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1. 19:5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열린 종교를 위하여
나의 신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이슬람교며 힌두교의 신자도 될 수 있다.
내가 불교 수행자라는 이유가
나를 기독교 신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나의 이러한 종교적 생각이
나의 불교적인 신앙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참된 불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활짝 열려있으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삶이고,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 고집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다만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진리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이나 틀 속에 스스로 갇히길 좋아하고,
그러한 틀 속에 보다 많은 신자들을 편입시키고자 애를 쓴다.
'이것은 불교다'라고 이름 지어 놓고,
그렇게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불교에 갇혔을 때는 이미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금강경』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는 유명한 게송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 틀에서 빨리 빠져 나오라.
참된 불교 신자라면, 기독교나 천주교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저 고대 인도인들이나 페르시아인,
또 아프리카나 호주, 아메리카의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도,
공자나 노자에게서도, 저 들의 농부에게서도
또한 저 한 송이 가녀린 꽃송이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무조건 금기시 하거나,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물런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너무 편협학소 열려 있지 못하고,
불교를 너무 싫어한다거나,
혹은 성경을 읽어보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성경의 구절과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는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이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따진다면 불교도 할 말은 없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불경의 게송이나 이야기 하나 하나를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면 부처님을 신격화 시킨다거나,
신이적인 모습으로 미화시킨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불교도 진리가 아니라고 좌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경이나 성경 그 자체의 본 뜻을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바라본 것일 뿐이다.
문자에만 치우쳐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 졌다거나,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신격화 시켜놓은 것일 뿐,
거기에 내 온 존재를 내맡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깊은 곳에서 피어나오는 진리의 향기이며,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혹은 어떤 한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려 해서도 안된다.
어떤 사람은 불자인데 왜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데 어떻게 저런 나쁜 성품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그 가르침 자체를 판단하지 말라.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잘 들은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을 헐뜯는다거나 반역을 일으킨 자도 있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다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하셨다.
부처님께서도 '원을 세우지 않는 자와 인연 없는 자는 교화하기 어렵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을 보거나, 경전의 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 전체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크게 보아서' 기독교도 불교고 천주교도 불교다.
그 모든 이들의 그 모든 행위가 그대로 불교다.
불교는 어떤 특정한 종교 안에서 만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란 삶 전체의 진리이며, 온 우주, 온 세계 모든 이들,
모든 존재들에게 공통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어찌 불교가 불자들만의 진리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는 타종교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도 기독교이고 불교도 천주교란 말과 다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는 물론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그것은 불경을 또 성경을 '열린 지혜의 안목'으로
올바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성경을 꽉 닫힌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성경에 담긴 참 뜻을 볼 수 없다.
즉, 집착 없이 텅 빈 마음으로 한없는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다시말해 우리 불교 신자는 성경을 헐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무조건 잘못되었으며 나쁜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법신의 관점에서, 불교적 관점, 활짝 열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은 그러한 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분별이 없다.
당신들께서는 불교 신자를 늘리고자 애쓰지 않고,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를 늘리는데는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틀에 가두는 순간 진리도 진리의 빛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늘 활짝 열려있는 자세를 취한다.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관점이 없다.
특정한 관점이 없는 관점이 바로 진리의 관점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하고 나누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정작 당신들께서는 그런 분별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더 많은 분별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리에서는 그런 울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며
부처님은 당신을 부처라고 부르라고 고집한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편의상 붙인 것이지
당신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불교를 제창하셨거나,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불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애쓰신 적이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이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가지 신관이 있을 수 있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온전하게 서 있고,
하느님은 항상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신관을 만들어 냈고,
수많은 성경의 해석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사람들의 해석 때문에, 관점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피를 흘리는 수많은 전쟁도 일어났고, 싸움도 분열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 아무런 분별 없이 진리의 빛을 나투고 계셨을 뿐이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서 현현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툼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지 진리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로마서 8:6, THE MESSAGE]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
아집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뿐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관념, 견해에 집착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께 집중하라.
우리 안에 또 밖에 충만한 하나님의 본질에 집중하라.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에 집중하라.
그랬을 때 삼매를 얻을 수 있고,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이 현현될 것이다.
물론 불경 또한 마찬가지다.
불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온갖 불교가 나누어져 왔다.
소승과 대승, 현교와 밀교, 선불교 등 수많은 해석이 나뉘어져 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면서도 진리 그 자체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화한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근거에 따라 수많은 가르침으로 나누어 놓았고
물론 그런데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그로 인해 수많은 다툼과 분열로 아파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한 적이 없으며,
늘 그 자리에서 진리의 향기를 꽃피우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분열되었다고 부처님도 함께 분열되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시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다.
진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해석이 피를 낳았고, 전쟁을, 분열을 낳았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한가지 관점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진리로 고집하고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다.
진리는 하느님 그 자체이지,
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고 말았다.
요즘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또 신관들이 불교적인 법신의 관점의 그것처럼
활짝 열려 있는 해석을 많이 보게 된다.
기독교 안에서도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활짝 열려 있으며, 불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은 어떤 하나의 해석이 아니다.
부처라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당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신이 아니다.
신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선악을 초월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바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혜로써 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진리이고,
그것 또한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를 수 없다.
그랬을 때 성경 속에서 불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진리를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불경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그랬을 때 하느님과 부처님은 다르지 않다.
관점을 버리고 무분별로써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또 부처님을 볼 때
두 분은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과 불경은 똑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모두가 똑같은 진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성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
옹졸하며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진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항상 사람에게 있다.
사람들의 분별과 관점과 해석 그리고 집착에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항상 진리의 빛을 한없이 비추고 계실 뿐이다.
그러니 불자가 기독교를 싫어한다거나,
기독교 신자가 불교를 싫어한다거나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로 싸우고 배격하며 헐뜯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근본에 있어서는,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어떻게 치우치지 않으며 활짝 열린 시선으로 온전하게 믿는가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목사님이나 신부님, 수녀님들 중에는
그야말로 활짝 열려있는 분들이 많다.
목사님이면서 불경도 공부하고, 법회에도 참석하시며,
그 속에 담긴 진리의 가르침에 깊이 깨우치며 감사하는 분도 계시고,
신부님이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시면서
참선도 하고 불경도 외는 분도 계시다.
물론 스님들 가운데에도 성경을 진실된 마음으로 공부하고
예수님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는 분들도 많으시다.
종교를 신앙하는 데에도,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준이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이 결정되는 가장 큰 잣대는
첫째, '열려 있음' 즉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음'에 있고
둘째로, 한없이 큰 사랑에 있다.
집착을 버리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며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공통적인 지혜의 일깨움이 아닌가.
하느님과 부처님 그 자체라는 진리에 마음을 둘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에 대한 또 부처님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견해를
진리라고 여겨 거기에 집착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마음을 비웠을 때,
바로 그 때 사랑과 자비는 한없이 넘쳐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여, 그 한쪽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울타리, 그 가르침에만 집착을 하여,
그 속에 있는 이에게만 사랑을 베풀고,
나머지 다른 종교 신자는 모두가 사탄이며
올바른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이지
온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사랑하는 그런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을 그런 편협하고 옹졸한 하느님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당장에 그만 두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
별도로 편협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하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문제는 '하느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온 우주를 사랑하지 못하며
단독으로 자기 종교 신자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인만을 단독으로 사랑하셨다고 해석하지 말라.
물론 구약을 있는 그대로 문자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 힘입은
그 당시 사람들의, 유대인들의 해석일 뿐이지 본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신약보다도 구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구약의 하느님은 살생을 하고 폭력적이며
질투가 넘쳐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그대로 표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하느님으로 묘사해 놓고 있을 뿐이다.
그 말에 현혹되지 말라.
그 말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진실을 찾으라.
하느님은 어느 한 부족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분별이나 차별도 있지 않다.
온 우주 법계의 본질이신 하느님께서
어찌 조악하게 한 부족만을 사랑하고
다른 부족을 죽이려고 안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해석과 견해를 버려라.
그런 신관을 버려라.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진리는 문자 그 너머에 있다.
문자를 가지고 진리를 그대로 나타낼 수는 없다.
문자는 항상 오류가 많다.
한 가지 말을 가지고 백 명의 사람은 백 가지 해석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언어, 문자, 말이 가지는 치명적인 오류다.
문자에 연연해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그로인해 무리를 만들며, 그 해석만이 진리라고 집착하지 말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자기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상대방의 해석을 공격하며 싸우려 들지 말라.
분명히 기억하라.
하느님은 어떤 견해도 있지 않으신 분이시다.
어떤 특정한 견해나, 어떤 특정한 부족이나,
어떤 특정한 가르침에만 치우치시는 분이 아니다.
항상 하느님은 진리만을 말하며, 진리로써 살아가시는 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진리에 대한 해석, 견해가 우리를 자유케 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바로 우리들 인간이다.
내가 해석한 대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된 사랑은 내 종교, 네 종교라는 울타리를 두지 않는다.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의 대상이고,
모두가 똑같은 형제 자매며 똑같은 도반일 뿐이다.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고,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좁은 사람이다.
불교 안에서도, 기독교며 천주교 안에서도,
또 나아가 스님들 가운데에도 신부님이며 목사님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편협하고 치우쳐진 낮은 수준의 종교를 신앙하는 분들이 물론 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신행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라면
당연히 그것만이 당연한 것일 줄 착각할 것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될 것은 뻔하다.
1960년대 벌써 로마 교향 요한 23세는
세계 종교사에 획을 그을만한 획기적인 발언을 해서
종교인들을 놀라게, 혹은 경이롭게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의 반발도 컸지만,
이 교황의 말씀 한 마디는 전 세계를 평화로 물결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즉, 그 말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라는 틀 속에서
서로 많은 신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참되게 믿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참되게 믿는다면 불교도 천주교도 기독교도
그 어떤 종교신자 일지라도 참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힌두교였지만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힌두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불교도 기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고,
교황 요한 23세 또한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달라이라마 스님이며 틱냩한 스님, 숭산스님이며 청화스님 또한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었다.
참된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한결같이 '모든 이'들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내 종교인들만 행복으로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자비이며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이들이 '참된 행복'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다만 궁극적인 참된 행복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왜 '해탈'이거나 '천당'이어야만 하는가.
그 길을 왜 꼭 '예수'를 통해서만, 혹은 '불교'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궁극의 행복의 자리, 깨침의 자리에 그 어떤 모양을 만들어 두지 말라.
불교적인 해탈과 기독교적인 천당은 결코 별도로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달라이라마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종교가 불교밖에 없는 것 보다는
오히려 여러 종교가 많은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왜 애써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 종교를 늘리기 위해 다른 종교 신자들과 다투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해야 하는가.
이것은 부처님도 하느님도, 보살님도 예수님도 정작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올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불교가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 천주교가 되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참되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 성경을 열린 시각으로,
지혜의 시각으로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견해가 너무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타나는 것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 속에서 인간들의 편협하고 옹졸한 견해, 생각들을 버리고
진리로써 해석하고 받아들이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절대 종교를 바꿀 수 없는 타종교 신자를 만나더라도
애써 개종하려 들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로인해 다툼과 시기와 전쟁을 일삼고자 한다면
그것보다는 그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음을 알라.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서 불경을, 부처를,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올바로' 믿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로 믿고 실천하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천주교를 믿어도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해탈에 이를 수 있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든 기독교 천주교를 믿든
모두가 지옥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경에도 이런 말이 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그 행위이지,
어떤 종교를 믿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참되게 믿으면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를 믿는 것이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더라도 외도를 믿는 것이다.
반대로 참되게 믿으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는 것이지만
참되게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를 믿더라도 사탄을 믿는 것일 뿐이다.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를 깨닫게 되고,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종교를 믿는가에 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어떤 종교라도 좋다.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다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믿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고, 관점일 뿐이지
'그 분'들의 입장이 아니다.
'그 분'들은 사실 '들'이 아니다.
'들'로써 둘로 혹은 여럿으로 나뉘는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이 온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 어디에도 법신의 숨결 아닌 것이 없을진데,
어찌 하느님은 법신이 아니고, 예수님은 법신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떻게 신부님이나 수녀님, 목사님은 법신이 아니고
타종교 신자라고 법신으로써의 본래불이 아닐 수 있겠는가.
나누기 시작하면 천차만별로 갈라지지만
하나로 보기 시작하면
전체가 한 맛으로 귀일하게 된다.
그렇게 하라.
나누어 두고 보지 말라.
나눔으로써 더 옳고 그르며,
잘나고 못난 것을 나누고
그를 가지고 싸우며 다투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온 우주에 두두만물 진리의 나툼이며,
법신 부처님의 나툼일진데,
어디에서 타종교를 찾을 것이며,
어디에서 별도로 다른 신을 찾을 것인가.
부처를 부처라고 이름붙였듯이,
부처를 신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싸워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나누어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큰 진리의 관점에서 전체를 바라보라.
어떻게 믿고 신앙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종교인을 대하고, 다른 종교를 대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세상의 이치
이치가 적요하면 사물도 적요하다 사물을 버리고 이치에 집착하는 것은 그림자 없는 형체를 남겨둔 것과 같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 경계도 비어있다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은 냄새나는 음식 앞에 모여든 모기를 쫒으려는 것과 같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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