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 [三法印]

2015. 6. 20. 12: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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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 [三法印]

 

 

 

불교의 가장 핵심사상은 삼법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소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불변하는 것이냐? 변화하는 것이냐?”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이는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주체로서의 나’라고 말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게 뭐라는 것입니까?

‘나’가 없으니까 곧 ‘무아’인 것입니다.

이 삼단논법에 의해서 이 우주 현상계에 들어있는 모든 생명적 존재들은

전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고,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아’인데 이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방편으로써

무상함과 고통스러움을 설명해 준것입니다.

그러니까 삼법인은 삼법인이 아니고 그냥 ‘일법인’입니다.

진리는 오직 한가지 ‘무아’뿐입니다.
‘무아’ 즉 ‘나 없음’은 이 우주 현상계 안에는 그 어떤 물질 그 어떤 생명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나’라고 하는 고정된 주체로써의 주인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알기 쉽게 말해서 몸과 마음의 결합체인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조차도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를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음체이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양체입니다.

하나를 이렇게 쪼개서 인식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이렇게 쪼개 놓으니까 따로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가는 곳에 몸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마음이라는 놈이 워낙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둘이 나온 게 아니라 하나가 나온 것이고, 하나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성질은

두 개의 성질을 갖고 나오니까 쌍생이라는 것입니다.

느끼기에도 상대적 세계이기 때문에 따로 나온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상 세계는 분리의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인 것을 자꾸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인데 말입니다.

왜 분리의식이 생겼습니까? 상대성에 의해서 분리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현상계에서는 분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현상계 안에 들어있는 모든 존재는 누구도 그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도 분리의식으로 보는 것은 같습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나’로 보고 저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너’로 보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이것과 저것이 분리되어 있지만 본래 하나이고, 이것은 단지

본래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투영시켜 놓은 허상체인 개념으로서의

 ‘나와 너’라는 것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비유하자면 깨달은 사람은 파도가 치고 있는 현재 상태대로 그냥

전체가 하나인 바다로 본단 말입니다. 전체가 하나인 바다로 보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는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파도가 치던 말던 전체가 하나로서의 바다라는 인식을 안 잊어 버립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파도가 치고 있는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하나의

파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하나의 파도의식이 아니고,

항상 전체로써의 바다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상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똑같이 인식합니다.

파도가 넘실거리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그 모든

모습을 그대로 봅니다. 똑같이 보되 의식이 순수의식이기 때문에 전체가 그대로

변화하면서 생멸하고 연기되어 간다는 그 근본 진리를 한순간도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에고는 바다의식이 아니고 파도의식이란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파도의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전체성을 못 보고 순간적으로 생했다

멸하는 그 파도가 ‘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바로 없어지는 허상입니다. 허상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중생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연기에 대해서 “이것이 생하면 저것도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머리 좋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연기를

12가지로 나눠 놓았습니다.

그러면 십이 연기의 핵심이 뭐겠습니까?  
결론은 내가 태어나서, 내가 죄짓고, 내가 죽어서, 내가 심판 받고, 내가 윤회한다는

말입니다. 즉 무아연기가 아니고 개체윤회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500년 전에 부처님이 깨달은 ‘무아 연기’는 힌두교의 근본 사상인 윤회설을

개혁하는 깨달음입니다.

무아 연기는 윤회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아인데 누가 윤회를 합니까?

참나는 본래성품입니다. 상대적 무아가 됐을 때 절대적 진아가 되는 것입니다.
개체로서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어떻게 윤회를 합니까?

힌두교에서는 3000년 전부터 윤회사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뒤집었다는

것입니다. 6년동안 죽을 고생하고 나중에 보리수 밑에서 깨닫고 보니까,

무아 연기더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윤회를 깨부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가 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다시 윤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웃기는 건 뭐냐하면, 이쪽에서는 부처님 진리인 무아 연기를 이야기하면서

저쪽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고 이렇게 두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아가 뭡니까?” 하면 “나 없음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윤회는 뭡니까?” 하면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자기가 저지른 업에 의해서

돌고 도는 게 윤회입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나는 없다’ 저기서는 ‘내가 지은

업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하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기껏 사후세계에 대해 최대한으로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직선사관이었고, 그후 조금 지혜로운 사람이 나와서 “아니다. 돌고 돈다.” 하는

순환사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지혜로운  사람이 깨닫고 보니까,

돌기는 도는데 개체가 돌고 도는 게 아니라, 전체가 그냥 하나의 모습으로

돌고 도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닫고서 “나는 생사를 해탈했다.”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는 태어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본래성품이니까 태어난 이것들은

실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 따로 있고 중생 따로 있고 이런 것 자체가

상대적 개념에 의한 하나의 시비 분별인 것입니다.

일체가 본래성품이 그대로 투영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는 개체가 아니라고

말한겁니다.

 

개체의 모습으로 드러난 석가모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중 인물인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게 아닙니다.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인 부처라고 하는 배역을

맡은 것입니다. 석가모니라는 실체가 없습니다. 부처라는 배역이 주어진 것입니다.

 “너는 연극에서 깨달은 사람 역할을 해라.” 그렇게 배역이 주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연극에서 “너는 사람 죽이는 살인마가 되라.” 그런 배역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석가모니 배역을 맡은 배우 이름도 본래성품이고, 히틀러의

배역을 맡은 배우 이름도 본래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근본은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덩어리이고 이 한 덩어리 속에

눈 역할 하는 놈, 귀 역할 하는 놈, 입 역할 하는 놈이 다 제 각각인 것입니다.

역할은 다 다르지만 전체를 그냥 ‘나’라고 하는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몸을 수십조의 세포로 나누어 가지고 나, 너 이렇게 따지지 않고 그냥 전체를

‘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전체성으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전체성을 ‘나’라고 매일 이야기하면서도, 틀이 상대성에 갇히니까 개체성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 현상계 전체가 한 몸이니까 그걸 ‘나’라고 인식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우주 현상계도 결국은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참나가 아닌 것입니다.

우주 의식을 체험했다고 해도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도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무아’만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개체성의 덩어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개체성으로서의 나는 없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인 참나를 깨달아야, 그게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우주만한 틀일지라도 그 틀이 없어야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쌍생쌍멸하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불생불멸하는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무아연기와 쌍생쌍멸을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원리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A)가 생하면 (B)도 생하고 (A)가 멸하면 (B)도 멸한다.
(A)가 있으면 (B)도 있고 (A)가 없으면 (B)도 없다.


 

* 상대적 개념 A, B를 위의 칸에 넣어 보세요.
A   | 육체 | 나 |  음 |  색 |  남 | 선 | 유 | 원인 | 기쁨 | 시간 | 천국 |
B   | 영혼 | 너 | 양  | 공  |  여 | 악 | 무 | 결과 | 슬픔 | 공간 | 지옥 |

 

- 해공명상센타에서

하루를 행복하게 살려면..

★ 1. 감사로 시작하십시오.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고, 또는 어디를 가더라도
먼저,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인간관계, 문제, 사업의 문도 열립니다.


 

★ 2. 하루에 세 번 기도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내 발걸음을 인도하소서."
구하세요.


생활 중에,

"나를 도우소서." 라고 도움을 청하세요.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도 감사합니다."
기도로  평안히 잠 자리에 드세요.


★ 3. 세상을 향해 축복하십시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그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세요.

그러면 세상도 나를 향해 축복하고,
타인에게 베푼 그 축복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 4. 말을 긍정적으로 하십시오.
사실은 지금 형편이 여의치 못해도,
요즈음 어떠냐고 누가 물으면,


"예, 팍팍 잘 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세요.
사람의 생각과 말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을 지배합니다.


★ 5. 꿈을 가지십시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가슴에 꿈을 품고, 그 꿈을 구체적으로 그리세요.

 

그리고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며,
오늘 최선을 다하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


★ 6. 산을 오를 때 처음부터 정상(목표)만
바라보면 금방 지칩니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계곡 물에 손도 씻고,
그렇게 산을 오르듯이
오늘의 삶을 즐겁게 가꾸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 7.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으세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세요.


그래야만
남을 존중할 수 있고, 사랑을 줄 수도 있습니다.

-모셔온 글-

 

 

요즘,메르스땜에 걱정들 많이 하시지요.?

걱정을 안 할수는 없겠으니 지나친 걱정은

활동을 전혀 안하므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문제가 될수도 있으니

극기의 마음을 가지신다면 넘 위축되지않는 삶이 될듯 싶네요.

 

개인위생 잘 관리하셔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림니다./천국.송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미라빌리하겐[네델란드출신 11세 오페라신동 ]

푸치니 오페라 "자니스키키"중에서 

 

Amira Willighagen-O Mio Babbino Ca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