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락 (苦樂 )의 원인 / 서경보 스님

2015. 6. 26. 11: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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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 (苦樂 )의 원인 / 서경보 스님

 

도데체 우리 인생의 고락희비의 모든 원인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이것을 추구해 보면 옛날부터 4가지의 사고방식이 있으니,

그 4 가지란 숙명설 , 천의설, 무인설, 인연설인데, 석가세존 께서는

이 4가지 가운데 앞의 3가지는 틀린 것이라 보고 제 4의 인연설을 취하셨다.

그 제1의 숙명설이란, 오늘의 우리들의 경우와 미래의 일체 사건이

다 이미 정해져있어서 인간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설이다.

이것은 세간에서 보통 이르는 운명론과 같은 것이다.

또 극단으로 말하면 업보론 이란 것이 있는데 이 이것은 어떤 일이나 이미

선천적으로 정해져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운명을 따르는 수 밖에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들도 말하길 

"만사가 이미 정해진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공연히 서두르고 있다" 고도 한 것이다.

 

제 2의 천의설이란 것은 곧 신의설 (神意設)이라고 해도 틀히지 않는 말이다.

천天은 인도에서는 신이라고 하여 범신梵神 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받은 바 업보가 원래 신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설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고락상은 모두가 신의 뜻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은

신의 의사에 절대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제3의 무인설(無因設)이란 것은 우연설 (偶然設)과도 같은 것인데.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경험하는 고락상은 그 어떤 원인이 있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데 불과 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 우연이요,즐거운 일을 보는 것도 우연히 발생된

것이라 거기엔 무슨 깊은 뜻이 있지않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해도 무방하다는 사고방식이 파생되게 된다. 

 

석가세존께서는 제1,제2,제3 의 설을 배격하셨다.

그리고 제4의 인연설을 택하셨다

첫째의 숙명설은 이것은 업론 業論 이라 하겠는데,

이 경우 인간 각자의 주변에서 일어난 고락상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자기가 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론적 입장에서 허용될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그 업론도 끝내는 운명론 과 같은 것이라 인간생활의 귀한 의미를

죽이는 결점이 있다.

그리고 제2의 천의설은 근거가 없는 가정설이기 때문에 취할수 없는 것이다.

제3의 무인설 또한 우연설 이기 때문에 위험한 사상이다.

이 우연설은 마치 하천 어귀에 그물을 치고 한마리도 남기지 않고 고기를

잡아버리는 어부와 같아서 인류에게 큰 재앙을 주는 것이라고 배척 하셨다.

위에든 3설은 다 인간의 자유의징화 도덕적 정신을 부정하고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없는 이론 이기때문에 석가세존께서는 취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제4의 인연설은 어떠한가?

우리들 인간의 주변에 일어나는 고락상은 인간 스스로가 뿌려놓은 종자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으로서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경우와 환경을 변모시켜 갈수있으며,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는 이상을 세워서 전진하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다.

현재의 생활고를 뼈져리게 각성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분발심으로 이상의

등불을 들고 전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요체와 가치는 주어진 환경을

변개變改 하려는 굳은 의지로 모든 악조건을 뚫고 나가는데 있다.

이리하여 이 말세적인 현실로 부터 도덕적 이상생활로 전진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속가세존이 취하신 제4의 인연설 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고락苦樂 이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보시고 인연설을 주장하시고 제법 (諸法 )이

종연생 (從緣生)하고 제법(諸法 )이 종연멸(從緣滅)함을 강조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인연설에 대하여 3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시길 ,

"우리인생의 고락경험은 주관과 객관과의 접촉에 의해 일어난 것" 이라고 하셨다 .

이것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근(根 / 감각), 경(境 /객관 ) ,

식(識 / 주관의 心 )의 3가지가 결합 하여 촉(觸 / 감각 ) 을 내고,

이 촉으로 부터 수(受/ 감정 ,경험 ) 가 생기고 그 뒤에 비로소 식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고락상 경험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인연설은 우리 인간의 경험을 심리적으로 보고 그 인식 방편으로 부터

이름을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을 말할 것 같으면 ,

우리 고락의 경험이 심리상태에 의해 변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예를 들면 금전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잃어버리거나 얻어지거나

전연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깊은 집착이 있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고통이 되고 얻어지면 즐거움이 되게 마련이다.

 

다 같은 사람이라도 욕심이 없어서 명예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없고,

목숨 까지도 아낄 것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용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조건으로도 그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마음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다만 그 사람에게는 도덕과 의리와 공정(公正)이 그 마음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권세나 금전이나 주색의 유혹으로는 그 사람을 도저히 건드려 볼 수가 없다.

옛날에 어떤 스님은 영상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진금불(황금부처님 )을 받았다.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 부처님은 스님에게 소용이지 속인에게는 필요없으니

받으십시요"함으로 중으로서 부처를 싫다고 할수가 없어서 받았다.

받기는 하였지만 진금불 이기때문에 고통거리 였다.그 내용을 아는자가 있다면

기어이 훔쳐갈 것이 틀림없기때문이다. 또 그런것이 발설된다면 그 영상에게도

중으로서 부처 하나도 잘간수하지 못하고 잃었다는 책망을 들을 것이 뻔한 일이다

 

.그 스님은 감사하다고 절을 하고 부처님을 받고 나와서는 그 집 상노 아이에게

진금불을 다시 돌려주면서 " 흙불상이나 나무불상이나 쇠불상 같으면 모실 수가 있지만 ,

금불상은 아직 인연이 먼 까닭으로 도로 받치오니 다시 권승(權僧)이나

부승(富僧)을 만나거든 전하시오" 라는 쪽지를 남기고 가버렸다고 한다.

 

또 옛날 희랍의 어떤 철인은 의복을 남루하게 입고 큰 통 하나를 굴리고 다니면서

그 속에서 자고 쉬고 기거를 하였는데 .알랙산더 대왕이 그를 성자로 보고 특별한

예유를 하려고 찾아가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었더니

"나는 아무 소원이 없으니, 대왕이 속히 물러가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비치는

햇볕을 가리시기 때문에 추우니까요" 하고 대왕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집착이 없는 곳에는 고락도 없고,생사도 없다,

'애욕만 없으면 뭇 고통이 쉬어버리고, 인연이 다하면 한 일도 없느니라"

라는 말이 있으니 생사를 집착 하기때문에 생사가 있다.

고락을 초월한 사람에게 고락이 없듯이 생사를 초월한 사람에게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용수보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이 고(苦) 라고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유루법(有漏法 )에서 고(苦) 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범부는 유루법 중에 있기 때문에 마음에 집착이 있어서 고뇌하는 이치다.

그러나 무루법 (無漏法) 에서는 마음에 집착이 없는 까닭으로 인생이 무상할지라도

우비고뇌가 없기때문에 고(苦)라고 이름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고 하셨다 .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 죽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

이 무상고가 인간에게 괴로움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생사를 뛰어넘지 못하고 살고싶다,

죽고 싶지 않다' 하는 집착이 마음 속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여의고 생사일여 (生死一如) 한 정신에 돌아가서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인생무상이라든지 죽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고뇌가 될 수가 없다.

 

당나라 함통 초에 (860~874)에 보화존자라는 스님이 계셨다.

이분은 허무승(虛無僧)의 비조(鼻祖)라고 할수 있는 분이다.

그는 생사일여의 경지를 달관하여 죽음의 문을 자기 집 문턱을 넘어가듯 했는데,

그 분의 입적에 관한 이야기는 죽음이 죽음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실증이 되고 있다 .

 

어느때 그는 임제종의 종주되는 임제선사와 함께 기거한 일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전과 다름없이 요령을 흔들며 허수룩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그런데 이날은 특별한 말을 외고 있었다. "나에게 옷 한 벌을 해주시오"

범상한 말이 아닌듯 하여 좋은 옷을 만들어 공양하는 신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거절했다 .

드디어 임제선사가 관을 만들어 주었더니 회색이 만면하여,

"임제스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운 옷을 만들어 주시니, 이제 동문으로 가서

이것을 입고 열반에 들겠소"하고 요령을 흔들며 북문에 가서

스스로 관에 들어가서 '죽었다' 고 외쳤다.

 

옛날 부처님 제자들은 이렇게 생사일여의 각오를 가지고

 '삶도 바라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분이 적지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생사고락에 대한 관념은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달라질수가 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자,떠나자.-

上記 제목을 머리속에 담고 긴(長文)글을 쉬어 가면서,

역사의 발자취를 음미 합시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카페지기,地坪-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

-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

《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두 사람의 생존자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

(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

《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金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

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

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