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진 교수의 불교 우주론

2015. 8. 1. 19:55일반/생물·과학과생각

728x90

 

 

불교의 우주론                                       

   양형진<고려대 교수·물리학과>

 <18>진리에 세우는 이정표

- 불교와 과학 만나면 엄청난 문화적 잠재력 표출 -
- 서구문명 한계 불교를 인류구원의 등불 삼아야 -

오늘날 우리는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혁명에서 시작하여 산업사 와 후기 산업사회를 거쳐 이제는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고, 기초 과학은 소립자의 극미의 세계에서 우주 저쪽의 극대의 세계에 이르기 까지 인간 지식의 지평을 넓혀놓았다. 러셀이 이야기했듯이 철학이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종교적 윤리적 견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의 세계관 혹은 철학은 자연 과학이 이해하는 세계상과 자연 과학이 제공하는 삶의 기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된다. 철학이 자연과학을 포함하던 시기가 있었듯이, 철학이나 세계관과 자연 과학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역동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과학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 삶은 물론이고 그 정신적 기반까지도 과학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마젤란의 항해, 다아윈의 진화론 등에 나타난 자연관의 변화가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상에 젖어있던 서구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뉴턴은 과학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 혹은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고 하였고, 엥겔스는 ‘자연 변증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법칙이 자연 과학과 같은 견고한 기반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자연의 이해에 기반하여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뉴턴과 엥겔스 시대의 미숙한 자연상이 아닌 현대의 성숙한 자연 과학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자원이 서구 문명에 대해 반성적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과학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불교적 세계상이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불교의 세계관은 과거의 철학이나 다른 모든 종교와는 달리 현대 과학의 제성과와 놀라운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는 서구 문명이 제공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비판을 과학 문명에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문화가 만나 융합되면 엄청난 문화적 잠재력이 표출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따라서 동양의 위대한 정신적 문화 유산인 불교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융합시킨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할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며, 이 작업은 불교적 가치관으로 서구 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과학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아무리 긍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무의식중에 갖는 편견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 대단히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게 된다. 이 편견이란 과학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 연유한다. 과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는 작업을 전적으로 합리적 체계인 과학을 이용하여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불교를 증명하려는 것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차라리 과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안하느니만 못하다. 사실 과학과 불교는 그 자체로서 서로 연관이 없으며, 마치 방법을 달리하여 산을 오르는 두 사람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헬기를 타고 산정상에 내린 한 사람과 한 걸음씩 걸어서 정상에 도달한 또 다른 사람과 같이, 두 사람이 지나온 길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산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 자신들의 과거 역사와는 상관없이, 서로 같은 장소에 서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두 번째 사람이 파악하는 세계는 첫번째 사람이 파악하는 세계에 훨씬 못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걸어올라가는 사람의 눈에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전경들이 펼쳐지게 되었고, 그 사람이 보는 세계는 언젠가 그 산에 올랐다는 사람이 전해주었던 그 모습이었다. 아직 그 소식을 완전히 재현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선각자가 깨달았던 소식, 그 2천5백년을 전승되어온 빛나는 진리를 자연 과학이란 방식으로 한 걸음씩 땅만보고 걸어온 전혀 다른 발걸음이 이제 약간이나마 파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학의 업적은 선각자들의 깨달음만큼 포괄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안심하며 안주해서는 안된다. 불교가 새로운 문명의 중심적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하여, 인류 구원의 대승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이것은 또한 서구에 진 과학문명의 빚을 동양이 정신으로 갚는 길이 될 것이다.

 

<19>연기에 의한 감각경험

- 객관세계 스스로 존재할수 없는 인연의 화합 -
- 감각기능 없다면 어떤 대상도 나타날수 없어 -

얼마전 어느 불교대학의 강의에서 바닷물은 왜 짜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를 국민학생 수준의 질문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제일 먼저 떠 올릴 수 있는 답변은 중고등학교의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이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무기물이 물 속에 녹아 들게 되는데, 오랜세월 물이 증발하여 농축됨에 따라 바닷물은 높은 농도의 무기물을 포함하게 되고 특히 그중에서도 염화나트륨이라는 성분이 짠 맛을 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어떤 화학물이 들어있기만 하면 짠 맛은 저절로 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이 그렇게 자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주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사실이 모든 생물에게 보편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짠 맛을 감지할 수 없는 생물이 존재한다면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아마 그럴 것 같다). 인간에게는 아주 짠 소금물이라고 할지라도 그 생물은 전혀 짜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위의 대답은 인간의 미각을 전제하여야만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과 관련하여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무지개는 왜 생기는가? 이는 대학교 수준의 물리학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인데, 굴절과 반사의 법칙, 그리고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은 굴절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비가 온 후 공기 중에 물방울이 많이 떠 있으면 태양의 반대쪽 방향에 둥글게 무지개가 뜨는 이유를 위의 설명으로 부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의 시각 기능을 전제로 한 답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무지개가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빨강색에서 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빨강색보다 파장이 더 긴 적외선이나 보라색보다 파장이 더 짧은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9가지 색이 될 것이다. 빨강색만을 감지할 수 있는 생물에게는 무지개가 빨강색 만으로 만들어진 원호가 될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로 하늘색만을 감지하는 생물이 있다면, 이 생물은 하늘색과 무지개를 구별하지 못하여 무지개라는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시각과 미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 기능에서도 찾 을 수 있다. 청각에 있어서도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 즉 20에서 20,000싸일클 에 해당되는 음만을 들을 수 있다. 그 한 예가 우리는 초음파를 들을 수 없 다는 것이다. 후각이나 촉각의 경우에도 비슷한 논의가 가능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은 제한적이며 또한 선택적이어서, 인간이 감지하는 생리 한계 내에서 우리의 신체가 그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대상과 화합되어 있어 야 지각경험이 나타나게 된다.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만으로 무지개는 생기지 않는다. 적절한 위치에 있는 물방울, 태양, 광학 법칙, 우리의 감지 기능이 모두 화합하여야 한다. 즉 우리 의 감각 기능에 대하여 이 감각 기능에 관련되는 감각을 제공하는 객관이 화 합하는 경우에 한하여, 우리의 지각경험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지각 경 험들이 우리에게 나타남으로써, 이 지각경험을 제공한 대상은 비로소 짜다거 나 무지개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엮어진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엄경에서는 이를 “모든 것이 인연이 화합하면 허 망하게 생겨나고, 인연이 별리 하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였다, 또한 반야 심경에서는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였다. 이를 데바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색성향미촉법이 없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안이비설신의를 얻을 수 있겠는 가?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한다면 색성향미촉법도 또한 얻을 수 없을 것이 다. 이와 같이 그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인연따라 화합되었다. 이 는 곧 생멸법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객관 세계 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이는 객관 세계가 본성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연 결되며, 이 문제를 이 글에서는 언급만 하고 자세하게 취급하지 못한 ‘우리 의 지각경험에 나타난다’는 문제와 함께 연기론이나 중관 철학과 연관시켜 앞으로 더 다루어보겠다.

이 글과 연관시켜 한 가지 하고싶은 말이있다. 많은 사람이 불교를 어렵다고 한다.그래서인지 불교를 과학과 연관시킬 때에도 현대의 첨단 과학과의 관계 가 많이 논의된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고전과학으로는 상상도 못 하는 것이었는데 현대과학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조명되는 부분이 많기는 하 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첨단 과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과 연 관되는 과학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증해 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으 며 또 그래야 할 것 같다.

 

<20>연기 즉 공

- 만물은 독립자존성이 없고 가명에 불과 -
- 결합된 연기요소 흩어지면 공만 남아 -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한다. 이를 공이라 한다.

불타는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고 하였다.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 하며, 이는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연기설로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12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교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識)이 있고…생(生)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노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행이 멸하면 무명이 멸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연기설은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생기와 지멸의 인과관계에 관한 가르침이다.

또한 연기는 “바퀴라는 부분에 연하여 수레가 있다”라는 것에서 처럼 바퀴라는 부분등이 상호 의존하여 수레라는 명칭이 생겨난다는 소위 상의성(相依性)의 대승철학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불타의 가르침은 일체 존재는 그 스스로 생겨나지 않으며 무아무실체(無我無實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금 잘못 해석하면 불타의 무아선이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을 부정하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인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들 주관이 갖는 실체에 대한 관념은 객관적 여러 요소에 의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며 그 스스로의 독립자존성이 없는 무아무실체적인 가명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객관적인 제요소는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상좌부(上座部)계통에 있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견해로서 아공법유(我空法有)혹은 인무아법유(人無我法有)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설일체유부는 여러 제요소가 삼세에 걸쳐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모두 실유(實有)한다는 삼세실유설(三世實有說)의 교의를 전개하였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우리가 지난 번에 논의하였던 무지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오늘은 이 문제를 객관 세계의 본성 혹은 객관 세계의 성품과 연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무지개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일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과학자는 물방울에 광선이 비치면 파장이 다른 여러 가지 빛이 어떤 각도로 다르게 굴절되고 반사되는 지를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무지개가 이것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시각감지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만을 우리 눈은 느낄 수 있으므로 일곱 가지 빛의 무지개가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을 지난 번에 논의하였었다. 이렇게 무지개가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과 태양 광선, 그리고 광선이 지나는 경로에 대한 물리법칙 만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을 분석한다 하여도 이 물방울에서 무지개의 본성을 발견할 수는 없게된다.

즉 이 물방울은 무지개의 성품 혹은 무지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방울에는 무지개의 본성이 없으며, 무지개라는 현상은 여러 가지 제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조성됨으로써, 즉 인연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되며 이 때 무지개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촉각의 예를 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일례로 우리가 매끄럽다고 느끼는 어떤 물질의 표면은 매끄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원자 배열을 본다면 그것은 설악산의 바위 능선보다도 더 요철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 요소가 화합하여 우리에게 느껴질 때, 이 물체는 부드럽다는 느낌을 주게 되며, 이로서 이 물체는 부드럽다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렇듯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모든 인지 경험의 원천이 되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전부 성립된다.

이와 같이 그 자체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든 요소가 화합하고 연기하여 나타나는 것을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를 용수(龍樹)보살은 중론(中論) 제24장 18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이 공성을 가명이라고도 하며 중도라고도 한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용수보살은 연기와 공성의 등식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연기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에서 본다면 무지개나 부드럽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요소의 화합이라는 연기에 의해 현현한 것이다.

이렇듯 일체의 존재가 시간적으로는 원인의 요소에 의존하고, 공간적으로는 같이 존재하는 다른 모든 요소에 서로 의존하게 되므로 공하다고 하며, 그렇 기 때문에 상주성(常住性)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중관철학(中觀哲學) 의 연기론은 곧 무상, 무아, 공, 중도의 의미를 갖게 된다.

 

 

<21>불생불멸

- 일체는 순간적 존재…영원불변한 물체 없어 -
- 양성자 속에 무수한 미립자 매순간 찰라생멸 -

일체 사물 즉 일체법이 연기이며 무자성이라는 연기무자성공론이 용수보살이 확립한 중관사상의 근본이다. 이 중관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중도사상을 계승한 것이요 후에 삼론종은 물론이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파에 그 영향을 미쳤으니, 모든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교의가 된다고 하겠다. 중관 사상에 관한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논서가 중론(中論)이요, 이 중론의 맨 처음 귀경계에서 밝힌 내용이 팔불중도(八不中道)이다. 이 글에서는 이 팔불중도를 대표하며 반야심경에도 나오는 구절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찰라멸론과 연관시켜 이야기해 보겠다.

연기와 무자성공 그리고 마음에 나타는 연기에 의한 객관 등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하여도, 나에게 이러한 감각을 제공하는 객체는 실재하여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내 눈 앞에 보이는 책상이 실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에게 책상이라는 모습이 보일 것이며, 또 어떻게 책상이라는 관념이 생겨나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일체의 존재자를 인연생기하는 무생한 존재로 보는 무상관이 근본 불교 이래의 기본적 교의라면, 위의 의문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의문은 인도 불교철학에서의 순간적 존재론 즉 찰라멸론의 논의와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찰라멸론이란 우리가 보는 사물이 언뜻 보기에는 순간순간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 순간마다 생멸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의하면 우리가 보는 한 순간 전의 존재와 한 순간 후의 존재는 이 생멸의 과정에서의 원인과 결과 즉 인과로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이 된다.

그러나 순간적 존재에 관한 이 명제는 이미 그 자체가 우리 지각에 현현하는 것 배후의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지각에 의해 확인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만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다. 이 논증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설명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를 현대물리학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지를 논의하고자 한다(다소 까다로운 이 논증을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하겠으니 관심있는 분은 인도불교철학책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만약 자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자가 있다면, 이 존재자는 다음 순간에 존속하게 되고 그 다음 순간에도 또 존속하게 되므로, 이러한 존재자는 영원히 존속하게 된다. 따라서 사물은 한 순간 존재하고 사라지든지 아니면 영원히 존재하든지의 두 가지의 양상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둘의 중간적인 양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소중배척논증법(反所證排斥論證法)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찰라멸이다’라는 명제를 찰라멸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확증을 시도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효과적 작용성을 말하므로, 작용은 한 순간에 즉 동시적으로나, 아니면 어떤 간격의 시간에 걸쳐 즉 계시적(繼時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존재자가 계시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각 순간마다 그 본성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작용의 순간 전후에 다른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영원한 작용일 수 없고, 또한 작용이 없는 것은 비존재를 의미하므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순간적인 존재라는 논증이 성립한다.

이제 현대 물리학의 입장을 살펴보자. 자연의 궁극적 구성물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물리학은 그 실체를 하나하나 해명해가고 있다. 원자론에 의해 이 우주의 다양한 물질은 1백여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뒤이어 이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반지름은 10-15m 정도이다. 이것이 얼마나 작은 크기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양성자나 중성자를 지름이 10㎝인 사과에 비유한다면, 1㎝라는 길이는 지구에서 태양에 이르는 거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미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초이다. 이 짧은 찰라를 사는 무수한 미립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순간적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찰라멸하고 있다. 생하면서 동시에 멸하는 이 존재자의 양태를 어떻게 생한다거나 멸한다는 한 단어로서 드러낼 수 있겠는가? 불생불멸이라는 말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이러한 현대의 물질관은 비단 찰라멸론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상의상대하는 존재여서 자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찰라멸론을 인정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 실유한다는 설일체유부에서와 같은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연기무자성공론에 기초한 찰라멸론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자연관은 일체 존재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근본 불교 이래 대승철학으로 이어져 온 무상하고 무자성공이라는 불교의 근본 교의를 우리에게 예증하고 있다. 

 

<22>중도철학과 원자론

- 찰라생멸하는 무수한 미립자 본성 없어 -
- 중도철학은 양극단을 포섭한 空의 세계 -

데모크리토스 이래 서구의 원자론은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탐구하고자하는 것이었고,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이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원자라고 불 렀다. 물질의 구성 요소로서의 원자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는 주기율표가 완 성되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물질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해 보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원자는 1백여 종 밖에 안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원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자를 이루고, 무수히 많은 수 의 분자들이 모여 우리가 보고 만지는 물질 즉 거시세계를 이룬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렇게 주기율표를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때 까지 원자 자체 의 구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 원자 구조를 탐구하면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원자론이 본래 의미하였던 바와는 달리, 원 자는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우선 이 원자의 구조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가장 간단한 구조의 원자는 수소 원자이다. 수소 원자는 하나의 양성자가 원자핵을 이루고, 그 주 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 양성자나 중성자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 량이므로 원자의 질량은 거의 대부분 양성자의 질량이다. 따라서 수소 원자 의 경우 원자핵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량이 되며, 다른 원자의 경우 이는 대부분 전자 질량의 3천6백배 이상이다. 그러나 원자핵의 반지름 이 10-15 m 정도이고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10-11m정도이니 그들이 차 지하는 공간적 부피는 그들의 질량과는 오히려 반대이다. 워낙 작은 숫자들 이니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양성자를 반지름이 1Cm 정도인 구슬로 부풀린다 고 하자. 그러면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백m정도이다. 이 모형에 의하면 원 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은 반지름 1Cm인 구의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원자 질량의 1/1,800 밖에 안되는 전자는 반지름 5백m의 구가 차지하는 삼차원 공간을 도는 것이 된다. 더우기 이 두 구가 차지하는 부피 의 비는 1:125,000,000,000,000정도이다. 가령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전 자를 다 떼어내고 원자핵 만으로 뭉쳐 놓는다면, 반지름이 0.01mm 쯤 되는 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물체를 보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물체의 질량의 대부분은 100조분의 1이라는 작은 공간에 몰려 있을 뿐이 고, 그 나머지 부분은 거의 텅빈 공간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그 텅빈 공간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돌고 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하고, 매끄럽다거 나 거칠다고 하고, 맛있다거나 맛없다고 하며 깨끗하다거나 더럽다고 한다. 20세가 초의 과학자 일부는 원자의 구조를 알고 나서 자연의 궁극적인 모든 구조가 밝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었다. 원 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것 역시 궁극적 인 물질은 아니었다. 이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 어져 있다. 이 미립자들의 수명은 불과 10-23 초에 불과하니, 순식간에 이어 지는 생과 멸은 분자 그대로의 생과 멸이 아니다. 생과 멸 서로가 서로에 대 해 동인(動因)으로 존재한다. 생과 멸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역동적으로 결 합하여 있다. 바로 생즉멸이요 멸즉생의 세계이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생이 나 멸 그 어느 것으로도 온전히 표현될 수는 없으니, 이를 일러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월정(月正)스님이 불생불멸의 멸이 찰라멸이라 고 해석한 것은 현대물리학의 관점과 연관된다 하겠다.

이처럼 순간에 생하고 멸하는 이 미립자들이 고정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성을 가지지 않는 무수한 미립자들이 관계의 틀 속에서 양 성자와 중성자를 형성하니, 이것이 곧 연기요 공이다.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 모든 것이 오직 연기일 뿐이니 공이요, 공이지만 연기에 의해 우리 앞에 현현하니 그것이 색이다, 그러므로 연기무자성공(緣起無自性空)혹은 색성공 (色性空)이라 한다.

불생불멸만이 아니라 용수보살이 설한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거불래(不去不來), 그리고 반야심경의 불구부정 이나 부증불감 모두는 어느 한 극단이 아닌 중도의 철학을 나타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였다. 이때의 중도란 양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여의면 서도 양극단을 포섭하는 것이어서 공가중(空假中)의 삼제가 원융하니 천태의 기본교의와 연관된다. 또한 양극단을 여윈 중도의 깊은 이치는 생이나 멸등 의 양극단의 문자가 의미하는 바에 의해서는 나타내질 수 없으니 언어나 문 자, 관념의 한계가 발생하게 되며, 이는 승의제와 세속제나 선불교에서의 언 어도단(言語道斷)과 연관된다. 더구나 현대물리학에서의 원자는 미립자의 기 본 단위들을 그저 단순히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미립자 상호간의 관계의 종 합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므로, 서로가 걸림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중중무 진 법계연기(重重無塵 法界緣起)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23> 불상부단(不常不斷)

- ‘있다’와‘없다’로 우주 파악은 불가능 -
- 오직 연기에 의해 모든변화·인과 살펴야 -

존재자가 자성을 가지고 생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임 으로써 무자성공인 열반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 불생불멸이라 한다면, 용수보 살이 불상부단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존재자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여기서 상(常)이란 상주(常住)로서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지고 계속하여 존 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단(斷)이란 단멸(斷滅)로서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 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기무자성공의 입장에서의 불생불멸이 이미 불상부 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를 구분하여 본다면 불생불 멸이 생멸의 과정 즉 생멸이라는 상태 전이에 주목하는 것인데 반하여 불상 부단은 생한 존재자와 멸한 존재자 간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불상(不常)은 일단 생한 존재자가 생이란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하 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단(不斷)은 멸한 존재자의 멸이란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생(生)과 상 (常)을 혹은 멸(滅)과 단(斷)을 같은 의미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보자. 수소분자는 수소 원자 두개가 결합하여 이루어 진다. 이때 수소분자를 이루는 두 개의 원자는 결합 하기 이전의 원자와 어떤 관계에 있게 되는지를 불상부단과 연관시켜 보자.

수소 원자란 전에도 말했듯이 하나의 양성자 주위를 하나의 전자가 도는 것 이다. 수소분자란 두개의 양성자 A와 B가 어느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 는 상태에서 이 두 양성자 주위를 두개의 전자가 도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 되어야 할 점은 수소분자의 상태가 말랑말랑한 공 두개를 풀로 붙여 놓은 것 과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공 두개를 붙여 놓았다면 각각의 공 은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게 된다. 수소분자의 경우가 이러한 공 의 경우와 같다면, A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는 수소 분자로 결합되고 나서도 그대로 양성자 A의 주위를 돌아야 되고, B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는 그대로 B의 주위를 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수소 분자의 상 태는 그렇지 않다. A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나 B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가 모두 똑같이 양성자 A와 B의 주변을 돌며, 서로의 영역을 넘나 들게 된다. 양자역학은 다만 두개의 전자들이 공간상의 각 점에 있을 확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전자가 양성자 A의 주 위를 돌고 있던 전자였는지를 말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가 수소 분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두개의 전자가 양자역학의 해가 제시 하는 확률분포를 따라 두개의 양성자 주위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 러므로 수소 분자는 수소원자의 상태가 그대로 연속 된 상(常)의 상태가 아 니므로 불상(不常)이다. 그러나 수소분자가 수소원자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 둘을 단(斷)의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또 한 부단(不斷)이다. 결국 수소원자와 수소분자의 관계는 상도 아니요 단도 아 니니, 불상부단일 수 밖에 없다.

불상부단의 논리가 원자의 세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목재를 다듬어 집을 짓는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기둥을 이루는 어떤 목재의 기능은 집이라 는 구조물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집을 떠나서 기둥이라는 의미는 존재하 지 않는다. 따라서 기둥을 이루는 목재는 예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 는 것이 아니어서 불상이며 그래도 예전의 상태로 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부단이다. 이러한 논의는 싹과 씨에 대해서도 역시 성 립된다. 싹은 씨에 연유하여 소생하지만 싹을 씨라고 할 수는 없다. 싹이 씨 에 연하여 소생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부단이요, 싹이 소생하여 도 씨는 이미 멸하였으므로 불상이다.

싹과 씨, 목재와 집, 수소원자와 수소분자 간의 모든 관계는 따라서 상도 아 니요 멸도 아니다. 이렇듯 인과란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연기적이 며 상대적이니, 단상(斷常)이라는 양극단의 견해에 떨어지지말고 연기무자성 공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상부단이라 하겠다. 이를 용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사물이 연을 따라 생한다면 이는 원 인과 같은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 니요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중론 관법품 제18장 제10계)” “굳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며 굳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에 집착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마땅히 있다거나 없다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중 론 관유무품 제15장 제10계)” 따라서 상주라는 절대적 동일성이나 단멸이라 는 절대적 차별성으로 우주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연 기에 의해 모든 변화와 인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희론(戱論)을 적멸(寂滅) 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중도사상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용수보살 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버릴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단멸하지도 않 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불멸이고 불생인 것을 열반이라 한다.(중론 관법품 제 18장 제7계)”

 

<24>불일불이

- 수소 산소와 물의 관계 연기에 의한 성립 보여 -
- 원인과 결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중도의 입장 -

중론에는 불일불이와 관련되는 게송이 여러 군데에 나온다. 대표적인 것만을 우선 살펴보자.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이러한 일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능생(能生:생겨나게 하는 것)과 소생(所生:생겨나는 것)은 동일한 것이되며,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고 한다면 원인은 원인이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세존 이래의 상활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여 중론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이 게송의 의미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세존은 “세계는 상주하는가 아니면 무상한가?” 혹은 “영혼은 육체와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가?”등의 질문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가 열반에 이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적극적으로 본다면 이런 형이상학적인 탐구는 필연적으로 경험적이고 상대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질 것이기 때문에, 석존은 무기에 의하여 언설로는 이룰 수 없는 중도의 진실 즉 언설불가득공(言說不可得空)의 진실을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석존 면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에서와 같이 세계는 상주한다는 등의 견해가 불교 내부에서까지 융성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용수는 사성제(四聖제)와 연기설을 근간으로 하는 붓다의 중도사상을 반야공의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재구성하여, 외도의 견해를 그 근거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논파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용수보살이 중도사상을 주창하게 된 동기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용수보살은 위의 게송에서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거의 없이, 외도의 견해를 주제로 설정하고 이를 비판하여 이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는데에 중론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물론 외도 사상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상승 진리의 진실한 뜻은 어떠한 언어적 표현으로도 온전히 나타낼 수 없고 따라서 언어적 표현으로는 훼손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만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ㅡ’의 사상이란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 인과동일의 입장이며 ‘異’의 사상이란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인과찰별의 입장이다. 이러한 일이(一異)의 입장은 유자성론(有自性論)의 과실 이다.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면 원인과 결과 혹은 능생과 소생의 존재성이 동일하든가 아니면 다르다는 그릇된 견해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그릇된 견해는 과거 어떤 특정한 시기의 인도에서만 가능했던 거이 아니다. 우리들이 붓다의 진실한 가르침을 이어가 지 못한다면 언제고 쉽게 품을 수 잇는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 간에도 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론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용수보살은 이를 능동적으로 생 겨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능생과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소생 즉 능 소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 관계를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하였다. 이를 원 자의 세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수소 원자 두개와 산소원자 하나가 결합하 여 물 분자를 이룬다. 수소 기체란 아주 가벼운 것으로서 이를 이용하여 과 거에는 비행선을 제작하여 하늘에 뛰우기도 하였었다. 산소란 생물이 호흡하 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특히 식물은 이를 이용하여 광합성을 하면서 생물계 전체에 먹이를 제공한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이룬다는 관계에서 본다면, 수소와 산소는 물 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능생이며 물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므로 소생이 된다. 물로 여기서의 능생이나 소생이라는 위치는 관계의 틀 속 에서만 파악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관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어서 이를테 면 광합성에서는 물이 능생의 위치를 갖게 된다.

중론에서의 중요한 테마는 이 능생과 소생의 관계가 불일불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지만 물의 성질이 수소와 산소의 성질과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불일이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를 떠나서는 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일례로 수소의 질량과 산소의 질량을 합한다면 물의 질량과 같 은 것이 되므로 수소, 산소와 물 즉 능생과 소생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이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 연기에 의하여 성립 할 뿐이요 그러므로 각자는 독립적으로 전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 재하는 무자성적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에서도 이에 관한 실례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사실은 모든 것이 그 예가 된다고 해야 맞는 말 일 것이다. 용수보살은 이를 불과 섶이라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만약 불이 섶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불과 섶은 동일한 것이어야 하는 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며, 불과 섶을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섶이 없어도 불 은 존재하여야 하는 데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중론 제10장 과연 가연품 제1계 참조). 불일불이 역시 연기 무자성의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25>불구부정

- 육근의 판단은 시간·상황따라 달라지는것 -
- 무집착 상태서 보면 일체가 차별없는 경지 -

지금까지 우리는 중론에서의 八不 중에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 남은 不去不來를 다음 번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겠다.

불구부정이란 우리 오관의 감각적인 판단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안이비설신의의 6근이 있고 이에 해당하는 감각이 나타나, 깨끗하고 더럽다든가 아름답고 추하다는 여러 감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왜 불구부정이라 하였는가. 음식맛을 예로들어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배부른 상태라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대단한 고욕이 될 수도 있고, 또한 그가 그 음식에 몹시 체하기라도 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음식을 꺼려하게 될 수도 있다. 더우기 그 특정한 사람을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이 특정한 음식이 맛있다는 감각은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대상에 대한 혀의 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사람에 따라서도 또한 달라진다.

아름답다거나 깨끗하다는 감각이 앞에서 예로 든 혀의 감각보다 보편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오랜 옛날부터 특정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아주 독특한 감각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우리는 썩은 음식을 냄새 맡기도 싫어한다. 이는 썩은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신체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 몸이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터득하였고, 이 정보가 우리의 감각에 각인된 결과이다. 파리라는 곤충에게 이 썩은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 될것이니 이 음식 자체가 꺼려해야 할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음식이 더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파리도 또한 인간과 같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명칭은 인간이라는 특수한 존재가 그 대상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 기준으로 이름지어 평가하는 것 뿐이니,이러한 감각은 인간존재에서 있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구속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을 벗어나 무애자재한 경지에서 살펴본다면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것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된다. 박테리아의 예를 들어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음식이 상하는 것을 싫어하며 따라서 음식을 상하게 하는 박테리아와 같은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박테리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부패가 없는 세계이니 이는 고생대의 식물에서부터 암모나이트와 공룡은 물론이고 가까운 우리의 선조까 지 그 모든 시체가 널려있는 참으로 참담한 세계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찮은 것으로 무시하는 박테리아조차 이 세상의 모든 생물 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박테리아 때문에 봄이면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푸른 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먼지의 예를 하나 더 살펴 보자. 일상 생활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먼지 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먼지가 공중에 있으므로 해서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비가 내리게 된다. 따라서 푸른 풀이 돋아나고 생명이 살아가는 데 더 없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먼지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존귀하지 않은 것 이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부여된 어떤 특수한 감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아름다움이나 깨끗함을 논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무명에 사로잡 혀 있음으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구속에서 해탈하여 무심과 무집착의 경지에서 모든 것을 관 조하며 포용한다면 깨끗하다고 가까이 하고 더럽다고 멀리할 것이 없으며, 아름답게 보인다고 존귀하게 대하고 더럽게 보인다고 비천하게 대할 것이 없 게 된다.

이것이 일체에 걸림없이 자재한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에서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위하여 우리에게 베푸는 만법평등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28>파동과 입자

- 모든 물체 두가지 성질 함께 지녀 -
- 이분법 고집하면 부분만 보게 돼 -

얼마 전에 도봉산을 다녀온 일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도봉산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느 방향에서 그려야 하는가? 서울 쪽에서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고 의정부 쪽에서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그림이 진짜 도봉산 그림인가?
오늘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물리학에서의 많은 물체는 입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즉 나름대로의 질량과 부피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따라 그와 연관되는 여러가지 물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물리적 속성에는 에너지라든가 속도 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입자성을 가지고 있는 물체의 경우에는 물체 자체가 운동함으로써 그 물체에 수반되는 여러 속성이 같이 이동한다.

그러나 파동의 경우에는 좀 다른 특성이 있다. 물체 자체는 이동하지 않고 에너지만 이동하는 것을 파동이라 한다. 이 에너지 전달의 역할을 맡는 물체를 매질이라고 한다. 가령 말하고 듣는 것을 생각해보자. 말한다는 것은 성대를 울려서 공기 분자를 진동시키는, 즉 성대에서 공기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이다. 이 에너지가 공간을 타고 흘러가다가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고막을 진동시켜 소리를 듣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성대에 있던 공기 분자가 상대방의 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오직 공기의 진동 에너지만이 전달된다.

따라서 파동 현상에서의 매질은 입자인 돌덩이와는 달리 오직 진동 하기만 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잘 익은 가을 논의 이삭들이 출렁일 때, 벼이삭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이삭의 물결이 에너지로서 전달되는 것과 같다. 이상이 고전 물리학에서의 입자와 파동에 대한 설명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입자와 파동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실제로 뉴턴은 빛을 입자로 생각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무지개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뉴턴의 명성을 따르던 많은 물리 학자들도 오랫동안 빛을 입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영(Young)이 빛의 파동성을 입증하는 간섭실험을 한 후, 물리학자들은 빛을 파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맥스웰이 완성한 전자기학에 의하면 빛은 전자기 파동이다.

이처럼 고전물리학에서의 대상은 파동이 아니면 입자여야만 한다. 어떤 물체가 입자이면서 파동인 경우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동과 입자에 대한 물리학에서의 이해는 양자역학이 나오면 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광량자설이라든가 프랑크의 흑체 복 사 이론, 콤프톤 효과등에 의하면 빛은 입자성을 가져야 한다. 이 입자를 광 자(photon)라고 한다. 그러나 영의 간섭실험등도 엄밀한 사실이므로 빛이 파 동성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파동으로만 이해되었던 빛이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 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빛은 물리학에서 이중성이라고 부르는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현상이 빛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한다면 빛만을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 하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 미시 세계의 모든 물체는 이러한 이중성을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파동으로 생각하였던 빛은 입자의 성질을 가지며, 입자라고 생각 하였던 전자는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 으며, 전자는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에서 어떤 물체 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묻는 것은 잘못이다. 고전물리학에서 처럼 물체가 입자 아니면 파도인 것으로 양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고전물 리학에서의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빛이나 전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 동이고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다. 입자의 세계와 파동의 세계가 따로 있 는 것이 아니라 상호 용융되어 있다.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이제 양자역학을 통하여 입자라든가 파동이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한 기본 물체의 전존재는 절 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7>불거불래

- ‘간다’‘온다’동작부정 불확정성 원리와 연관-
- 운동속성·작용실체 직관에 의해 파악돼야 -

오늘은 팔불중도 중에 하나 남은 불거불래(不去不來)에 대하여 생각하여보자. 이를 中論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의 첫번째 게송에서 살펴보겠다.

“이미 지나간 것에는 간다는 것이 없으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간다는 것은 없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지나가는 것에도 또한 간다는 것은 없다.”(己去有無去 未去亦無去 離己去未去 去時亦無去)이 게송은 과거와 미래, 현재에 대하여 간다는 작용이 불가득(不可得)임을 논증하고 있다.

과거에 이미 간 것에나 미래에 아직 간 일이 없는 것에는 간다는 동작이 이미 완료되었거나 그 동작이 실현된 일이 없기 때문에 간다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은 간다는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용수보살은 이마저 부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청목 스님은 지금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반은 가고 아직 반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작용마저도 이미 간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날 수는 없다는 내용의 주석을 하고 있다. 동작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나가고 있는 작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방금 지나간 과거의 동작을 파악하고 사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거불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가고 옴이라는 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를 물리학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운동과 운동의 속성 혹은 자성이라는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뉴턴의 고전 물리학의 내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원리와 연관되는 내용이다. 양자역학이나 불확정성 원리의 기본적인 의미는 다음에 살피기로 하고 오늘은 이의 운동과 관련된 부분만을 생각하여 보자.

고전 물리학은 거의 기본적으로 어떤 물체의 속성이라는 것을 상정한다. 그리고 그 속성은 물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언제고 우리가 측정하기만 하면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고전 물리학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양자역학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물체가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를 직선 운동에 대하여 적용하면 삼차원 공간에서의 운동 속도의 세 성분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 속성은 원리상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양자역학은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적으로 불거불래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물체의 운동 속성조차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운동하는 작용의 실체를 가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문제는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논의 될 수 없는 것이므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불거불래와 관련하여 제논의 화살의 문제만을 생각하여 보도록 하자.

위의 게송은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는 제논의 운동 부정론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논의 논의는 베르그송이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개념적인 사유에 의해 시간과 운동을 공간화시킴으로써 시간적인 운동을 정지 상태로 환원한 다음, 이 정지 상태라는 부분을 모아 시간과 운동을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논의 역설이 갖는 모순이 존재한다. 따라서 진정한 운동이나 시간은 순수지속으로서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만 알려진다고 베르그송은 말하였다.

용수보살 또한 추상적 사유와 판별에 의해 성립되는 유자성론이 갖는 오류를 불거불래로 지적함으로써 분별과 집착을 떠난 철저한 공관에서 운동을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분별과 무심의 경지이다. 그래서 과거심과 현재심과 미래심이 불가득이라고 하였다. (金銅經 一體同觀分) 여래는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28>파동과 입자

- 모든 물체 두가지 성질 함께 지녀 -
- 이분법 고집하면 부분만 보게 돼 -

얼마 전에 도봉산을 다녀온 일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도봉산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느 방향에서 그려야 하는가? 서울 쪽에서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고 의정부 쪽에서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그림이 진짜 도봉산 그림인가?
오늘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물리학에서의 많은 물체는 입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즉 나름대로의 질량과 부피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따라 그와 연관되는 여러가지 물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물리적 속성에는 에너지라든가 속도 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입자성을 가지고 있는 물체의 경우에는 물체 자체가 운동함으로써 그 물체에 수반되는 여러 속성이 같이 이동한다.

그러나 파동의 경우에는 좀 다른 특성이 있다. 물체 자체는 이동하지 않고 에너지만 이동하는 것을 파동이라 한다. 이 에너지 전달의 역할을 맡는 물체를 매질이라고 한다. 가령 말하고 듣는 것을 생각해보자. 말한다는 것은 성대를 울려서 공기 분자를 진동시키는, 즉 성대에서 공기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이다. 이 에너지가 공간을 타고 흘러가다가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고막을 진동시켜 소리를 듣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성대에 있던 공기 분자가 상대방의 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오직 공기의 진동 에너지만이 전달된다.

따라서 파동 현상에서의 매질은 입자인 돌덩이와는 달리 오직 진동 하기만 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잘 익은 가을 논의 이삭들이 출렁일 때, 벼이삭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이삭의 물결이 에너지로서 전달되는 것과 같다. 이상이 고전 물리학에서의 입자와 파동에 대한 설명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입자와 파동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실제로 뉴턴은 빛을 입자로 생각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무지개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뉴턴의 명성을 따르던 많은 물리 학자들도 오랫동안 빛을 입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영(Young)이 빛의 파동성을 입증하는 간섭실험을 한 후, 물리학자들은 빛을 파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맥스웰이 완성한 전자기학에 의하면 빛은 전자기 파동이다.

이처럼 고전물리학에서의 대상은 파동이 아니면 입자여야만 한다. 어떤 물체가 입자이면서 파동인 경우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동과 입자에 대한 물리학에서의 이해는 양자역학이 나오면 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광량자설이라든가 프랑크의 흑체 복 사 이론, 콤프톤 효과등에 의하면 빛은 입자성을 가져야 한다. 이 입자를 광 자(photon)라고 한다. 그러나 영의 간섭실험등도 엄밀한 사실이므로 빛이 파 동성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파동으로만 이해되었던 빛이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 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빛은 물리학에서 이중성이라고 부르는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현상이 빛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한다면 빛만을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 하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 미시 세계의 모든 물체는 이러한 이중성을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파동으로 생각하였던 빛은 입자의 성질을 가지며, 입자라고 생각 하였던 전자는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 으며, 전자는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에서 어떤 물체 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묻는 것은 잘못이다. 고전물리학에서 처럼 물체가 입자 아니면 파도인 것으로 양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고전물 리학에서의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빛이나 전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 동이고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다. 입자의 세계와 파동의 세계가 따로 있 는 것이 아니라 상호 용융되어 있다.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이제 양자역학을 통하여 입자라든가 파동이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한 기본 물체의 전존재는 절 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그림이 도봉산을 그린 진짜 그림인가?

 

<29>개념의 한계

- 도봉은 도봉이 아니요 이름하여 도봉일뿐 -
- 언어 형상 관념 집착 버릴때 실체 드러나 -

지난 번에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에서의 물체는 파동이면서 입자이고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곧 이러한 물체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물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도봉산으로 돌아가 보자. 도봉산을 그린다고 할 때 어찌 서울이라든가 의정부라는 두 방향만이 존재하겠는가? 사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도봉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여도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울이나 의정부라는 도시가 있으므로해서 그 방향에 익숙해져 있고, 그런 연유로 설정된 어느 특정한 두 방향의 가능성만을 고집하면서 도봉을 그려보겠다고 별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도봉산이 그림으로 설령 나타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방향이 서울쪽이거나 의정부쪽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나 광자에 대한 설명이 또한 이와 같다. 전자라는 존재도 파동과 입자라는 면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파동이나 입자라는 개념은 서울이나 의정부에서 보는 방향과 같이 우리가 비교적 친숙히 아는 상대적인 개념의 쌍일 뿐이다. 그러므로 전자를 바라보는 무수히 많은 개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기에 양자역학을 만들어 갔던 물리학자들은 파동이나 입자라는 개념말고는 전자를 기술하기에 적당한 개념을 달리 알고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파동과 입자라는 잣대로 전자의 존재를 그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라는 등의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파동이나 입자뿐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언어적 개념이란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그림은 어느 한 쪽 방향에서 그릴 수 밖에 없으니 그 실체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그림은 어느 쪽에서 그렸건 그건 단지 그림일 뿐, 그 그림이 도봉의 실체는 아니다. 종이에 묻은 먹을 아무리 따져보아도 도봉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봉을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 도봉에 대한 어떠한 말도 마찬가지이다. 금강경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도봉은 도봉이 아니요, 다만 이름하여 도봉일 뿐이다. 또한 대품반야경에서는 “보리와 중생과 보살이 다 이름뿐이요, 그 자성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다 … 세상에서는 가설로 붙인 이름에 얽매여 망상 분별과 말과 집착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러면 도봉을 그린 그림은 결단코 도봉을 드러낼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인간의 위대한 점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종이 위에 단지 먹이 묻어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도봉은 살아나게 된다. 도봉을 아는 사람은 어느 방향에서 그린 그림을 보고도 도봉을 드러낼 수 있다. 그가 보는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종이 위에 묻은 먹이 아니다. 그가 보는 그림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맑은 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도봉이다. 이것은 그림을 그린 방향에 대한 집착, 먹물이 그려낸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도봉이라는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만 도봉은 살아나게 된다.

양자역학이 발달하면서 물리학자들은 파동과 입자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기술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들은 장(場)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사실은 이것도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던 개념에 대한 집착은 일단 놓은 셈이다. 파동과 입자라는 상대적 개념의 세계는 벗어난 것이다.

석가 세존은 먹물에서 도봉이 드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다. 서울과 의정부, 파동과 입자, 생과 멸, 깨끗함과 더러움 등의 모든 상대적 관념을 초월하여 중도의 입장에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면 우리 모두의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셨다. 어느 방향의 그림이건 어느 사물이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 어느 그림이 진짜 도봉을 그린 그림인가?

 

<30>승의제와 세속제

-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것은 假相이며 공 -
- 언설은 實相아닌 경계서 일어난 분별지 -

양자역학에서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서 시작하여 언어적 개념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와 연관하여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 혹은 승속이제(勝俗二諦)의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승의제란 언설불가득공인 절대 세계의 진리요, 경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한편 세속제란 상대적인 언어의 표현으로 나타난 진리이다. 언설에 의하지 않고는 승의를 알 수 없으므로 방편으로서 나타낸 것이다.

우선 세속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세속에 대응되는 말에는 vyavahara, samvriti, prajnapti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세 단어에 공통되는 의미는 세속(世俗), 속(俗), 언설(言說), 세간(世間), 가명(假名) 등이다. 이들 단어에는 언설등과 관련하여 각각 조금씩 다른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데 흥미로운 점이 있으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vyavahara에는 언어활동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그렇다면 언어에 의한 개념이나 개념을 기초 단위로 하는 논리까지도 세속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논리의 문제를 양자역학과 관련시켜 살펴보자.
우리의 일상적인 논리체계와 정합적으로 구성되는 대수학을 불리안 대수(Boolian algebra)라고 부른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서는 이 불리안 대수학이 성립되지 않으며, 그래서 이를 비불리안 대수라고 한다. 확률과 관계되는 양자 역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양자역학의 대수와 관련하여 주사위의 예를 하나 들어 보도록 하겠다. 주사위의 1과 2가 나올 확률은 각각 1/6이다. 그러면 1이나 2가 나올 확률은 1/3이 된다. 이것은 불리안 대수의 간단한 예가 된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서의 주사위는 그렇게 간단한 주사위가 아니다. 양자 주사위에서는 1과 2가 나올 확률은 0에서 부터 1/3사이에 있는 값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양자 역학에서의 확률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친숙하게 생각하는 그런 확률이 아니다. 양자 주사위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노는 주사위가 아니라 아주 기묘한 주사위인 셈이다. 이러한 셈법이 비불리안 대수학의 예가 된다.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확실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논리의 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논리학에서의 명제가 자명한 것으로 보이 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경험 한계 내에서 형성된 의식의 틀 안에 서만 자명한 것일 뿐 그것을 조금 벗어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과 학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힘입어 20세기에 와서야 겨우 보여줄 수 있었다. 그 러나 숫타니파타에서는 이미 ‘세간에 있어서의 어떠한 세속의 것이라도 그 들 일체에 지자는 집착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모두 호칭이고 명칭이고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samvriti에는 ‘가리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물의 진실성을 가린다는 의미에서는 무명(無明)과 같은 것이다.

언설이란 산만한 마음으로 경계에 미쳐 일어나는 생각 곧 분별지(分別知)일 뿐이니, 허망치 않은 진실한 본상 즉 실상(實相)을 가린다는 말일 것이다. 이 는 언설불가득의 진여(眞如), 공성(空性)을 언설로서는 드러낼 수 없다는 것 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rajnapti에는 ‘실체성이 없는 가상(假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연기이기 때문에 자체로서 생하지 않고 오직 상대적으로 의존해서만 생겨나니 연기무자성공이라고 하겠다. 용수보살은 중론 관사제품(觀四諦品) 제24장 18, 19게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한다. 이 는 가명이며 중도(中道)이다. 인연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일체법에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모든 세속의 논의는 언설로 표현된 것이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 한다. 그러면 최상승의 절대 진리는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다음 번에 승의제 를 살펴 보면서 논의하여 보도록 하겠다. 

 

<31>승의제

- 승의란 공의 세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것 -
- 현대물리학 不可言說의 진리 일부 파악 -

세속제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설해진 상대적인 언설인 반면에, 승의제(勝義諦) 혹은 제일의제(弟一義諦)란 언설불가득공의 진리이며 경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분별지라고 지난 번에 소개하였다. 세속이 우리들의 경험적인 언설이라면 승의는 경험적인 언설의 부정 즉 불가언설(不可言說)이다.

세존께서 무상정등각을 이룬 후에 스스로의 깨달음을 설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나 무기(無記)에서 보인 침묵의 태도는, 더없는 최상승의 진리를 언어로서 나타낼 수 없음을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제에 의하지 않고는 제일의제를 증득할 수 없고 제일의제를 증득하지 않고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으므로 (중론 觀四諦品 제24장 제8게), 부처님은 대자비의 마음으로 세속의 언설을 방편으로 삼아 승의의 진실을 보이신다. 모든 부처님은 이렇듯 제일의제와 세속제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한 법을 설하시니(제9게) 이 이제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심오한 불법의 진실한 뜻을 알 수 없게 된다(제10게)고 하였다.

또한 중론(觀法品 제18장 제9게)에서는 “자기 스스로 알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면, 적정하며 희론이 적멸하고, 차별이 없으며 무분별이다. 이를 이름하여 실상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승의란 다른 사람의 언어나 문자의 가르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온갖 개념의 장난 즉 희론(戱論)에 의해 상대적인 분별지로 객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희론이 적멸하여 적정하며 무차별하고 무분별하여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주체적으로 자각될 뿐인 공의 세계 그것이 승의일 것이다.

능엄경에는 세존께서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는 장면이 나온다. “네가… 발심하여 무상보리를 구하기에 내가 지금 제일의제를 너에게 개시하였는데 어째서 또 세간의 희론과 망상인 인연에 얽매이느냐? 네가 비록 다문하였다고 하지만, 마치 약을 말하는 사람이 앞에 놓인 휼륭한 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여래가 너를 가련하다 하느니라.”이는 그것이 아무리 부처의 설법이라 하더라도 설법을 많이 듣는것 만으로는 제일의제가 요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승의의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역시 “유마의 침묵” 이다. 유 마를 문병하는 자리에서 보살들은 최후로 지혜제일인 문수보살에게 불이(不二)의 법문에 관하여 물었다. 문수보살은 “일체 법에 있어서 말할 것도 설 할 것도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어서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언어도단 심행소멸의 경지를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벌써 말인 까닭에 그것이 궁극적인 것일 수는 없다. 뒤이어 문수보살이 유마에게 이를 되물었을 때, 유마는 오직 침묵 하여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뢰와 같은 침묵이었으며, 개념으로 설정된 일체의 희론을 단박에 뛰어 넘는 침묵이었다.

어떻게 언어나 논리 혹은 이를 형상화한 기호를 떠나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 에서 과학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과학 그 자체는 승의제 혹은 제 일의제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지난 다거나 과학이 더 발달한다고 하여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과학의 한계라 하겠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 하고, 현대 물리학이 언어적 개념으로는 사물의 실상이 온전히 드러낼 수 없 음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며, 세계의 실상을 한 단면이나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동안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서구의 고전적 세계관이 어떠한 한계를 가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기초 위에 이루어진 자연에 대한 이러한 성숙한 이해는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 작 업은 우리 세대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 있 어서 동양 내지는 불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필수적인 요소가 되리라고 생 각한다. 

 

<32>하나의 세계<Ⅰ>

- 현대물리학 미시 거시 세계 모두 다뤄 -
- 세계는 색 포함한 공의 세계만이 존재 -

양자 역학에서 다루는 물체는 파동이면서 입자이고 입자이면서 파동이며, 역으로 말하면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라는 논의를 하였었다. 이는 우리의 지각 경험에 근원을 두는 언어 개념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또한 승의제와 세속제와 연관시켜 최상승의 절대 진리는 언설로 다 다를 수 없는 경계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의미있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질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양자 역학에서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말하지만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공간에 놓여 있는 물체는 파동적인 성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양자 역학은 비결정론적인 확률 분포를 말하지만, 어제 사용했던 책상은 하루 밤을 지내고 난 지금도 내 앞에 어제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일상 생활에 확률분포란 개념은 적용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개념들은 우리의 삶의 공간과 전혀 연관없는 것이며, 이에 기초한 논의들도 또한 허황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다.

불교의 공에 대해서도 이와 평행한 질문이 가능하다. “내눈앞에 분명히 책상이 놓여있다. 그 위에 책을 놓을 수 있고 만지면 만져지는 물건이 분명히 있는 데 왜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하는가? 나는 모든 감각 기관을 다 가지고 있는 데 왜 반야심경에서는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가? 공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이다.

뉴턴 역학은 거시 세계에 관한 물리학으로서 천체의 운동을 비롯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과거의 많은 사람들은 뉴턴에 의해서 물리학은 완성된 것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물리학에서의 관측 영역이 확장되면서 뉴턴 역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양자역학이나 상대론이다. 대략적으로 말한다면 양자역학은 크기가 작은 물체, 즉 미시 세계에 대하여 뉴턴 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한다.

뉴턴 역학이 천체라든가 돌멩이 등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반면에 양자역학은 전자나 광자 등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세계를 기술한다. 또한 상대론은 물체의 속도가 아주 빠른 경우나 아니면 중력의 영향이 아주 큰 영역의 물체에 대하여 뉴턴 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루는 것을 특수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며, 중력까지를 포함하여 일반적인 경우를 다루는 것을 일반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이처럼 상대론이나 양자역학 등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이론들은 우리의 감각 경험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 공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 구성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다. 양자역학이 다루는 전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전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자도 또한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이 미치지 못하며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서 절대 진리의 세계가 부정될 수는 없다.

현대 물리학의 이론들은 우리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기술하는 데에 주로 쓰이지만 우리의 일상 영역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을 포함한다. 고전물리학은 현대물리학의 근사이론이며, 이는 현대물리학의 어떤 극한으로 표현된다. 이 근사 이론은 세계의 일부 즉 거시 세계만을 기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시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 따로 있고 거시 세계를 기술하는 뉴턴 역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계가 미시세계와 거시 세계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현대물리학이다.

공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 공의 세계는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 색의 세계 즉 현상계는 공의 세계의 근사이며 한 극한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의 세계가 따로 있고 색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공의 세계와 색의 세계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공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현상계는 공의 세계의 극한으로써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33>하나의 세계<Ⅱ>

- 하나의 세계지만 시야따라 보이는 현상달라 -
- 불법의 세계 30억년 한정된 인간시야 넓혀 -

옛날에 ‘일상’과 ‘확장’이라는 두 새가 살고 있었다. 이 새들은 물 밑을 투시할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새에게는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일상’이라는 새는 자신의 눈 아래 수직이 되는 곳 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확장’이라는 새는 수직이 되는 곳 뿐만 아니라 그 주위까지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확장’이라는 새는 ‘일상’이라는 새보다 확장된 시야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상’이라는 새는 굴절현상을 알지 못하였지만 ‘확장’이라는 새는 이를 알고 있었다. (빛이 물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일반적으로 굴절현상이 나타나지만, 빛이 수직으로 들어갈 때에는 굴절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전 물리학이 기술하는 세계는 ‘일상’이라는 새가 보는 세계에 해당하며, 현대물리학이 기술하는 세계는 ‘확장’이라는 새가 보는 세계에 해당한다. 물론 ‘확장’이 보는 ‘일상’이 보는 세계를 그 안에 포함한다.
물리학을 말하면서 흔히 고전 물리학은 거시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고 양자역학은 미시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 역학은 거시세계 뿐만 아니라 미시세계까지 다룰 수 있는 학문이다. 고전 물리학에서 거시세계로 한정되었던 시야가 현대물리학에 와서 미시세계로 까지 확장되게 된다. 이 확장된 시야에서 보면 일상적인 세계에서 비롯된 소견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비유하자면 ‘확장’이라는 새가 보는 굴절현상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역학 뉴턴역학이 기술하는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미시와 거시로 세계가 양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의 세계가 존재할 뿐이지만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야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마치 핀셋만으로 물건을 들어 올리다가 기중기를 사용하게 되면 무거운 물체까지 들어 올릴 수 있어 작업 영역이 확장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연필을 들어올리려고 기중기를 쓴다거나 거시세계의 간단한 문제를 푸는 데에 양자역학을 쓴다면, 상단히 복잡하고 번거로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거시세계의 문제에 양자역학을 쓰지 않는 것이지, 세계가 양분되어서 양자역학을 못쓰는 것은 아니다.

‘일상’이 보는 세계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 공간 내에서 경험하는 세계이 다. 우리의 인식은 이 경험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마치 뉴턴 역학의 신봉자 들이 수백년 동안 뉴턴 역학의 세계관에 갇혀있었던 것과 같다. 지상에 최초의 생물이 나타난 이후 30억년 이상의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쳐 오늘의 인간이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경험세계, 우리 의 의식세계가 형성되었으니, 일상의 시야에 갇혀 있었던 역사는 뉴턴 역학 의 수백년 정도가 아니라 수십억년이다.

이 30억년 동안 한정되어 있던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준 분이 석가모니 부 처님이요, 그 확장된 세계가 부처님이 펼쳐보이신 불법의 세계이다. 이 확장 된 세계에서는 일상 세계에서 비롯된 소견으로는 상상도 못하는 정경이 전개 된다.

불법의 세계가 우리 일상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 두 세계가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불법의 세계, 열반의 세계, 반 야의 세계, 공의 세계는 일상의 세계, 생멸의 세계, 미혹의 세계, 색의 세계를 그 안에 포함한다.

공의 세계를 의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30억년이라는 업에 의해 형성된 근 원적 무지, 좁은 소견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안목에서 보면 굴절이 자연스러 운 현상이듯이, 오직 하나 공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세계일 뿐이다. 굴절현상이 보편적인 것이지만 물 위에서 수직으로 보면 굴절현상이 없는 것 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우리 세계는 근본적으로 공이지만 아주 특수하게 색 의 현상이 나타나며, 이 색의 세계에 고정된 좁은 시야의 눈은 보다 넓은 세 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30억년 동안 그것만 보아왔으므로 그것은 절대 적이고 전체인 것으로 안다. 불법을 모르는 중생은 ‘일상’의 새와 같다. 

 

<34>삶에서 깨어나기

- 인간의 위대함은 불성을 자각한다는 것-
- 맹목적 삶에서 절대자유의 세계로 전환-

소크라테스는 현자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지혜의 신인 아폴론의 신전을 찾아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신탁의 결과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 도시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신탁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민하였다.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는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나서 그는 그 신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이전에 훌륭했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현명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처럼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전을 찾아가서 누가 가장 현명하느냐고 물으면 두 말않고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면 인간은 언어나 도구 혹은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며 그런 차이 때문에 인간은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여타 생물을 어떻게 해서든지 차별하여 구분지으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 위험 신호를 서로에게 전달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인간처럼 고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에게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또한 도구나 불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에게 손과 지능이 진화를 거치면서 어느 수준 이상 발달되었기 때문이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지능이라는 능력이 특히 발달된 것 뿐이다. 그런 식으로 굳이 구분을 짓는다면 하늘을 날지 못하니까 새보다 열등하며, 물 속에서 빠르지 못하니까 물고기보다 열등하다고 해야할 지 모른다. 각각의 생물종이 저마다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키우며 진화해왔는데, 생물종의 우열을 지능이라는 일률적인 잣대로 잰다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정당화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대한 점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에게 만약 위대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자각함으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듯이, 우리 인간은 불성을 자각함으로써 위대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왜 위대하다고 해야 하는가?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년 정도이고 그 땅위에 생명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은 약 30억년 전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물종이 있은 이후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맹목적인 생의 의지 만으로 삶을 영위하며 종을 번성시켜 왔다. 그들 중생에게 세계는 자신이 잡아먹을 수 있는 것, 자신이 잡혀 먹힐 수 있는 것, 그리고 종족을 번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서만 의지를 갖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감관은 밖으로 열려있어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먹고 먹히는 것을 구분하는 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진화의 한 정점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 어느 다른 생물종보다도 심한 탐욕을 가진 존재였을 뿐이다.

이 중생적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우주적 사건이 바로 불성의 자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으므로 이 가능성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밖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감관이 안으로 모아지고 상과 견해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지면서 모든 법이 평등하다는 깨달음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진화의 고리에서 나왔음에도 더 이상 맹목적 생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는 주체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는 실로 30억년의 역사를 가진 맹목적이고 중생적인 삶에서 깨어나는 일이다.(얼마전 나온 책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좋아 이 글의 제목으로 인용한다)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생기고, 유기체에서 생명이 생기고, 그 생명의 한 가운데에서 생명을 뛰어 넘으면서도 생명을 버리지 않는 해탈의 연꽃이 피어나게 되었다. 

 

<35>진공묘유(眞空妙有)

- 풍랑 일어도 바다의 성품은 변하지 않아 -
- ‘공은 색포함한 근원자리’ 양자역학 밝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즉 무(無)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무(無)를 존재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 내용으로부터 추상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쟁반 위에 사과가 몇 개 있다가 다 먹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듯이, 존재가 정의되고 나서 가능해지는 무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 혹은 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공은 존재를 무화시킴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이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이 다루는 세계가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세계를 포함하듯, 공의 세계가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는 말을 하였으며, 30억년에 결쳐 형성된 무명으로 싸인 세계인식이 불법을 만나 확장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여기서 공의 세계가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는 것은 무를 존재에 의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공이 색을 포함하고도 남을 수 있는가?이 문제와 연관하여 지난 번에는 디랙의 상대론적 양자 역학의 세계상 즉 현대물리학의 진공 개념을 물고기의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비유는 물리학의 진공개념을 거의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현대물리학이 파악하고 있는 진공이란 허무단명의 공이 아니고 묘유(妙有)하는 공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물고기의 비유는 현대물리학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선 0이라는 수를 살펴보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수로 나타내면 0이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돈을 빌려서 투자를 한다면 빌려온 돈과 투자한 돈이 서로 상쇄되어 자산은 변함없이 0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게 된다. 오히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가능할 수도 있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플러스궦뗌犬駕봉 자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정신적 자유마저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닷물과 파도의 비유이다. 바닷물이 잔잔하여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다면 이는 공의 상태에 해당된다. 그 바다에 바람이 불어 풍랑이 일게 된다면 풍랑이라는 색이 나타나게 된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라는 에너지가 들어가서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게 되지만 단지 그것뿐 풍랑이 이는 바다도 역시 바다이다.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바다라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금강경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수미산과 같이 큰 파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한한 색의 제한을 가지고 있는 한, 바다라는 성품 자체와 그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는 ‘불설비신 시명대신(佛說非身 是明大身)’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성(空性)의 바다는 색상의 파도를 언제나 그 안에 포함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지만 연기에 의해 잠시 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규봉스님은 금강경의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을 해설하면서 ‘공(空)은 모든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가(假)는 인연에 의해 잠시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中은 그 공 가운데 가유(假有)하는 것을 똑바로 알아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므로 중도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공이란 허무단멸의 공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결론이기도 하고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가르침 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욱(智旭)스님은 금강반야바라밀다파공론에서 “눈먼 중생들은 상을 타파한다는 말만 듣고 바로상이 아니라는 데에 집착하여…단멸공(斷滅空)을 취하고 악지견(惡知見)을 이루어 속제의 차별상을 파괴하고 생멸에 따른 인과법을 없앤다…그리하여 일체 환망의 상을 영원히 여의긴 해도 실상의 자체 성품이 단멸공이 아님을 모른다”고 하여 공의 실제 의미가 진공묘유임을 밝히고 있다. 

 

<36>색즉시공(色卽是空)

- 허공중의 에너지 인연으로 물체 드러내 -
- 색의 본 바탕은 생멸하지 않는 공의 세계 -

반야심경의 너무도 잘 알려진 구절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임을 설명하고 색과 공이 다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굳이 색즉시공의 주어를 색이라고 본다면 색이 곧 공이라는 말은 우리 눈 앞에는 색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는 사대(사물의 제 요소)가 화합하여 인연따라 잠시 나타난다는 것으로서 자성으로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연기무자성공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굳이 공즉시색의 주어를 공이라고 본다면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은 공이 허무단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색의 세계가 이 공으로 부터 현현하니 색의 무한한 가능성을 공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진공묘유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진공묘유에서 설명하였듯이 색은 마치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라는 인연이 닿아 생겨난 파도와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파도라는 물 덩어리가 표면 위에 솟아 있지만 그 파도의 본성은 오직 바닷물일 뿐이니 바람이라는 인연이 다하면 바다라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 더우기 그 파도 자체가 바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본성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색즉시공이 된다. 자성이 없는 것이 연기에 의해 잠시 나타나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이 기술하는 물질관이 정확하게 이 파도와 바닷물의 비유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에너지는 물질과 같다. 이는 유명한 E=mc2 이라는 공식으로 표현된다. 물체의 질량은 (색 혹은 파도는) 에너지로 (색으로서의 가능태로) 바뀔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에너지는 허공에(공 혹은 바다에) 퍼져 있게 된다. 이 에너지가 어떤 좁은 공간으로 결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물체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체가 (색이나 파도는) 어떤 상황이 되면 (색이나 파도의 인연이 다하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공 혹은 바다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 허공이다. 또 이 에너지가 어떤 상황이 되면 (사대의 인연이 화합하면) 물체(색 혹은 파도)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물체란 에너지가 결집된 것 이상이 아니어서 색의 바탕은 공이지만,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허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충만한 것이어서, 그 본성은 단멸공이 아니라 무한히 현현하는 색의 가능태이므로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고 공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니, 이를 색체가 곧 공이요 공체가 곧 색이라 한다(色體卽空 空體卽色).

이를 다시 말하면 색성공(色性空)이다. 색성공이나 색체즉공, 색즉시공의 의미는 색이 멸하고 나서 공이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라, 색의 성품 혹은 색의 본 바탕이 공이라는 것이다. 파도가 곧 바다요 물체가 곧 에너지가 충만한 허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색과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유마경에서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이른다.

대품반야(大品般若) 봉발품(奉鉢品)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색을 여의고 공이 없고 수상행식을 여의고 공이 없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며, 수상행식이 공이고 공이 수상행식이다. …모든 존재의 참 성품은 생멸하지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멸을 보지 않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보지 않으며 행한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인연의 화합으로 된 것이어서 단지 분별과 생각으로 거짓되게 이름을 붙인 때문이며,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일체의 이름을 보지 않고,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사량 분별에 의한 일체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불이의 관점으로 세계를 관하는 불교적 세계관의 장쾌한 모습을 보게 되며, 이는 또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와 연결된다는것을 알게 된다. 

<37>공공(空空)

- 물리학의 ‘진공’개념 공의 의미 못미쳐 -
- 집착 해왔던 모든 존재 놓아야 지혜 완성 -

반야공 사상의 핵심은 법계가 연기(緣起)이므로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자성이므로 공(空)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오직 연기이고 무자성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모든 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오온(五蘊)이 모두 공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하여 잠시 생겨난 것일 뿐이며 그에 따라 그것에 명칭이 일시적으로 부여된 것 뿐이다.

이러한 반야공의 이치가 체득되면 반야 바라밀을 행한다든가 행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터럭만큼의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대품반야 봉발품(奉鉢品)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보살을 보지 않고 보살이란 명칭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다를 보지 않는다. 또한 내가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고 있다고도 보지 않으며 행하지 않고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금강경에서는 “응당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한 법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봉발품에서는 “보살이란 것도 보살이란 명칭도 그 본성은 공이며,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또한 색을 여의고 공이 없으며 수상행식을 여의고 공이 없기 때문이다. 색은 바로 공이며 공은 바로 색이며, 수상행식이 공이며 공이 수상행식이다. 왜냐하면 명칭만으로 보리라고 하며 명칭만으로 보살이라고 하며 명칭만으로 공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에 대한 논의는 대품반야경에 나오는 십팔공(十八空)에서 모든 존재나 생존체가 무자성이라는 법공(法空)이나 중생공(衆生空)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18공의 하나 하나를 소개하는 것은 이 글에서 별의미가 없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공공(空空)이나 필경공(畢竟空)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공묘유나 색즉시공을 논의하면서 색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였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에 기초한 현대물리학의 진공 개념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그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 가능태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이 말에만 집착을 하게되면 우리가 눈 앞에 보는 존재 즉 색이 공에서 연유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공이라는 것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공 의 의미는 일체 대립의 완전한 부정이므로 공이라는 것도 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공에 대해서도 색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집착 하여서는 안된다. 이 공까지도 공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이 공공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공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필경공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이란 불교에서의 공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공에서는 우리가 여지껏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고 집착해왔던 제존재를 놓아버려야 만 하였는데, 공공에 와서는 그 공이라는 것마저 놓아야 한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의지하고 있던 색이라는 한가닥의 밧줄을 놓아버리고 다시 공이라는 밧줄까지 놓 으라고 가르친다.

이와 연관하여 바라밀다라는 말의 의미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 라밀다의 원어는 paramita이다. 이를 흔히 피안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를 차안과 피안을 대비시키면서, 생사 경계의 차안 에서 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만다. 여기서 피안은 이 언덕과 저 언덕으로 구분되는 피안이 아니라, 모든 대립의 구도와 집착 을 벗어난 완성의 피안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령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면 “완전 한 지혜” 혹은 “완성된 지혜”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집 착에서 벗어남으로서만 얻어지는 자유이며 일체에 대한 긍정으로 연결되는 지혜이 다. 공의 자유, 공의 긍정, 공의 실천의 의미가 완전하여질 때 비로소 완성된 지혜 곧 반야바라밀다와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다. 일체에 대해 막힘 이 없으려면 언제나 깨어있어야만 한다. 모든 예속과 부자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성자는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38>삼천대천세계

- 관측 가능한 우주 크기는 약 1백억광년 -
- 부처님 2500년전 이미 은하계 존재 밝혀-

경전에는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함경이나 구사론, 법화경, 대지도론 등 여러 곳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에 대한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의 소천 세계(小千世界)에는 천의 태양, 천의 달, 천의 염파제, 천의 위타니, 천의 울담과 월, 천의 불파제, 천의 수미산, 천의 사천왕,천의 장소, 천의 삼십삼천, 천의 야마천, 천의 도솔타천, 천의 화자재천, 천의 대범천이 있다. 이 소천 세계가 천이 모여 이천중천세계(二天中天世界)를 이룬다. 이 이천중천세계 천이 모인 것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을 어지럽게 만들 만큼 복잡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설마 우리가 사는 우주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기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면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우주는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아 보자.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지구는 반경이 6,400km쯤 되는 작은 천체로서 태양에서 4번째로 가까이 있는 혹성이다. 태양계에는 9개의 커다란 혹성이 있고 각각의 혹성 주위에 위성이 있으며 또한 10만개 정도의 소혹성들이 존재한다. 태양은 지구에서 1억5천만km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빛으로는 약 8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 거리를 만약 시속 100km 의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린다면 170여년 걸리게 된다. 제일 바깥에 있는 혹성인 명왕성 까지의 거리는 60억km 정도 되며, 빛으로 5시간 정도 걸린다. 태양은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스스로 빛을 발하게 되는 데 이와 같은 천체를 우리는 항성 혹은 별이라고 부른다.

빛이 1년 걸려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며 이는 약 10조km에 해당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알파센토리로서 태양에서 4.3 광년 거리에 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포함하는 별의 집단을 ‘우리 은하’라고 하자. 우리은하 안에는 태양을 비롯하여 약 3천억 개의 별이 휘감긴 원판 모형의 배열로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평균 거리는 대략 5광년이다. 우리은하의 반지름은 약 5만 광년 정도 되며, 태양은 그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안드로메다은하는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이며 약 200만년 거리에 있다. 우리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것은 우리 은하 내의 별과 안드로메다은하 그리고 마젤란성운 뿐이다. 이 셋을 포함하여 20여개의 주변 은하가 하나의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 우리 지역군에서 6천만 광년 정도 떨어진 위치에는 버고은하단이 있으며 이 안에는 약 2천5백개 정도의 은하가 포함되어 있다. 버고은하단은 다시 버고초은하단의 일부가 되며, 버고 초은하단의 근처에는 이보다 규모가 더 큰 코마초은하단이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주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관측이 가능한 우주의 크기는 대략 100억 광년 정도이며, 이 영역 안에는 약 1000억개 정도의 은하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것이 현대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삼천대천세계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얼마만큼의 별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보이는 별 이외에 또한 안 보이는 물질이 우주 안에 얼마나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와 현대과학이 이해하는 세계의 별의 수를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쨌건 이 두 세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크다는 면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라는 세계상이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우주관과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숫자가 크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부파 불교의 실유론적 사유 방식의 일면에 접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관측 기구도 없던 2500년 전에, 보통 사람이 들으면 허황되기 짝이 없는 듯한 세계상이 설해졌었고, 그 세계상은 첨단 관측 기구를 동원한 현대 과학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처님의 설법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9>성주괴공Ⅰ

- 별의 생멸 空에서 출발 空으로 돌아가 -
- 우주는 영원한 것없는 제행무상 세계 -

우리의 우주는 별이나 혹성 등의 천체 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평균 거리가 대략 5광년 정도 되는 우리 은하 안에 있는 별과 별 사이의 대단히 넓은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물질이 존재한다.
연기나 안개와 같이 그 밀도가 아주 적으며 주성분이 수소인 이 물질을 성간물질이라 한다. 이 성간물질은 우주 공간에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며, 그 밀도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 간다. 이것이 성주괴공(成住壞空)에서의 공의 단계이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하지만 무의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없는 듯 하기도 한 그런 상태이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성간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사방의 별에서 오는 빛에 의해 이 덩어리에 광압이 가해지게 되며, 이에 따라 이 덩어리는 더욱 밀집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렇게 수축되는 과정이 계속되면 내부 압력이 커지고 온도가 올라가게 되어 밖으로 퍼지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지만, 이 성간물질의 덩어리 내에 탄소 등의 고체입자가 소량 섞여 있게 되면 발생되는 열을 장파장의 전자기파 복사로 방출시키게 되어 열을 식히게 된다. 그런 경우에는 수축 과정이 지속될 수 있다. 이 과정이 계속되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가 되면 성간 물질 자체의 중력에 의하여 수축 과정이 가속화된다.(우주에는 기본적인 4가지 힘이 존재하며 이 4가지 힘 중에서 중력은 가장 약한 힘이지만 우주의 진화는 거의 전적으로 이 중력에 의한 것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내부의 압력과 온도는 계속 올라가게 되는 데 온도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뜨거운 난로가 붉은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다가, 온도가 1천만도 이상에 이르게 되면 네 개의 수소 원자핵이 결합하여 하나의 헬륨핵을 이루는 핵융합반응이 시작된다.
수소 원자핵 4개의 질량은 헬륨 원자핵 하나의 질량보다 크며, 이 과정에서의 결손질량이 E=mc2 이라는 식에 의해 에너지로 변환되고 이 에너지는 빛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방출된다. 따라서 핵융합 반응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별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햇빛도 이런 식으로 태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이다. 태양의 경우 수소와 헬륨의 구성 성 분비로 보아 약 50억년 전부터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였다고 추산된다.) 이것이 성 주괴공의 첫 단계인 성의 단계 즉 탄생의 단계이다. 이로써 별로서의 생명이 시작 된다.

이렇게 일단 핵융합 반응이 시작되면 별을 수축시키려는 중력과 별을 확산시키려 는 열에너지가 힘의 평형을 이루어, 별은 대체로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게 된다. 또 한 대체로 일정한 양의 수소를 소모하므로 별의 밝기도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된 다.

별이 커지면 내부의 압력과 온도가 높아 격렬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게 되어 밝 은 별이 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어두운 별이 된다. 이러한 안정된 단계는 수십억 년에 이르기 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다. 이는 성주괴공의 주에 해당하 는 단계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수소 핵융합 반응은 그 원료인 수소가 다소모되고 나면 더 이상 진 행될 수 없으므로 별의 일생은 끝나게 된다. (태양은 약 50억년 정도 핵융합 반응 을 더 진행할 수소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괴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 단계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으므로 다음 글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결론적으로 성주괴공의 원리는 유기 생명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각으로 보기에 는 영원한 것 처럼 생각되는 태양과 같은 천체에 까지 적용되는 우주의 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간물질이 인연따라 모여 밝은 빛을 뿜어내는 별이 되어 활동하 다가 생명을 다하고 나면 다시 한 번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삼천대천세계 역시 오로지 연기법의 현현일 뿐이며, 그러므로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일 뿐이다. 

<40>성주괴공Ⅱ

- “풀잎 썩은 자리에 다시 새싹 돋아나듯 -
- 우주전체는 연기법따라 질서있게 생멸”-

별이 아무리 크더라도 가지고 있는 수소의 양은 유한한 것이므로 언젠가는 핵융합 반응의 원료가 되는 수소를 다쓰게 될 것이다. 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소를 거의 다 사용하게 되면 매우 불안정해 지면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이 때 대부분의 별들은 적색거성(赤色巨星)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이 단계의 별은 헬륨으로 이루어진 중심핵과 외피로 구성되게 되는데, 중심부에서의 수소 원료는 고갈된 상태이고, 외피는 원래 크기의 100배 정도까지 팽창된다. 이 단계에서 강한 대류작용에 의해 별의 일부가 밖으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수소 핵융합 반응이 완료되면 중심부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사라지면서 외부에 있던 질량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별 자체의 중력에 의해 별 전체가 중심부로 함몰하여 높은 밀도의 백색왜성(白色矮星)이 된다. 대부분의 별들은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사용하고 백색왜성으로 최후의 단계를 맞게 된다고 한다. 이는 질량이 비교적 적은 별의 최후이다.

그러나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은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수소 원료가 고갈되고 나면, 수소 원자에 의해 생성된 헬륨 원자핵이 다시 결합하여 탄소 원자핵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반응이 끝나게 되면 다시 이 탄소 원자를 원료로 하여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내는 핵융합 반응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렇게 여러단계의 핵융합 반응을 거쳐 연료가 다 소비되고 나면 자체중력에 의하여 극히 짧은 순간에 격렬하나 수축이 일어나다가 폭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별은 며칠간 대단히 밝은 빛을 내게 되고 별을 이루는 대부분의 물질은 외부 공간으로 날아가고 만다. 이를 초신성 폭발이라 한다.
이 폭발의 잔해는 (1cc단 100만톤 정도 되는) 대단히 밀도가 높은 물체 덩어리가 되는데, 이는 반지름이 수십㎞정도 밖에 되지 않고 초당 수십회 정도 자전하는 (중성자 만으로 이루어진) 별이 된다. 이는 중성자 만으로 이루어진 중성자 별이라고 추측된다.

만약에 별의 질량이 대단히 커서 중력에 의한 수축 압력이 너무 커서 중성자의 형태조차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중심핵 주위의 중력은 너무도 커서 빛 조차도 이 중력을 이겨내면서 이 별에서 탈출할 수 없게 된 다. 이를 블랙홀이라고 한다. 이 블랙홀에서는 빛이 새어나오지 않으므로 오직 간 접적인 관측만이 가능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대개 비슷하게 태어나지만 죽는 모습은 서로 상당히 다르듯 이, 별도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나 그 결과는 이처럼 서로 상당히 다르다.

이제 복잡했던 이야기를 좀 정리하여 보자. 어제 떴던 태양은 오늘도 우리의 세계 를 비추고 있지만, 어제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과는 다르다. 태양은 분명히 조금씩 변해가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죽음 을 맞이하듯이 태양도 50억년 후의 어느 날 더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 것이 다.

그러나 풀잎이 썩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다음 해의 어느 따스한 봄날 새 싹이 솟 아나듯이, 이 우주 어디에선가는 새로운 태양이 바로 그 순간 생기고 있을 것이다. 부증불감이다. 중도의 입장에서 볼 때 생멸은 오직 원융하여 무애할 뿐이다.

성주괴공이라는 우주의 원리는 우주의 구석구석 어느 곳 하나에서도 어긋남이 없 다.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보는 유기적 생명체만의 일이 아니다. 작 게는 유기 생명체에서부터 크게는 삼천대천세계의 그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 전부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공으로 부터 인연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그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우주의 원리를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일체는 다 우리와 같은 생명이다. 그들 일체의 하나하나 돌아가는 모습은 그 어느것 하나 예외없이 연기법을 들려주는 부처님의 음성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 우주 전체는 바로 법음이 울리는 법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1> 오직 하나의 진리

-‘ 태양의 존재’등 자연현상은 한계지녀 -
- 제행무상·제법무아 연기법으로 밝혀 -

과학에서는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려는 작업을 한다. 그 중에서 사회 과학은 그 대상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사회 과학 자체가 덜 발달되어서 그런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겠지만, 아직까지 보편타당한 명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살펴 본다면 사회 현상에 관한 명제만이 보편타당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자연 현상에 관하여 우리가 품고 있는 관념 중에서도 보편적이지 못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자연 현상에 관한 명제라 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관측이라는 인간의 유한한 경험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계절이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온대 지방에 사는 우리들에게만 성립되는 자연 현상이다. 일년 내내 여름인 곳도 일년 내내 겨울인 곳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유한한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보기가 될 것이다.

사계절의 순환보다 보편적이며 얼핏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언제나 변하지 않는 진리일 수는 없다.
태양에 있는 수소와 헬륨의 구성비로 미루어 볼 때 태양의 나이는 지금 약 50억년이 되는 것으로 추산되며, 앞으로 한 50억년 정도 더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50억년 동안 태양계의 구조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다고 하여도 50억년 후의 어느 날 태양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지구라는 땅덩어리 위의 그 어느 곳에서도 태양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이와 함께 태양에서 오던 모든 복사에너지도 공급되지 않아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기껏 백여년이라는 생명을 영위하며, 지구 상에 존재하였던 기간 자체가 이삼백만년에 불과한 인간의 입장에서 볼때 그 명제가 틀림없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근사적으로만 참일 뿐이다. 그 명제가 결코 진리일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은 단지 태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천체와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모든 생명에게도 우리 태양의 이야기는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흔히 일월성진의 움직임이란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리고 사실은 그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수백년 후의 달력까지 만들 수 있지만) 그것도 오직 근사적으로만 참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우주 어디에도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영원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를 가리켜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적으로 진리라고 알고 있는 자연 현상에 대한 모든 법칙들도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진다.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서 성립하는 즉 한계를 가지지 않는 자연 법칙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의 현상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대상, 자연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다 부정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부정하기 어려운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한다.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하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삼라만상과 그에 관한 모든 원리가 오직 연기에 의해 성립한다는 것 뿐이다. 오로지 연기법만이 우리의 우주 전체가 공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성립하는 궁극적인 유일한 절대 진리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크게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이를 대의심이라 한다. 철저하게 의심함으로써 연기법으로서의 우주적 진리 곧 불법이 드러나게 된다. 오로지 연기이므로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면, 불교도의 좌우명은 “나는 크게 의심한다. 그러므로 오직 연기일 뿐이다”일른지 모른다. 

<42>幻影의 밤하늘Ⅰ

- 별빛은 수억광년전에 내뿜은 과거잔영 -
- 불법은 현상 뒷면에 존재하는 궁극원리 -

밤하늘은 별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똑 같은 밤하늘을 보는 것이지만 사람마다 그리는 세계는 저마다 다르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어제 그렸던 세계가 다르고 오늘 그리는 세계가 다르다. 사실은 잠시 전에 그렸던 세계도 지금 그리고 있는 세계와는 다르다. 같은 대상을 놓고도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달라지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는 밤하늘의 별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 혹은 오음(五陰) 모두가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고 있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은 유능한 화가와 같이 갖가지의 오음을 그려낸다(心如工畵師 畵種種五陰)”고 하였으며, 유마경에서는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心淨卽國土淨)”고 하였다. 마음의 문제를 잠시 덮어두고 마음의 작용이 전혀 없는 사진기같은 것이 찍는 밤하늘은 어떨까를 생각하여 보자. 사진에 나타나는 영상은 과연 지금 이 순간의 우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현재의 기술로는 100억 광년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관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영역 안에는 1000억개 정도의 은하가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가령 50억 광년의 거리만큼 떨어진 어느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건을 50억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알 수 있다. 지금의 우리가 그 사건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란 원리상 불가능하다. 그렇게 범위를 확장하지 않고 그 반지름이 5만광년 정도되는 우리의 은하 안으로 눈을 돌린다고 하여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우리 은하의 반대 쪽에 위치한 별에서 오는 빛은 거의 10만년 전에 그 별을 떠난 것이다. 우주적 시간의 규모에서 볼 때 10만년이란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에 그 별은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이 맞다면 빛보다 빨리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으므로,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 별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밤하늘을 바라본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이란 이렇게 무수히 많은 다른 시간의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에 중첩되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 밤하늘에는 몇초 전에 달에서 출발한 빛도 있지만 10여만년전 우리 은하의 반대편에서 떠난 빛도 있고, 100억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지금 막 지구에 도착한 아주 먼 은하에서 온 빛도 있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이란 오직 개개의 다른 별들이 내뿜는 과거의 영상, 과거의 잔영일 뿐이다. 그건 우리 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며, 관측 기술이 덜 발달되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훌륭하고 관측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우주의 구조상 그럴 수 밖에 없다. 철학자 야스퍼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가해진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일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구조가 강요하는 한계상황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보는 밤하늘은 오직 아름다운 하나의 환영(幻影)일 뿐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 모두는 우리에게 환영으로 그렇게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자체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어서 마치 물거품과 같이 잠시 나타났다가 본래의 자리로 사라져 가는 것 뿐이다. 인연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존재란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유위법은 꿈이나 환상이나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이나 번개와 같다”고 하였다.

문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보면 글쓴 이의 의도를 알 수 있듯이, 자연을 보더라도 단순히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의 원리를 본다면 그 안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불법이다. 오직 하나의 진리의 불법은 시방삼세(十方三世) 어디에도 예외없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며 상주불괴(常住不壞)하는 것이다.

 

<43>幻影의 밤하늘Ⅱ

- 우주만물은 인연 화합하며 끝없이 변화 -
- 일체를 ‘있고 없음’아닌 중도로 봐야 -

우리가 흔히 끝없는 바다라고 하지만, 사실 우주야말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끝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 우주의 일부를 우리는 밤하늘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모습은 무수히 많은 다른 사건들의 영상이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난 번에 논의하였다.
나에게 지금 그 곳에 있는 것 처럼 나타나는 것들은 사실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으로 지금 그 곳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의 논의는 그나마 빛을 발하는 물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 우주에는 우리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물질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우선 우주에는 어느 곳에도 널려있는 성간 물질이 있다. 아주 낮은 온도의 성간 물질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성간 물질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천체가 형성된다. 비가시적인 것이 인연이 화합하면 가시적인 것이 되고, 가시적인 것은 인연이 흩어지면 비가시적인 것으로 변한다.

성간물질인 수소 원자를 우리의 시각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양자역학에서의 초미세 구조의 갈라짐 때문에 수소 원자는 21.1cm의 전자기파를 방출하게 되므로 이에 대한 물리학적인 관측은 가능하다.
그러나 우주에는 이러한 물리적 관측마저 불가능한 물질이 있다. 오직 간접적인 추정만이 가능할 뿐, 직접적인 관측이 원리상 불가능한 이러한 물질을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주에는 이러한 암흑물질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물질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든 볼 수 없는 것이든 그 모든 대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 가고 있으니,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의 세계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세계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환영일 뿐이며 진정한 세계의 모습은 무시무종하는 것이어서 오직 연기(緣起)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기반한 좁은 범위에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오류를 아주 쉽게 범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조론이다. 사람이나 여타 생물이 만드는 우리 주변의 물건은 반드시 그 제작자가 있다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된다. 이 경험을 무한히 확장시켜 우주 전체의 창조자를 상정하는 것이 창조론이며, 이는 거의 모든 문화가 공통적으로 범하고 있는 오류이다.

특히 우주 현상의 배후에 절대자가 있지 않고서는 우주 현상이 이토록 조화로울 수 없으리라는 근거없는 논리는 창조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에 대한 환영을 보면서 또 하나의 더 큰 환영을 마음 속에 그려내어, 그것을 섬기고 그것에 기꺼이 종속되는 그릇된 견해일 뿐이다. 이는 모든 유위법이 다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어지럽게 구하는 중생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보고 우리가 만지는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밤하늘은 하나의 환영일 뿐이며, 그나마 볼 수 있는 물질이란 전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무언가 있다는 중생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기 위하여 일체공을 설하시고, 아무 것도 없다는 중생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기 위하여 일체 유를 설하시며, 또한 중생이 이 양 극단에 집착할까 두려워 중도를 설하신다. 있는 것 같아도 있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 같아도 없는 것이 아니다. 진여실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비유 비무 비비유 비비무(非有 非無 非非有 非非無)이어서 일체법에 중도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44>상의상대(相衣相待)

-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인연의 복합체-
- ‘이것있어 저것있다’일체법 성립 원칙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만나게된다. 그 생명체들은 생명체가 아닌 것과는 좀 다른 특징들을 지니며 살아간다. 그들은 우선 종족 번식을 위하여 생식작용의 기능을 가지며, 개체의 성장이나 생명 유지를 위하여 끊임없이 신진대사 작용을 한다.

신진대사란 간단히 말한다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를 외부에서 섭취하고 생명 활동의 과정에서 생긴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생리과정이다.

물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활동에 필요한 자유에너지(free energy)를 외부에서 끌어다 쓰는 과정이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의 경우에, 이 자유에너지의 근원은 궁극적으로는 예외없이 태양이다.) 그리고 신진대사 과정은 이러한 자유에너지의 섭취뿐만 아니라, 노후된 우리 몸의 구성 요소들을 교체해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이 몸은 외부에서 영양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이 공급받은 영양소를 에너지로 전이시키기 위하여 외부의 산소를 끌어들여 호흡하여야 하는 존재이며, 몸의 구성 요소를 쉴 새없이 외부와 교체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나’라는 존재는 ‘외부’와의 밀접한 연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외부인가? 우선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 몸 속에 잠시 머물다가 빠져 나가는 음식물이나 공기 같은 것을 내몸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의 폐나 위를 들락거렸던 그 많은 분량의 공기나 음식물이 다 내 몸이어야 하며, 그러한 음식물이나 공기를 이루었던 원소들은 다른 사람의 음식이나 호흡에 쓰였을 것이므로 나의 몸과 너의 몸의 구분은 없어지고 만다.

이와는 달리 그러한 음식물이나 공기같은 것을 내몸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근육이나 내장, 혈액등 그 모든 것도 다만 나에게 좀 오래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나의 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즉 내 몸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어느 경우에서나 외부와 구별되는 ‘나’라는 존재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공간상에서 어디까지를 ‘나’라는 존재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공간상에서 어디까지를 ‘나’라고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자성(自性)을 가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인연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것 뿐이다. 또한 어떤 인연으로 어떤 개체가 이루어졌다 해도 독립적으로 개체의 생명이 영위될 수 없으며, 끊임없는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서만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아닌 것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의상대(相衣相待)라는 존재양식이다. 이러한 상의성이 생명체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상의성이 생명체에게만 작용되는 것은 아니며, 이 우주의 모든 사물이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렇게 자성이 없이 오직 인연의 화합으로 잠시 이루어지는 것 뿐이므로 무상(無常)이다. 다시 말하면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용수보살은 중론 제8장 觀作作者品 제12게에서 “업(業)으로 인하여 작자가 존재하고, 작자로 인하여 업이 존재한다”고 하여 이러한 상의상대의 연기설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렇듯 무자성하여 상의상대의 연기에 의해서만 일체의 법이 성립하므로 이를 가리켜 공(空)이라고 한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法)을 나는 공성(空性)이라고 한다. 이것을 또한 가명이라고도 하며 중도라고도 한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중론 제24장 18게)”이를 청목(靑目)스님은 “…여러 인연이므로 무자성이요, 무자성이므로 공이다. 공도 또한 공한 것이지만 단지 중생을 위하여 가명으로 설한다. 유무의 이변을 떠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중도라 한다… ”고 해설하였다. 

 
<45>諸法無我 諸行無常

諸法無我 諸行無常 지난 번에는 생명체에 대한 상의상대의 연기를 주로 살펴 보았다. 생명체란 어디까지가 생명체인지 그 공간적 경계도 확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인연의 복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어서 오로지 연기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제 그 생명체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여 보자. 쉬운 예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우선 사회적인 면을 살펴보자. ‘나’는 작게는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아내에게는 남편이요, 혹은 남편에게는 아내이다. 또한 어버이에게는 자식이요, 자식에게는 어버이이다. 사회에서는 직장 뿐만 아니라 각종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저마다 자기가 맡은 위치와 역할이 있다. 크게는 한 나라의 국민이기도 하고, 인류라는 종족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모두가 관계일 뿐이다. 내 몸을 이루는 것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난 이후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내 몸을 만들어 왔다. 어버이에게서 몸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도 좀 더 따지고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인연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 어떤 면을 살펴 보아도 ‘나’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다른 존재와 구분하여 정의해 줄 수 있는 어떤 요소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다른 모든 요소와의 관계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그런 요소가 변하게 되면 ‘나’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를 나에게서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명체가 아닌 다른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물체도 영원 불변의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령 눈앞에 놓여 있는 책상의 경우, 그 쓰임새가 책을 놓고 공부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평범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서는 드러누워 잠자는 것으로 쓸 수도 있고 단순히 물건을 쌓아 두는 것으로 쓸 수도 있다. 이처럼 모든 물체는 생명체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정된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않다. 이는 우리 주변의 물체 뿐이 아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우주의 모든 천체들도 예외없이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다.

가령 항성의 경우에는 외계로 에너지를 내 보내면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어 간다. 또한 수소로 이루어진 희미한 성간 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기도 하고 별이 생명이 다하여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원자는 고정된 실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원자핵을 이루고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는 다시 수없이 많은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 소립자들은 서로 간의 관련 위에서 끊임없이 생멸하면서 존재한다. 이들 소립자 간의 관계는 고정된 실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역동적인 인과 관계를 보여 준다. 우리의 세계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립자들이 모여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원자를 이룬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이 모여 생명체를 포함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

그런 것들이 모여 천체를 이루고 천체가 모여 우리의 우주가 된다. 이렇듯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으므로 부처님은 이를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셨다. 범어로 Anatman인 무아는 곧 불멸하는 실체인 atman과 같은 것은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렇듯 현상에 드러나는 모든 것이 무아이니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제법과 제행이란 현상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물을 일컫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제법이 우주 만물을 공간상으로 파악한 것이라면 제행은 이를 시간상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체 만유는 공간적으로 무아요, 시간적으로 무상이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알게 한다.

<46>불교속의과학

공기중 삼제원융

-파도가 바다 떠나 존재하지 못하듯-
-空 假 中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 -

인간은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반성적 사유가 가능한 생물의 종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나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것을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참으로 인간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불성의 자각 곧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의해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하여 보면, 그 크기가 아주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에서부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크기가 대단히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자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연기(緣起)에 의하여 즉 서로의 연관에 의하여 존재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오직 연기에 의할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이는 지금 존재하는 그 어느 것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좋은 예가 밤하늘의 별이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천체들도 시작과 끝이 없이 오직 인연법에 의하여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여 가다가 마침내 소멸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아주 중요한 점을 놓칠 수도 있다. 가령 지금 밤하늘에 있는 별은 성주괴공의 주(住)의 단계에 있는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다가 괴멸하여 공(空)의 단계에 이르며, 또한 이 공의 단계에 있는 이를테면 성간물질과 같은 것들은 공의 상태에 있다가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지면 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면, 주와공을 단순히 시간상의 변이로만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색과 공은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지만 색이 변화하여 이윽고 공이 되고 또한 공이 변화하여 이윽고 색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는 색성공(色性空)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간물질의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없는 듯 하기도 한 상태이다. 또한 별의 상태는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없이 쉼없이 변화하여 가는 인연 화합의 상태일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하여 공이 되고 공이 변하여 색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것이다. 색성공이라는 것은 색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니, 공이란 색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색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따로 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은 공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공은 색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예를 현대물리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찾는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이 이해하는 진공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완벽하게 차 있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리가 바로 색의 세계이며, 색의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세계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두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일 수 밖에 없는 세계이다. 그 하나의 세계를 이르되, 연기하여 머무름이 있으므로 색 혹은 가(假)라고 하고 그러나 일체의 모든 사물은 오직 무아여서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하며 또한 그 둘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하여 중(中)이라고 한다. 공가중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그러므로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 오고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 오며 중이라 하면 가과 공이 따라 온다. 이렇듯 공과 가와 중이 거칠 것이 없이 원융무애하니 이를 이르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 이라 한다. 마치 바다와 파도의 비유와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파도의 흰 거품 뿐이지만 이는 바다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이다.

이러한 하나의 세계는 비단 색과 공, 진공과 묘유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보리에 대하여 생사와 열반에 대하여 마음과 중생과 부처에 대하여 다 성립하여야 할 것이다.

<47>무자성과 진화

‘콩심은데 콩나고’영원불멸 믿는 창조론
‘모든것 변한다’제행무상 진화론적 사고

인간은 대개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내 앞에 놓여있는 책상을 보면서 이것은 누가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것이 인조물에 대한 질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질문이 생명에 관한 것이 되면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왔겠지만, 생명의 근원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을 얻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우선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인조물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가설이 될 것이다. 이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도 역시 우리와 같은 형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화는 많은 경우 이러한 창조를 가능케 한 우주의 원리라든가 아니면 궁극의 인격체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상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이른바 진화론이라는 것이 대두되면서 그동안 창조론에 묶여 있던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인류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 그것은 우선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라는 말이 있다. 만약 이 명제가 절대적으로 참이어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무한히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궁극적인 조상도 틀림없이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창조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선다. 진화론은 우리의 먼 조상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이는 위의 우리 속담도 근사적으로만 참일 뿐 절대적으로 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몇 천년 혹은 몇 만년이라는 시간의 영역에서 보면 위의 속담이 참일 수도 있지만, 보다 장구한 시간에서의 변화를 본다면 결코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우리 주변에서 관찰되는 (콩 심은 데 콩이 난다는) 상황을 어디까지 참인 것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기준으로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의 유한한 관찰 경험을 근거로 하여 얻은 명제를 (때로는 심지어 우주의 시작인 시점까지) 무한 확장하여 주장한 것이 창조론이라면, 이렇게 얻은 귀납적 명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진화론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비시켜 보자. 내 앞에 수평하게 놓여 있는 책상 위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은 정지하여 있게 된다. 이 때 그 책상은 반드시 반듯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명제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유한한 관찰 경험에서 얻은 명제는 무한한 공간에서 참일 수 없다. 지구가 둥글므로, 물방울이 움직이지 않는 아주 큰 책상은 지구의 표면 모습과 같이 둥근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한한 관찰 경험에서 얻은 명제는 모두 이와 유사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물도 불변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셨다. 이것이 제법무아요 제행무상이다. 이 원리는 하나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도 물론 성립하는 것이지만 전우주를 통시적으로 고찰해 볼 때 더욱 분명해지며, 그 한 예로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흐름 즉 유전의 경우에서도 역시 성립한다. 콩 심은 데 콩난다는 관찰에 의하면 콩의 속성은 하나의 개체가 죽더라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시야를 확대하여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진화론은 보여 준다. 생명을 시간의 영역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관찰한다면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 나고 유기물에서 원시적인 생명이 생겨나며 이 원시 생명에서 무수히 다양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에 어떤 자성이 있어서 하나의 개체가 죽더라도 그 속성은 영원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창조론은 사물에 자성이 있는 줄 알고 그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그릇된 견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8>최초의 생명

- 무기물서 유기물 생겨나듯 인연화합의해 생명탄생 -

대폭발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약 150억년쯤 된다. 태양과 지구의 나이는 각각 약 50억년과 45억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초의 생명은 약 35억년 전에 탄생했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생명 진화의 역사가 시작되며, 유전에 의하여 생명의 속성이 지속된다. 물론 유전과 진화라는 것도 대단히 경이로운 과정이지만, 지구가 생겨난 이후 지구의 전 역사를 통하여 가장 극적이며 중요한 사건은 역시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일일 것이므로 이는 생명사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끄는 문제가 된다 하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사든 지질학과 같은 자연사든) 역사의 거의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이, 최초의 생명이 태어난 사건을 오늘날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만 원시 지구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그러한 상황 하에서 최초의 생명이 생겨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 볼 수 밖에 없다.

지구의 진화 과정과 연관하여 생각하여 볼 때, 원시 지구의 대기는 메탄과 암모니아를 포함하는 환원성 대기라고 추정된다. 오파린은 이러한 원시 지구의 상황 하에서 유기물 합성이 가능하다고 제안하였으며, 이에 관한 실험은 1953년에 밀러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는 메탄과 암모니아, 수소, 수증기의 혼합 기체를 일주일 동안 가열 순환시키면서 전기방전을 시켜 여러 종류의 아미노산과 포름알데히드, 시안화 수소 등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가열과 전기 방전은 각각 원시 대기의 고열 상태와 공중 방전을 재현시킨 것이다.) 그 이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생물의 참여없이 생명의 기본이 되는 분자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유기물이 원시 대양으로 흘러 들어가서 점차 농축되었다.

10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이들 간단한 유기물들은 고분자 화합물을 형성하였으리라고 추측한다. 즉 원시 대양에 녹아 있는 아미노산은 단백질로 합성되고 탄수화물은 다당류를 만들어 내며 퓨린이나 피리미딘 유도체들이 핵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또한 그 개연성이 실험으로 확인된다.

오파린은 원시 바다 속에 녹아 있는 핵산이나 단백질의 고분자 화합물로부터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원시 생명체의 시초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이는 세포 의 막과 비슷한 단백질의 막을 가져 주변과 경계를 이루며, 세포의 삼투작용 과 비슷한 현상도 나타낸다. 폭스도 이와 비슷한 설을 주장한다. 그는 단백질 이 없이 DNA는 생성될 수 없으므로 최초의 자기 복제 물질은 단백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미노산을 200℃ 에서 가열하였다가 식혀 단백질과 유사한 프로티노이드를 얻었으며, 이를 바닷물에 녹인 후 가열하였다가 식혀서 무수 히 많은 박테리아 크기의 마이크로스페아라고 불리우는 입자를 얻었다. 이것 은 막을 가지고 있으며 생장과 증식, 촉매작용 등을 하므로 원시적인 자기 복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코아세르베이트나 마이크로스페아 같은 것들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원시 생명체로 발전되어 갔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실험이 성공하였다고 해서 원시 지구에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유기물이 형성되고 이로부터 단백질이 합성된 후 생명이 탄생되었 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무기물로부터 생명의 원형이 탄생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는 맑스가 주장하는 ‘양의 질로의 변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 을 데우면 온도가 상승하는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온도가 100℃ 에 이르면 이 양적인 변화는 액체인 물이 기체인 수증기로 변하는 질적인 변화 를 겪게 된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나고 다시 그 유기물에서 최초의 생 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이러한 질적인 변화에 비유된다고 하겠다. 양의 질로 의 변화든 생명의 탄생이든 이러한 모든 변화는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직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형성되는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구 위의 생명도 그 자취를 감추게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 을 예상한다면, 생명의 역사에도 또한 성주괴공의 진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49>생명 진화

- 생명역사 35억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 -
- 진화 전과정 상주론과 단멸론 떠난 중도 -

최초의 생명은 바다 속에서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원시 지구의 대기에는 산소가 희박하였으므로, 산소 원자 3개가 결합하여 형성되는 오존층이 없었다. 따라서 태양에서 오는 강력한 자외선은 여과되지 않고 지상에 도달하였으며,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생명체는 바닷물 속에서 생겨났고, 그 이후에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생물이 나타나 산소를 충분히 만들어 오존층이 형성된 다음에 육상생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화석으로 알려진 최초의 생명체는 남아프리카 스와질랜드의 퇴적암층에서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최초의 생명은 약 35억년 전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남조식물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남조류가 만들어 낸 산소는 오랜 기간 동안 지구 대기층에 축적되고, 이 산소에 의하여 성층권에 오존층이 형성됨으로써 태양에서 오던 강력한 자외선이 차단되었다. 결과적으로 남조류를 위시한 생명체들은 지구의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이에 따라 최초의 생명이 탄생했던 방식으로 생명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게 되었다. 생명의 역사는 이 단계에서 20억년 가까운 오랜 기간동안 머물러 있다가, 또 다른 도약을 하게 된다. 그 이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약 16억년 전에 원생동물이 바다에 나타난다. 해면동물은 약 9억년 전에, 그리고 해파리는 약 7억년 전에 나타난다.
5억5천만년 전에 무척추동물이 나타나며, 그 후 해면동물이나 연체동물들이 번성하게 된다. 4억3천만년 전에 최초의 육상식물이 나타나며, 4억년 전의 바다에서 최초의 척추동물인 어류가 나타난다. 육지에서 처음으로 활동한 동물은 노래기 종류로서 그 시기는 3억9천만년 전이며, 어류의 후손이 육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억5천년 전이다. 양서류의 시조는 3억8천만년 전에 나타나며, 그들이 육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억3천만년 전이다. 파충류는 3억5천만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며, 파충류의 한 종류인 공룡은 2억2천만년 전에 나타나 1억5천만년 전을 정점으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7천만년 전에 멸종되었다. 조류는 1억4천만년 전에 나타나며, 꽃식물이 번성한 것은 1억2천만년 전이다. 포유류는 2억년 전에 나타나지만, 번성하게 된 것은 공룡의 시대가 끝난 6천만년 전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장류가 등장한다. 인류의 조상으로서 가장 오래된 라마피테쿠스의 화석은 1천2백만년 전의 지층에서 발견되며,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는 3백50만년 전에 나타난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의 역사가 너무 긴 기간을 다루는 것이므로, 생명의 35억년 역사를 1년이라는 기간으로 환산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1월 1일에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 났다고 한다면, 원생동물은 7월 말에, 해면동물은 10월 초에, 어류는 11월 20일에, 양서류는 11월 말에, 파충류는 12월 초에, 포유류는 12월 10일 경에 각각 등장한다. 공룡이 멸종한 것은 12월 25일 쯤이며, 현생 인류의 조상은 12월 31일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단기간에 걸친 관찰만으로는 생명이 유전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자신의 속성을 보존시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와 같은 역사를 본다면 생물의 속성은 그대로 이어져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은 진화라는 오랜 시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다.
이는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원리가 개체 생명의 나고 죽음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의 전역사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은 그러한 원리가 있으므로 무생명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상주론과 단멸론의 양변을 떠난 곳에 생명 현상의 참 모습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이란 유전에 의해 그 속성이 지속되므로 단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그 속성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므로 상주일 수도 없다. 따라서 생명 현상도 상주와 단멸의 양변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하겠다.

<50>진화의 증거

- 생물진화해 나온 과정 화석으로 확인 가능 -
- 가까운 種일수록 아미노산 분자배열 비슷 -

다윈은 1831년 탐험선 비이글 호를 타고 5년간의 항해를 하였다. 곳곳에서 여러 가지 표본을 얻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값진 경험은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탐험이었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에쿠아도르 해안에서 정서방으로 1천km 정도 떨어진 고립된 섬이다. 그는 그 곳에 사는 동물들이 남미 대륙의 동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르며, 서로 다른 서식지에서 먹이 경쟁을 하는 새들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생물종이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 생각은 그후 <종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다윈에서 시작된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대단한 반발이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론이 되었으며 인간의 세계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이론이 되었다. 진화론의 증거를 간략히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 해부학적인 증거를 들 수 있다. 다양한 포유류가 존재하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구조, 기능 등은 모두 같으며, 목뼈의 수는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과 같이 목이 짧은 동물이나 같다. 또한 새의 날개나 육상 포유류의 앞발, 고래의 앞 지느러미 등도 그 기본형은 같다. 이러한 예는 그들이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으나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살면서 오랜 기간동안 자신의 신체적 구조를 조금씩 바꾸어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그들이 어떤 공통의 조상을 가졌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다음으로 발생학적 증거를 들 수 있다. 어느 동물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단세포의 수정란에서 시작되는 여러 척추 동물의 발생 과정을 비교하여 보면, 처음에는 대단히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가 발생이 진행되면서 각자의 특유한 형질이 갖추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조류나 포유류의 발생시 그들의 심장이 어류나 양서류의 심장 상태를 거친다든가, 말발굽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화석상에 나타나는 진화 역사상의 변화를 반복한다는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장이나, 동맥 등의 발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가리켜 개체 발생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진화 과정 즉 계통 발생을 축소 반복한다고 말한다.

가장 결정적인 진화의 증거는 화석에서 발견된다. 가령 척추 동물의 경우 지층 연대별로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의 순서대로 화석이 발견된다는 것에서와 같이, 오래된 지층에서는 오직 하등 동물의 화석 만이 나오며 새로운 지층으로 가면서 고등 동물의 화석이 나온다. 그리고 현존하는 생물들의 중간종이면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 화석으로 나오기도 한다. 가령 지금의 조류와 파충류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시조새는 현재의 조류와 파충류가 쥬라기 시대의 공통의 조상에서 분리되어 각자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발굴되는 200여 종의 말의 화석은 말발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화되어 현재와 같이 발가락 하나만이 남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생물을 분자 수준에서 관찰하여 볼 때 비슷한 생물종이란 DNA의 염기 배열이나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이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의해 진화의 계통을 분자 수준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는 진화에 대한 생화학적 혹은 분자생물학적 증거가 된다. 가령 척추 동물의 헤모글로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분자의 배열 순서는 가까운 종에서는 비슷하고 먼 종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 생화학적 분석에 의하면 어떤 단백질에서 아미노산 분자 하나가 다른 것으로 치환되는 데에는 약 600만년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과 말의 헤모글로빈 분자의 아미노산 배열은 18곳에서 차이가 나므로 사람과 말의 공통의 조상은 약 1억년 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계산은 산소 호흡을 하는 동물의 전자전달계인 씨토크롬C 에서도 가능하다. 이러한 분석에 의하면 포유류와 다랑어의 공통의 조상은 4억년 전에 존재했으며, 척추 동물과 효모의 공통의 조상은 20억년 전에 존재했다고 한다.

<51>진화의 의미

- 생물 우열관계 분석은 그릇된 분별심 -
- 人相집착 버리면 모든 생명 평등관계 -

근대의 서구 지성사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두 사건을 든다면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일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과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따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 두 이론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계 내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지위와 관련된 그 이전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이론이나 그 이전의 세계관을 갖는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이 그 초기 단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이론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경험적으로 더 적합하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며, 19세기 이전이라면 창조설을 굳이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1650년 아르마의 대주교 어셔가 구약을 근거로 하여 창조는 기원전 4004년에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나 라이트푸트 박사가 그 정확한 시간은 10월 23일 오전 9시라고 했던 것 보다는, 진화론에 대한 반대의 역사가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지속된다는 것이 보다 심각하게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적어도 진화론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과학자라면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증거는 앞의 글에서 밝혔듯이 분자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공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꽤 많은 것 같다. 원숭이가 우리와 친척이라는 것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가 인상(人相)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견해이다. 나와 남을 분별하여 내가 너보다 낫다는 아상(我相)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내가 인간이라 하여 다른 모든 중생과 구별하여 우월해지고자 하는 인상에 집착한다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진화론은 가르쳐 주고 있다.

진화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이 맞는다면 동물원의 원숭이는 언제쯤 사람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진화론을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질문이다. 진화론이 말하는 것은 지금의 원숭이가 사람이 된다 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원숭이와 지금의 사람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선가 같은 조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원숭이와 사람은 마치 나무 위의 두 가지에 비유될 수 있다. 나무가 아무리 자라더라도 하나의 가지가 다른 가지로 변해갈 수 는 없다. 각각의 가지는 각자의 나름대로 자랄 뿐이다. 그렇지만 나무 가지를 따라 가다 보면 그들이 만나는 곳을 찾아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원숭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지금의 사람으로 변할 수는 없다. 현재의 원숭이와 현 재의 사람은 각자 자신의 진화의 길을 따라 간다. 그래서 그들이 미래의 어느 시 간에 같은 종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과거로 거꾸로 올라가 본다면 그들 의 공통의 조상이 살았던 시점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 진화론의 이야기이다.

원숭이가 언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관점에는 모든 동물의 우열이 가려지 며 열등한 동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등한 동물로 변해간다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분별심에 근거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그릇된 견해일 뿐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두 생물 들은 35억년의 진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인간만이 아니라 파리까지도 그 모든 생물은 그들 나름대로 지금 이 순간 최상의 상태, 즉 진화의 최고 단계에 있다. 그러므로 35억년의 전역사가 담겨져 있는 생명체 하나 하나는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참으로 장엄한 것이다. 일체가 평등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도 모두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체가 동근이다.

이렇듯 일체의 생명은 장엄한 것이요, 일체의 생명은 평등한 것이요, 일체는 또한 동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 생명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52>엔트로피와 생명

- 일체사물은 끝없는 ‘연기의 그물’로 연결-
- 생명체는 외부와 에너지 주고받는 열린쳬제-

엔트로피란 물리학의 열역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리학 이외의 많은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엔트로피란 도대체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진화나 생명과 연관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계의 엔트로피는 그 계에 유입된 열량을 온도로 나눈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사람들은 이 엔트로피라는 양이 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엔트로피는 정보라는 개념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정보 이론에 의하면 엔트로피란 부의 정보 혹은 마이너스 정보이다. 즉 정보를 적게 가지고 있을수록 엔트로피는 크게 되며,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엔트로피는 적은 것이 된다. 엔트로피는 부의 정보이므로 무지의 정도이기도 하며, 또한 혼란의 정도를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느 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든가 그 계가 질서정연하지 않다면 엔트로피는 커지게 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법칙의 내용은 닫힌 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엔트로피의 정보적인 측면과 연관시켜 간단한 예에 적용시켜 보자. 가령 마당에 낙엽이 흩어져 있는 경우와 한 군데에 모여 있는 경우를 생각하자. 나뭇잎의 위치에 대한 정보량은 나뭇잎이 한 군데에 모여 있는 경우가 흩어져 있는 경우보다 크다. 이와는 반대로 엔트로피는 부의 정보이므로, 나뭇잎이 흩어져 있는 경우의 엔트로피는 나뭇잎이 모여 있는 경우보다 크다.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닫힌 계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따라서 외부에서 낙엽을 한 군데로 쓸어 모으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을 해주지 않는 한 (이는 외부와 단절된 경우에 해당하므로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계를 닫힌 계라고 부른다), 엔트로피가 큰 상태에 해당되는 흩어져 있는 낙엽이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인 한 군데로 모이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생명 현상과 연관시켜 보자. 생명체란 대단히 질서 정연한 조직이어서 고도의 정보를 지닌 계이며 따라서 엔트로피가 아주 작은 계이다(이와는 달리 생명체가 죽고 나서 신체의 구성 요소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면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생명의 진화라는 과정이 과연 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해 진다. 생명체가 아주 엔트로피가 작은 계라면, 덩치가 큰 생물은 덩치가 작은 생물보다 엔트로피가 작은 부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원시 생명에서 고등 생명으로의 진화 과정은 대체적으로 생물체의 몸집이 커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은 엔트로피가 축소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열역학 제2법칙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만일 진화의 과정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과정이어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로 불가능하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하나의 생명체 만을 관찰하는 데서 생기는 오류이다. 어린 아이나 진화하는 생명체는 결코 닫힌 계가 아니라 외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공급되는 열린 계이다. 영양분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얻고 노폐물을 배설하는 생명체는 결코 닫힌 계가 아니다. (비로 쓸어 모으는 것과 같은) 어떤 외부 작용에 의하여 한 군데에 모여 있는 낙엽과 같이, 생명체란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으면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를 유지하는 계이다. 그럼에도 생명체를 닫힌 계라고 생각한다면, 진화가 불가능하다거나 어린아이가 자라지 못한다는 불합리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상의 논의는 일면적인 고찰만으로는 사물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생명을 비롯한 일체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의 연관 다시 말하면 끝없는 연기의 망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한 연기의 고리를 다 끊어 놓고 하나의 개체만을 들여다 본다면, 그 안에서 생명의 전존재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일체 법계의 모든 사물이 그러하다. 일체의 사물이 끝없는 연기의 그물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를 중중무진법계연기라고 한다.

 

<54>상호 연관

- 지구 전체가 자율조정 기능 갖춘 생명체 -
- 연기와 공의 세계 태양계까지 확대 가능 -

우리가 미지의 천체로 여행을 하면서, 그 천체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지를 탐사한다고 하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구조와 행태를 보이는 생명체가 다른 천체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지구의 생명체를 접하면서 얻은 경험만으로 그러한 탐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생명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답에 근거하여 (지상의 생명체와 다른 것가지 포함하여)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 항공 우주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에 화성에 생물이 존재하는지를 탐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참가하였던 과학자의 한 사람인 러브록도 이상과 같은 이유로 생명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생명체란 비평형의 상태 즉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라고 결론내렸다. 다시 말하면 자유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우리의 체온이 주위의 온도와 다르다는 것은 우리 몸이 환경과 비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비평형 상태 혹은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는 음식물에서 얻는 자유에너지를 소비함으로서 유지된다).

그런데 생명을 이렇게 정의하고 보니 다름 아닌 지구가 거대한 생명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지구는 그 전체가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 즉 탈평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령 지구의 대기는 금성이나 화성의 대기처럼 화학적 평형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탈평형의 상태에 있다. 한 예로 현재의 지구는 40억년 전의 원시 대기에도 없었고 다른 천체에는 없는 산소를, 생명 현상이 유지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성비인 21%정도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탈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이러한 자율조정 기능은 생명체가 특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지구 대기의 조성비나 지구의 온도 등 여러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러브록은 지구의 생물권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를 포함하여 이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고 가정하였으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가이아라는 것이 정말 과학적으로 입증된 하나의 실체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체의 사물은 오직 상호 연관이라는 연기의 망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떤 사물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즉 어떤 존재가 지속적 존재 양상을 나타내어 마치 실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그렇게 나타나게끔 인연이 성립한 것일 뿐이니 그 존재에 대해 자성을 상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이아를 논의하는 것은 가이아의 실체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가이아 이론이 제시하는 사물의 상호 연관성에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생명이 아닌 지구는 자신의 머리 위에 그저 생명체들을 얹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들 사이의 연관성이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더 깊고 더 폭 넓게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 사이에는 그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심오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가이아 이론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명체는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그 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꾸면서 역동적 상호 연관의 관계를 꾸며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생태계는 고도의 자율 조정 기능을 지닌 상호 연관의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이아 이론은 이 상호 연관의 체계가 생태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연관의 체계는 지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태양계까지는 확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세계의 완벽한 상호 연관성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연기와 공을 자연의 세계에서 이해하게 된다.

 

<55>상대론

- 일체 사물 서로 끝없이 의존하며 존재 -
- 마음에 그려지는 세계는 인식따라 변화 -

상대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이나 일반 상대론을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물리학에서 상대론의 역사는 적어도 갈릴레이에게까지 올라게게 된다. 갈릴레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고전 물리학에서 상대론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일상 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어떤 물체의 속도를 관측한다고 하자. 정지하여 있는 채로 어떤 나무를 관찰한다면 그 나무의 속도는 물론 0 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의 속도가 0 이라는 관찰 언명이 과연 보편적인 것일 수 있는가? 시속 100km 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같은 나무를 관찰한다면 그는 그 나무가 시속 -100km 의 속도를 가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체의 속도라는 물리량은 그 물리량을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 상태가 규정되지 않고서는 전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의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관측자와 관측 대상 사이에 상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고전적 상대론이다.

물리 이론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들릴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단순히 물리 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직접 체험 가능한 것이다. 기차 안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를 살펴본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시속 100km 로 달리는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이 관찰할 때 자신의 수저 안에 들어 있는 밥알은 정지해 있다. 그러나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이 관찰한다면 그 밥알은 시속 100km 로 달려 간다. 기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밥알이 100km 로 날아온다면 식사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물리 현상을 추상적으로 이론화하여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체가 정지하여 있는가 아니면 움직이는가 하는 질문도 또한 이를 관측하는 관찰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규정해야만 비로소 가능해 진다. 다만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나무가 정지하여 있고 기차 안의 밥알이 100km 로 날아간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 위에 고정되어 있는 관측자를 전제하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러한 관측자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게 되지만, 사실상 모든 운동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요 깃발도 아니라 나부끼는 깃발을 보는 사람 자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인연에 연하여 과가 생기한다는 인연기생(因緣生起) 혹은 인연에 의하여 과가 생한다는 피연생과(彼緣生果)라는 뜻이다. 연기의 두번째 의미는 상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의 존재는 자성을 가지고 독립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무상이고 무아이며, 이는 또한 공이나 중도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에서 논한 상대론의 이야기는 연기의 세번째 의미와 상관한다. 이는 어떤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세계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며 또한 세계가 나에게서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도 역시 인과이기는 하지만 이의 원인은 객관 세계이며 결과는 주관 세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객관 세계는 주관과의 연관에서 볼 때 그 자체로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주관 세계는 객관 세계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 세계에 와서 객관 세계는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기술하는 객관 세계의 운동 상태가 나의 운동 상태에 의하여 규정되듯이, 내 마음에 그려지는 객관의 세계는 내 마음의 상태에 의하여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안(眼)과 색(色)에 의하여 안식(眼識)이 얻어지듯이 우리의 식(識)도 근(根)과 경(境)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것이지만, 경에 의하여 식이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과 식의 역동적 상호 연관 아래서 우리의 인식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다.

<56>진여 즉 제법

- ‘사과와 달’‘번뇌와 보리’둘 아닌 하나 -
- “현실 떠난 곳에서 진여·열반을 찾지 말라”-

물리학의 전 역사를 단 한 마디로 꿸 수 있는 단어가 있
다면 그것은 통합일 것이다. 여기서 통합이란 그 이전보다 더 종합적으로 자연 세계를 이해하여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서로 연관이 없다고 여겨졌던 잡다한 현상들이 점차적으로 적은 수의 원리에 의해 통일적으로 설명되었던 예는 무수히 많다. 물리 현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그 자체가 대단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현상 간에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여러 현상들을 보다 간단한 통합 원리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과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밤하늘에 떠 있으면서 한 달을 주기로 그 모습이 바뀌는 달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초기 조건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다를 뿐, 사실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운동이라는 것을 뉴턴은 밝혀내었다. 뉴턴에 의하여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를 공전하는 달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물리학에서의 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가지 중요한 예만을 들어보자. 전자기학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동일한 근원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전자기학의 기초를 완성한 맥스월은 빛이 바로 전자기 파동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폭과 깊이는 현대물리학에 오면서 더욱 깊고 넓어지게 된다. 20세기에 들어 오면서 우선 파동과 입자에 대한 이해가 종합된다. 전에는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성을 가지며, 전에는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전자나 빛 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본 입자가 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기본 입자에 대해서는 입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고 파동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다. 또한 역으로 입자라고 해도 좋고 파동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언어의 궁색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 언어가 자연 대상을 표현해 내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물리학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이 사건은 현대물리학의 한 기둥인 양자역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현대물리학의 또 다른 기둥인 상대론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그 이전에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이 사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삼으면서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동력학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이러한 개념은 단지 근사적으로만 참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리고 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개념은 중력과 가속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눈에 비치는 개개의 세계, 우리가 상상하는 개개의 세계는 차별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과의 운동은 달의 운동과 다르고 전기는 자기와 다르고 파동은 입자와 다르고 시간은 공간과 다르며 중력은 가속도와 다르다. 그래서 또한 번뇌는 보리와 다르고 생사는 열반과 다르며 마음은 중생과 다르고 중생은 부처와 다르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 대한 깨우침은 사과의 운동과 달의 운동을, 전기와 자기를, 파동과 입자를, 시간과 공간을, 중력과 가속도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는 세계가 오직 연기요 공이어서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의 근본이 있을 뿐이지만 그 현현함에 있어 개별 세계의 차별성이 드러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래서 또한 부처님은 번뇌와 보리가 하나요 생사와 열반이 하나며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고 하셨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장엄한 화합이다. 그리고 그 이상을 현실을 떠난 곳에서 찾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당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발디디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찾는 진여의 세계, 그래서 제법이 진여와 상즉하는 그 세계가 바로 대승의 세계일 것이다.

<57>무차별의 세계

- 진공이란 ‘없음’아닌 입자 가득찬 상태 -
- 색은 인연의 화합일뿐 본체는 평등한 不二 -

과학이 발달하여 가면서 자연을 보는 시각이 점점 통일적이 되어 간다는 점을 지난 주에 이어 계속 다루어 보도록 하자.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은 양자역학과 상대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디랙이라는 물리학자는 이 두 이론을 상대론적 양자역학으로 통합하였다. 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의 진공이란 어떤 에너지 준위 이하의 상태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입자가 가득 차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즉 색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입자들로 가득 찬 상태 즉 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론적 양자역학이라는 물리 이론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색과 공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틀이 마련되었으며 색즉시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연 세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여야 할 것은 색즉시공이란 색이 시간이 지나면서 성주괴공의 단계를 거쳐 공의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색이 공으로 변하고 공이 색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다. 색의 본성 그 자체가 그대로 공이요 또 역으로 공이라는 것도 색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무의 양변을 멸하고 유무의 차별을 떠난 중도에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있다고 하여서, 유와 무와 중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가중이 삼제원융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대지도론에서 “유를 떠나고 무를 떠나고 유가 아님을 떠나고 무가 아님을 떠나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능히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차별을 떠난 세계상은 물리학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고진은 우주의 구조를 평형 구조와 산일 구조 (dissipation structure)로 구분하였다. 평형 구조란 정태적이고 안정적인 것이어서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구조를 말하며, 산일 구조란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구조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우주가 바로 이런 구조이다. 산일 구조에서 계의 요동이 있을 경우, 그 요동의 정도가 경미하면 계가 그 요동을 흡수하여 요동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요동의 정도가 심하여 분기점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요동이 점차로 증폭되다가 마침내는 이전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구조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아냈다. 요동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가 창출된다는 그의 이론은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던 생명의 진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요동을 통하여 무기물의 계에서 유기물 의 계로 유기물의 계에서 생명계로 전혀 다른 구조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론은 우주의 진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프리고진은 이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고 하였다. 이렇듯 제반 과학이 성숙하여 감에 따라 심 지어는 색과 공,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차별상마저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듯 색이라고 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그것은 오직 인연의 화합일 뿐이어 서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듯 하여도 그것은 결코 허무 단멸이 아니니 어찌 색과 공을 차별하겠는가?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서 색을 버리고 공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아를 버리고 무아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문수사리보살은 마하반야바라 밀경에서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겁다고 여기지 않는 다. 왜냐하면 생사를 보지 않는데 어찌 다시 싫어하여 여의겠으며, 열반을 보지 않 는데 어찌 즐겨 염착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렇듯 일체의 허망한 차별상을 여 의어 일체 법에 자성이 없다는 올바른 지혜를 증득하게 되면 제법의 본체는 불이 (不二)하고 평등 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다.

그래서 유마거사는 천녀가 뿌린 꽃을 떼지 못하는 승려들을 향해 보살의 몸에 꽃 이 붙지 못하는 것은 분별을 모두 끊어 버린 까닭이니, 분별심 때문에 꽃이 떨어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채근담에서는 “산림에 숨어 사는 것을 즐겁다 하는 것은 산림의 참 맛을 못 깨달음이요, 명리의 이야기를 듣기 싫다함은 아직도 명리 의 미련을 다 못 잊은 때문

 

<59>무한한 가능성

- “떨어지는 오동잎만 봐도 계절을 알듯 -
- 인간의 사고능력 분별세계 뛰어넘어” -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오히려 타당한 듯한 경우도 있는데 부처님은 어찌하여 우리 모두를 부처라고 하셨는가?
인간이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속단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발달하여 많은 일을 훌륭하게 해 주고 있어서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은 컴퓨터보다 훨씬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더욱 놀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10을 3으로 나누면 컴퓨터는 그것을 3.33... 으로 기억해 둔다. 여기에 3을 다시 곱하면 9.99... 가 된다. 다시 말해서 10을 3으로 나누고 거기에 3을 곱했을 때, 무한히 10에 근접하는 결과를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10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수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14... 라는 식으로 소수점 이하 수천자리까지 계산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원주와 지름의 비라는 수학에서의 직관적인 의미를 인간처럼 이해하지는 못한다. 또한 현재의 컴퓨터는 문 틈에 보이는 고양이 꼬리를 보고 그 뒤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한 잎 떨어지는 오동잎으로 천하의 가을을 알기도 한다. 언어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이다 맛을 본 사람이라면 사이다 맛이 짜릿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사이다의 맛을 마음 속에서 그려낼 수 있다. 이 때문에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분별을 넘어선 절대의 세계가 언어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로서 말을 떠난다는 (依言遺言) 것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진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 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그 어느 동물보다도 탐욕스러운 것으로 만든 부정적인 일면도 있으나, 이상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포착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게 하였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을 가리키는 손에 집착하지 않고 달을 볼 수 있기도 하며, 8만4천 법문을 다 읽지 않고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리를 위하여 법문을 펼치시며, 우리 모두에게 불성이 있으니 오직 자신과 법을 의지하여 정진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이 한 알의 쌀알을 아무리 들여다 본다고 하여도 거기에서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돋아나며 잎이 번성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볼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를 안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뢰야식에는 35억년 중생 삶의 번뇌 망상이 집적되어 여래의 덕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래의 덕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숨겨져 있을 뿐이다. 마치 설산의 본체는 눈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으나 그 안에 자리하고 있고, 캄캄한 밤하늘 어디를 보아도 태양은 보이지 않으나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닌 것과 같이, 번뇌 망상은 상주불변하는 진여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진망화합식(眞妄化合識)이라고도 한다. 이 진여가 누구에게나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불교도가 가져야 할 큰신심이다.
이 모든 것이 불교의 상징인 연꽃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연은 진흙탕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줄기를 뻗어올려 이상의 푸른 하늘을 향한다. 그러나 그 뿐, 물 위에 나온 연은 더 이상 구차스레 줄기를 뻗어 하늘을 향해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은 조금 더 다가가더라도 이상에는 어차피 이르지 못한다는 체념 때문이 아니라, 하늘은 이미 그 안에 가득하여 더 이상 장엄할래야 장엄할 수 없는 세계가 한 송이의 연꽃 안에 완벽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꽃은 다만 그대로 연꽃일 뿐, 그 안에는 흙탕물도 푸른 하늘도 나고 죽음도 없고 깨끗하고 더러움도 없다. 그 모든 분별을 떠난 무차별의 세계로서의 완벽한 종합, 그 불이의 세계가 곧 연꽃이다.

<60>인타라망

- 모든 물체 중력에 의해 상호작용 하듯-
- 우주존재 끝없는 삼세 연기그물로 연관-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들은 4가지 상호작용의 지배를 받는다. 강핵력과 약핵력, 전자기력과 중력이다. 그 중에 중력은 가장 약한 힘이지만 먼 곳까지 그 힘이 미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성이나 성운의 형성은 이 힘에 의하여 진행된다. 우주에 있는 모든 물체는 다른 모든 물체와 이 중력에 의하여 서로 영향을 미치므로, 다른 것과 고립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이 때의 상호 연관을 공간적인 것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시공간이 뒤얽힌 것이다. 가령 5광년 떨어진 별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한다면, 이는 지금의 지구와 5년전의 그 별과의 연관이다. 또 그 별의 입장에서 본다면 5년전의 지구와 지금 그 별과의 상호작용이다. 우리의 우주는 이처럼 복잡하게 서로 서로를 연관지으며 존재한다. 이는 우리의 세계 어디를 보아도 그 자체 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호 연관성은 물체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시공간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물이 든 양동이를 회전시키면 물의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러한 물리 현상이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원심력에 의하여 생긴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관성이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기초 위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절대 공간에 대한 물의 회전운동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뉴턴의 설명이다. 그러나 뉴턴과 생각을 달리하는 마흐는 물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원인은 물이 전우주에 대하여 회전이라는 상대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마흐에 의한다면 양동이의 물을 그대로 두고 전우주를 양동이의 회전 속도에 맞춰 돌린다면 물의 표면이 휘어져야 한다. 또한 만약에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물체를 제거한다면 양동이를 아무리 돌린다고 하여도 물의 표면은 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물리적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주장이 맞는지를 실험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흐의 이러한 주장은 아인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절대적 시공간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설정은 고 전물리학에서의 동력학 기술의 출발점이었지만,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차 별성이 특수 상대론에 의하여 무너지고 이 시공간마저 우주 전체의 물질 분포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일반상대론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우리의 몸이라는 것도 사대의 인연이 화합하여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 여기 서 인연이라는 것은 단지 지금 현재의 시각에 성립하는 공간적인 상호연관에만 국 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상호연관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 뢰야식을 논의하면서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 몸에는 무량겁을 진행하여 온 생명계 의 전역사가 녹아 들어 있다.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마음 속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게 되므로 (能變性), 나에게 나타난 세계는 무량겁의 과거와 상호연관된다. 또한 그 모든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경험은 무한한 미래와 연관된다는 것을 생각하 면 제행은 단지 무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무단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성과 같이 큰 물체든 티끌보다 작은 물체든,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상 관없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끝없는 연기의 그물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 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법계의 실상을 중중무진법계연기라고 이르지만, 인타라망의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제석천궁에는 인타라망이라 불리우는 그물이 걸려있는 데, 하나 하나의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달려있다. 그 구슬의 각각은 서 로 서로 빛을 비추어 각각의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첩첩이 나타나 서 로의 상이 중중무진하게 되어 있다 한다. 이는 우리가 보는 개개의 존재가 서로 차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존재는 하나 하나가 절대적이면서 도 서로 상즉상입하고 원융무애하여 일체가 일(一)에 포섭되고 일이 곧 일체가 되 는 법계의 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一卽一切多卽一)

<61>이사무애

- 도봉산 보는방향 따라 모습 다르지만 -
- 상주불변하는 본체는 오직 하나일 뿐 -


전자나 빛은 한 쪽에서 보면 파동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입자이다. 도봉산을 서울 쪽에서 보면 남도봉이요 의정부 쪽에서 보면 북도봉이다. 큰 물에 바람이 일면 이 파도도 있고 저 파도도 있다.
도봉산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의 인연에 따라 수많은 도봉이 나타나며, 바람이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부느냐의 인연에 따라 수많은 파도가 일어난다. 이렇듯 수많은 도봉과 파도가 나타나지만 그 불변하는 본체는 오직 하나 도봉산과 물일 뿐이다.

이 예로서 체와 용의 관계를 비유하여 설명해 보자. 여기서 체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일체 차별상의 근본이 되는 절대평등의 본체로서 일체 만물의 불변상주하는 본 모양을 가리키며, 용이란 체를 근거로 하여 인연에 따라 일체 차별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위의 예에서 도봉산과 물은 남도봉과 북도봉, 이 파도와 저 파도의 차별이 없이 불변하는 본체이므로 체가 된다. 도봉산과 물이라는 본체가 여러 각도에서 본 다양한 도봉과 여러 곳에서 이는 다양한 파도로 나타나 갖가지 차별상이 생기는 것을 용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다만 비유로서만 성립할 뿐 체와 용에 대한 완벽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봉산이나 물도 다른 산이나 다른 물건과의 관계에서 보면 엄연한 차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와 용에 대한 긍극적인 예는 색즉시공과 공즉시색 즉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찾을 수 있다.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은 결국 같은 말이지만, 이를 굳이 나누어 본다면 진공과 묘유를 의미하게 된다. 색즉시공이란 색으로 나타나는 온갖 차별상은 결국 무자성이어서 평등 무차별한 공이라는 의미이므로, 색이 숨고 공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체의 면에서 공을 강조하는 진공의 의미이다. 공즉시색이란 진여의 본체인 공이 곧 색이라는 의미이므로, 공이 숨고 색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용의 면에서 색을 강조하는 묘유의 의미이다.

이제 이러한 체용과 관련하여 화엄에서의 사종법계(四種法界)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종법계라 함은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사법계(事法界)란 우주 만유의 현상이 서로 대립하여 차별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남도봉과 북도봉, 이 파도와 저 파도의 차별상이 드러나는 색의 세계이다. 물리학에 비유하면 이는 사과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 지고 하늘에는 달이 떠있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법계(理法界)란 차별의 만유 는 서로 대립하고 있으나 그 모든 것에 일관한 본체는 절대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여러 도봉과 여러 파도가 인연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상주불 변하는 하나의 본체인 도봉산과 물의 세계를 가리킨다. 색과 대비하여 본다 면 공의 세계이며, 물리학에 비유하면 사과와 달의 현상을 있게 하는 만유인 력의 법칙이다. 이제 이사무애법계관을 살펴보자.

물리학이란 자연 현상의 규칙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 모양 이 훌륭하게 보이는 법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 현상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면 물리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예로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 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그것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고 달이 지 구 주위를 돈다는 등의 무수한 개개의 현상과 떨어져서는 성립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봉이나 물이라는 본체는 우리 앞에 나타나는 개개의 도봉 이나 개개의 파도라는 차별상을 떠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파도가 곧 물 이요 물이 곧 파도이며, 개개의 도봉이 곧 도봉산이요 도봉산이 곧 개개의 도봉이 된다. 이는 일체 차별상의 사법계가 절대 평등의 이법계와 상즉상입 하여 원융무애함을 나타낸다. 이와 사를 다시 체와 용으로 보고 진공과 묘유 를 그 예로 든다면, 이사무애법계관이란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이니 진 공이 즉 묘유이고 묘유가 즉 진공이어서 진공과 묘유가 원융무애하고 색즉시 공이며 공즉시색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단공(斷空)이 아니고 진공이다.)

그리하여 색즉시공이라 하면 색이 숨고 공이 드러나 공뿐인듯하고 공즉시색 이라 하면 공이 숨고 색이 드러나 색뿐인듯 하지만, 색과 공은 상즉하고 상 입하여 서로 방해하지 않고 오직 원융무애할 뿐이다.

<62>사사무애

- ‘하늘의 달’과‘물에 비친 달’무애관계-
-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

지난 번에 화엄의 사종법계 중에서 사법계와 이법계, 이사무애법계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사법계가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우주 만유의 차별 세계를 나타냄이요, 이법계가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절대 평등의 본체를 나타낸다고 한다면, 이사무애법계는 일체 차별의 사법계가 절대 평등의 이법계와 상즉상입하여 원융무애한 세계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이를 진공과 묘유에 비추어 본다면 사법계란 묘유로서 공즉시색이요, 이법계란 진공으로서 색즉시공이며, 이사무애법계란 진공즉묘유로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어서 색과 공, 현상과 본체, 용과 체가 원융무애하여 그 구분이 없는 중도의 세계이다.

사사무애법계관이란 현상과 본체가 원융무애할 뿐만 아니라 차별적인 개개의 현상 하나 하나도 서로 무애한 관계임을 본다는 것이다. 앞에서의 비유로 설명하면 북도봉과 남도봉이, 이 파도와 저 파도가, 사과와 달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조금 부족하다. 큰 물에는 무수히 많은 파도가 있고, 도봉산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도봉이 있으며, 우주에는 무수한 물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사무애법계란 하나의 파도, 하나의 도봉, 하나의 사과가 무한한 수의 파도, 무한한 수의 도봉, 무한한 수의 물체와 상즉무애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하나의 달이 뜨면 일체의 물에 그 달이 두루 비치며 일체의 물에 비친 개개의 달은 모두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에 포섭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인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실상을 보는 것이 곧 사사무애법계관이다 (一卽一切多卽一).

이미 지난 번의 “인타라망”에서 사사무애한 중중무진법계연기에 대하여 만유인력과 아뢰야식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지난 번에는 인타라망으로 오늘은 사사무애라는 제목으로 잡았지만, 현수 스님이 사사무애한 만유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세운 십현문(十玄門) 중의 하나가 “인타라망경계문”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사실 같은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오늘은 사사무애의 예를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양자역학에 대하여 만족스럽지 않게 생각하였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세워 나갔던 보어 등에게 양자역학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보어 등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문제를 풀면서 양자역학의 제 개념을 공고히 하였으므로, 아인슈타인의 노력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양자역학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문제 중의 하나로 유명한 것이 1935년에 발표된 EPR 역설이다. 그리고 벨이라는 이론물리학자는 1964년에 이 EPR 역설을 검증 가능한 형태의 부등식으로 나타내었다. 이 벨의 부등식은 몇 가지 변수에 대한 자명해 보이는 전제와, 집합에 대한 간단한 논의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역학이 이 부등식이 만족되지 않는 경우를 예측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자역학의 예측이 맞고 벨의 부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교한 실험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이는 그토록 자명한 방식으로 유도된 벨의 부등식에 틀린 곳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벨의 부등식을 유도하는 데 사용되었던 집합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의심가는 곳은 자명해 보이는 부등식에서의 변수에 대한 전제 몇 가지 뿐이다. 이에 대한 다소 복잡한 논의를 거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부등식의 변수에 대하여 상정하는 실재성의 가정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전역학과는 달리 양자역학의 어떤 경우에는 부등식의 변수에 대응하는 물리량의 실재성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경우가 실재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경우를 포함하므로 보편적인 경우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에는 한 물리량에 대한 관측이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다른 물리량에 대한 관측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사무애와 관련하여 본다면 이는 결국 미묘하게 성립하는 상호연관의 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이 다 끝없는 연기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63>생명의 세계관

- 한송이 국화에도 35억년 전역사 담겨-
- 불교는 인간·자연 구별없는 생명철학-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개개인의 성품이나, 문화, 역사, 사회 환경, 종교 등에 따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에서 테니슨과 바쇼의 시를 비교한다. 테니슨은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채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한 송이/ 그러나 내가 너를 뿌리와 너의 모든 것을/ 그 모두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이라고 쓴다. 환원주의적이며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이 시는 생명을 해체하여 진리를 얻으려는 자세를 보여 준다. 이러한 자세로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고, 서구의 자연과학이 이에 근거하여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게 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하나의 세계는 결코 이렇게 부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다.

한편 바쇼는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 라고 쓰고 있다. 그 뿐이다. 그저 그렇게 거기 한 송이의 꽃, 하나의 우주가 열려 있음을 그는 보고 있음이다. 여여함의 미라고나 할까.

무기물에서 시작된 생명의 역사는 유기물과 단백질, 원시적인 자기 복제 체제를 거쳐 최초 생명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생명 진화의 역사가 시작되어 결국에는 자기 성찰이 가능한 그래서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린 인간이라는 생명종까지 지상에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인간 모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일체동근의 다른 모든 생명과 중중무진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이아에 대한 논의에서 살펴 보았듯이, 적어도 지구 전체는 하나의 생명이다. 테니슨의 시에서와 같이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는다. 이처럼 단절된 실체가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를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철학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다 같이 존중하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바로 나 자신이 법계연기의 중심이듯이,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그 모두는 다 같이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이 존중의 철학이 퇴색한 근세의 역사는 이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난제를 던져 주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관 스님은 “환경운동이라는 것도 자연파괴가 인간에게 위해되니까 아우성이지만 환경이란 말도 인간 중심의 서구적 사고 방식에서 나온 말”이라고 지적하면서 “동체대비의 자각으로 유정과 무정을 차별없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의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에, 프롬은 더 많이 소유하여서가 아니라 충실히 존재함으로써, 불교적으로 말하면 여여하게 존재함으로써 기쁨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문제가 탐욕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의 해결은 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불교는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성만으로 작동되었던 우리의 세계를 이성의 세계로 그리고 더 나아가 여여함의 세계로 고양시키는 작업은 이제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며 피운 한 송이의 국화꽃, 거기에는 35억년의 전역사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 잎파리의 꽃에서 장엄함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김용정 교수는 한 송이의 꽃, 한 포기의 풀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포기의 풀에서 얻을 수 없는 구원은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관세음보살이 어찌 법당 안에만 계실 것인가?“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 그늘에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의 시 <새>를 보며 부족한 사람의 부족한 글을 여기서 마친다.

  / 한용운

  

봄물보다 깊으리라

갈산(秋山)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나니 잇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응암 담화 화상이 말했다.

“옛날의 스님들은 마음의 눈이 밝지 못하면

화급하게 도가 있는 선지식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바로잡았다.

 

하루아침에 마음의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

본래의 원력으로 산림에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혹 20년 30년을 여러 생의 계획을 마련해서

심식을 갈고 닦아 마음의 때가 깨끗하게 없어짐에 이르러

털끝만한 허물도 없도록 했다.

 

경계를 만나거나 인연을 만나면 그것을 보기를

마치 담장의 기왓장이나 돌맹이를 보듯 했다.

 

세속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맑고 고요했다.

이것을 일러 금강의 정체(正體)라 했다.

벗은 듯이 깨끗하여 원만하게 된 연후에

어떤 조작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에(무공용無功用) 맡겼다.

 

비록 세상에 대해 무심해 보였지만 

세상에 대한 마음은 항상 간격이 없었으며,

비록 모든 것을 제도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것을 제도하려는 마음은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다함이 없었다.

 

마땅히 알아라.

옛날의 큰스님들이 도가 있는 곳에 나가 바르게 해

깨닫는 묘용은 마치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비추는 것처럼 밝다.

어찌 잠간이라도 법을 계승하여 짊어진 사람이겠는가.

 

Марк Олич (마르크 오리츠)作 (1974~, Russia, Ballet Photographer)

지리산 (Jirisan) / 한태주 작곡, Ocar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