근경으로, 그리고 숲길 사이로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집(本性)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너머 숲과 바위 언덕의 중경과 멀리 우뚝하게 원경이 펼쳐지면서 화면의 구도를 안정시키고 있다. 소를 타고 가는 사람의 붉은 색 옷은 녹청색조의 바탕 화면 위에서 강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즉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니 오랑캐 피리 소리 마디마디 저녁 노을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가락이 한량없는 뜻이러니 곡조를 아는 이여,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등 위에 사람 없는 소, 무릎 아래 소 없는 사람. 이제 유유히 참 근원으로 돌아가니, 소박한 가락이 노을과 나란히 가고 물과 하늘이 한 빛깔이다. 피리 한 곡조와 노래 한 가락이 만물의 근원이니, 이는 줄 없는 거문고의 비밀스런 곡조일세. 갈등이나 투쟁이 끝날 무렵 모든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모두 하나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제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방황하면서 헤맨 것도 성장의 일부였다. 기우귀가는 이렇게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본가(本家, 곧 본래의 성품)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십우도7 - 망우존인 (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일반 적으로 사찰의 본당(本堂) 외벽에는 주로 팔상도(八相圖)와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진다. 이는 팔상도가 가지는 교화적 가르침과 심우도가 일깨우는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성찰은 대승불교의 수행을 일컫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下化衆生)’는 가르침의 조형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난 호에 이어 계속 심우도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벽화의 내용을 게송과 함께 살펴보자. 망우존인. 밀양표충사 벽화 7)망우존인 (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이르렀으니/소 또한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초당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잃고 얻을 바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오니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버리고 밝은 달이 맑은 물을 버리듯, 소는 더이상 필요 없고 사람 또한 할 일 없네. 아침이 되어 해가 솟아도 여전히 꿈속이다. 망우존인은 집에 돌아 왔지만 소는 간 데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을 그렸다. 고향집은 나 자신이 비롯된 근원을 말한다. 고향집에 이르렀음은 현상적인 삶과 나 자신의 근원 (本覺無爲)이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 이제 채찍(각성)과 고삐(수양)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자성(自性)을 찾기 위한 여행을 처음 떠날 때는 필요했으나 이제 그것마저도 초월된다. 망우존인을 달리 도가망우(到家忘牛)라고도 한다. 도가(到家)란 집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자기 마음 속에 진심(眞心)이 있는 것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른다. 그래서 법무이법(法無二法)이라 하였다. 일곱 번째 망우존인에 이르러 사람과 소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우도8 - 인우구망 (人牛俱忘: 소와 사람, 둘 다 잊다) 인우구망. 설악산 신흥사 벽화 8.인우구망 (人牛俱忘: 소와 사람, 둘 다 잊다)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붉은 화로의 불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본심(本心)의 바다 위에 한 점 티끌도 없고, 한 조각의 물결도 없네. 수행도 깨달음도 자기도 세계도 없으니, 어찌 붓을 들겠는가? 천만 가지 분별이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이라 한 티끌의 그림자도 남기지 않네. 여덟 번째인 인우구망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소도 소를 찾는 이도 없다. 채찍, 고삐, 소, 사람 이 모두가 사라져 버리고 텅비었을 뿐이다. 그래서 인우구망의 경지를 나타내는 그림은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일원상(一圓相)이다. 즉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에 이르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내 밖에 찾아야 할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바로 내가 여태껏 찾아 헤매왔던 그것이었다. 찾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삶 그것이 목적이었다. 일원성이 나의 본성(本性)이며 모든 것과 하나였다. 이것의 이름이 공(空)이었으며 한계가 없는 우리의 근원이었다. 십우도가 말해 주는 모든 것은 불성, 또는 참나를 찾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실존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 모은 정보나 이미 주어진, 공식화되고 화석화된 해답이 아니라 또는 경전에서 빌어 온 것조차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른 해답만이 깨달음의 상태로 이끌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석두(石頭 ; 700 ~ 790) 스님에게 제자인 도오(道吾) 스님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그것을 스스로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곧 이를 말한다. 어떤 주어진 해답이 아닌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실존적인 경험이 자기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길임을 십우도는 시각화된 언어인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십우도9 -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석존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늙음·병듦·죽음을 보셨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누구 나가 다 그러하다면 삶 전체가 속절없음을,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 음을 깨닫고는 유성출가(踰城出家)를, 즉 소를 찾아 떠난 것이다. 소를 찾는 것은 죽음이 없 는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할 때 참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꿈 과 삶 사이에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을 깨치고 체득하는 과정을 우리는 그 동안 심우도를 보면서 함 께 해왔다. 이번 호에는 심우도의 마지막으로 반본환원과 입전수수 벽화를 게송과 함께 해 설을 통해 그 의미를 마음에 계합시켜 보도록 하자. 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설악산 신흥사 벽화 9.반본환원(返本還源:근원으로 돌아가다) 근원으로 돌아오고자 무척이나 공을 들였구나/그러나 어찌 그냥 귀머거리 장님됨만 같으리/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의 사물 보지 않나니/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진정 근원으로 돌아와 보니,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소 찾아 나선 이래 한 생각 한 생각 이 오히려 소의 모습 아니었던가? 보지 않으면 아팎을 함께 보지 않고, 보면 전체를 보나니, 기이할 것 아무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네. 반본환원은 있는 그대로의 수록산청(水綠山靑) 산수 정경을 그렸다. 즉 본심은 본래 청정하 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 음을 비유한 것이다. 반본환원 벽화는 이렇게 순수한 공(空)일 때 있는 것은 무엇이나 진실 이 된다는 가르침을 구현시키고 있다. 나무와 꽃들, 흐르는 물과 산들은 이미 자신의 참된 집에서 살고 있다. 나무는 산을 흉내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붉은 꽃을 질투하지 않는다. 인간이 참된 본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뿌리깊 은 욕망이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반본환원 벽화는 있는 그대로의 산수를 그려서 그 내용과 형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십우도10 -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밀양 표충사 관음전 벽화 10.입전수수(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신 선의 비법 따윈 쓰진 않아도/그냥 저절로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저잣거리에 들어가 온몸을 드러내 세속의 중생과 함께 하니, 이는 바로 성인의 풍모이네 고 목에 꽃을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앉아 눕고 나아가는 하나하나가 참이네. 입전수수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루를 들고 자비의 손을 내밀며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로 돌아 옴으로써 완결된다. 사람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만이 완전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 발했다. 여행을 마친 후 성취하게 된다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입전수수에서 는 다시 마을로, 중생들 속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세상은 출발하는 곳임과 동시 에 끝맺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는 심우도를 보면서 내면으로의 여행, 자기 완성으로 가는 노정을 확인해 보았다. 심우도의 각 단계가 비단 초월적인 궁극적 경계에만 굳이 국한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완성해가는 단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따라서 위로 는 깨달음이라는 것에서부터 아래로는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력을 현실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즉 주변에서 그 중심에 이르는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인욕과 정진력을 통해 성취했을 때 사찰 전각의 벽에만 갇혀 있던 소가 싱싱하게 살아 뛰어 활구(活句)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