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집착하지 말라/법상스님

2015. 7. 25. 19: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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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에 집착하지 말라/법상스님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 신념, 혹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치관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가치관이란 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른 문제인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를, 어떤 사상을, 어떤 사고나 생각을,
또 어떤 사람의 신념을 선택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내 문제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나에게 있다.

어쩌면 세상살이라는 것이
수많은 가치관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고 버릴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놓고 벌이는 연극같은 공연이 아닐까.

어쨌든 이렇게 선택하는 가치관이 바로
내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살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가치관으로 생각이 굳어져 있으면
그 생각대로 경험되어지기도 하고
그 경험은 또 다시 그 가치관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 가치관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 가치관대로 세상을 사는 것만이 의미 있는 길이라 여기곤 한다.

나와 상대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살 수 있지?’
나는 내 경험을 통해 분명한 진리로 인정된 것을 받아들였는데
저 사람은 불쌍하게도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며
거기에 집착해 살고 있구나 하고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처럼
상대방도 분명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도 나를 보며 불쌍하게 안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불교라는 가르침을 내 삶의 진리로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기독교라는 가르침을 내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둘은 상대방을 보면서 안쓰럽고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어떻게 저 종교를 선택할 수 있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 속에서 타종교를 선택하고 그 이치대로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며
거부감과 배타적인 느낌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편이다.
이 세상의, 이 인류의 역사를 보라.
어떤 종교를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가 수많은 전쟁과 죽음을 몰고 왔다.
내가 선택한 종교, 내가 선택한 가치관에 갇혀
이것만이 올바른 종교이고 가르침이며 절대적인 것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사탄이며 마귀이고 완전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전쟁을 일으키고 죽이는 일들이
이 인류의 역사에는 수도 없이 일어났고 또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어떤 가치관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지는 않다는 자각이 더 중요하다.

불교라는 종교만 100% 절대적으로 옳은가.
만약 어떤 불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불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도 수많은 경전에서도 말하길
불교에도 집착하지 말며, 경전의 말씀에도 집착하지 말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도 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깨어있는 정신이다.
참된 진리는 어떤 한 가치관에, 어떤 한 신념에, 어떤 한 종교에
전적으로 집착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열려있음, 무집착의 정신이야말로 진리를 진리일 수 있게 하는 정신이다.

참된 불자라면 기독교 성경을 보면서도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그 안의 진리를 볼 수 있다.
왜 우리가 성경이 불교 경전이 아니라는 그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미리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좋지 않은 느낌이나 판단을 앞세워야 하는가.
그런 선입견과 편견들은 성경 안에 담긴 참된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뿐이다.

어떤 한 종교에 갇힌 어리석은 이들을 보라.
어떤 한 종교에서는 교주를 영생을 위해 죽을 것을 강요하기도 했고,
또 어떤 한 종교에서는 집단 자살을,
또 다른 종교에서는 테러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지금 이 순간도 어떤 종교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같은 가르침을 토대로 하는 두 종교집단이
그 가르침의 해석 차이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일들이 모두 어떤 한 가르침, 어떤 한 신념, 어떤 한 가치관, 어떤 한 종교만이
옳다고 스스로 결정짓는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이처럼 잘못된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선택하여 믿게 되면
그 가치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일이나
남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도 아주 쉽게 자행할 수 있지 않은가.
이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와 같이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
또 그 가치관에 얼마나 집착하여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문제는 우리 삶을 전적으로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라.
모든 삶의 행위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행위 즉 업들은
그 이면에 어떤 한 가치관, 신념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주 사소한 행위 하나까지도 그 이면에서 어떤 특정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예는 너무나도 많다.
아니 너무 많다기 보다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모두 다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라고 탓하거나 지적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가치관을 바꿀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를테면 햄버거나 피자, 통닭,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푸드 등을 좋아하는
아이의 식습관을 바꾸고 싶다고 해 보자.
부모님은 아이에게 매일 같이 잔소리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쉽게 바뀌어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아이의 가치관에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있고, 패스트푸드를 먹고 있으며
이렇게 많은 패스트푸드 전문점들이 깨끗하고 정갈해 보이는 상점에서 팔리고,
심지어 TV에서도 입맛을 자극하듯 이미지 광고를 하고 있는데
설마 이렇게 대중적인 것이 몸에 좋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는
그런 가치관이 깔려 있을 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너무 맛이 있다. 입맛을 자극한다.

어지간한 사람들이 몸에 좋지 않다고 해도
이미 길들여진 입맛을 포기할 정도는 못 될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는 막연하게 몸에 안 좋으니까 먹지 말라는 말보다는
또 다른 가치관을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중적인 패스트푸드점의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서운 경제논리와 생명경시, 욕망 충족 등의 본질을 바로 보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통닭 한 마리가 우리 앞에 오기까지는,
30년 이상 즐겁게 커가야 할 것을 한 달여 만에 잡아 오며,
그러기 위해 매일같이 24시간 켜 놓은 전깃불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매일 항생제, 호르몬제, 성장촉진제 등을 맞으며 자란다는 점,
또 그런 통닭을 먹은 사람이 낳은 여자 아이가
3년만에 가슴이 나오고 5살이 되어서 생리가 시작되는 현상이
미국 전역에 3000여 명 이상이 발견, 보고 되고 있다는 점 등을 알려준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긴가 민가 하다가도 가만히 듣다보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계속해서 입맛 때문에 먹겠지만
이면에 가치관에서는 자꾸만 반대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점차로 먹는 일상 자체가 조금씩 바뀌어 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관대로, 믿는대로 내 몸도 현실도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내 가치관이 점차 확고해져서 입맛보다 더 중요하다 싶은 어떤 선을 넘어서면
이제 그런 식품들을 먹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란 얼마나 신념에 많이 구속되어 사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신념 때문에 자살도 하고, 신념 때문에 사람도 죽이고 하는 판에
신념으로 인해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게 되는 것 쯤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그렇다고 그 신념에도 완전히 집착해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가치관도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전적으로 옳은 가치관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가치관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집착심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패스트푸드, 인스턴트식품이 좋지 않아 먹지 않겠다고 했더라도
거기에 너무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 먹는 사람을 증오하거나
얕잡아 보거나 어리석게 보거나 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때로 직장이나 대중이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다함께 인스턴트 식품을 먹게 된다면
인스턴트는 나쁘다는 가치관에 얽매여 ‘난 절대 못 먹어’ 하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혐오하거나, 과도하게 자연스런 분위기를 깰 것 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에도 너무 집착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로써의 본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요즘 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이 많다고 하던데,
이 또한 우리의 선택일 뿐이지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살아 온 환경이나, 직장, 대학 등에서 어떤 가치관을 주입 받아왔는가에 따라
우리는 보수를 택할 수도, 때로는 진보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어느 한 쪽 극단에 치우쳐 집착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보수라고 해서 진보집단을 폄하하고 미워하며
심지어 원색적인 비난에 나아가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거나,
진보집단들이 보수를 폄하하고 비난하며
나아가 보수는 썩어 없어질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제 건전한 보수나 진보가 아니며, 중도가 아닌
어리석은 집착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수냐 진보냐 아니면 그 중간 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수에 혹은 진보에 얼마만큼 집착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없을 수 없고
서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다른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건전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진보도 보수도 다 필요한 것이고 나름대로의 몫이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과도하게 편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참된 보수는 보수이면서 보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보수를 놓아버릴 수도 있고 대신에 진보를 선택할 수도 있는
그런 열린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자다.
보수를 위해 보수를 선택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활짝 열린 정신으로, 언제라도 내 생각이 틀렸다면 놓아버릴 수도 있는 마음이 있다면
보수를 택하든 진보를 택하든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도 중도를 걷는 자일 것이다.

때때로 보수냐 진보냐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면
나라를 둘로 나누기도 하고, 서로 죽고 죽이며 전쟁과 폭력을 가져오기도 하지 않은가.
가만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가 선택한 가치관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가치관 하나 때문에 우리 삶이 전 인생을 걸쳐 드러나게 된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와 같다.
그러니 내 가치관은 어떤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 이면을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너머에 딱 버티고 있는 가치관을 찾으면 의외로 쉽게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니 첫째는 올바른 가치관, 좀 더 좋은 가치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는 어떤 가치관이든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방편의 가르침인 첫째도 중요하고
본질의, 근본의 가르침인 둘째도 중요하다.
방편을 무시하고 세상을 살 수도 없고
본질을 무시하고 방편만 가지고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가치관이란 무엇이 있을까.
잘 선택한 가치관은 우리 삶을 보다 향기롭게 하고
본질적인 생명의 숨결을 드러나게 해 준다.

방편의 좋은 가치관을 예를 들어 본다면,
선을 행하라, 보시를 행하라, 집착하지 말라. 소박하게 살라,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와 행위를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라,
때때로 산 길을 거닐라,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라,
인위적인 것 보다는 무위의 자연과 벗하라, 녹차를 즐기라,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지라, 외로움은 좋은 것이다,
개발과 발전의 논리보다는 보존과 생명의 정신을 지키라,
가공된 먹거리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를 택하라,
뭐 이런 정도의 가치관을 선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하면 좋고 나쁜 것이 생기고
좋고 나쁜 것이 생기면 미움과 사랑이, 애정과 애증이 생긴다.
둘로 나뉘는 순간 다툼과 전쟁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기도와 명상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선택했다고
기도도 하지 않고 명상도 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어리석다고 폄하하거나, 못났다고 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순간 상대와 나는 둘로 나뉘게 되고
좋고 나쁜 판단은 곧 마음 속에 다툼과 애정과 증오를 남긴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본질은 그 어떤 가치관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부처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일 것이다.

모든 가치관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를 버리고
좋고 싫은 판단을 버리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 어떤 것도 인연따라 선택하여 쓸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바로 부처다.

어떤 한 특정한 가치관에 집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가치관이라도 거부감 없이, 편견 없이, 치우침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여 쓴 뒤에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할 때가 오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참된 중도의 가르침이다.

어떤 한 가지 가치관에 집착되지 말라.
그것이 내 정신을 옭아매고, 심지어 나를 죽이고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
그로인해 내 삶의 모습이 인위적인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모든 가치관을 버리라.
버리되 모두를 다시 가지라.
다 버리고 났을 때 비로소 모두를 자유자재하게 가져다 쓸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불교에도 집착됨이 없어야 한다고 했고,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도 했다.

내가 삶 속에서, 대인관계 속에서, 일 속에서
선택한 가치관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가만히 살펴보라.
할 수 있다면 가치관, 신념 목록을 만들어 보라.
그리고 그 가치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툼과 미움과 증오, 혹은 애정과 소유를 낳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

하나 하나의 가치관 목록에는
분명 수많은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뒤따라 이어질 것이다.
좋은 일에는 더욱 애착하고 나쁜 일은 더욱 증오하는 마음이 연이어 생겨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눠놓고 사랑과 증오를 하게 될 것이다.
내 편과 상대 편이 생겨나게 되고, 내 것과 네 것이 생겨나게 되며
거기에서 크나큰 어리석음인 ‘아상’ ‘에고’가 또아리를 틀고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 목록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좋고 나쁜 일이 사라지고 연이어 대 평등, 평화, 적멸의 고요가 뒤따를 것이다.

가치관을 선택함이 없다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시비 분별이 끊어지고
이 세상과 나와의 모든 나뉨이 사라지며
모든 사랑과 미움, 투쟁과 다툼이 모두 고요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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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선 / 법정스님


선(禪)이란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써 타인을 향해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방 안에서만 통하는 선이라면

뒤주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뒤주 속에서 살아 나갈 길을 찾아

인간의 거리로 뛰쳐 나와야만
비로소 창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창백한 좌불은 많아도 살아 움직이는
활불(活佛)이 아쉬운 오늘이다.

- 법정스님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나이들수록 친구가 필요하다 / 이외수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라는 

인디언 속담 이 있다.

좋은 친구는 과 같아서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처럼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하다.

 

때로는 과 같아서

싹을 틔우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줄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의 소유자다.

인내하며 살아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이
요즘 생활이다.
그러한 순간마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줄 친구 같은 배우자가 있고

망설임 없이 힘든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편한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이 즐거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