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2015. 5. 16. 20: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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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이승은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 한장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아
이른 봄 그 섬에 닿기 전,
쌓여 있는 꽃잎의 시간.

벼랑을 치는 바람 섬 기슭에 머뭇대도
목숨의 등잔 하나 물고 선 너, 꽃이여
또 한 장 엽서를 띄운다,
지쳐 돌아온 그 봄에



 일승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欲趣一乘 勿惡六塵  - 신심명 중에서

<능엄경>에서 몸과 마음에 묶여 있는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풀려날 수 있는가 하는

 

아난의 질문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특하구나, 아난아.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난 무명[俱生無明]이

그대를 윤회하게 하는 생사의 결근[結根]이니,

그것은 오직 그대의 육근(六根)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또한 위없는 보리[無上菩提]는 그대로 하여금 안락, 해탈, 적정, 묘상을 얻게 하니.

그것 역시 육근이지 다른 것이 아니노라."

어째서 생사윤회의 뿌리와 무상보리의 근원이 다른 물건이 아닌 육근이냐는

아난에 질문에 세존께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육근과 육진은 근원이 같고 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며

식성(識性)은 허망하여 마치 허공꽃 같다.

아난아, 육진으로 말미암아 앎[知]이 생겨나게 되고,

육근으로 인하여 모양이 있게 되니, 모양과 보는 주체[見]는

아무런 성품이 없어서 서로 얽힌 갈대와 같다,

그런 까닭에 그대가 지금 지견에서 앎[知]를 세운다면 곧 무명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지견에서 아무것도 보는 게[見] 없다면

이는 곧 번뇌로부터 벗어난 열반이 청정함이다.

그 가운데 어찌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주관인 육근과 객관인 육진의 근원은 본래 공하여

그 사이에서 일어난 앎의 성품 역시 허공꽃 같습니다.

객관 경계로 말미암아 아는 주관이 생기고,

인식하는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의 모양이 생기므로,

주관과 객관은 속이 빈 갈대가 서로를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객이 공하여 텅 빈 가운데 허망한 지견을 세운다면

따로 마음이 있어 생사윤회의 근본이 되고,

주객이 텅 비었으니 지견마저 텅 비어 마음이라 할 것도 없으면

곧 청정한 열반의 소식인 것입니다.

참다운 일승의 도리에는 일승이라는 것마저 있지 않습니다.

일승이란 것도 이 한 마음의 다른 이름이요,

육근과 육진 역시 이 한 마음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깨달으면 육진 경계가 그대로 일승이요,

미혹하면 일승이 오히려 육진 경계에 불과합니다.

손가락을 모아 쥔 것을 주먹이라 이름하고,

손가락을 활짝 편 것을 손바닥이라 이름하나,

 주먹과 손바닥이 동일한 손 하나의 서로 다른 이름입니다.

 

일승을 취하려 한다면 오히려 육진 경계에 떨어지고,

육진 경계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일승입니다.

일승의 도리를 깨닫고 싶습니까?

손을 폈다가 오므리고, 오므렸다 활짝 펴 보십시오!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취하면            自心取自心
허망하지 않은 것이 허망하게 되거니와      非幻成幻法
취하지 않으면 허망하지 않음도 없으리라   不取無非幻 
허망하지 않은 것도 생기지 않거늘           非幻尙不生
어찌 허망함이 성립할 수 있으랴              幻法云何立

 

- 몽지릴라 밴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