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29. 19:3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이미지(Image)/강병균 교수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보시한 자야(1916~99)는 꽃다운 시절 시인 백석과 1년여 꿈같은 동거를 했다. 자야는 22살의 한양기생이었다. 한국전으로 백석과 남과 북으로 갈린 그녀는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녀가 늙어서도 한결같이 사랑한 백석은 60년 전의 백석이었을까, 아니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노년의 백석이었을까? 타인은 우리에게 실재일까, 아니면 이미지일까? 우리는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과거부터 존재한 존재와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자기에게 실재일까, 아니면 이미지일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이미지이다.
미인의 대장, 직장(똥주머니), 방광(오줌보), 요도(오줌길), 허파꽈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가 만들어낸 이미지 혹은 그 여자로 인해 내 마음에 즉 내 머리 속에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지, 저기 존재하는 ‘어떤 여자’(ding-an-sich 물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허깨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이미지는 불완전하고, 하시라도 바뀔 수 있고, 실제로 바뀌므로 허깨비이다. 유한한 정보를 가지고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잔인하게 배신을 당하고 처참하게 절망한다. 진실이 드러나도 부인한다. 내가 아는 당신은 내 눈앞의 당신이 아니라고, 즉 내 마음속의 당신은 내 마음밖의 당신이 아니라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허깨비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이라는’ 정체성에 기인하는데, 이조차도 유한하고 불완전한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5,000년 전에 인간이 자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을 것인가? 50만 년 전에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았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정체성은 시공을 통해 끝없이 변한다!
한국전쟁 중 20대 젊은 나이에 헤어진 북쪽에 남겨진 배우자를 그리워하는 남쪽의 배우자는 60년 동안, 마음에 혹은 뇌에 담아둔, 옛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지금 그 사람의 실제 모습(몸과 마음의)은 알 길이 없다. 만약 그분이 이미 사망했다면, 그분은 배우자의 마음속에 과거의 이미지로 영원히 고정된다. 우리가,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우리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 우리가 우리 마음에 만들어낸 그 여자에 대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여자의 방광, 직장, 허파꽈리, 코털, 위장점막, 뇌 역시 사랑해야하나 그렇지 않다.
그녀의 촉촉이 젖은 안개비 같은 눈을 사랑할지는 모르나, 사고를 당해서 밖으로 튀어나온 구체의 안구를 사랑할 리는 만무하다. 안구를 코 근처에 달고 다니는 여인을 사랑할 리는 만무하다. 설사 그 여인의 나머지 부분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절색의 여자가 있다 해보자. 그런데 피부가 투명해서 속이 다 보인다. 시뻘건 간, 콩팥, 방광(오줌보), 내장, 심장, 위장, 소장, 직장(똥주머니), 요도(오줌길), 핏줄이 다 보인다. 두 눈이 멀쩡한 당신은 그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밤이 아니라 낮에 사랑할 수 있는가? 밤이라 해도, 그믐밤이 아니라 보름밤에 사랑할 수 있는가?
아마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 여자처럼 투명피부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런 생물이 존재하며 멸종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기들끼리 서로 사랑을 해서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분명하다.) 투명피부 속으로 보이는 콩팥, 방광, 허파꽈리의 눈부시게 선명한 핏빛 아름다움을 논할지 모른다. 아주 심각하게. 숨 막히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미지이다. (불투명피부 시절의) 옛 이미지가 (투명피부 시절의) 새 이미지로 대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미지도 불완전하다. 이제 속은 볼 수 있으나 밖은 볼 수 없으며, 여전히 속의 속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투명한 세상에 살면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다 볼 수 없다. 완벽하게 투명한 유리로 건립된 세상은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당신 눈(망막)이 투명하다면 아예 상(像)이 맺히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하시라. 불투명한 우리 눈에 포착되는 유위有爲의 세계는 천변만화하는 불투명의 세계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보려면 유위세계에 살아야 하고, ‘이 유위세계는 불투명하기에 다 볼 수 없다’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
▲ 당신은, 안개비 두 눈 뒤에 자리잡은 그녀의 이 뇌를 사랑하는가? 이 뇌가 없이도 그녀는 존재하는가? |
몸이 아닌 마음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불투명 피부가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기 어려운 이유이다. 불투명한 막이 없어서 쉽게 타인에게 자기 마음을 읽혔으면, 이미 오래전에 진화의 과정에서 멸종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타인의 마음에 대한 이미지’는 불완전한 유한개의 이미지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당신은 당신의 간, 허파꽈리, 방광, 뇌를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는가?
자기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가? 자기 영혼의 어두운 구석진 곳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는가?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사실은 항상) 스스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한 사람 속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이다. 그 여러 마음들이 각각 내밀(內密)한 불투명 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마음을 잘 모르고, 영혼의 밤은 북극의 밤처럼 길고, 북창동의 밤처럼 소란스럽고, 이태원의 밤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당신 마음이 안팎으로 완벽하게 투명해지면, 아무 상도 맺히지 않는다. 그것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에 대해 갖는 이미지’, 즉 ‘내가 누구라는 이미지’는 유한개의 불완전한 정보로 이루어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더 정확한 이미지를 가질 순 있으나, 유한정보와 불완전한 정보위에 건립된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이미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즉 '나'라는 이미지도 허깨비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허깨비가 허깨비를 사랑한 것이다. 그런데 허깨비 사이에 무슨 사랑이 가능할 것인가? 따라서 사랑이란 허깨비 사이의 ‘허깨비’ 사랑이다.
사랑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건립한 일체는 다 이미지이고 허깨비이다. 다 코드(code)이다. DVD, CD, USB 위에 새겨진 디지털화된 코드일 뿐이다. 우리 마음 또는 뇌에 음과 양으로 새겨진 코드일 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은, DVD의 코드를 디코드(decode)해서 스크린(화면 畵面)에 올리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 마음속의 코드를 디코드해서 우리 현재의식이라는 스크린에 올리는 것이다. 다른 모든 정신적인 행위도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몸과 마음)와 우리의 정체성은 시공을 통해 변한다! 세상 만물도 그러하고 우리 마음속에 코드화된 세상만물은 더욱 그러하다.
▲ (왼쪽 설명)뇌신경세포 뉴런: 이미지를 만들고 저장한다. 뇌 속에는 이런 뉴런이 1,000억 개나 있다. 은하의 별 숫자와 같다. 우리 뇌는 은하다. (오른쪽 설명) 다양한 형태의 뉴런. 당신은 당신에 대해 잘 몰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냥 살면 된다. 모든 생명체는 35억년 동안 ‘그냥’ 살아왔다.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처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이다.
모든 연기현상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고 이슬이나 번갯불 같다.
그러므로 어디에 참나가 있을 것인가? 소위 ‘참나(진아 眞我)를 증득했다“고 주장하는 선사(禪師)들과 힌두교 수행자들의 우주와 자연과 생명과 세상에 대한 미개하고 불완전한 견해를 보면, 그들의 참나 역시 ’유한개의 불완전한 정보‘위에 건립된 ’불완전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한한 목숨‘을 지닌 그리고 ’유한한 몸과 유한한 인식력‘을 지닌 인간이 ’수명과 능력이 무한하고 완전한‘ 신을 만들어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로부터 위안과 보호를 받으려는 것이나, ’무한하고 완전한 참나‘를 만들어 스스로 자신이 ’수명과 능력이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를 것이 없는 행위이다. 하나는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밖‘에 건립한 것이고, 하나는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안‘에 건립한 차이밖에 없다.
이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를 ‘불완전하고 유한하게’ ‘묘사하고, 설계하고, 만들어온’ 환망공상(幻想·妄想·空想·想像)의 역사이다.
그럼 희망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살면 된다. 삶은 시간이고, 시간은 변화이고, 변화는 불완전이다. 뭘 더 바라시는가? 살고 싶으면 불완전을 수용하시라. 오늘도 어제처럼 태양이 떠오르고 올해도 지난해처럼 봄이 찾아온 것을, 즉 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나 동료에게 배신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살면 된다. 어차피 불완전한 인간이 이 정도의 판단이나마 한 것이, 즉 아직까지 배신을 당하지 않은 것이, 어찌 기적이 아니고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깊은 밤 벌거벗은 채로 우리 자신을 대면할 때, 죽음을 직면할 때, 우리와 그동안 더없이 친숙하게 지내던 인생관, 생명관, 종교관, 우주관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고, 우리는 생과 사의 황량한 십자로에서 홀로 떤다. 자기를 배신하는 친구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영혼의 어두운 밤, 우리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낯선 적이 아니라 친숙한 친구이다. 남일 필요도 없어서,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한 자기일 수도 있다.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인 자기!)
그래서 불란서 철학자이자 문호인 볼테르는 기도했다. “주여, 저를 친구들로부터 보호하소서. 적들은 저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나이다.”
그리 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이 행복이 날아가 버릴까봐 불안해지면, 지금 불행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우면, 혹은 너무 혹독하게 배신을 당하면 생각을 바꾸면 된다. “즐거움을 누리거나 고통을 당하는 나(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심신복합체(physio-mental composite 五蘊複合體 名色複合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과 고통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집착과 고통을 탈출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무아(無我)를 설한 이유이다. 마음을 지닌 모든 존재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깊어가는 겨울밤, 백석의 시를 소개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자야(김영한) 1916~1999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미자 힛트곡 184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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