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도, 드러난 도 /강병균 교수

2015. 6. 20. 12: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숨은 도, 드러난 도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부처님은 임종에 즈음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무엇을 주먹에 쥐고 감추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라.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찾아 헤매는 성향이 있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리할까? 게다가 84,000경 장광설(長廣舌)까지 있는데, 뭘 찾아다니는 것일까? 아마, 도망가는 짐승과 식용식물을 찾아다니던 수렵채집기 습성의 흔적일지 모른다. 주거지 근처의 것은 다 잡아먹고 따먹고 캐먹었으므로, 멀리 이동해야 먹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므로 옛 습성은 이미 오래 전에 쓸모가 없어졌건만, 사람들은 잠에서 덜 깬 듯 꿈속에 사는 듯 옛 습성의 숙취에 빠져있다. 그래서 태백산에 수십 년 은거한 도사를, 소백산 깊은 토굴에서 수십 년 참선한 스님을, 그리고 지리산 깊은 골에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수십 년 묵은 도라지 같은 때 묻지 않고 얼굴 맑은 수행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숨어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다. 드러나 있는 것은 이미 검증을 거쳤으므로 위험하지 않다. 모르는 것을 잘못 먹으면 독에 중독될 수 있다. 낯선 버섯을 먹다 독버섯을 먹고 죽는 사람들이 매년 발생한다.

산에 은거하여 수십 년 도를 닦았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는데, 산속에만 살았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기이한 주장은, 예를 들어 천둥·번개를 관장하는 용에 대한 믿음은, 그냥 현대과학에 무지해서 뱉어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독이 없을 지라도, 쉬운 말을 어렵게 표현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긴 시간을 들여 애써 파악하고 보면, 그 가르침의 그 평이함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뭔가 신비함을 찾아다니는 추종자의 마음’과 ‘시대에 뒤처진 도사의 표현방식’이 연합해서 오해를 빚은 것이다. 주어,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조사, 목적어가 문법의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어지러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면, 신비감은 가속화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언어도단 심행멸처(言語道斷 心行滅處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소멸한 곳)’라고 몇 마디 얻어들은 문자가 있으면, 무른 된장에 떨어진 야무진 돌처럼 확신은 깊어진다. 대장경 84,000권에 차마 기록하지 못한 진리를 저분이 독점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이런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진짜 독버섯일 수도 있다. 그것도 수십 년 묵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버섯! 온통 황당무계하고 괴력난신(怪力亂神)적인 데다가 혹세무민까지 하는 환망공상(幻妄空想 환상 망상 공상 상상)으로 이루어진 허깨비일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물들면, 몸은 현대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문명의 빛으로 휘황찬란한 백주대낮에 살아도, 마음은 햇빛 한 점 안 드는 만 길 깊이 동굴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조심할 일이다.

중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이 있다. 도로 건설 중 땅속에서 커다란 알이 발견되었다(이런 유의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을 자르자 알속에 좌정한 머리가 긴 사람이 나타났다. 알껍질은 그 사람의 손톱과 발톱이 자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나는 석가모니부처님 바로 전 부처인 가섭불 때 수행자인데 석가모니불을 기다리려 선정(禪定)에 들었다”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석가는 이미 2,500년 전에 입적했다”고 대답하자, 그는 ‘펑’하고 사라져버렸다. 그이는 자그마치 수백만 년을 선정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고 멍청하게도 석가모니부처님이 득도하셨을 때 선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그가 설사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바뀐 세상에 적응하려면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수백만 년 전 사람이라면 인간은 생긴 것도 동물원의 침팬지보다 더 동물적이고, 지능도 더 저열하고, 문화도 침팬지보다 더 미개한 시절인데, 무슨 수로 이 어지러운 현대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현대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현대문명을 이해하고 거기 적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애완동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인간과 같이 살지만 인간이 이룩하고 향유(享有)하는 과학기술문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며,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것이 더 우수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내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말고, 행해보고 맞으면 따르라’고 하셨다. 이것은 진정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자세이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려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과연 그 사람의 조상들이 제사를 지냄으로써 하늘나라에 태어났는지’를, 그 사람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수대에 걸쳐서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은 ‘그렇다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헛수고’라고 지적한다. 불경 도처(到處)에서 이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수행의 최고경지인 해탈조차도, 수행자가 자신이 해탈했음을 남이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오분향 중의 해탈지견(解脫知見)향에 해당한다. 자신의 번뇌가 소멸하였는지, 즉 누진통(漏盡通)을 이루었는지는 스스로 아는 것이다. (초기불전 ‘장로게(長老偈)’와 ‘장로니게(長老尼偈)’에는 이런 증언이 무수히 나온다.) 최고경지인 해탈이 그러할진대, 지금 바로 여기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따라서 신비주의적인 면은 선도(仙道)나 힌두교나 배화교(拜火敎) 등의 외도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후대의 가필(加筆)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 아빠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면, 다른 아이는 더 큰 목소리로 ‘울 아빠는 우주를 날아다니고 핵폭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뻔히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 대꾸한다. 모든 종교적인 초자연적인 현상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기이한 주장을 하면 철저히 검증을 해볼 일이다. 그러고도 믿을 만하다면 당신은 대박을 친 것이다!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이미 시중에 유포되어있는 가르침보다도 못한 저질 싸구려 주장과 견해를 턱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살 위험이, 즉 된통 바가지 쓸 위험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십중팔구 당신이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한 결과이다. 그래서 훨씬 더 품질 좋은 가르침이 이미 시중에 도처에 깔려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한탕을 노리는 당신의 사행심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심하게는, 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권태에 뿌리를 둔 선정주의(煽情主義 sensationalism)일 수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베이어드 스폴딩(Baird T. Spalding)의 ‘극동의 스승들의 삶과 가르침(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이라는 5권짜리 책을 권한다. 인도 카슈미르 지방에 석가와 예수가 손을 잡고 나타나는 등 경천동지할 내용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당신의 삶이 변용될지는 의문이다. 영화 ‘인디애나존스’를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볼 때야 기가 막히게 재미있지만, 다음 영화가 개봉될 즈음이면 그냥 흘러간 영화일 뿐이다. 아!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한, 부처님의 선언인 ‘무상(無常)’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無常是眞中眞).

이 세상(기세간과 우리 몸과 마음)은 연기(緣起)적인 것이므로, 개인과 도(道)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회와 즉 타인과의 교류가 없는 도는 죽은 도이다. 그런 도가 의미가 있다면, 차라리 돌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돌 역시 번뇌도 없고 말도 못한다. 방편(方便)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면, 도(道)도 이미 그 안에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침팬지가 깨달음을 얻어도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은 분명하다. 침팬지의 깨달음은 침팬지들에게나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식과 언어를 공유해야만 깨달음의 내용과 수준이 일치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사반세기 전에 기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 혼란스러운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속의 티베트를 무대로 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소설이었다. 열심히 도를 닦은 한 티베트 스님이 예티(설인 雪人 눈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내용이다. 눈 덮인 깊은 설산을 찾아가,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적대적인 예티들을 우여곡절 끝에 동굴에 모아놓고 설법을 한다. 이 스님의 전생이 예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바로, 그 스님이 직전(直前) 전생에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알아봤고 그들의 언어를 기억해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즉 사회 안에서 숨쉬고 살아 움직이며 소통하는 드러난 도(道)가 진짜 도이다.

부처님의 45년 전법인생(傳法人生)은 중생과 같이 한 소통의 삶이었다. 부처님은 임종 당일 병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부처님을 찾아와 기어코 제자가 되겠다고 떼를 쓰는 120살이나 먹은 외도(外道) 수행자 수발타라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와 문답을 나누었다.

도(道)가 물이라면 깊은 산속의 옹달샘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의 우물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