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5. 19:4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대행 스님의 기이한 생물학
과학은 우주와 생명을 무한한 질서를 지닌 경이로운 대상으로 보게 만들지만
과학에 대한 무지는 우주와 생명을 무한히 자유로운 망상의 원자재로 만든다.
대행(大行) 스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을 모아 경전을 만들었다. 크기와 모양이 기독교 성경과 비슷한데, 검은 색으로 장정을 하고, 측면에는 금박을 입혔으며, 실로 제본하였다. 글씨가 몹시 커서 내용이 책 크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체제는 기독교 성경처럼 번호를 붙인 장과 절로 구성되어있다. 한 구절을 경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도록 교차주도 갖추어져 있다. 책명은 거창하게도 ‘한마음 요전’이다. 이 책은 한마음(一心)을 구현한 대행 스님의 행장기(行狀記)이기도 하다.
대행은 이 한마음을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또 주인공을 ‘참나’라고 부른다. 주인공은 전지(全知 omniscient)·전능(全能 omnipotent)·편재(遍在 omnipresent)하고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기독교 신과 같은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은 나와 세계의 ‘주인(Lord)'이며,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요, ‘알파(시작)’이자 ‘오메가(끝)’이다. 기독교신약에 등장하는, 영락없는 기독교 신이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도 주인공’이라고 하니, 기독교 구약 욥기의 야훼 하나님이기도 하다.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고 우주가 다 없어져도 존재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불구부정(不垢不淨), 지고지락(至高至樂)한 존재이다. 주인공은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이 그로부터 비롯되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원인(第一原因 The First Cause)이다. 주인공은 일체 모든 사물과 생물이 될 수 있으므로, 인도 바라문교(婆羅門敎 Brahmanism)의 브라흐마(梵) 전변설(轉變設)이기도 하다.
대행의 사상은 바라문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괴이한 사상이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무아론(無我論)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전형적인 유아론(有我論)이다. 이상은 ‘한마음 요전’에 나타난 주인공에 대한 대행의 철학이며, ‘주인공 신학’은 대행이 평생 설한 핵심사상이다.
‘한마음 요전’ 첫 번째 쪽에 주인공에 대한 ‘믿음’이 천명(闡明)되어있다. ‘내 주인공만이 모든 병고액난(病苦厄難 질병과 재앙으로 인한 괴로움과 어려움)을 녹일 수 있다’는 등의 주인공에 대한 오종(五種)신앙이 제시되어있다(하지만 병은 주인공이 고치지 못한다. 맹장염에 걸리면 그 즉시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며, 충치가 생기면 치과에 가서 신경치료를 받아야 한다. 대행 자신도 치과치료를 받은 바 있다. 치료가 잘못 되어서 볼이 움푹 들어가는 부작용이 생겼다고 불만을 표한 적이 있다. 주인공에게 맡기지 않고 병원에 들른 업보인지 궁금하다). 대행은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맡기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유일신교의 신앙고백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I. 대행 스님의 진화론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
이 책 '한마음 요전‘에는 UFO와 수성, 금성, 화성, 목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 등 기괴한 내용들이 여기저기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진화론도 있다. 제8장 ‘윤회와 진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진화론에 대한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꼬리가 있는데 그 꼬리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꼬리가 사라졌고,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날개가 생긴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지만, 옳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위 내용은 대행이 어설프게 얻어들은 진화론이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설: 예를 들어 지게꾼의 굵은 다리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설)조차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대행의 지향(志向)진화론(intentional evolution)이 성립하겠는가. 마음제일주의 진화론이다.
수영선수들은 손발이 커지기를 원하는데 정말로 커지는가? 아마 이들은 손가락 사이나 발가락 사이에 커다란 물갈퀴가 달리길 소원할지도 모른다. 만약 대행의 지향진화론이 참이라면 이런 소원을 가진 선수들은 물갈퀴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올림픽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수영선수들의 우람한 어깨와 커진 폐나, 테니스선수들과 야구선수들의 커진 한쪽 팔은 절대로 유전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특정 육체기관을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렁이나 박테리아나 단세포동물은 마음이 없다. 없는 마음이 무슨 수로 필요와 불필요를 느낀다는 말인가?
대행 스님은 진화론을 공부 좀 하시라. 종교인들은 혹독하게 비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어설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과학용어로 포장해서 선량한 대중을 미혹(迷惑)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대중(무명중생 無明衆生)은 ‘성직자가 잘 몰라서 한 소리’인 줄 모르고 진리인양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어떤 사람을 믿다가 믿음이 임계치를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 말이라면 무조건 다 믿는 기이한 현상을 ‘광신’이라고 한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날개는 처음부터 지금의 완전한 상태로 생긴 것이 아니다. 학자들은 깃털의 기능이 처음에는 체온유지작용 또는 달리기나 나무를 오르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작용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즉 초기기능은 비행(飛行)이 아니었으며, 다른 목적으로 쓰이던 깃털이 변해서 날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행이 생각하듯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날개가 생긴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새의 조상인, 2억 년 전에서 6,500만년까지 1억3,500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들은 당시 아직 존재하지 않던 날개라는 물건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기능을 할 발달한 뇌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룡보다 자그마치 6,500만년이나 더 진화한 불세출의 만능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조차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상상할 수 없었다.
양력(揚力)이나 프로펠러나 제트엔진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껏, 이미 존재하는 동물의 날개를 모방한 인공날개로 하늘을 날고자 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대행은, 그 멍청한 공룡들이 당시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날개가 생겼다고 주장하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도 날다람쥐는 새 날개 같은 완벽한 형태의 날개가 없이 겨드랑이 막을 펴고 활강(滑降 glide)할 뿐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용 인공날개 스케치 |
점진적인 진화의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눈을 들 수 있다. 창조론자들은 ‘눈이 처음부터 지금의 눈처럼 생겼다’고 오해하고, “완벽한 눈의 출현은 진화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눈은 처음에는 완벽한 형태가 아니었으며, 진화를 통해서 원시적인 눈이 지금의 복잡한 눈으로 발달한 것이다.
자연계에는, 원시적인 눈에서부터 사람의 눈까지 여러 중간단계의 눈이 종류별로 존재한다. 눈의 시작은 빛에 민감한 피부이다. 이 피부가 변해서 눈이 된 것이다. 그 변화과정에서 홑눈, 겹눈, 채색감별 눈, 색맹 눈 등 다양한 구조의 눈이 생겼다. 그러므로 진화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다. 모든 생물이 진화를 하면 모두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모두 같은 형태·구조의 눈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맹점이 없는 문어의 눈이 맹점이 있는 인간의 눈으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역도 불가능하다. 동물이 어느 날 식물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고, 동물이 어느 날 식물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다.
▲ 모나리자 |
올챙이 꼬리가 없어지는 것은, 올챙이가 ‘나는 꼬리가 필요 없다’고 느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챙이에게는 그런 생각은 고사하고 ‘꼬리’라는 개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동양종교인들은 순진하게도 생물이라면 모두 인간 같은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아마 모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II. 대행 스님의 주인공과 영혼
동양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영혼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완전한 존재이지, 미개한 상태에서 발달한 상태로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영혼(아트만 atman 我)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기독교인들은 아담과 이브가 창조될 때 지금 인간과 동일한 영혼이 그들 몸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영혼을 불생불멸(不生不滅 만들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과 끝이 없는)의 영원한 존재로 인식하는 데 비해서,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또한 하나님이 없앨 수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혼(holy spirit)뿐이다.
고등사고를 하는 데는 언어가 필요하며, 언어는 배워야 구사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침팬지들과 살다 인간사회로 돌아온 소년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며, 인간과 같은 사유를 하지 못한다. (이것은 수학, 물리학, 화학 전문용어를 배우지 않으면 수학, 물리학, 화학을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이것은 언어가 없으면 고등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설사 영혼이 있다 하더라도, 영혼이 하는 것이 아니다. 뇌는 특정부위에 손상을 입으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기능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변연계가 손상되면 감정이 없어지며,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기억장애가 생긴다. 더 세부적으로는, 사람얼굴기억만 담당하는 뇌 부위가 있어서 이 부위에 손상을 입으면 자기 가족도 알아보지 못한다. 즉 영혼은, 설사 고도의 정신적인 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뇌에 구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이론이다. 최소한, 당신(몸)이 살아있을 때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대행 스님의 가르침에서는 이 영혼이 ‘주인공’이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 (불교용어인 주인공主人公은 ‘주인님’이라는 뜻이다. 몸의 주인인 ‘뭔가’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無我 anatman)사상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사상이다.)
대행 스님에 의하면, 이 주인공은 치병(治病)·구난(救難) 등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데, 단지 우리가 주인공을 안 믿어서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한다’고 대행은 가르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말과 몹시 유사하다.
따라서 대행의 불교는 ‘유일신교적 불교’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은 각자 자기 주인공이 있으나, 모든 주인공은 그 능력과 속성에 있어서 서로 차별이 없으므로 주인공을 유일신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다. 예수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father)’라 부르듯이, 대행은 자기 주인공을 ‘아빠(daddy)’라고 불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헤맬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리고 나의 원수를 박살내주시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 내 모든 소원과 하소연을 들어주고 보살펴주는 ‘아빠’ 같은 주인공.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기 하나님과 대화를 하듯이, 대행은 ‘아빠’라고 부르며 자기 주인공과 대화를 했다.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이 놀랍지 않은가?
근래 개봉된 외화(外畵)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동자(童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구약 출애급기 3장에서처럼 ’불타는 떨기나무‘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어린아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몹시 흥미롭게도, 대행에게도 ’아빠‘는 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마음 요전‘ 41쪽) 이들은 무속(巫俗 shamanism)에 등장하는 동자신(童子神)과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린아이들은 상상의 존재와 대화를 한다. 상상의 친구가 있다. 어떤 이들은 상당히 늦게까지 상상의 친구를 둔다. 아직 의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인간들은 신과 대화를 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의식)과 대화를 한 것이다. 또는 자기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낸 존재와 대화를 한 것이다. 아직 의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어린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친구의 존재’는, ‘의식도 개체발생은 종의 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증거이다.
(한 사람의 마음에는 동시에 여러 개의 의식이 살고 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은 나눌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개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발견은 현대의학과 뇌과학의 빛나는 업적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병은 주인공에게 맡기라던 대행도 치과치료는 받았는데, 병은 환영이라면서 병원에 가는 것을 금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1821~1910)도 치과에 가는 것은 허용했다.
치통은 기도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그 지독한 고통은 아무리 신심이 깊은 사람도, 물질세계와 병은 환영이라고 눈을 부라리며 주장하는 사람도 참기 힘들다. 당신이라면 치통있는 천국과 치통없는 사바세계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는가?
그 외에 산부인과, 검안사(檢眼師), 접골의사, 예방접종은 허용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들이 병든 자식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기도만 하다 어문 아이들을 많이 죽였다. 물론 예방접종도 시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고 법적 제재를 받았다. 교세가 확장되지 못한 주요이유일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여호와증인들의 수혈 거부가 있다. 사이비종교들은 현대과학을 거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너가 천연두치료법인 종두법(種痘法)을 발견한 것은, 에디가 태어나기 25년 전인, 1796년이다. 당시 인구폭증을 두려워하던 ‘인구론’의 저자 맬더스는 “천연두는 인구를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순기능(順機能)을 한다”면서 제너의 종두법을 반대했다. 인간의 광기는 끝이 없다; 성속(聖俗)을 가리지 않는다.
▲ 크리스천 사이언스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 기독교 역사상 유일한 여성교주이다. 그녀의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영일 뿐이다. 물질세계는 사악한 환영이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순수하고 선한 신(God), 즉 ‘신성한 마음’(Holy Mind)뿐이다. 기도를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으면 물질세계와 병에서, 즉 환영으로부터 해방된다.“우주를 브라흐마(梵)의 꿈으로 보는 힌두교사상을 차용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독교에 섞어 잡종(hybrid)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걸 감히 과학(Christian Science)이라고 불렀다. |
대행 스님의 가르침은 ‘병이 나면 주인공에게 다 맡기라’고 한 반면에, 미국 사이비종교 크리스천 사이언스(1879~)의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는 “병은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영적세계뿐이며, 물질세계는 환영(illusion)이다. 영적세계는 선하고 물질세계는 사악하다. 질병은 정신이 고장 난 것이지, 육체가 고장 난 것이 아니다. 물질은 마음에서 생겼다. 우주는 마음이고 신(神)도 마음이다. 병은 ‘바른 마음’의 부재에서 온다. 질병과 죽음은 환영이다. 기도를 하면 그 사실을 깨달아 병에서 해방된다”고 주장했다. 서양인 기독교신자인 그녀는 동양인 불교승려보다도 더 지독한 유심주의(唯心主義)적 입장을 취했다.
종교인들은 치병의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 크게 교세를 확장하는 경우가 있다. 불교계의 대행 스님과 기독교계의 조용기 목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대행 스님의 한마음선원은 국내외에 수십 개의 지부를 자랑한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근자에 조 목사를 둘러싼 온갖 재정적인 성적인 추문이 불거지게 전에는, 한때 신도수 100만을 자랑하던 세계최대 단일교회였다.
그런데 이들이 치병의 능력이 없어도 단지 고상한 설법·설교만으로 그 정도의 교세를 이룰 수 있었을까? 통상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이나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먹고살기 바쁘고 힘겨운 터에, 골치 아픈 소리일 뿐이다. 차라리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고 그 대가로 복을 받는 것’이 훨씬 쉽고 매력적이다. 대중은 즉물적인 그리고 치병적인 능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치병능력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있다’ ‘없다’ 생각하는 것조차 믿음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불합리한 믿음과 치병을 맞바꾸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의 미심쩍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어줄 터이니, 그 대신에 내 병이나 고쳐주세요!”
그중 가장 극적인 것이 “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일 뿐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에디의 선언이다. 대행의 주장은 “병은 존재하나, 자신의 주인공(마음)의 힘으로 다 고칠 수 있으니 주인공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의료계에는 엄청난 재앙이다.
III. 대행 스님의 유사불교적인 지적설계론
<<옛날에 살던 몸집이 크고 흉하게 생긴 동물들이 없어진 까닭은 사는 동안에 마음의 차원이 밝아진 까닭이다... 마음의 설계가 있음으로 해서 진화된 몸이 겉으로 나온 것이니 진화이면서 창조요, 창조이면서 진화인 것이다.>>
대행의 이론은 신종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이다. 더 정확히는 ‘유심론적인 창조론적 지적설계론’이다. 마음(주인공)이 창조적으로 신체기관을 설계한다는 주장이다. 유사불교적 지적설계론이다.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지적설계론’과 매우 유사한 이론이다. 기독교는 ‘생물은 신이 설계(창조)했다’고 주장하는데, 대행은 ‘생물은 마음(주인공)이 설계(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대 가톨릭은 어느 정도 진화를 인정하며,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서 큰 틀의 창조가 이루어졌고 그 후 작은 규모의 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지금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그 후 황인 흑인 백인 등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대행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가톨릭의 ‘지적설계론적(창조론적) 진화론’과 일치한다. 유일한 차이는 ‘하나님’의 자리를 ‘마음(주인공)’이 대신한 것이다. 대행이 “뭐든지 주인공에게 맡기면 다 해결된다”라고 주장하니, 대행의 진화론이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 미국 보스톤에 있는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본부교회 |
대행이 언급하고 있는 ‘옛날에 살던 몸집이 크고 흉하게 생긴 동물들’이란 공룡을 말하는 듯한데, 공룡이 사라진 이유는 공룡의 마음이 밝아져서가 아니라, 가장 유력한 이론에 의하면, 6,500만 년 전에 발생한 지름이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유성의 충돌이 초래한 초대형의 극심한 지구환경변화로 인한 멸종이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그런 유성충돌흔적이 해저에 남아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구는 지금도 공룡세상이고,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미국 보스톤에 있는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본부교회의 장엄한 내부 |
대행 스님의 독창적인(?) 진화론은 괴이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진화란 마음의 설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요, 유전자의 돌연변이와 적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마음도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주인공이 설계를 해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몸을 벗고 새 육신을 받는다는 ‘마음국수주의(mind chauvinism)적인 윤회론’을 진화론과 화해시키려 하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행에 의하면,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주재자, 참자기가 있다.” 여기서 참자기는 육신의 주인인 참나, 즉 주인공이다.)
대행 스님은 생전에 현대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진화론을 제대로 배우거나 공부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황당무계(荒唐無稽 absurd crazy bizarre grotesque)한 진화론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대행이 하는 초자연적인 주장을 모두 면밀히 검토해야한다. 그 주장들이 어떤 엄밀한 과학적인 사고·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필시 대행의 명상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행의 ‘수성, 금성, 화성, 목성에 사람이 산다는 주장’이나 ‘공룡이 멸종한 이유가 공룡의 마음이 밝아진 것 때문이라는 주장’이 선정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나머지 ‘사람이 개구리, 뱀, 새로 환생한다는 주장’ 역시 신빙성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禪定)은 진리를 찾기 위한 보조수단이지, 선정체험 그 자체가 진리일 수는 없다. 능엄경 등의 경전에 언급된 숱한 삿된 선정은, 수행도상(修行途上)에 순백(純白)의 표정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무시무시한 치명적인 크레바스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인류역사상 어느 종교경전에도 ‘진화(evolution)’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엄밀히 그리고 가혹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모든 종교경전들은 인간과 생물의 기원에 대해서 크게 헛짚은 것이다. 사실은 다 초대형 중증 망상이다. 따라서 대행의 진화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언급은 대행이 현대과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의 결과이며, 진화에 대해서는 대행이 더 잘 알 리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불변의 진리가 있다: 배우지 않거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다.
▲ 육식공룡황제 티라노사우루스의 위용: 6,500만년에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지 않았다면 지구는 아직도 공룡세상이고 부처님의 출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이 점에서 공자님은 위대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呼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니, 그 아니 즐겁지 아니하냐). 인류 과학·문명발달은 집단의 힘이지 종교가 주창(主唱)하는 완벽한 주인공 같은 개인(영혼)의 힘이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적 망상은 바로 이 개별영혼(스스로 완전한 즉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이 완벽하게 자족적인 존재)에 대한 광적인 과대평가에 기인한다.
일찍이 2,000년 전에 로마의 위대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4? ~ BC 55?)는 저서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De rerum natura)’에서 말했다. “눈이나 혀와 같은 기관은 처음부터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식물과 동물 등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는 전부 길고 복잡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 왔다.”
▲ 가지가지 공룡들: 공룡애호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대행스님의 말처럼 흉측하게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한 어린아이들이 공룡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
루크레티우스의 이 말 앞에서, “‘마음’의 설계가 있음으로 해서 진화된 몸이 겉으로 나온 것이다”라는 2,000년 후학(後學) 대행의 발언이 어찌 부끄럽지 않을 것인가? 여기서 ‘마음’은 대행이 즐겨 표현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주인공’일진데 어찌 주인공이 시행착오(진화의 여정에서의)를 한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우리 눈의 망막에 있는 맹점(盲點)은 설계되었다면 바보 같은 설계이다. 시신경이 망막전면에 배치되어있어, 이 시신경들이 망막 뒤의 뇌로 빠져나가는 구멍이 맹점을 만든다. 오히려 맹점이 없는 문어의 눈이 더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문어의 시신경은 망막 앞이 아닌 뒤에 위치한다. 대행의 주인공이 문어(의 주인공)보다도 못하다는 말인가? 이 점은, 대행의 지적설계론이건 야소(耶蘇)의 지적설계론이건 간에, 지적설계론의 맹점이 아닐 수 없다.
▲ 시조새: 공룡처럼 입에 이빨, 날개에 발톱, 꼬리에 뼈가 있다.파충류 박쥐에 해당한다. |
이런 괴이한 이론이 불경처럼 생긴 책(한마음 요전)으로까지 만들어지는 것은 추종자들과 신도들의 책임이 크다. 자기들 스승을 무조건적으로 추앙만하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은 자기 이론이 명문대 출신의 똑똑한 신도들과 사회적 명사인 신도들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과격한 이론을 내놓다가 급기야 혹세무민(惑世誣民 홀리고 속임)의 길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설사 그리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집단의 광기가 가세하면) 그리 된다. 전형적인 '상호 되먹임'(mutual feedback)현상이다. 인간군집의식의 기이한 측면이다.
그 피해는 오로지 어리석은 신도들의 몫이다. 스승이 (현대과학에 위배되는) 괴이한 주장을 하면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뭔 소리야?” 하면서 급히 스승의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보아야 하거만, 오히려 그 괴이한 주장에 감동을 하여 다른 괴이한 주장까지 믿는 초대형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일어난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실로 아무나 획득할 수 없는 대단한 신통력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참으로 기이한 존재이다.
▲ 문어의 눈은 각막, 홍채, 수정체, 망막 등 인간의 눈이 가진 특징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단, 색을 보지 못한다. 문어는 거울에 비친 자기모습을 자기로 인식할 정도로 뇌가 발달하였다.수컷 문어의 8개 촉수(다리) 중 하나는 성기이며, 생물 중 몸 크기 대비 가장 크고 긴 성기를 가지고 있다. 수컷 문어는 교미 후 짧으면 수시간, 길면 수일 만에 죽는다. 암컷은 정자를 보관했다(최장 반년)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사람도 그렇다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문어 수컷은 강간의 명수이며, 말을 안 듣는 암컷은 잡아먹는다.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 생물은 머리가 좋아지면 사악함과 폭력이 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침팬지가 총이 있다면 종족을 대량살상하지 않을까 의심한다. |
Ⅳ. 불성(佛性)
진리는 불교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없는 방대한 진리와 지식이 어찌 불경 안에만 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진리는 불교 승려들 마음이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난 큰스님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가없는 시공간의 우주에 끝없이 펼쳐지는 지성의 역사 속에서 아주 작은 섬(때때로 잡초로 뒤덮인 섬)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종교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우리 눈을 가린다면, 정신을 마비시켜 혼미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술이나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가능성과 지성’이다. 이것을 일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석가도 달마도 혜능도 원효도 미처 온전히 보지 못한 것이다. 유한한 시공간을 점하는 인간이 어찌 다 볼 수 있겠는가? 불성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에서 생식生息하며(살아 숨쉬며) 약동躍動하는 역동적인, 그리고 부단히 진화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것은 특정인이 교조적으로 제한할 수 없는 능력이며, 인간이 지닌 유일한 희망이다.
불성무정 혹동혹서 난득예측 어시공간 생식약동 고역동체 어고정관 불가감금 천변만화 무시무종 상행진화 시위불성(佛性無定 或東或西 難得豫測 於時空間 生息躍動 故力動體 於固定觀 不可監禁 千變萬化 無始無終 常行進化 是爲佛性)
필자가 위대한 스님들의 수행과 성취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경이나 스님들에게만 진리가 있다는 편협한 시각을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불경이나 스님들의 발언은 죄다 완벽하다고 믿는 일각(一角)의 광신을 지적하는 것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소나무와 우리민족.
소나무는 백목지장(百木之丈) 우리 민족의 나무다. 소나무는 오래 살고 죽어서도 오랫동안 할 일을 한다고 생 천년(生千年) 사 천년(死千年) 수(樹)라고 한다.
중국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천세 지존(千歲至尊) 이라고 하였고 조선 세종 때 문신 강희안은 만년 송(萬年松)이라고 했다고 하고 이퇴계 선생은 솔은 다른 나무와 비교 할 수 없는 무 등격(無等格) 무 등수(樹) 라고 했다고 한다.
솔은 한겨울 설한 중에도 청정한 잎은 조금도 위축 되지 않고 독야 청청 기품을 자랑한다.
해발 1600m이하의 산에 자라고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일본 중국동북부 우수리강 근방에 많이 서식되어있다
솔의 종류는 바닷가에 자라는 해송 내륙에서 자라는 육송으로 구분한다
요즈음은 리키다소나무라고 가까운 야산에는 그 놈들이 무성히 자라서 우리토종 육송은 처량하게 보이는 것을 자주 본다.
우리토종 육송에서 또 껍질이 붉은 것은 적송이라고 하고 질이 좋다
적송 중에서도 목 질이 금강석처럼 굳은 것은 금강송 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중심부와 북부지방에 많이 자라고 경북 춘양지방의 춘양목이 으뜸이다.
소나무는 수 천년 동안 우리민족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무이다.
집을 짓는데 큰 역할을 했다 궁궐을 짓는데 절에 대웅전에 등 기둥 대들보는 반드시 소나무를 섰고 그 중에도 오래 자란 곧고 우수한 것으로 썼다.
또 배 만드는 재료로 오랫동안 많이 쓰였고 오래 전부터 가구 소품 등도 소나무로 만들어서 썼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얼어 죽지 않게 한 연료로도 쓴 우리민족에게는 너무나 고마웠던 나무이다.
또 솔 잎은 추석 때 송편찌는 시루 바닥에 깔고 차를 다려 먹기도 하고 송화 가루는 다식 등 고급 음식으로 쓰였으며 송기떡은 구황식품으로 기근을 면하게 하였으며
솔방울은 솔방울 주라고 술을 담갔으며 송진은 종기를 낫게하는 고약으로 송이는 귀하고 고마운 고급식품으로 여겼고
뿌리에서 나는 복령은 신장기능에 좋은 약재로도 썼는 우리민족과 고락을 같이한 역사적인 나무이다.
득도(得道)를 하기위해 고행하는 선사들 선식으로도 썼다고한다.
요즈음 솔잎이, 솔잎 비누 식초 솔잎 주 등으로도 쓰이고 약용으로 심장병 동맥 경화등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고 그 외 각종 질병 예방에 놀라운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솔잎에는 당질이 많이 들어 있고 단백질 지방질 칼슘 인 철분 비타민 A C가 들어 있다.
의학 서적 본초 강목에 솔잎을 생식하면 종양이 사라지고 모발이 돋아나고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오래 먹으면 불로 장수 한다고 쓰여 있다.
위장병 고협압 중품 신경통 불면증 빈혈 천식 등에 효과가 있고 각종 유기산이 풍부하여 냉 대하증 같은 부인 병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여 최근에는 미용식과 건강 식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소나무는 기독교에서는 상록수라고 하며 신앙이 돈독 함을 상징 할 때 소나무 같다고하며 문인 화가 서예가 등이 좋아하는 나무여서 작품 소제로도 많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시 사철 푸른 소나무를 서원에 많이 심고 선비의 기강이라고 여기고 학자 수(學者樹) 문필수(文筆樹) 라고도 불렀다고한다.
고려 말엽 ‘백설이 만건곤 할제 독야 청청 하리라.’ 고 하였고
그 외에 또 소나무에 얽힌 작품들 하서 김인후 작 (엊그제 배던송) ‘엊그제 배던 솔이 낙락 장송 아니든가 적은 듯 두엇 던들 동양 제목 됫을 텐데 어즈버 주초 기울면 어느인들 버티랴.’
송강 정철은 (송림에 눈 내리니) ‘송림에 눈 내리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꺽어 내어 님께 보내고저 님께서 보신 뒤에야 녹아 진들 어떠리.’
송은 대사 사명당은 (청송사) ‘푸른 솔은 초목의 군자로다 눈 서리 비 이슬에도 끄떡 없구나 슬프거나 즐거우나 변함이 없고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항상 푸르구나.’
등등 많이 있고 그 외 시화에도 직 간접으로 많이 쓰였다.
신라시대에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 새들이 앉다가 미끄러 젔다는 이야기도 있고
단원 포암 유촌 이인문 송계 한담도, 추사 대가들의 작품이 있고 지금도 동양화가들 많이 소재로 쓰고있다.
그 외에도 경북 예천에서는 석송령이라는 소나무가 세금도 내고 있고
속리산입구에는 정 이품 송이라고 나라님께 충성한 소나무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 청와대에 많이 멋있게 심어저 운치를 자랑하고
고급 주택에는 물론 고급 아파트 유명한 유적지와 건물에는 반드시 멋스럽게 자란 소나무가 있어서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주고 그 놈들이 많이 있기에
우리는 맑은공기 숨쉬고 많은 사람들께 정신적으로 건강상으로 큰 도움을주는 우리 민족의 나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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