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修道) 경제학 : 경제 보살화 / 강병균 교수

2015. 4. 11. 20:4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수도(修道) 경제학 : 경제 보살화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불교닷컴 강병균 교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고통을 극복하러 이 세상에 태어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안 되기는,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

 

우리가 태어나 사는 과정에는 낙(樂)도 있고 고(苦)도 있는데, 이 고가 가끔 자주 난동을 벌이고 발악을 하며 우릴 못살게 굴며 괴롭히므로 손을 좀 쓰거나 봐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전쟁, 천재지변, 재난, 실패, 실연, 소중한 이의 죽음, 부모·자식의 죽음이나 불치의 질병이 닥칠 때는 지옥 같은 고통이 몰려오겠지만, 인생이 (어느 누구에게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가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럽냐?”고 외치는 일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왜 갑자기 말미잘 해삼 따개비를 들먹이느냐고 묻는다면, 인간 중에는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는 인간과 같은 고통이 없는 것이 분명하며, 뇌(腦)를 태우는 번뇌(煩惱)는 더욱 없을 것이다. 이들은 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인간이 누리는 즐거움도 없다. 의식의 환희와 우주를 이해하는 쾌락이 없다. 없는 신(神)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통력도 없다. 그러니 비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쁨도 없다. 모든 일이 ‘고 위험, 고 이익(high risk, high return)’인 법이다. 즉 (큰) 고통이 없으면 (큰) 낙도 없다. 따라서 고로부터의 해탈의 낙도 없다. 이 점에서, 즉 고락의 측면에서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우리가 고통(번뇌)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순간 (혹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사라진다면(무여열반에 들어 윤회를 멈춤), 마치 ‘삶의 목적이 사라짐’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즉, ‘존재의 목적이 소멸’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바로 이점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오자(돌아오자)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 ‘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소한 지구촌에 행복한 이들(대승보살)의 숫자가 계속 증가할 것이므로, 지구의 행복농도는 짙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지구의 행복농도는 매양 그 모양 그 꼴일 것이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번 부자가 그 돈을 모두 지폐로 바꿔 다 태워버린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몽땅 팔아 마련한 수백 조 현금을 죄다 소각시켜버린다고 상상해보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한국은행은 그만큼의 돈을 다시 찍어내 이 회장에게 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부의 손실로 끝난다. 물론 화폐발행비용과 아울러 벌금도 물려야 한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경고하는 뜻으로.) 그 돈을 태우기 보다는 사람들의 행복(요즘 말로는 복지, 힐링, 기부)을 위해서 써야하듯이, 보살이 번 (엄청난 양의 질 좋은) 행복도 무여열반(심신의 완벽한 소멸)으로 무용지물(無用之物)화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을 여읜 이들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즉 그 방법을 전해주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온다는 (대승불교) 철학은 긍정적이고 현명한 해석이다. ‘여러 모습’ 철학이 특히 그러하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이들이 새 도우미보살을 옛 도우미보살과 같은 사람이라고 알아보지 못하게 올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옴은 필연이다. 자신의 생체 유전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세상에 다시 옴이 반복됨에 따라, 세상은 생체 유전적으로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나,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보시인 ‘선한 사마리아인 보시’ 또는 ‘무연보시(無緣普施)’가 최고의 보시임을 유의하시라. 이 무연보시는 생체 유전자와 달리 육체가 아닌 사바세계 속에 그의 문화유전자(meme)를 점점 늘릴 것이다.

 

보살은 없애야할 (자신에게 기원하는) 고통이나 번뇌가 없기에, 그의 출세(出世 이 세상에 태어남)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그렇긴 하나, 앞으로 누릴 무한한 깨달음의 즐거움과 평안은 오로지 그의 몫이자 복이다. 고통 속에 존재해온 시간은 분명히 유한한데(수학적으로 말하면 시간에 대한 고통의 적분값이 유한인데), 앞으로 안락을 누릴 시간은 한이 없다니 엄청나게(대로) 수지맞는 장사이다. 범인(凡人)에게는 고(苦)가 안팎에서 마구마구 일어나고 쳐들어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 도(道)를 닦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국가적인, 동북아시아적인, 유라시아대륙적인, 그리고 전(全)지구적인, 혹은 전(全)우주적인 행복무역수지 개선을 위해서!

 

그런데 비밀은 모든 사람이 이미 보살이라는 것이다(一切衆生卽菩薩).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꿋꿋이 목숨을 유지해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필수품인 가지가지 물건과 의식주와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진정한 보살이다(위대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빵집주인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는 개인적인 차원의 마이크로 시각이다. 전체적인, 즉 매크로 시각에서 보면 빵집주인의 행위는 공익을 위한 헌신이다. 보이지 않는 손, 즉 천수보살의 화신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을 돕는 보살이다. 우리 개개인이 피땀 흘려 일하는 것이 결국은 인류전체의 행복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진실로 일체중생은 보살이다. 단지, 자신들이 보살이라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불교라는 특정한 종교적 수행을 닦아야만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생기기 전에도 보살은 존재했고, 불교가 사라진 후에도 보살은 존재할 것이다. 자기 일을 혼신을 다해 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진정 보살이다. 이 점에서 기업인들(CEO 이하 전 사원들)은 농부들 못지않은 보살이다. 기업이 없으면 대중은 굶어죽는다. 무의식적으로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사실은 보살행을 하고 있다는 자각(自覺)을 주는 것이 불교이다.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경제보살화’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신과 사회에 이로움을 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 누구나 보살이 아니 될 수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살행은 자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다. 빵집주인은 빵을 성실히 맛있게 굽는 것이 최선의 보살행이다. 이건희 회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살행은 삼성전자가 꾸준히 이익을 내고 성장을 하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직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재의연금을 내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백만 배는 더 큰 보살행이다. 자선행은 이런 일 다음에 오는 일이다. 자선행이란, 최선을 다했지만 때와 장소가 맞지 않아서, 주위 환경이 안 좋아서, 운이 없어서, 또는 짓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곤경에 빠진 보살들을 그들이 보살행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영국과 불란서의 대혁명 와중(渦中)에, 대한민국의 동학혁명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경제개발 와중에, 그리고 역사상 무수한 민중봉기 와중에 목숨을 앗기며 바치며 희생된 사람들은 넓게 보면 인류전체를 위한 희생이다. 이들이 인류역사 진행에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이상 理想)이라는 것은 신기루이고 환상일 수 있다. 개인의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사실은 인류전체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는 ‘유혹 호르몬’일 수 있다: 뇌 세포에서 분비되는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의 쾌락 호르몬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알고 보면 세상은 보기보다 훨씬 나은 곳이다. 개별자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험악한 곳일 수 있지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생명의 힘을 유지하고 수없는 생명을 생장(生長)시키는 약동하는 삶의 현장이다. 이런 관점은 무의식적으로 종교경전에 표현되어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힌두교 바가바드기타이다. 동족(同族)이 둘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마하바라타의 전장에서, 전차마부이자 비슈누 신의 아바타인 크리슈나(Krishna)는 동족살해라는 딜레마에 고뇌하는 제자 아르주나(Arjuna) 왕자에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경전은 개별자의 관점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군집생물인 개미 벌과 사회적인 동물인 침팬지 보노보 등을 연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종교)이해에 서광(曙光)이 비쳤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개별자의 관점과 전체의 관점 사이의 충돌을 최소화하며 조화시키는 것이다. (도로공사가 닦는 도 역시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여 상호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평화를 늘이는 길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고 군집생물인 한, 홀로 존재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苦)의 상당부분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타인과의 관계는 개인에게, 부처님이 두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붙인, 정신적인 고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이 기이한 관계는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둘 다 연기적 조망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적인 관점’을 추가하면 금상첨화이다.)

 

따라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유아기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 거기 홀로 살고 있는 인간이 도를 닦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와 군집을 유지하고 사는 한, 우리는 도를 닦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너의, 즉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 군집의 행복을 위해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연과 뭇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항상 행복한 분’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길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불가사의한 방생의 공덕

 

 

불자님들~

오늘은 방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방생(放生)은 생명체를 구속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자유와 해탈은 방생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속 중에 배고픔은 으뜸가는 고통입니다.

배고픔의 번뇌가 치성하면 해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년 봄 방생은 배고픈 바다짐승(물고기)과 날짐승(새)들에게

먹이를 주어 배고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게

자비를 베푸는 방생법회를 가집니다. 

 

 

◇ 먹이방생의 공덕

 

한 스님이 경론에 박학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지 못하여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노(老)스님이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대는 부처님 법을 배웠다면서, 어찌하여 유독 부처를 이루기 전에

 먼저 사람의 인연에 주의해야 하는 가르침은 모르는가?

그대가 아무리 부처님 법에 통달했다 해도, 인연이 없으면 또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저는 여기서 다 끝났단 말입니까?”

“내가 대신 그 인연을 만들어주겠네.”

그리고는 그 스님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 한 벌과 여벌의 옷뿐이었지요.  

 

“그것이면 충분하네.”

그 노(老)스님은 그것을 달라하여 시장에 나가 옷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전부 음식과 바꿨습니다.

그런 후에 그 스님에게 음식을 들고 따라오라 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을 데리고 간 곳은 엉뚱하게도 깊은 산속이 었습니다.  

 

얼마나 깊은 데까지 들어갔을까......,멈추라 하더니 음식을 죄다

바닥에 펼쳤습니다. 그런 후에 그 스님에게 이렇게 발원하라고 시켰습니다.  

 

“내가 20년 뒤에 바야흐로 크게 부처님 법을 펼치리라.”

그 스님은 시키는 대로 합장을 하고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 발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발원이 끝나갈 즈음 산짐승과 새들이

가득 몰려와 그 음식을 먹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과연 그 스님은 그 때부터 비로소 불법을 펼치기 시작하여 교화를 받은 사람이

수 없이 많았다합니다.

그 교화된 사람이 바로 20여 년 전에 그 음식을 먹었던 새와 짐승,

그리고 곤충들이었다고합니다.  

 

원력은 불가사의 한 것입니다.

그 위신력은 불보살님의 가피로 반드시 큰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짐승이나 새들은 물론, 곤충 같은 미물까지도 교화가 되는데

하물며 사람과 자신에 있어서 더 이상 무슨 설명을 붙이겠습니까?  

 

◇ 방생의 10대 공덕

인광대사는 방생의 10대 공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전쟁의 위험이 없다(一者無刀兵劫).

둘째는 기쁘고 길상스러운 일들이 모두 모인다(二者諸吉祥).

셋째는 건강하고 오래 산다(三者長壽健康).

넷째는 자손이 번창한다(四者多子宣男).

다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五者諸佛歡喜).  

 

여섯째는 은혜에 감응한다(六者物類感恩).

일곱째는 모든 재난이 없다(七者無諸災難).

여덟째는 천상에 태어난다(八者得生天上).

아홉째는 모든 악이 소멸된다(九者諸惡消滅).

열째는 복덕과 수명이 영원하다(十者永遠福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