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선사 / 지안스님

2015. 7. 25. 19: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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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쓴  대주<大珠> 선사 

 

중국불교에서 가장 널리 쓰진 말 가운데 하나가 돈오(頓悟)라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불교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도의 부파불교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말이다.

선(禪)에서만 쓰여진 말이 아니라 교에서도 널리 쓰여진 말이다.

특히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으로 알려진 <원각경>이나 <능엄경> 등에서도

이 돈오를 강조하고 있다.

 

‘단박에 깨친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이 때로는 깨달음을 최후의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수행에서 본격적인 수행 자체가 이 돈오를 통하여 시작된다는 매우

특이한 뉘앙스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가 그러한 뜻을 가진다

돈(頓)이란 원래 어떤 방편을 의지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혹은 비약적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에서 나와 육조 혜능 대사가 선의 돈오종지를

선양한 후에 선의 근본 대의를 천명하는 말이 됐다.

특히 조사선이란 말이 생기고부터 돈오는 실참(實參)공부의 가장 핵심적 말이 됐다.

 

선어록 가운데 <돈오입도요문론>을 쓴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가 있었다.

생몰연대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등록(傳燈錄)> <조당집(祖堂集)>

등에 의하면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로 되어 있다.

처음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출가한 후 강서(江西)에

있는 마조스님을 찾아가 법을 구하며 6년을 시봉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처음 마조 스님을 찾아갔을 때 마조 스님과의 문답이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는가?”

“무엇하려 여기 왔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자기 집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불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 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저의 보배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이 자재한데 어찌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이 말 끝에 혜해 스님이 크게 깨달았다 하는데 이런 경우를 돈오라고도 한다.

 

<돈오입도요문론>에는 돈오에 대하여 밝힌 말이 있다.

“어떤 것을 돈오라 합니까?”

“돈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요, 오란 얻은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니라.”

(頓者頓除妄念 悟者悟無所得) 돈오의 근본 내용을 이렇게 말하였다.

 

혜해 선사가 은사인 도지화상이 연로하여 대운사로 돌아와 도지 화상을

모시다가 책 한 권을 저술한 것이 <돈오입도요문론>이다.

그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소박하게 숨은 생활을 하다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을 조카상좌였던 현안(玄晏) 몰래 가져가 마조 스님에게 보였다.

마조 스님이 이 책을 보고 대중에게 말했다.

“월주에 큰 구슬(大珠)이 있으니,

둥글고 밝은 광명이 비치어 자유자재 하고 걸림이 없구나!”

 

이렇게 마조스님이 감탄하고 칭찬한 것이 게기가 되어 대주라는 이름을

다시 얻게 되고 선문(禪門)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등록> 대주 스님의 법문이 다른 스님들보다 더 많이 실려 있다.

 

<돈오입도요문론>의 특징은 다른 선어록과는 달리 대주 스님이 직접 쓴

글이라는 점이다.

<육조단경>이나 <전신법요> <백장광록> <임제록> 등은 당시의 사람들이

법문을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거나 후세 사람들이 수집하여 엮어낸 것이지만

<돈오입도요문론>은 직접 써서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어록이다.

50여개의 주제를 가지고 문답형식으로 간명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주제의 핵심요지를 바로 설해 놓았다

 

- 지안스님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68. 온갖 이치를 두루 찾기에 바쁘지만

     자기 몸도 스스로 구제하지 못한다.
     廣尋諸義紛紜 自救己身不了- 지공화상의 대승찬에서

추론과 이해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추론과 이해란 사실에 대한 추상적 해석에 불과한

공중누각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추론과 이해는 그럴 듯하지만 사실 자체는 아닙니다.

추론과 이해로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추론과 이해가 가닿을 수 있는 맨끝에서

영적인 비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이빙 선수가 절벽 끝에서 과감하게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듯,

스스로 의지하고 있던 알음알이를 포기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그러한 비약을 가능하게 합니다.

텅 빈 허공 속에 자기를 던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혼란이 공부의 과정입니다.

자기 해체의 공포를 느낀 자아는

머뭇거림과 의심을 통해 저항을 합니다.

스스로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온갖 수단을 발휘합니다.

발심이 간절하지 못하면 대부분 이 상황에서 뒷걸음질칩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알 수 없음 속에

한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내면이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불분명함과

정체감, 막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과정이 공부의 과정입니다.

분별심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공부 과정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피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깜냥으로 공부하는 것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끌려가듯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피상적 학문은 자기 의지와 계획에 따라 해날 수 있겠지만,

진리 탐구는 기존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잃어야만 자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몽지릴라 밴드에서

 
  
Lullaby [Jim Chapp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