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상(敎相)과 관심(觀心) /청화스님

2015. 8. 8. 20: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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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상(敎相)과 관심(觀心)

청화 큰스님

 


中國 佛敎 敎觀(敎相 觀心)


敎相敎理判釋을 말하며 釋尊一代時敎自己宗義에서 分別判斷함.

觀心自宗에서 세운 眞理觀念하는 을 말함.


法相宗三時敎敎相으로 하고 唯識觀觀心으로 함.

天台宗五時八敎敎相으로 하고 一心三觀觀心으로 함

華嚴宗五敎十宗敎相으로 하고 一眞法界觀觀心으로 함.

眞言宗顯密二敎十住心敎相으로 阿字不生觀觀心으로 함.


중국불교의 교관(敎觀)을 살펴 보겠습니다.

교관(敎觀)은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교상은 그 당시에 불교 교리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번역(飜譯)불교라 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부분적으로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을 하였습니다. 법현(法顯 369?-45l?) 삼장이나 현장(玄奘 622-664) 삼장이나 또는 의정(義淨 635-713) 삼장이나 또는 우리 한국 스님인 혜초(慧超 704-787) 대사나 그분들에 의해서 경전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주로 우리한테는 구법승들에 대한 행각이 깊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구법승들이 한번씩 갔다 오려면 십팔년 이십년 걸립니다. 이른바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립니다. 갈 때도 서역국으로 통과하여 수만리 길인데 혼자 가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몇십 명이 발심을 하여 출발했다가도, 가는데 3년 오는 데 3년, 보통은 3년 세월 이상이 걸리는 가운데 몽고의 고비사막(Gobi 沙漠)을 지나야 하고 티베트 파미르고원(Pamirs 高原:蔥嶺)을 넘어야 하는 고생이 극심하여 그야말로 십중구퇴(十中九退)라, 열 사람 가면 아홉 사람쯤 후퇴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기도 합니다. 현장 법사가 갈 때도 이른바 서유기(西遊記)같은 것을 보면 사막지방에 가다가 쓰러져 죽어서 버려진 구법승들의 해골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현장이나 또는 법현이나 또는 의정이나 혜초나 또는 혜일(慧日 680-748)이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분들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너무나 모험적인 구도행각이었습니다.

종교란 마땅히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무엇인가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다는 것은 현상적인 상을 여읜다는 것입니다. 상을 여읜다고 할 때는 자기 몸뚱이가 안중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구법승들이 그렇게 난행, 고행, 고생고생하고 가까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길인지라 돌아온 사람은 정작 몇 사람 밖에는 안됩니다.

우리는 행복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과거 전생에 구법승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금생에 이렇게 편한 때에 와서 한번에 다 불경을 볼 수가 있고 여러 스승들 덕택으로 발췌해서 요점만 추릴 수가 있는 것이고 아무튼, 역사적으로 고찰을 꼭 해야 합니다.

우리 강원교육도 그런 점에 역점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해도 철학사(哲學史)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바른 철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불교도 인도 불교사(佛敎史), 중국 불교사, 또는 동남아 불교사, 일본 불교사, 한국 불교사를 우리가 꼭 읽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보지 않으면 그만치 자기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다보면 가사, 염불을 애쓰고 한 사람들은 염불에 대해서 재미를 보는 것이고 또 거기 따른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화두를 많이 참구한 사람들은 화두에서 또 무엇인가 얻습니다. 어떤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오 주여! 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또 그것으로 해서 무엇인가 얻습니다. 외도나 정도나 어떤 것이나 하다보면 결국은 재미가 붙습니다. 그러면 미련한 사람들은 꼭 그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상(敎相)의 구체적인 말은 교리판석(敎理判釋)입니다. 교리를 그 당시에 이루어진 불법으로 판단 해석하는 것입니다. 석존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자기 종의(宗義)에서, 자기들 종지(宗旨)에 따라서 분별 판단하는 것입니다.

관심(觀心)은 무슨 종파를 세우면, 우리 종파는 무슨 법으로 공부한다고하는, 공부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지요. 곧 자기 종파에서 세운 진리를 관념(觀念)하는 법을 말합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계통은 ‘나무묘호우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 하는 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딱한 일 아닙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역사적 고찰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련(日蓮 1222∼1282) 대사같은 위대한 사람이 나왔을 때는 그 사람대로 특수한 방편을 세웠겠지마는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비판할 때는 반드시 공변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저는 일련 대사 책을 한번 보았습니다마는 사종격언(四種格言)이라고 해서 선천마(禪天魔)요, 참선하는 것은 하늘 마구니요, 염불은 무간 지옥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극락 간다고 애쓰는 것이 정토종이고 참선하는 것이 삼계를 초월하는 것인데 그와 같이 반대로 말합니다. 또 율종(律宗)은 국적(國賊) 곧 나라의 원수요, 또 일본의 순수밀교인 진언종(眞言宗)은 망언(妄言)이라 합니다. 이것이 일련종의 사대격언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다 옳은 말씀인데 이렇게 꼭 자기 것만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종파를 내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다 독선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법상종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주로 합니다. 법상종은 삼시교(三時敎) 곧 유교(有敎) 그 다음에 공교(空敎) 그 다음에 중도교(中道敎)를 교상으로 하고 또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물질은 티끌 하나도 본래가 없고 모두가 식()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식이나 유심(唯心)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내나야 식은 바로 마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주 전체가 오직 마음 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유식관(唯識觀)을 관심법(觀心法)으로 합니다.


천태종(天台宗)은 오시팔교(五時八敎)라, 일대시교를 다섯 시교(時敎)로 나누고 공부하는 여러 가지 행위에 따라서 팔교(八敎)로 구분합니다. 우리 마음자리에서 바로 공()과 가()와 중도(中道)를 관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을 수행법으로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조금도 집착하거나 잡을 수가 없는 무장무애하고 텅텅 비어 있지마는 인연에 따르면 현상적인 상()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상이 본래 바로 공이지마는 가상(假相)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가()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공과 가가 둘이 아니므로 결국 중()이라 합니다.

화엄종(華嚴宗)은 오교십종(五敎十宗)을 교상으로 하고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 곧 우주만유 모두가 간격도 없이 일여 평등한 진여법성이라고 관조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관법이 있으나 대체로 이렇게 관하는 법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그리고 진언종(眞言宗)은 순수밀교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순수밀교로 해서 진언종이 여러 모로 훌륭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일본의 구우까이(空海 774∼835)라는 스님이 일본 진언종을 세웠습니다. 진언종은 현교, 밀교, 2교와 십주심(十住心)을 교상으로 하고 아자(阿字) 곧 아미타불의 아자입니다. 아자불생관(阿字不生觀)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자칫 혼란을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 이런 것을 세밀히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윤곽만을 알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이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나중에 경을 보고 또는 불교사를 보더라도 한결 명료하게 납득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무소유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건 허욕이다.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그 하나 속에 있다. 둘을 얻게 되면 행복이 희석되어서 그 하나마저도 잃는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 준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 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나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나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일부이다. -법정스님의 법문 중에서-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일수록 말이 적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주고 드러나지 않게 선을 베푸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십시오. 변명하지 말고 행여 마음이 상하더라도 맞서지 말며 그대의 마음을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섬세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사람들이 그대를 멀리할 때에도, 도움을 거부할 때에도, 오해를 받을 때에도,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이해인 수녀-
      (오늘의 꽃) 분홍 안개꽃 (깁소필라) 석죽과(너도개미자리과)과의 한해살이풀로 안개꽃(Gypsophila elegans)과 근연종입니다. 원산지 카프카스 등 아시아 중부 및 유럽 전역의 길가나 모래 및 자갈이 많은 노지에서 자라고 주로 절화로 이용하며 공중걸이분이나 모둠심기의 가장자리 장식용으로 이용하는 꽃이지요. 꽃말 :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입니다. 한창 꽃이 피어날 때는 안개가 서린 것처럼 희뿌옇게 된다고 하여 안개꽃이라는 이름이 붙었구요. 석회질의 토양에 잘 자라기 때문에 '석회'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gypsos와 '좋아하다'라는 뜻을 가진 philos를 합하여 깁소필라 라고도 한답니다.. 안개꽃은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꽃다발의 감초로써 다른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꽃발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꽃이랍니다. 홑꽃도 있지만 작지만 풍성한 느낌을 주는 겹꽃도 있는데.. 나보다 남을 돋보이게 하는 꽃..참 착한 꽃이지요?
      안개꽃(Des oeillets de poete - A Foggy Flower)
      - 나윤선 노래, 김용운 작시, 박경규 작곡 - 1992년 브라질 리우데 자네이로 세계환경의 날에 즈음하여, 최초로 환경음악이라는 장르로 매스컴의 집중을 받은 "환경음악집"의 타이틀 음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노래한 곡입니다 작곡자가 캐나다의 몬트리올 유학생활중 퀘백인 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이 곡을 부른 나윤선은 불문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대사관 샹송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Des oeillets de poete 는 안개꽃의 학명으로 '시인의 꽃' 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