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1. 20:0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근ㆍ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전강 스님
만공(滿空, 1871~1946) 선사가 어느 날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전강(田岡, 1898∼1975) 스님에게 물었다.
“부처님은 ‘샛별(啓明星)’을 보고 오도(悟道)하셨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그러자, 전강 스님은 곧 땅에 엎드려 허우적 허우적 더듬으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하였다. 만공 선사는 그것을 보고,
“옳다, 옳다(善哉 善哉)!”하며 인가하였다.
23세에 태안사에서 개오한 전강 스님은 만공, 혜봉, 혜월, 용성, 한암 스님 등을
찾아가 점검을 받았다. 특히 만공 스님으로부터는 마조 스님의
‘원상(圓相) 화두’로 점검을 받고 인가를 증명하는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받았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한 것 (佛祖未曾傳)
나 또한 얻은 것 없네 (我亦無所得)
이 날은 가을빛도 저물어 가는데 (此日秋色暮)
뒷산 봉우리에 원숭이 울음소리 (猿嘯在後峰).
이 게송에서 ‘불조도 일찍이 전하지 못한 것’이 바로 원상(圓相)이자
‘한 물건(一物)’이다. 이와 관련,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몰랐거니 어찌 가섭이 전하랴.
이 한 물건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위의 별 찾는 공안은 전강 스님이 인가를 받고 며칠 지난 날 밤에 벌어진
선문답이다. 만공 스님은 시험삼아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고 물었지만,
전강 스님의 별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부처님이 보았던 별과 전강 스님이 본 별이 같을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 <선문염송>에는 이런 게송이 보인다.
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지만 (因星見悟)
깨달은 뒤에는 별이 아니네 (悟罷非星)
사물을 따르지도 않거니와 (不逐於物)
무정물도 아니라네 (不是無情).
부처님이 별로 인해서 깨달았지만, 깨달은 것은 별이 아니라,
한마음(一心)이요 도(道)라는 게송이다.
이는 마치 서산 대사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지만,
깨달은 것은 ‘꼬끼오!’라는 소리가 아니라 진여자성(眞如自性)이었던
것과 같다.
‘물건을 따르지도 않고 무정물도 아니다’고 한 것은 깨달음의 성품이
목석(木石)과 같지 않아서 신묘하게 안다는 뜻이다.
자성의 묘함은 미혹과 깨달음에 속하지 않고 시절인연 속에서
늘 밝게 드러나 있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별이라는 객관 대상과 보는 주관이 하나 될 때 일어난다.
주객이 일체가 된 각성(覺性)에서 볼 때, 별이 마음 밖에 따로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무슨 별을 따로 찾을 것이 있겠는가.
수덕사 초대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만약 만공 스님이 나한테 위 법문을 물으신다면
‘스님은 어느 곳에서 제 별을 보셨습니까?’ 라고 여쭈리라.”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을 암시하고 있다.
늘, 혹은 ...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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