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6. 20:2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정성으로 하는 기도
기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精誠)'입니다.
아니 정성스런 마음이 곧 기도인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얼마만큼 정성스러운가에 따라
얼마만큼 마음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
그 기도가 업장을 녹이고 말고 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습관처럼 절을 하고 염불하며 경전을 독송합니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매일 같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살아있는 기도가 됩니다.
어제하는 절과 오늘 하는 절이 달라야 합니다.
앞에 한 염불과 지금 한 염불이 똑같으면 안됩니다.
그냥 습관처럼 절을 하고 염불하게 되면
복은 지어질지언정 업장이 녹고 마음이 닦이지는 못합니다.
마음 닦기 위해서는
어제 절하듯 오늘 절하지 말아야 하며
나날이 새로운 마음으로, 날마다 시작하는 마음으로 절해야 합니다.
그냥 흥얼거리며 놀 듯 염불하게 되면
그건 그냥 다른 말 반복하는 것과 똑같은 공염불이 될 것입니다.
염불하며 마음에서는 악심을 가득 품고 있다면
그것은 염불이 아닌 욕설과 다름이 없으며,
밝은 마음으로 밝은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염불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공경스런 마음, 정성이 담긴 마음이 기도입니다.
모양새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무슨 기도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정성입니다.
기도를 하면 업장이 녹는다고 하는데
업장을 녹이는 것은 우리들의 정성어린 마음입니다.
정성이 업장을 녹이는 것입니다.
매일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해도
정성이 담기지 않으면 작은 기도밖에 되지 못합니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절이라면
그냥 다른 육신의 노동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으며,
정성이 담기지 않 은 염불이라면
그냥 다른 말의 반 복과 무슨 다를 것이 있겠으며,
정성이 담기지 않은 독경이라면
그냥 다른 책 읽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정성을 담아 기도하는 마음은
부처님께 이 마음을 다 공양 올리는 마음이라야 합니다.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는 마음은
얼마나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장 내 앞에 계신 부처님께 하는 절이 되어야 하며,
내 앞에 계신 부처님을 부르는 염불이 되고,
내 앞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시는 독경이 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앞에서 정성스럽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그러한 정성이라면
내 안에 쌓여있는 수미산보다 높은 업장이 절로 녹아내릴 것입니다.
절을 할 때
한 배, 한 배 정성이 담긴다면
절하는 오직 그 순간에 깨어있게 됩니다.
과거 미래도 없고, 분별도 없이
오직 나의 마음에 부처님 밝은 마음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저 무심(無心)이 되고, 자성불(自性佛)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업장을 녹이는 것입니다.
염불을 할때
또박 또박 입으로 염하고
귀로 뚜렷하게 울리도록 들으며
정성스레 명호를 염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성스런 염불 속에는
그 어떤 분별도 없으며, 끄달리는 마음도 없이
오직 그 순간 온전 히 깨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독경을 할 때도
부처님께서 지금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웅얼웅얼 읽을 것이 아니라
정성스레 또박또박 독경을 하실 일입니다.
경전이란 그대로 부처님과 같아서
독경하는 그 가운데 부처님의 밝은 마음이 담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정성입니다.
정성이란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참되고 거짓없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 최대한의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거짓없는 참된 마음이 바로 기도라는 말입니다.
거짓없는 참된 마음으로 온갖 성의를 다해 절하고 염불할 일입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순간 순간 기도할 일입니다.
순간 순간 정성스런 마음으로 살아갈 일입니다.
생활 속의 기도라는 것은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일체 모든 경계들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 공경하듯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자성불 바탕자리에서 본다면
일체 모든 경계며 사람들은 모두가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보지 못하고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보지 못하였기에
온갖 악심이 나는 것이지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볼 수 있다면
정성스런 마음, 공경스런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체 모든 대상을 대함에 부처님을 바라보듯 공경심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활 속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가며
정성스런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 한 생각 일으킴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도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대하듯 공경스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바로 그 마음에 업장이 녹아내린다는 말입니다.
업장을 지을 때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마음으로 지었기 때문에
업장을 녹일 때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바로 보아
정성스레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만큼 정성이 중요한 법입니다.
정성이란 일체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보고
공경스런 마음, 공 양 올리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할 때도
부처님께서 내 앞에 계신다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할 일이며,
생활 속에서 내 부모님, 내 자식, 내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며 거리의 모든 이들이 나의 부처님이라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이들에게 정성스레 공양하는 마음을 일으킬 일입니다.
◆꽃에서 詩를 줍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네 (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고려시대 시인 이규보가 여섯 살 때 썼다는 한시(漢詩)다. 꽃은 어린아이도 시인으로 만든다. 다 큰 시인들은 꽃 앞에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시를 줍는다.
시인들은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가 내게로 왔다'고들 한다. 시는 꽃향내를 타고 시인의 가슴에 날아든다. 봄날에 시인은 꽃과 꽃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꿀벌이 된다. 봄의 향내가 짙어지는 4월이다. 벚꽃과 목련이 세상을 밝히고 산수유와 개나리도 어깨동무하며 길을 치장한다.
이맘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가곡 '4월의 노래'다.
목련이 허공에서 화사한 등(燈)을 밝힐 때 귓가에서 하늘거리는 나비처럼 다가온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목월(1915~1978) 시인이 노랫말을 지었다.
1953년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언어를 속삭이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한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둔다'는 노랫말이 들어간 까닭이 그러했다. "여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여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며 "나무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읽거나 긴 사연의 편지를 쓰는 것은 스무살 전후의 소녀적인 낭만과 정서를 대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여학생들의 애창곡이 됐다. 그 시절 그 노래를 부르던 소녀들이 가장 예뻤을 때였다. 하필이면 전후(戰後)의 폐허에서 인생의 봄을 맞았다.
그래도 소녀들은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가슴 설레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안쓰럽다.
봄날의 화창함이 오히려 짙디 짙은 설움의 물감처럼 가슴 한편을 물들인다. 정현종 시인에게 꽃나들이 갈 때 읽을 시 5편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정현종 시인은 "꽃을 보러 가는데 시가 따로 필요 있겠느냐"고 타박하면서도 서정주의 시 '백일홍 필 무렵'을 비롯해 5편을 골라줬다.
그 중에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 '봄'도 들어 있었다. 그 시를 던져줄 테니 읽어보곤 6살 어린이 이규보의 시와 비교해보시라. 탄생하려고 빛을 가지고 그 모든 지저귐으로부터 물은 태어난다
그리고 공기를 풀어놓는 물과 빛 사이에서 이제 봄이 새로 열리고 씨앗은 스스로 자라는 걸 안다 화관(花冠)에서 뿌리는 모양을 갖추고 마침내 꽃가루의 눈썹은 열린다 이 모든 게 푸른 가지에 앉는 티 없는 한 마리 새에 의해 이루어진다'
'시가 내게로 왔다'는 표현이 바로 네루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네루다의 시는 새와 꽃이 날라다 준 것이다.
네루다가 이 시를 썼을 때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마음의 나이테는 여섯 살 어린이와 별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아이는 놀람을 통해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고 한다.
시인은 늘 보던 꽃을 새롭게 보면서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다. 네루다는 새의 지저귐에서 물의 탄생을, 화관(花冠)에서 뿌리의 신생(新生)을 읽고 티 없는 한 마리 새처럼 순수한 영혼의 언어로 노래했다.
시와 산문과 사진을 통째로 음미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소설가 조용호가 오래 전에 펴낸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가 손에 잡힌다. 꽃의 문학 기행을 떠나는 길을 알려준다. 작가가 섬진강 매화, 구례 산수유, 유달산 개나리 등을 찾아가 맡은 꽃내음을 사진으로 찍고 산문으로 액자를 만든 기행문이 꽃구경 가는 길을 화사하게 포장한다. 굳이 개나리 보러 유달산에 가선 개나리 노란색으로 망막을 적시며 시 한 편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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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의 시 '개나리'다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라고 읊어본다.
개나리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을 성싶은 작가는 꽃비에 젖은 나비처럼 중얼거린다. "추억은 곤충채집하듯 어떤 기억을 뇌수에 꽂아둔 영원한 현재형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어쩔거나, 개나리가 순결한 입술로 그때처럼 짹짹 거리며 아무리 위무해도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꽃의 형상을 한 창(窓)인 듯싶다. 꽃을 통해 사람은 꽃 너머 혹은 아득한 시간 저편을 보게 된다. 가뭇없이 사라져간 지난 봄의 꽃 향기처럼 잊혔다가 올봄에 되살아나는 순수의 순간이 돌연 꽃을 통해 이승에 그림자를 슬쩍 떨구나보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라고 노래했던가. 몸이 느끼지 않는다면 봄이 얼마나 서운할까. 어차피 갈 봄인데 섭섭지않게 놀아주다가 보내는 게 사람이 할 짓이다. 그 어떤 느낌이,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넘실대는 봄날이다.
by/박해현의 문학산책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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