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속의 유령: 자아는 죽었다/강병균 교수

2015. 6. 6. 20: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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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속의 유령: 자아는 죽었다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선사(禪師): 송장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눈이 아니라 마음이 보는 것이다.
안과의사: 봉사는 마음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니라 눈이 보는 것이다.
부처: 싸우지들 말거라. 눈과 마음이 온전해도 대상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대상과 눈과 마음의, 즉 대상과 심신의 연기(緣起)현상이다.

 

 

부처님이 이미 2,500년 전에 무아론(無我論)을 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와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서양사상에 ‘기계속의 유령(ghost in a machine)’이라는 것이 있다. ‘몸속의 영혼(soul in a body)’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듯이, 우리 ‘몸이라는 집’ 속에 누군가 들어앉아 ‘눈(구멍)이란 창’을 통해서 밖을 본다는 말이다. 그 누군가는 물론 귀(구멍)를 통해서는 듣고, 코(구멍)을 통해서는 냄새 맡고, 입(구멍)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피부를 통해서는 감촉을 느낀다는 말이다. 물론 생각도 그 누군가가 한다. 이런 주장을 ‘데카르트의 극장(cartesian theate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데카르트의 극장(cartesian theater). 머릿속에 들어앉아 영화 보듯이 외경을 보는 존재를 보라. 텔레비전화면과 영사막은 눈에, 음향장치는 귀에 연결되어 있다.

 


 

(창이 막히거나 망가지면 밖을 볼 수 없다는 논리는 이해해 줄 여지가 좀 있지만, 뇌가 망가지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생각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 한다고 주장하는 괴이한 이론가들은 더욱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 고대 그리스(아리스토텔레스)나 이집트도 아니고, ‘뇌가 아닌 심장이 생각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가? 지금도 인도인들과 티베트인들과 남방불교인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티베트 밀교와 남방불교의 영향이다. 목 아래가 없는 사람에게 기계를 이용해서 피를 공급해 살게 하면, 심장이 없는 이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할 것이 아닌가? 차라리 ‘마음은 피에 있고, 생각은 뇌가 아니라 피가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물론,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주장이나 ‘마음이 피에 있다’는 주장이나 둘 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변신로봇 머릿속에 들어앉아 로봇을 운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로봇이 기계에, 그리고 사람이 유령에 해당한다. 또는 영화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긴 팔이 여러 개 달린 괴물기계 가슴 속에 들어앉아 괴물기계를 운전하는 악당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혹은 자동차(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유령)을 연상해도 된다. 그와 같은 것들이 기계속의 유령이자 영혼이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해석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1596-1650)는 ‘영혼은 뇌의 송과선(松科腺)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뇌 깊숙이 있는 조그만 솔방울같이 생긴 송과선에 자리잡고 안(눈)·이(귀)·비(코)·설(혀)·신(피부)을 통해서 외계에서 들어오는 감각정보를 경험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하벙커에 자리잡은 사령부를 연상해도 좋다. 이곳의 사람들은 지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모든 정보를 보고받는다. 데카르트에게는 송과선이 바로 이 지하벙커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기계속의 유령을 믿으며, 이 유령이 자기들 뇌 속에 ‘작은 사람의 형태’로 산다고 믿는다. 이 작은 사람은 ‘호문쿨루스(homunculus 난쟁이)’라고 불린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감각과 인식기능은 뇌 전체에 분산되어 있지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중추는 후두엽에 있으며(그래서 뒤통수를 된통 가격당하면 시각을 잃을 수 있다), 청각중추는 측두엽에 있다. 그리고 공의 표면 같은 뇌피질은 피부와 일대일로 대응되고 있다. 즉, 뇌에는 온몸의 피부지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팔에 간지럼을 느끼는 환상통(幻想痛)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얼굴의 특정부위를 긁으면 간지럼증이 사라질 수 있다. 바로 그 특정 얼굴부위를 담당하는 뇌부위와 팔을 담당하는 뇌부위가 서로 인접하여 있어서, 전자(前者)를 긁어줌으로써 인접한 후자(後者)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언어, 논리, 분석, 수학, 이성 등은 좌뇌가 담당하며, 직관, 통찰, 예술, 감성 등은 우뇌가 담당한다.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기능은 해마에 있으며, 전두엽은 의사결정과 계획 등을 담당한다.

국가와 사회는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거기에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일한 결정자는 없다. 집단을 움직이는 것은 단일한 결정권자가 아니라 제도, 즉 시스템이다! 뇌에도 이런 시스템이 존재한다. 수학적으로는 일종의 알고리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알고리듬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누가 이런 알고리듬을 만들었을까? 유신론(有神論)자들은 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만든 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생기고 발전한 것이다.

국가에서 대통령이 모든 결정을 하지 않으며, 일을 분담한 각 부처의 장관들이 자기 부처의 모든 결정을 하는 것도 아니며, 다시 장관 밑의 국장들이 자기 부서의 모든 결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고도로 발달한 복잡한 조직의 의사결정은 캐스케이드(cascade)를 이루며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뇌의 의사결정도 마찬가지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없는 국회가 더 좋은 예이다. 가장 높은 지위의 국회의장에게도 그런 권력은 없다. 국회는 국회법과 시스템에 의해서 돌아가지 일개인의 결정에 의해서 운영되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투표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회가 비리혐의로 체포위기에 처한 동료 국회의원을 보호하려고 방탄국회를 열었다’고 하면서 마치 국회가 생물체처럼 의지를 지닌 것처럼 묘사한다.

 


한국의 선사(禪師)들은 ‘보고 듣는 주인공’이 우리 몸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찬술된 유아론적(有我論的)인 위경(僞經 가짜경전)이라고 비판을 받는 능엄경조차도 ‘보는 성품은 몸 안에도 없고, 몸 밖에도 없다’고 논증한다: 몸 안에 있다면,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집 안의 가구를 보는 것처럼 몸 안의 심장·위장·비장.간 등의 장기(臟器)를 보아야 하고, 집 안에서 밖을 볼 때 창문(틀)을 보는 것처럼 눈(육안 肉眼)을 보아야 하지만, 장기와 눈은 보이지 않는다. 몸 밖에 있다면 밖에서 집을 보는 것처럼 우리 몸(肉身 특히 얼굴이나 등)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성품은 몸 안에도 몸 밖에도 없다. 이상이 능엄경의 논리이다.

 

본다는 것은 근(根 시각기관)·경(境 시각대상)·식(識 시신경) 삼자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일어나는 연기적(緣起的) 현상일 뿐이다. 예전에는 뇌의 기능과 뇌신경세포회로망(커넥톰 connectome)의 존재를 전혀 몰랐으므로 본다는 것이 연기적 현상임을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명상·수행·해탈은 개인적인 성취이지만 문화는 집단적인 성취라는 점에서, 과학문명의 위대성을 볼 수 있다. 깨달음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번뇌뭉치 사람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생체 병렬컴퓨터’를 만들어, 마음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무명 중생(無明衆生)들을 우습게만 볼 일이 아니다!

수행자들이 공포에 떨 만하다. 특히 반(反)물질문명적이고 반과학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분들은 더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깨달음을 선사하는 기계가 발명될지! 혹자는 40년 안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면, 한때 지구인구 반의 존경을 받던 위대한 마르크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그 기계를 구입할 돈이 있는 부자들만 깨달음을 얻는, 가장 불평등한 자본주의가 도래할 것이다. 소위 ‘오도(悟道)자본주의’ 또는 ‘해탈자본주의’이다. 현대가 지적자본주의라면 미래는 영적자본주의이다. 지금 돈을 주고 지식을 사듯이(교육, 연구, 특허, 기술개발, 고급두뇌유치誘致 비용 등), 미래에는 돈을 주고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살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 우리 세대가 돈이 없이도 ‘평등하게’ 해탈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물질적 자본주의야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자본주의를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시절이 도래하기 전에 다들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특히 (필자처럼) 가난한 사람일수록! 자본주의의 파멸은 물질적자본주의의 극(極)에 가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자본주의의 폐해(弊害)로 무명중생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올지 모른다. 물질적 무산계급이 아니라, 영적 무산계급인 무명중생들이 들고 일어난다는 말이다. “왜, 부자 너희들만 영적고급주택단지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누리고 사느냐”고 규탄(叫彈)하면서. 번뇌로 가득 찬 사람들이 번뇌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을 비난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영적좌파정당인 해탈평등당(解脫平等黨) 또는 해탈정의당(解脫正義黨)이 등장해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당명 앞에 ‘민주’자를 붙여도 무방하다. 민주해탈평등당 또는 민주해탈정의당이라고.


 

 

   
▲ 뇌신경망 사진. 문어대가리 같은 부분이 뇌신경세포인 뉴런이고 문어다리 같은 부분이 정보전달도로인 축색돌기와 수상돌기. 축색돌기와 수상돌기의 접합부분인 시냅스. 뉴론과 돌기의 전자현미경사진.

 


 

하나의 뇌에는 뇌세포는 1,000억 개, 돌기는 1,000조 개가 있다. 종교적 명상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왜 인간의 능력을 종교적인 능력으로 국한시켜야한다고 광적으로 주장하는지 미스터리이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심신복합체’이지, 마음 단일체가 아니다. 그리고 그 마음조차도 단일체가 아니다. 1,000억 개의 뉴론들과 1,000조 개의 돌기들이 그 증거이다. 다른 증거도 있다. 뇌량은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여 둘 사이의 소통 즉 정보교환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통합된 의식이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외과수술로 간질환자의 뇌량을 절단하면 좌뇌의식과 우뇌의식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의식이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표면의식 아래에는 적어도 2개의 의식이 숨어있다는 증거이다.


 

 

   
▲ 뇌신경망의 발화. 뉴론과 돌기들이 전기적으로 발화(fire)하는 장면.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팔이 여럿 달린 괴물 같은 모습의 뉴론과 돌기. 하나의 뉴론에는 돌기가 1,000~10,000개가 달려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 등 특정한 뇌활동을 하면 그에 연관된 뉴론들이 선별적으로 분주하게 발화한다. 뉴론과 돌기들은 사용하면 늘어나고 발전하며,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들고 퇴화한다. 퇴화하지 않으려면 화투라도 쳐야한다. 민화투보다는 고스톱이 낫고, 바둑은 훨씬 더 낫다.

 


 

선사들이 주인공, 자성(自性), 불성(佛性)을 묘사할 때 쓰는 ‘본래 텅 빈 자리’라는 말은 맞지만(일체가 공空이다), 그런 ‘텅 빈 자리’에 무엇이 있는가가 문제다. 그 ‘텅 빈 자리’에 지성知性과 감성이 있는가? (만약 ‘텅 빈 자리’에 지성과 감성이 없다면 지성과 감성은 어디서 생기는가?) 만약 있다면, 모든 동물의 ‘텅 빈 자리’의 지성과 감성은 서로 동일한가? 즉, 지렁이와 박테리아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은 조금도 차이가 없이 그 기능과 질에 있어서 동일한가?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흔히 ‘기억’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모든 기억이 없어졌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무 기억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으신가?

(장기기억은 남아있는 치매환자도 주변사람들에게 처리하기 힘든 고통을 주는데, 아예 모든 기억이 없는 사람은 어떨지 상상을 해 보시라.)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이 세상과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최소한 대승불교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 고통의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중생들의 고락(苦樂)을 같이 겪고 느끼는 존재. 기독교가, 엉터리 교리와 미개한 신과 잔혹한 범죄의 역사(인신공희, 인종말살, 마녀사냥, 노예제도, 고문제도, 종교전쟁, 인종차별, 종교탄압, 세속전쟁)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바로 그런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혜국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인공’론을 펼쳤다. (유튜브에서 ‘14 원각경 제6 청정혜보살장 2014 05 29’제목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적멸(寂滅)의 세계는 성정적적(惺惺寂寂)의 세계이다. 깨어있고 고요한 그 자리를 깨달으면 부처이며 누구나 그 부처를 모시고 있다. 적멸은 이름이 끊어진 자리이다.

 

지수화풍을 빌려 만든 몸뚱이나 허공이 듣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듣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히 듣고 있는 놈이 있는데, 그게 적멸이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다. 누군가 듣고 있다. 몸뚱이나 귀가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귀가 있어도 못 알아듣는다. 안에서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다. 그게 적멸이다.

적멸론(寂滅論)과 유아론(有我論 아트만論)이 뒤죽박죽된 주장이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적멸이고 그 적멸이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정확히 ‘기계속의 유령’이다. ‘몸이라는 기계’ 속에 들어앉아 귓구멍을 통해서 듣는 ‘주인공이라는 유령’! 또, 듣는 것이 연기현상(緣起現象)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혜국스님의 이 발언은 지난번에 소개한 경봉스님의 발언과 궤를 같이 한다: “으로 (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령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즉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다’라는 말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선사들은 혜국스님과 경봉스님같이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가 유아론이 되어버렸다고 통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자아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공포에 휩싸인다. 그 공포를 이기려면 반야심경에서처럼 ‘지혜(반야바라밀)’에 의지해야 하건만, 오히려 아트만(진아眞我 참나)에 의지한다. 적멸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서.

이들이 주인공이 보고 듣는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필시, 만약 이 주인공이 보고 듣고 생각하지 못한다면 무정물과 다를 바가 없어져 ‘죽으면 사라진다’는 말과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존재’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가 죽어도, 즉 우리 몸이 죽어도 이 주인공은 죽지 않으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몹시 죽기 싫어하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환호작약할 일이다. 사실 모든 종교는 유론(有論 靈魂論 永生論)이다. 죽기 싫어하는, 즉 소멸을 싫어하고 소멸에 대한 공포심에 빠져있는,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영생(永生)상품을 파는 기업이다. 기독교의 영생상품은 영혼이고, 불교의 영생상품은 주인공·본래면목·지켜보는 놈·진아(眞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참나’이다.

필자가 혜국스님을 거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혜국스님은 손가락을 태워가면서까지 수행을 한, 부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훌륭한 수행자이자, 이 시대에는 보기 힘든 청정비구이시다. 하지만, 오로지 진리를 찾는 데 목숨을 건 눈 푸른 납자(衲子)들의 모임인 전국수좌회 의장까지 지낸 스님이 불자들과 젊은 수행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크기에, 그 견해를 비판하는 것뿐이다.

개미집단(군집)은 군집차원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는 놈(들)이 없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벌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은 개미를 유한개의 행동지침으로 이루어진 유한상태기계(有限狀態機械 finite machine)로 추측한다. 그 행동지침 중 하나가 페로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판기가 유한상태기계이다. 돈을 받고, 손님이 버튼을 눌러 상품을 선택하면, 해당상품을 배출하고, 거스름돈을 내주는 기계.) 우리마음도 그러한 면이 있다. (함부로 말하자면, 누가 당신에게 **놈아 혹은 개**야 하고 욕을 하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이다. 즉 ‘욕’이라는 입력이 들어가면 ‘화’라는 출력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자동기계라는 말이다. 물론, 매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면이 다분히 있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언어, 공간지각, 시간지각, 평형감각, 수계산, 추리, 연상, 표상, 사유, 기억, 데이터처리, 사랑, 전쟁, 타협, 정체성, 감정, 운동, 호흡, 혈액순환, 체온유지, 각종 호르몬 조절 등을 다루는 무수한 모듈(개별 업무부서)로 이루어져있으며, 마치 개미나 벌이 활동하는 것처럼 활동한다. (이 업무부서들은 반드시 고정적으로 뇌의 특정부위를 점유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며, 상황에 따라 팀을 조성·해체하며 유동적으로 활동한다.)

벌 집단이 커지면 일군의 벌들이 새로운 여왕벌을 옹위(擁衛)하고 분봉(分蜂)을 한다. 유튜브(YouTube)에 이들이 새 집을 '결정'하는 과정이 나온다. 한 서양인 양봉업자가 분봉하려는 수만 마리 벌들을 넓적한 나무 주걱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개의 벌집을 준비하여 서로 다른 방향의, 주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하나(A)는 벌들이 입구는 좁지만 안이 넓고, 다른 하나(B)는 입구는 넓지만 안이 좁다. 벌들은 전자(前者)를 선호한다. 좁은 입구는 외적을 막기 쉽고, 넓은 내부 공간은 생활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몇몇 벌들이 벌집후보지를 찾아 사방으로 정찰을 나간다. 돌아온 벌들은 벌들 사이를 여기저기 비집고 들어가서 몸으로 자신들이 발견한 벌집방향을 가리키면서 춤을 춘다. A를 발견한 벌들은 힘 있게 춤을 추는 반면에, B를 발견한 벌들은 그에 비해서 약하게 춤을 춘다. 춤을 본 벌들이 새 정찰대를 구성하여 지시한 방향으로 날아가 집을 확인하고 돌아와, 다시 전 정찰대처럼 춤을 춘다.

이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A방향으로 춤을 추는 벌들의 수가, B방향으로 춤을 추는 벌들의 수를 충분히 넘는 순간(즉 임계점을 넘는 순간), 갑자기 모든 벌들이 A를 향해 나무주걱을 떠난다(이것은 국회에서의 다수결투표를 연상시키는 현상이다). 이 과정에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결정을 내리는 사령관은 없다. 즉 ‘기계속의 유령’과 유사한 ‘군집속의 유령’은 없다.

과학자들은 우리 뇌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은 이와 유사할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에게 몇 가지 선택사항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할까 고민한다. 즉, 뇌 여기저기서 뇌신경세포들이 팀을 짜서 각 선택사항을 지지하며 전기화학적으로 발화(fire)한다. 그러다가, 뇌(벌 군체)속의 1,000억 개의 뇌신경세포(벌) 중, 충분한 수가 한쪽 방향으로 전기화학적으로 발화(fire)하면 그쪽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벌의 의사결정과정처럼 의사결정을 하는 결정권자가 없이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기계속의 유령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뇌에는 ‘모든 상황에서 자동차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자동차 운전사가 없다’는 말을 뜻한다.

다른 예로서는, 단순한 조건반사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누가(영혼이) 판단을 한 다음 행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겨울이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순천만 하늘의 철새들의 움직임 역시 군집의 이동방향을 결정하는 단일한 총사령관 철새는 없다. 청어, 꽁치, 멸치 등의 작은 물고기들이 이루는 군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즉 각각의 물고기는 자기 옆에 있는 물고기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즉 옆 물고기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것이다. 새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움직인다.

일부 사람들은 선사(禪師)들이 주인공, 참나, 진아 등의 말을 사용하는 것은 표현만 그렇게 한 것이지 유아론이 아니라고 강변(强辯)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진짜 유아론’의 의미로 그런 말을 한다. 영락없이 오리처럼 울고,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날며, 오리처럼 헤엄치고, 오리와 짝짓기를 하는, 오리처럼 생긴 새는 오리이지, 다른 새가 아니다. 설사, 그 새가 자기는 오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오리가 아닌 다른 새로 바뀌는가? 무슨 변신로봇도 아니고. 선사들의 참나, 진아, 주인공이 바로 이 ‘오리’이다. 집주인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집주인이 없는 틈에 담을 넘어가 남의 집에 들어가서, 허락 없이 귀중품을 들고 나오면서, 자기는 도둑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누가 믿겠는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놈이 바로 이 ‘참나’ ‘진아’ ‘주인공’이라는데, 그리고 이놈은 ‘불생불멸’이고 ‘무시무종’이라는데, 이게 ‘아트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처님이 설한 무아론은 인도적인 ‘아트만’이나 서양적인 ‘기계속의 유령’, ‘영혼’, ‘호문쿨루스(homunculus)’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이 위대한 것은 이미 2,500년 전에 일체의 물질적인·과학적인 실험도구가 없이 이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며, 2,500년이 지난 이제서야 현대 과학이 그 타당함을 입증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진화론과 뇌과학이다. 그런데 비극은 불교인들이, 그 사이를 못 참고, 자기 스승의 가르침인 무아론을 내다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오래전에! 더 비극은 내다 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불자들이 접하는 유명 스님들은 대부분 ‘참나’를 선양(煽揚)하고 가르치는 선사(禪師)들이지 학승들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단히 유명한 학승들조차 선사들의 영향으로 유아론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지적하면, 즉 유아론(有我論 atman論)을 비판하면, 떼로 나서서 비난한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 아닐 수 없다! 자기를 납치한 아트만(atman 유아론자)과 사랑에 빠져, 구해주려는 안아트만(anatman 무아론자)을 비난하는 현상! 전도몽상(顚倒夢想)도 이런 전도몽상이 있을까?

 


부처님의 연기론에 의하면, ‘몸과 마음’의 ‘존재와 활동’은 연기(緣起)이다. 

서양의 유일신은 모든 것은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원동자(原動子. The First Mover. The Unmovable Mover)이다. 즉 첫 번째 원인이다. 인과론적으로 보자면 ‘태초의 인(因)(The First Cause)’, 즉 ’제일 처음의 원인‘이다. 인도의 아트만사상은 바로 이 ’첫 번째 원인인 원동자로서의 신‘에 해당하는 사상이다.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존재이다. (이 아트만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이 나온다고 주장하면 전변설轉變說이 된다. 베단타 불이론不二論에 의하면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한국불교의 선사들이 주장하는 참나, 진아, 주인공도 생명체와 의식이 존재하게 하는 원동자이다. 철저히 연기론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우주에서 우연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인과론과 연기론으로 설명하면서, 그 우연(인과와 연기에서 벗어난 것들)을 모조리 참나, 진아, 주인공에 농축시켜 때려 넣은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참나, 진아, 주인공은 인과와 연기를 벗어난 존재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열반 대신 ’참나‘의 실재를 주장하는 신유부(新有部)이다. 또 이들의 주인공은 유위세계인 인과세계와 무위세계인 열반세계 사이의 신종 튀기(hybrid)이다. 이런 괴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맹신하기에 불교가 발전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코끼리대가리를 한 신 가네샤와 원숭이 신 하누만과 성스러운 암소를 믿는, 유아론의 태두(泰斗 泰山北斗)인 외도 힌두교로부터 ’너희는 우리의 아류‘라고 인정(?)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힌두교는 부처를 비슈누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필자도 절친한 인도인 친구에게 이 같은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아소카 선언 아래 서로 껴안고 반가와 하면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하면서, 웃지는 않을까, 강한 의심이 든다. 아니, 부처님이, 인류가 서로 형제임을 몰라서, 브라만교도들을 꾸짖으며 삼법인(無常 苦 無我)과 연기법으로 사자후를 토하신 것인가? 힌두교 외도들에게 살해당한 목련존자, 부루나존자, 용수보살 등 부처님 제자들이 통곡할 일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위대한 탐구정신은 지하실에다 모셔 두었는가 아니면 가택연금 시켰는가? 그러면서도 일본이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면, 다들 하던 일 제쳐두고 들고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는다. 세속의 정체성은 끔찍이 지키려 하면서도, 불법(佛法)의 정체성은 ’나 몰라라‘다.

1996년에 톰 울프(Tom Wolf)는 ‘포브스 Forbes'에 발표한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영혼은 방금 죽었읍니다(Sorry, But Your Soul Just Died)”라는 글에서 신경과학의 놀라운 발견들을 언급하면서,  2006-2026 기간에 새로운 니체가 나타나 “자아는 죽었다(The self is dead)"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톰 울프는 현재 미국 펜실베니아 주 2014년 민주당 주지사후보이다.) 니체가 1885년에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고 선언한 것에 빗댄 표현이다. 1885년이라는 해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지 불과 26년 후이며, 1882년에 사망한 다윈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겨우 2년 전이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기독교신에 대한 믿음을 버렸음을 처음으로 고백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두 거장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부터 신궁神宮으로 진격하여, 독립적으로 신을 죽인 것이다. 한 사람은 사변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실증적으로. 이들은 본시 신을 섬기는 기독교신자였으므로, 사실은 신을 시해(弑害)한 것이다. 서양 지식인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신’을 죽였고, 이제서야 ‘자아’를 죽일 조짐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신공아공(神空我空)이다. 사람의 영혼은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신이 만든 것이므로 신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졌어야 마땅하지만, 영생을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은 질기고 질긴 원초적인 욕망인지라, 신이 사망한 후에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남아 있다.) 이들은, 이미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신과 자아를 한꺼번에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배달민족은 이 위대한 부처님의 무아(無我 anatman)론을 버리고, 거꾸로 미개한 유아(有我 atman)론으로 후진하는가? 무슨 연유로, 과학문명이 선사하는 환한 빛을 피해서 어두운 몽매주의(蒙昧主義)의 동굴로 기어들어 가는가?

기독교 신약에서 예수는 말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쓸 곳이 없다.” 그렇다, 불교가 무아론(無我論)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잃으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냥 힌두교로 흡수되고 말 것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어머니의 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한 청년!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면접 때마다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면접도 떨어지게 되자
청년 실업자는 회장님을 붙잡고 읍소했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뜻밖에도 회장님은 관심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노모가 계시다고? 그러면 발을 씻겨드리고 내일 다시 오게”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회장님의 요구대로 생전 처음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려고 했지요. 그 순간
어머니의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발이 아니었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굳어진 발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발톱은 닳아 검게 오그라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어머니의 발을 만져보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회사로 다시 찾아간 청년은 회장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은 저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청년에게 회장은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출근하게”

- 일본의 한 기업에서 있었던 실화/이주영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