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8. 20:5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저잣거리의 불교성지 법현스님의 열린선원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갖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지금 감기에 걸려 드러누웠어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지금 다리가 다쳐 괴롭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는 것 역시 누구나 알 고 있다.
좀 더 복잡한 문제에 부딪칠 수도 있다. 가정 내에서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그리고 직장내에서 상사와 부하와의 갈등 같은 것들이다. 이런 갈등은 상처가 나면 자연 치유되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과의 갈등은 감정이 개입 되어 있으므로 쉽게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다. 그대로 방치 해 두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 된다. 대화가 단절 됨에 따라 오해하게 되고, 오해가 불신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가 하면 나중에 결별로 끝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 인간과의 갈등만 심각한 문제일까? 좀더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일 수도 있고 살고 죽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왜 사느냐?’는 문제로 연결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기뻐한다. 반대로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남이 죽으면 무덤덤하지만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몹쓸 병에 걸려서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역시 슬픈 마음이 일어난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괴로워하다.
슬퍼하는 것과 괴로워 하는 것은 거의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S12.2)”라 하였다. 여기서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라는 말은 괴로움에 대한 표현이므로 슬픔과 괴로움은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종교는 삶의 마지막 버팀목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제서야 종교를 찾게 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문제에 대하여 절대자에게 의지한다거나 부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절대자나 부처님에게 떠 넘기는 것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 한다. 그래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구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종교에 의지한다는 것은 나약한 인간에게 커다란 의지처이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의지하듯이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린다. 엄마 품안이 가장 안전하듯이 종교의 품안에 안겼을 때 평온을 느낀다. 특히 가진 것 없고 소외되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마지막 버팀목이 된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십자가 뿐 인데
사람 사는 곳에 종교시절은 널려 있다. 특히 눈에 밟히는 것이 교회이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밤에 빌딩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이곳 저곳에 ‘빨간십자가’ ‘하얀십자가’ 등 온통 십자가 천지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서 어느 외국인은 한국에 오면 올수록 십자가는 늘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거대한 공동묘지를 보는 듯 하다고 하였다.
십자가는 넘쳐 나지만 절을 표시 하는 상징물은 보이지 않는다. 교회처럼 첨탑을 세워 네온싸인으로 불을 밝히는 형식이 아니어서일까 도시에서 절을 보기 힘들다. 아니 도시에 절이 없는 것이다.
불자들은 불교에 의지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의지처로 하고 귀의처로 하고 피난처로 한다. 그러나 주변에 갈만한 절이 없다. 절에 가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코자 하지만 주변에 절이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다.
먼 산길을 힘겹게 올라 가지 않는 한 주변에서 절 구경하기 힘들다. 이런 때 사람 사는 곳에 그것도 저잣거리에 절이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매우 신기하다고 여길 것이다. 왜 그런가?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기 때문이다.
저잣거리에 절이 있었네
저자거리에도 절이 있다. 그것도 서민들이 찾는 낡고 허름한 시장통에 절이 있는 것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유별나고 특별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절이 있다. 역촌시장 안에 있는 ‘열린선원’이 바로 그곳이다.
열린선원을 찾아가 보았다. 오래 전부터 저잣거리에 있는 절이라 하여 교계언론에서 여러 차례 소개 된 바 있다.
일요일 오전 준비한 음악씨디를 들고 전철로 이동하였다. 여러 차례 갈아 타기를 거듭한 끝에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 내렸다. 선원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은평구 갈현동이지만 역촌시장안에 있다. 그래서 선원이 갈현동에 있는지 역촌동에 있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이다. 손바닥 안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지도 검색을 하면 쉽게 찾아 갈 수 있다.
저잣거리라는 말은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길거리를 말한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혼잡한 분위기가 연상된다. 장사치들이 “골라 골라”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것도 연상된다.
저잣거리는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연상된다. 그래서일까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무리라 하여 ‘시정배’라는 말이 생겨 났을 것이다. 또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부량배라는 뜻의 ‘시정잡배’라는 말도 저잣거리에서 연유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저잣거리에 열린선원이 있다.
시장 입구 아치에
열린선원은 역촌시장 안에 있다. 재래시장으로서 깨끗한 이미지는 아니다. 낡고비좁고 번잡하다. 그런데 시장 입구 아치에 열린선원의 플레카드가 붙어 있다. 그리고 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는 건물에 열린선원이라는 간판도 보인다.
플레카드에는 열린선원 법현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제21기 명성(참선) 문화아카데미 수강생 모집’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데 왼편에 빨간가사를 수한 스님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왜 그런가?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놓고 사진을 붙이고 수강생을 모집해도 되는 것일까? 아직까지 도시에서 이런 플레카드는 한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대체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난 것일까? 입구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 하였다.
교회와 절이 공존하는 건물
건물가까이 다가갔다. 한동 전체가 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물이다. 거리 전체가 시장통이기 때문에 역촌시장이라 하지만 이 건물 한동에 대하여 ‘역촌중앙시장’이라 한다.
그런데 건물에는 열린선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교회’도 있었다. 그것도 시뻘건 십자가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교회외 절이 공존하는 건물이다.
건물 입구로 가 보았다. 외관은 4층 짜리 건물이다. 갖가지 간판이 어지럽게 난립해 있다. 태권도장, 의류점 등의 간판과 함께 열린선원과 교회간판도 보인다.
실내체육관 처럼
내부로들어 가 보았다. 시장건물은 ‘입 구(口)’자 형태로 되어 있다. 건물 사방에 가게가 있고 중앙은 너른 홀이다. 너른 홀 위에는 천정을 만들어 놓았다. 비나 햇볕을 가리기 위한 간이 천장이라 볼 수 있다. 아마 처음 건물을 지었을 천정이 없었을 것이다. 너른 홀과 천정을 보나 실내체육관 처럼 보인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홀안에는 갖가지 상품들이 쌓여 있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이다. 2층에는 빙둘러 가며 사무실이 있다. 그 중에 한면 전체가 열린선원이다. 판대기를 붙여서 만들어 가리개를 하였는데 한쪽 벽면에는 플레카드가 붙어 있다. 흔히 산중이나 유명기도처에서 볼 수 있는 입시나 소원성취와 관련된 문구가 아니다.
문구를 보니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수행하고 기도하며 실천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십시오!”라 되어 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물론 장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눈에 보일 수 있도록 커다란 글씨로 되어 있다. 한번도 불교를 접해 본 바 없고 불교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약간은 신선한 충격을 주는 문구라 볼 수 있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통 사람들에게 ‘주인공이 되라’든가 ‘실천하여 행복한 삶을 누려라’와 같은 말은 참으로 근사한 말이라 보여진다.
또 한 개의 플레카드를 보면 정기법회를 안내하는 내용이다. 스님에 따르면 가족법회는 둘째 일요일, 동문법회는 셋째일요일에 하고, 또 불교명상아카데미라 하여 매주 수요일 저녁에 법회가 있다. 매주 법회가 열린다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열린선원은 시장건물 이층에 있다. 이층에 진입하자 마자 교회가 보인다. 밖에서 보았던 시뻘건 십자가를 세웠던 교회이다. 일요일이어서 인지 찬송가 소리가 들려 나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건물 자체가 낡고 오래 되어서 일까 교회 역시 가난하게 보인다. 아마 돈이 없어서 이 곳에 세들어 사는 개척교회로 보인다.
복도로 들어 서자
교회를 지나 홀 안쪽 복도로 들어 가면 불교의 세계를 보는 듯 하다. 베란다처럼 보이는 복도에는 이층에 올라 가자 마자 온통 열린선원과 불교관련 문구로 가득하다. 벽에는 ‘십우도’가 그려져 있고 한켠에는 열린선원을 알리는 홍보책자와 불교관련 잡지 등이 진열되어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가져 가도 좋다는 식으로 보인다.
한국불교 태고종 열린선원
열린선원은 시장통에 있다. 저잣거리에 있는 대표적 사찰이다. 그런 사찰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층 열린선원 입구 복도에는 ‘한국불교 태고종 열린선원’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일종의 간이 일주문이라 볼 수 있다.
시장건물 2층 한면 전체가 열린선원이다. 법당이 있고 주방이 있고 스님의 서재와 침실이 있는 곳이다. 법당으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베란다식 복도로 가야 한다. 복도에는 신발장이 있고 각종 박스로 가득하다.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얼굴을
스님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얼굴을 내미는 형식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연락이 없이 준비한 ‘음악씨디’만 가진 채 불쑥 방문한 것이다.
일요일임에도 선원은 고요하다. 아마 이번 주 일요일 법회는 없는 듯 하다. 일정표를 보니 넷째 주 일요일 행사는 보이지 않는다.
스님은 서재겸 응접실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을 내밀자 깜짝 놀라며 맞이 해 준다. 사전에 연락 없이 방문한 것에 대하여 양해를 구하고 합석하였다. 손님은 양초사업자이다. 새롭게 양초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전국의 사찰에 양초를 납품하고 하는데 문의차 들른 것이라 한다.
스님이 따라 주는 차를 마시며
세 명이 합석하여 차를 마셨다. 스님이 차를 만들어 따라 주면 마시는 형식이다. 절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고, 차도구를 갖춘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또 접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다. 그러나 차를 마시면서 대화한다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차나 한잔 하게”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차를 마실 때 한잔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찻잔이 비면 따라 주는 식으로 하여끊임 없이 마신다. 나중에는 배가 빵빵해서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스님이 따라 주는 차를 연거푸 마셨다. 쉼 없이 따라 주는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니 부드럽다. 카페인이 듬뿍 든 일회용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차를 주는 사람과 받아 마시는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대화가 부드럽고 분위기도 차분하다. 불가에서 커피 보다 차(茶)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스님과의 인연
스님과의 인연은 오래 되지 않았다. 불과 몇 달에 불과하다. 불교NGO 카톡방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오프라인 모임을 몇 차례 갖게 된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동안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어도 서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넷상에서 글로서 종종 소통하였기 때문에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특별한 인연까지 있었다. 이런 저런 인연이 얽히고 설켜서 한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방문 하루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전에 불교음악 씨디를 전달한 바 있는데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화로 요청할 정도이면 급한 것 같아 택배로 보내는 것 보다 일요일일 맞이 하여 한번 가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락도 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 간 것이다.
불상과의 인연
스님은 선원을 안내 하였다. 법당으로 이동하여 법당의 불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현재 열린선원의 불상은 폐기처분 일보직전에 구입한 것이라 하였다. 동으로 만든 불상으로서 폐기 되면 녹여서 다시 동의 재료가 될 뻔 하였는데 이런 사정을 알게 되어 구입한 것이라 한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 뻔한 불상에 ‘개금’을 하여 모신 것이 현재의 불상이라 설명한다.
푹신푹신한 법당
법당은 매우 넓직하다. 바닥은 푹신푹신 하다. 차가운 마루바닥도 아니고 딱딱한 장판바닥도 아니다. 걸으면 푹신푹신하여 발바닥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 맨바닥에 앉아 앉아서 좌선하거나 경행하기에 딱 알맞은 재질이다.
법당의 한켠에 법고가 보인다. 그리고 또 한켠에는 탱화가 보인다. 법당을 가로 지르는 천정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중심으로 하여 안쪽에는 법당의 영역이고 바깥 쪽에는 신행공간이라 볼 수 있다.
콘크리트 천정에 꿈틀 거리는 용(龍)
법당영역을 보면 불상 윗면에 탱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는데 마치 전통사찰의 단청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콘크리트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 산중의 법당처럼 화려하지않지만 콘크리트 천정에 그려진 용을 보면 생동감 넘친다. 선원에 다니는 사람 중에 불화를 전문으로 하는 하는 불자의 작품이라 한다.
약사여래불과의 인연
스님은 열린선원 이곳 저곳을 소개한다. 그 중에 ‘약사여래불’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당시 어느 불자가 모시던 것을 인연이 되어 이곳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몽골에서 받은 작은 불상
법당 왼편에는 몽골에서 받은 작은 불상이 있다. 몽골에서 높이가 50미터에 달하는 ‘미륵대불’이 조성되었는데 언젠가 몽골에 갔었을 때 보시한 인연으로 받은 작은 불상이라 한다.
불상은 예경의 대상이다
열린선원 법당은 다른 사찰의 법당과는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셨는데 우리나라 법당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과 같은 민속신앙과 관련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인 법당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아마 부처님 한 분만 모셔 놓은 법당일 것이다. 이런 형태는 남방불교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을 받아들이는 선원 등에서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만 볼 수 있다.
더 이상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 ‘무불상’일 것이다. 불상이 없어도 신행생활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사적으로 오백년간 ‘무불상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해준다.
무불상시대에 부처님을 기리는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수라든가 족적 등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시작과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출현하였다. 이후 불상은 불교의 상징처럼 되었고 불상에 예경을 올리게 되었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불상을 보면 신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하다. 32상 80종호로 대표되는 형상을 보면서 신심을 다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불자들의 신행행태이다.
가르침을 알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불상을 대한다면 어떨까?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연기법을 이해하고 불상을 대했을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면전에 부처님이 살아 계신듯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상은 예경의 대상이다.
작은 도서관에 온 듯
열린선원 법당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천정을 가로지르는 대들보 콘크리트를 기준으로 하여 법당구역과 신행구역이다. 신행구역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책이다. 벽 한쪽 면이 책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주로 불교와 관련된 책들이다. 이렇게 책이 많은 것이 열린선원의 특징이다. 주방과 마주 하고 있는 벽면에도 역시 책으로 가득하다. 주로 경전과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남전대장경’이 시리즈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또 하나는 각종 사전류이다. 불교사전을 비롯하여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사전은 다 모아 놓은 듯 하다. 마치 작은 도서관에 온 듯하다.
밥상도 되고 공부상도 되고
언젠가 스님이 카톡방에 올려 놓은 사진을 보았다. 신도들이 식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식당 같지 않아 보였다. 상이 죽 펼쳐져 있고 양 옆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바로 옆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한 것이다.
열린선원에서는 따로 식당이 없다고 하였다. 주방이 있기는 하지만 비좁기 때문에 수십명이 점심공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법당에서 밥을 먹는 다고 하였다.
신도들이 밥을 먹을 때 별도로 밥상이 없다고 하였다. 평소 공부하던 책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용도에 따라 공부하는 책상도 되고 밥먹는 상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당은 예불 드리는 공간이기도 하고 공부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밥먹는 공간이다. 법당이 다용도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주방에서 네 명이서 공양을
법당소개가 끝나고 공양시간이 되었다. 작은 주방에서 네 명이서 함께 먹었다. 스님과 사미승과 양초사업을 하는 손님 한분이다. 작은 밥상에는 고기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김과 김치와 장아찌와 콩나물국 등이다.
예고 없이 불시에 방문하여 점심공양을 대접받았다. 사미승이 준비한 밥상이다. 매우 소박한 밥상이지만 매우 맛있었다. 그래서 한그릇을 비우고 나서 더 퍼 먹었다. 절에서 먹는 밥은 반찬이 많고 적고를 떠나 맛이 있다.
고기가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밥상을 보면 매일 잔칫날이고 매일 파티날이다. 하지만 절에서 먹는 밥상은 청정하다. 탐욕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청정한 밥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먹었다.
스님의 서재를 보니
밥상을 물리고 다시 스님의 서재로 돌아 왔다. 양초사업하는 사람은 돌아 가고 스님과 둘이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스님의 서재를 보니 책으로 가득하다. 한쪽 벽면에 책으로 가득하다. 책상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어서 글을 쓰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스님의 침실
서재 안쪽에는 스님의 침실이다. 침실도 공개해 주었다. 침실을 들어가 보니 마치 골방처럼 작은 공간이다. 흔히 집에서 볼 수 있는 장롱이나 옷장 등 세간살이는 보이지 않는다. 작은 요가 하나 깔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래 전 것으로 보이는 구형 TV가 한대 놓여 있다.
침실에도 역시 책으로 가득하다. 한쪽 벽면이 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니까야가 이곳에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간된 번역서가 대부분 갖추어져 있다. 니까야 중에서 초불연 ‘맛지마니까’ 제2권을 선물로 받았다.
윤회금지 표지판
열린선원 이곳 저곳 다 둘러 보았다. 그런데 한군데 더 볼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매우 독특한 표지판이다. 마치 교통표지판 ‘유턴금지’를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윤회금지’라 쓰여 있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수승한 것이 열반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열반 하나를 설명하기 위하여 설해져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 태어남이 없어야 한다.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윤회금지 표지판이 신선한 충격을 준다.
2005년 문을 연 열린선원
다시 서재에 앉았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대면하여 알게 된지는 몇 달 되지 않지만 넷상에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의 공통적인 주제도 자연스럽게 가르침과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스님이 열린선원을 연 것은 2005년도라 한다. 올해로서 만 10년 된다. 그런데 아직까지 저잣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임대료 내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임대료 정도는 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절의 살림은 어렵다고 한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한국불교
한국불교는 전국구라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불교가 산중에 있기 때문에 전국에서 불자들이 찾아 간다. 순례라는 명목으로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전국에 걸쳐 있는 전통사찰을 찾아 간다. 그러다 보니 지역적 기반이 없다.이는 다른 말로 뿌리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전국구 국회의원은 있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이 없다는 말과 같다.
한국불교는 지역에 뿌리가 없다. 그러나 개신교나 천주교는 철저하게 지역을 뿌리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과 매우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타종교에서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선교도 하지만 봉사도 열심히 한다. 그래서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뿌리가 매우 단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한국불교는 뿌리가 없는 보리수와 같다. 그것도 종단이 수뇌부는 썩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의 현실은 한마디로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다. 그래서 언제 넘어 질지 모른다. 태풍이라도 한번 불면 뿌리 채 뽑혀 나갈지 모른다.
스님들은 공부가 다 되었으면 세상으로
지역적 기반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아직도 산에서 내려 올 줄을 모른다. 심산유곡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라 하지만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마치 신선처럼 살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스님들은 공부가 다 되었으면 세상으로 내려 와야 한다.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지역에 탄탄한 ‘불자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혜문스님’은 언젠가 불교방송에서 피를 토하듯이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라 하였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 산사의 수행처를 비우고 내려 오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지껏 배우고, 수행하고, 익히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 내려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저잣거리에 스스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산속으로 숨어 들어서는 안됩니다. 산속으로 출가한 스님의 세월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산속에서도 세상을 맑히고 교화하는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저잣가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기적으로 산으로 불러 모아서 불법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열악합니다.
산으로 오는 도중에 모든 외도들에게 모두 감화를 받고 귀의를 당해 버리고 맙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외도들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해 들으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허황한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터 인데, 우리 불교계의 스님들은 산속에서 개인의 도만 닦고 계시는지, 왜 밖을 내다 보시는 것이 지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스님들이 빨리 밖으로 나오셔서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면서 교류해야 합니다. 스님들은 마냥 신비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손만 벌리면 곧 옷소매가 잡히고 부르면 목소리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왜 스님들은 숨어서 살려고만 하십니까. 아직 공부가 덜 익었습니까. 출가 하신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요.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년 9월3일자)
피를 토하는 듯한 스님의 외침이다. 산중에 있는 스님들은 공부가 다 되었으면 속히 저잣거리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에 목마른 사람들과 함께 하자는 것이다.
저잣거리에 내려오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공동체의 복원이다. 불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공동체를 말한다. 이런 지역공동체가 행정구역상 한동에 하나만 있어도 한국의 불교는 몰라 보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스님들은 산중에서 내려 올 줄을 모른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저잣거리에 있는 선원은 허름하고 낡아 빠진 오래 된 건물에 있다. 선원 내에 화장실이 없어서 저 멀리 일층까지 내려 가야 한다. 그것도 건물의 문이 닫히면 일층화장실은 사용할 수 없어서 옥상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다고 한다.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작은 화장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여자용, 또 하나는 남자용이다. 교회다니는 사람들도 함께 사용한다고 한다.
옥상에서 사방을 보니 그래도 툭 터진 공간이다. 스님에 따르면 밤중에 옥상으로 화장실 보러 갈 때에 별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그곳에 불교가 있었네
열린선원은 시장통 낡은 건물에 십 년 째 입주해 있다. 아직까지 저잣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들이 화장실 한번 가려면 일층에 내려가 공용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샤워시설도 없어서 주기적으로 공중목욕탕을 활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불교가 있었다. 나오는 길에 아치부분을 사진을 찍으니 시장보러 나온 사람이 “저기 열린선원에서 참선도 하고 아카데미도 있데”라는 말을 들었다.
열린선원은 열악한 환경속에 있다. 주변에는 대형교회도 있고 눈에 보이는 곳마다 십자가가 보인다. 더구나 같은 건물 안에도 작은 교회가 있다. 이렇게 기독교가 득세하는 현실에서 초파일이 되면 시장통에 연등을 달고, 당일날에는 신도와 함께 매년 제등행렬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교아카데미를 개설하여 매주 수요일 모임을 갖는다.
이날도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광고판 보고 전화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수요일 아카데미가 있으니 그때 나오라고 알려 준다. 이렇게 십 년간 아카데미를 운영하였는데 이번 봄학기가 21회 째이다.
한국불교의 심장에 화살을 쏘았다
일요일 열린선원을 느닷없이 방문하였다. 방문하여 점심공양도 하고 차도 배가 빵빵할 때 까지 마셨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곳 열린선원이 다름 아닌 ‘성지’와 같다고 느껴졌다.
불자들은 성지순례를 떠난다. 해외이든 국내이든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곳이 성지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산중의 전통사찰로 떠난다. 마치 대궐 같은 전통사찰에서 스님들의 법문도 듣고 공양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전국구일 뿐이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불교는 뿌리가 없는 보리수와 같다. 이런 때 시장통에서 그것도 기독교가 득세하는 지역에서 ‘여법한’ 불교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지역불자공동체를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잣거리의 열린선원, 그것도 조계종인 아닌 태고종 스님이 운영하는 사찰이다.화장실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역불교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면 눈물겹다. 바로 이런 곳이 가 보아야 할 불교성지 아닐까? 멀리 산중으로 순례 가는 것도 좋지만 저잣거리 불교를 보는 것도 일종의 성지순례가 아닐까? 입장료 수입에나 의존하고 정부보조금으로 살아 가는 듯한 한국불교의 심장에 열린선원이 화살을 쏘았다.
◆ 다산 부인 치마에 얽힌 애절한 사랑 이야기
다산 정약용은 15세때(1776년) 2월22일(음력) 복사꽃이 만발하였을 때
풍산홍씨 홍화보라는 분의 딸, 자기보다 한살 많은 홍씨와 결혼하였다.
아들 여섯 딸 셋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아서
여섯 명을 잃고 아들 둘 딸 하나 만을 키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1836년 봄 결혼 당시처럼
복사꽃 망울이 피어나려던 음력 2월 22일 회혼일에
그는 75세로 고단한 육신을 내려놓고 이승을 떠났다고 한다.
그 동안 어린자식 4남 2녀를
땅에 묻어야 하였던 비운의 아버지였고
1801년 2월 27일 큰 아들 학연의 나이 18살
둘째 아들 학유는 15살 딸은 8살 때 집을 떠나
경상도 장기현으로 잠시 유배되었으나 곧 돌아왔다.
가난한 선비였던 다산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순조원년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유되어
큰형은 사약을 받고 둘째 형도 귀양을 가고
자기도 귀양살이가 다시 시작된다.
폐족이 되어 집안사정이 말이 아니였다.
열여섯 살에 다산과 결혼한 부인홍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폐족의 집을 꾸리며 살았다.
아끼던 소중한 책을 팔아 쓰기도 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철 투호를 팔아서 아이들과 살았고
4개월이 넘도록 옷 한 벌로 보낸 남편의 귀양살이
바라지도 하지 못했는 그 마음이 어떠했으랴.
너무나 가난하여 큰아들이 귀양 생활하시는 아버지를
5년이 지난 후에 마늘농사가 잘되어서
그것을 팔아서 아버지를 찾아간다.
다산은 아들을 본 기쁨도 잠시 아들을 먹고 재울 곳이 없어서
강진읍 우이산 보은산방 스님에게 숙식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둘째는 8년이지난 후에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을 보고
아래와 같이 자기마음을 나타낸 글이 있다.
‘모습은 내 아들이 분명한데
수염이나서 다른 사람 같구나
집 소식 비록 가지고 왔으나
오히려 믿지 못하겠네.’
하며 곁에서 돌봐 주지 못한 못난 아비의 심정을 읊었다.
그러나 그는 수시로 아들과 딸에게 폐족이 된 집이기에
남들보다 더욱 더 노력하여야 한다고
자식 교육 때문에 편지를써서 보낸다.
18년의 귀양 생활을 마치고 귀가하여
죽기 3일전에 다음과 같은 회혼시를 지었다.
‘육십년 세월
잠간 사이 흘러가
복숭아나무 봄빛 신혼 때와 같구나
생이별이나 사별은
모두 늙음을 재촉케 하니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네
이밤
목란사 소리 더욱 다정하고
지난 유배시절 님의 치마폭에
쓴 먹 흔적 남아 있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우리 부부가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주노라.’
이 시에서
“지난 유배시절 님의 치마폭에 쓴 먹 흔적 남아있네”라는
사연을 읽고 나는 감격하여 눈가가 젖었다.
다산 부부의 슬프고 눈물겨운 사랑이야기가 들어있다.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입고 온 분홍색
이제는 빛이 바랜 치마를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는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일구월심 님 생각에 보낸 한 여인의 한 맺힌 치마다.
다산은 아내가 보내준 그 치마를 소중히 지니고
밤마다 아내를 얼마나 그리워 했을까?
오래 지니고 간직하다가 정성스럽게 잘라서
한지를 보태서 그가 저술한 책의 표지로 사용하고
두 아들에게 삶의 지혜를 담은 글을 적어 보내고
딸에게는 매조도를 그려 주었다.
부인의 헌 치마로 저서를 감싸는 표지로해서 후세에 남기고
사랑의 결실인 아들에게 일생 동안 살아갈 지혜를 담은
유훈을 남겨주고 하였는데
결혼 60주년 회혼일 삼일 전에 그것을 꺼내서
파란 많았던 지난 세월을 회상하였다.
부인의 빛이 바랜 치마는 아이 들에게 남겨주는 사랑과 학문,
효도, 재물, 음식, 등의 세심한 충고가든
하피첩(霞巾+皮帖)이라는 가족을 위한 상징물로 다시 태어났다.
딸에게 준 매조도(梅鳥圖)는 유배생활 도중에
시집간 딸에게 혼례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아버지의 미안함이 담긴 선물일 것이다.
딸이 결혼한 일년 후에 주었다고 한다.
거기엔 아비의 심정을 읊은 아래와 같은 시가 있다.
‘훨헐 새가 가볍게 날아
내 뜰에 매화나무에 앉아 쉬네
매화향기 진하니 좋아서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러 살며
즐겁게 네 집을 삼아라
꽃이 만발하고 무성하니
그 열매도 많단다.’
‘가경 18년 계유년(1813)7월 14일 열수옹은 다산 동암에서 쓰다.
내가 강진에 귀양 온지 수년이 지났을 때
홍씨 부인이 헌 치마 여섯폭을 부쳐왔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다.
오려서 4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 작은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이 매조도는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상단에 매화가 만발했고
한 쌍의 참새가 사이 좋게 나란히 앉아있다고 하였다.
딸의 부부가 이 새처럼 화목하기를 바라고
그림아래
‘꽃이 만발하고 무성하니 그 열매가 많다.’ 는 말은
딸이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먼데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한 다산은
아내와 자식과 생 이별을 하여 살면서도
자식들에게 폐족의 자식이니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하고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극진히 돌보도록
주야로 걱정하고 최선을 다했다.
요즈음에야 한나절 거리도 않되고
또 남과 여의 구별도 없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에 양반집 부인이 아무리 보고싶다 한들
수 백리 귀양살이하는 남편에게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생 이별이 되어
산 그분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머엉하다.
다산의 일생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가 살아온 나날은 질곡과 같은 나날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은 추앙하며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남긴 유산은 다산학이라는 한 장르의 학문으로
연구 하고 추앙 받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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