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상지대 최종덕 교수

2015. 9. 12. 23:33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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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과학과 불교의 외형적 유사성에 초점을 두는 신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과학세대의 현대인이 불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시도하는 글입니다. 내용에 대한 비판이나 질문 혹은 충고를 저의 주소로 주시면 저의 능력 범위 안에서 답변드리겠습니다.

 
043 色을 뛰어 넘어 
042 이분법적 경계 
041 있을만 하니까 있을 뿐이다 
040 단순 형질 유전의 환상 
039 공간과 물체는 하나 
038 시간과 함께 하는 물질 
037 마음
036 관용과 공존 
035 정보사회와 불교 
034 암흑물질 
033 물질의 끝 
032 블랙홀 
031 E = mc2 
030 소외와 중독 
029 면역학과 상호작용의 자아 
028 탄생의 신비 
027 모순과 반대 
026 연속의 깨달음 
025 본능과 학습 
024 소유
023 평등한 생명 
022 이타주의 II 
021 이타주의 
020 우주 한 모퉁이의 인간
019 유전자 결정론 
018 현상과 본질 
017 =추후기재=
016 디지털과 色의 세계 
015 밀가루 반죽 
014 보이지 않는 인연의 타래 
013 나비 한 마리
012 지혜 인식론 
011 과학의 권력
010 1/16 초의 세상살이 
009 처음 이전
008 일상성 III 
007 일상성 II 
006 일상성 I 
005 우주적 기하학 
004 미래
003 선재의 고민 
002 분별심 
001 과학과 불교 - 삶의 임상학을 위하여

 

001 과학과 불교 - 삶의 임상학을 위하여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 10월1일)

구름이 없다면 하늘의 깊은 맛도 느끼지 못한다. 가을 하늘에 먼 구름이 나름대로의 모양을 꾸미고 있으니 하늘의 장엄함이 비로소 꽃피게 된다. 구름 한 무리가 낮은 땅에서 높은 하늘에까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참 후에 보니 용의 형상은 간데 없고 흩어진 조각 구름만이 있었다. 용의 하늘 무늬를 아쉬워한들 모두가 지나간 것이며, 잡히지 않는 흐름이었다. 

무상함의 깨달음은 부정의 상상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꽉 차 있음에 대한 새로움의 깨달음이다. 구름무늬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지만, 원래 없었던 구름무늬를 없다고 느끼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구름무늬가 없다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마음을 새로이 고쳐먹고 원래 있는 것을 있다고 느끼는 일은 쉽지가 않다. 무상의 깨달음은 있음과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있게 되는 것과 없게 되어 가는 흐름에 대한 깨달음이다. 결국 무상을 아는 일은 새로움을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을 내 몸의 언어로 발산시킬 수 있는 행위의 실천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늘에서 용의 무늬가 없어짐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상이 무한히 그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바로 무상을 아는 일이다. 용의 구름무늬가 없어 졌다고 해도, 하늘은 다시 용궁이나 백두산, 혹은 새털이나 로봇 태권 브이의 구름무늬가 다시 그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새로이 갖게된 것이다. 무상은 있음의 지워짐이 아니라 있음의 다양성을 슬쩍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상은 허무와 적멸의 실존논리가 아니라 새로움의 존재논리이다. 

(그림)

선재라는 사람이 있다. 선재는 이 그림을 터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선재는 작은 깨달음이 있어서 이 그림을 지붕으로 보게 되었다. 선재가 터널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인지작용에 대하여 후회와 어리석음을 내뱉으면서 현상계의 무상함을 말했다. 어제 마시던 해골의 물이 오늘도 여전히 같은 물이거늘 물의 의미를 부여하는 선재의 어리석었던 어제가 오늘을 다른 세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상을 이해하는 마음은 터널이 지붕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을 보는 마음은 같은 대상이라도 터널로도 볼 수 있고 지붕으로도 볼 수 있다는 새로움과 다양성을 산출하는 마음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있는 없음이며 없는 있음이다. 어렵게 말해서 이를 일러 공의 논리라고들 한다. 

보통 말하기를 공이란 꽉 차 있지만 그 안에서 어는 것도 고정된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빈 하늘만을 보고 하늘을 쉽게 눈치챌 수 없듯이, 공 역시 비어 있는 공만을 말하면 너무 어렵고 형이상학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공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아는 일은 단순한 형이상학의 깨달음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도움이 되면 더 좋다. 공(空)은 대장간에서 무엇인가가 만들고 있는 일이다. 못쓰는 칼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기도 하고, 쟁기를 다시 녹여서 문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칼은 있는 것이지만 칼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녹은 쇳물은 여전히 있다. 대상을 말할 때 칼의 입장에서 말할 때와 쇳물의 입장에서 말할 때 공의 뜻은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간의 배를 타고 있다. 그 배는 과학, 이성, 기술, 소외, 자본이라는 몇몇 돛대를 달고 그냥 앞으로 항해하고 있다. 그 중에서 과학이라는 돛대가 가장 큰 휘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칼의 입장에서 과학과 공의 세계를 비유하는 일은 피상적이고 현상을 변명하는 일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쇳물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과 공의 세계는 서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열어 놓고 있다. 그럴 때 불교는 고증학이거나 박물관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창조적 임상학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과학과 불교라는 지면공간을 앞으로 펼쳤으면 한다. 필자의 능력에서 그것이 가능하면 말이다.

002 분별심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0월9일)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조카 아이에게 집앞 가게에서 양파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뿌듯한 얼굴을 하고 들어온 아이의 봉투 안에는 양파는 없고 양파깡이 들어 있었다. 그 아이는 어른이 시킨 심부름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지만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세계 안에서 한 최대한의 행위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곽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성곽 안에서 세계는 성곽 위에 비춰진 모습으로 제한될 뿐이다. 그러한 세계를 부정적으로 말하면 편견이고 선입관이 되는 것이며, 긍정적으로 말하면 인생관이나 역사관이라고 한다. 선입관과 인생관이라는 말의 뉘앙스의 차이는 엄청나 것이어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 둘의 뉘앙스 차이는 수많은 갈등과 싸움을 낳게 한 질곡의 원천이 되었다. 선입관의 장르와 인생관의 장르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 사이의 변증법적 파고의 압박을 견뎌내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역사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역사는 영원한 삶의 압박이 짓누르는 갈등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구과학의 역사는 이러한 압박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 사이로 전이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서구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대신 그들은 사람이 바라보는 사물의 세계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성을 배제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여지는 사물은 진리의 진정한 거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객관성이라고 말했고, 객관성은 서구과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어왔다. 그 화두는 사물에 천착되었으며, 뉴턴과 같은 서구 근대과학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아인슈타인은 사람이 사물을 관찰하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과학이론을 형성해 가는 추론과정에 대한 기준이며 사물을 바라보는 밑그림과 사물을 과학이론의 변수로서 만드는 과정에서는 객관적이라는 말을 쉽게 쓸 수가 없음을 고백해야 했다. 이 두 과정을 과학철학에서는 '정당화의 논리'와 '발견의 논리'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논리 즉 발견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과학자 개인이 갖고 있는 심리적 배경들, 사회적 관습들, 역사적 관성이라는 색안경을 벗어 던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이를 보통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 ladeness)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써서 말하고 있다. 즉 과학적 발견을 위한 어떤 경험적 관찰도 기존의 과학이론에 의해 주어진 사고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과학은 사람과 사물 사이의 영원한 갈등구조를 안고 가야만 한다. 

과학의 이 같은 갈등구조는 대상을 바라보는 분별심을 만들어 놓았다. 분별심은 사물들을 차이에 따라 구분하고 비슷함에 따라 묶어 놓는 기능을 하였다. 2500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분별심이라는 사유의 기능을 종/강/목으로 나누는 생물종의 분류방식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 최초의 과학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학에서 분별심은 사람과 개별 사물 사이의 관계였다고 앞서 말했다. 이러한 과학의 분별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분별심을 사물에 적용하여 과학의 성과를 이루어 내기는 했지만, 근대 이후 산업화와 더불어 사람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소외의 현상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자주 이야기되는 문명위기의 핵심이다. 

반면에 불교는 분별심을 지혜를 가리고 욕심을 자아내는 마음의 장막으로 간주한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보는 분별심이 과학의 논리를 부정하는 메타퍼로 보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유식론은 분별력을 따져보는 장르에 속한다. 다만 사람과 개별 사물 사이에 적용되는 대상 인식론의 분별력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용되는 분별심은 해탈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현대에서 해탈의 자각심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자각된 해탈이 대중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언어라는 사다리가 조금은 필요한 듯하다. 일체언어도단(一切言語道斷)의 해탈이 공중환화(空中幻花)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언어 속에 묻힌 삶의 생명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현대인은 분별심의 경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선입관과 편견, 이기심의 고리인 사물화의 분별심에서부터 경계가 터진 광명(光明) 세계로의 마음의 전화(轉化)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의 거울이기도 하다.

003 선재의 고민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0월16일)

이선재 박사는 이미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이 시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다. 평생 실험실과 집만을 오가던 그가 하루는 시장 통 한구석에 몰려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재미 삼아 주사위 노름을 우연히 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호주머니 돈을 다 잃었고 다음날 다시 가서 더 큰돈을 잃었다. 그 다음날 다시 가게 되었고, 이렇게 노름 중독에 빠져 주사위 노름판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고 많은 은행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를 지켜보던 주변사람들이 그의 도벽을 끊게 하려고, 그를 시골로 내려가게 하였다. 이선재 박사는 시골로 내려가면서 노름은 그만 두었으나, 주사위에 대한 맺힌 한 때문에, 그가 실험실에서 쓰던 첨단 실험장비를 동원하여 국제주사위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주사위 연구를 시작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주사위를 다 사다 모아 주사위의 표면 재질과 질량, 모서리 각도에 따른 공기저항, 낙하표면의 재질에 따른 낙하순간의 저항변수들, 베르누이 정리에 따른 주사위의 미세 회전량, 투사환경의 유체역학, 주변온도에 따른 압력의 변화, 컴퓨터 투사력의 미세한 차이에 따른 투사체의 변이도 등, 몇 십만 개의 수많은 운동변수들에 의한 초기값을 연구하여 그에 따른 결과값을 내고자 하였다. 즉 던져진 주사위의 숫자를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의 결과로 얻으려는 과학탐구를 한 것이다. 이 박사는 주사위에 관한 한 신과 맞먹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이런 의지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하늘에 존재한다는 과학적 의미의 신神이 이를 보고 우습지도 않아 그의 의지를 하찮게 여겼다. 그런데 연구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나 이선재의 연구결과는 신의 주사위 능력에 거의 도달하게 되었다. 이선재를 우습게 보던 신은 너무나 깜짝 놀라 위기감을 느꼈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가상적인 신의 대응조치는 다음의 몇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 첫째 기억상실증 등을 동원하여 이선재의 주사위 연구능력을 몰수하는 일이다. 둘째 주사위에 관한 한 그의 행위가 너무나 고약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을 인정하여 주사위 세계에서 이선재를 자신과 공존토록 놔두는 일이다. 셋째 이선재의 행위에 너무나 분통이 터져 신이 스스로 자살하는 경우이다. 넷째 신의 능력에 거의 따라온 이선재와의 수준을 더 벌려 놓기 위하여 신이 더 노력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이런 가상조건을 검토해 보자.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과학적 신은 다음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완전성, 불변성, 유일성, 절대성, 무모순성, 정지성이다. 우선 둘째 공존의 상황은 과학적 신의 유일성 조건에 위배되어 탈락된다. 넷째 조건 역시 더 노력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전의 신의 상태는 완전성이 아니었음을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성 조건에 위배되어 탈락된다. 첫째와 셋째 상황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의 상황과 유사하다. 셋째 상황은 과학적 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과학이 종교를 대치하는 상황이며, 첫째 상황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인간의 총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는 상황이다. 

유전자 복제기술과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최근 과학의 성과는 과학윤리의 범주를 벗어나 심각한 인간위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돌리 양과 유전자 지도 공표 이후 체세포 복제기술을 통한 유전자 조작기술은 정말로 큰 인류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셋째 상황은 기독교 윤리범주와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서구윤리학에서는 가장 큰 주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반면 불교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피상적인 접근만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의 세계관과 직접 부딪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불교계의 생각과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불교에서도 그 사상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소산인 과학적 신 개념에 대한 재고, 과학주의와 인간주의가 충돌되는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반성, 대중 속에 만연되어 있는 과학적 신앙과 그에 따른 종말론 그리고 서구철학의 실체론적 물질관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하여 우리는 충분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불교는 '일체언어도단'이라는 명분 때문에, 일선과학의 발전에 대하여 너무나 허약한 공리공담만으로 대처해왔다. 불교 자체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조를 버리고 적극적인 실천세계를 찾아야 한다. 용수의 중론이나 불교의 다랄 수 있는 연기설 혹은 화엄의 관계론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그 실천적 대안의 희망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그 작은 발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이선재의 변화를 희망하면서.

004 미래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0월24일)

미래는 무엇인가, 미래는 오기만 기다리고 마는 것인가, 미래는 항상 좋기만 한 것인가, 그래서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이런 질문에 부딪칠 때 우리는 난감하기만 하다. 어떤 미래가 우리에게 닥칠 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어떤 이는 그 불안감 때문에 미래를 무시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과거에 집착하여 반복된 삶의 현재를 살거나, 어떤 이는 철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미래 예측을 실험실에서 탐구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점치는 집에 찾아가 막연한 자기위안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희망의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과학자가 보는 미래는 두 가지 양상을 띄고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과학 교과서에서 배우고 또한 중력이 지배하는 일상 세계에서 익숙한 물리공간에 대한 뉴턴역학의 해석이다. 뉴턴 역학이 말하는 시간의 뜻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운동방정식의 초기조건만 알면 미래사태의 모든 양상을 정확히 결정할 수 있다. 둘째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서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 는 과학이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셋째 과학의 관찰대상은 수학적 량으로 환원시켜 표현되어야 한다. 결국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의 의미는 과거를 알 수 있듯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며,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등질적임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과학적 의미의 시간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한 시간 개념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서 말하는 시간이란 시간이 앞으로만 간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란 모든 자연물이 미래 시간에 가서는 결국 최고의 무질서도를 갖는 쓰레기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질서도의 증가와 시간의 흐름은 같은 방향이어서 앞으로 계속 앞으로만 가며 절대로 뒤로는 갈 수 없다. 

이렇게 서구 과학이 바라보는 시간의 의미는 시간의 등질성과 앞으로만 가는 화살의 시간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서구 과학의 시간 개념은 단순히 과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전반에 걸친 생활사뿐만이 아니라 과학이 지배하는 현 시대, 나아가 전지구적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 전형적인 사상사적 범례가 바로 서구 유토피아의 시간관이다. 유토피아는 지금은 아니지만 먼 미래에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의 시간관이다. 그 장밋빛 미래의 시간이 현실적으로 올지 안 올지는 관계없다. 유토피아의 뜻 자체로는 현실적 도래가 불가능하지만 그런 좋은 미래가 온다고 가정함으로써, 현재의 불완전한 삶을 완전한 삶으로 이끌고 가려는 희망의 추동력으로서의 시간관이다. 

이처럼 과학과 물질의 시간은 앞으로만 가며, 좋은 것은 반드시 미래의 물리적 시간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사회적 약속을 위해서 필요하고 과학적 측정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우리들의 진정한 삶의 현장과 깨달음의 미래를 담아 낼 수 없다. 그래서 물리적 시간과 깨달음의 체험적 시간을 구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해를 끄집어내야 한다. 

미륵 사상에서도 시간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륵불은 서구의 미래적 유토피아 사상과 비슷한 외형적 사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륵세계의 시간이 과학의 물리적 시간과 다름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선재라는 한 제자가 스승에게 언제 미륵이 이 세상에 도래할지를 질문하였다. 그 스승은 2만 5728년 후에 올 것이라고 답해 주었다. 그래서 이선재는 그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수양의 길을 밟고 있었다. 어느덧 2만 5728년이 지났지만 미륵은 오지 않았다. 분개한 이선재는 스승을 찾아가 따졌다. 그러나 스승은 항상 지금부터 2만 5728년 후 라고 답했다. 즉 체험적 의미로서 2만 5728년을 말했는데, 이선재는 어리석게도 물리적 의미의 미래를 기다린 것이다. 당시에 이선재는 자신의 마음속에 미륵이 함께 했는지도 모르고, 과거에 이미 와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시간을 이선재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런 이선재와 더불어 우리들 많은 이들이 미래 희망의 시간을 서구 유토피아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에 걸어 놓고 있다. 그러니 점치는 집에서 교회에서 절에서까지 나의 물질적 욕심만 채우려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나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는 희망의 시간들, 하찮게 보이는 낙엽 한 잎에 이미 존재하는 깨달음의 시간들은 밖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 이선재는 기다림과 삶의 섭동을 느끼면서, 내일의 미래가 아닌 오늘의 미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005 우주적 기하학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0월31일)

고대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플라톤의 철학을 이야기하려면 너무 복잡해서, 간단히 그의 우주관이 2000년 가까이 서구 근대과학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것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플라톤이 발견한 것 중에서 엄청난 기하학의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정다면체의 수가 오로지 다섯 개뿐이라는 사실이다. 4, 6, 8, 12, 20 정다면체가 그것이다. 일일이 그려보지도 않고, 정244면체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아가 정12828면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러한 플라톤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단지 기하학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존재의 진리 그리고 천체 즉 행성들이 운행하는 진리에까지 천착되었다. 이러한 기하학적 진리가 경험세계에도 해당된다고 하는 것이 플라톤의 강한 신념이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념은 근대 초기인 갈릴레오의 경험론적 천문학에서까지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정4면체 안에 내접하는 원1이 있다. 그리고 정4면체에 외접하고 동시에 정6면체에 내접하는 원2가 있으며, 정6면체에 외접하는 원3이 있고 그에 외접하는 정8면체가 있어 다시 그에 외접하는 원4가 있다. 다시 그에 외접하는 정12면체 밖에 외접하는 원5가 있으며, 그 밖에 외접하는 마지막 정다면체인 정20면체가 있어서 그것에 최종 외접하는 원6이 있다. 이렇게 사유 속에 추상적으로 구성된 6개의 원이 바로 행성의 궤도가 된다고 서구 근대인은 보았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진리가 곧 경험적인 천체의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철저한 합리주의 전통의 결과로서 천문학을 재구성한 결과이며, 이러한 재구성에 대하여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신이 부여해준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망원경을 통해서 본 당시의 행성의 수는 정확히 여섯 개였다. 결국 기하학의 진리는 곧 경험세계의 진리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서구의 기하학을 배운 이선재라는 천문학자가 있었다. 그는 우주의 별들 사이에 내재하는 기하학적 구조가 있다고 믿었다. 이선재의 연구과제는 고대 희랍의 철학자인 피타고라스가 했던 우주의 조화를 탐구하는 것과 비슷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의 조화 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인간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보았다. 이선재는 음악대신 수학을 동원하여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과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선재는 로렌츠 변환식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에서 시간의 변환에 따른 물체의 변화를 확인하였으며, 특수 상대성이론과 도플러 효과를 통해서 쌍둥이 별의 기하학적 구조를 밝혀 내었다. 그리고 일반 상대성이론을 동원하여 우주 공간의 휨 현상을 찾아내어 별들 사이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최단거리의 비밀을 밝혀 내었다. 그는 우주 공간이 편평한 것이 아니라 휘어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러나 그 휘어 있는 공간의 의미는 공간 스스로 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 던져진 물체가 운동할 경우에만 그 휘어 있음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물체가 운동한다는 것은 물체가 갖는 질량과 속도에 따라 그 휨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래서 그는 운동의 속도와 질량에 따른 휨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우주 공간을 그물 망 구조로 가정하였다. 그리고 편평한 그물 망 위에 물체를 던질 때 그 그물 망이 휘어지는 정도는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어느 정도 비례할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사각형 모양의 그물 망을 네 모서리에서 손으로 잡고 있다고 치자. 그런 그물 망 위에 갑자기 아주 무거운 물건을 던진다면 두 모서리 혹은 아주 더 무거운 물체라면 네 모서리 모두가 한 곳으로 모아 질 것이다. 이런 우주의 공간을 비쥬얼하게 상상을 한다면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 공간이 순간적인 시간차원에서 하나로 모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이선재의 우주 천문학의 꿈이었다.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 전에 한국에도 다녀갔던 스테판 호킹의 엔트로피 감소가 일어나는 도발적인 우주공간의 꿈이 실현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선재는 연구실에서 나와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화엄경이라는 번역본을 쥐게 되었다. 그 책 안에는 인드라 망이라는 우주의 구조가 간단히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의 종교적인 환타지로만 여겼다. 그날 밤 이선재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인드라 망의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로만 그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끝>

006 일상성 I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1월6일)

세상에는 정말 신기하고 신비한 일이 많다. 날마다 같은 방향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 더불어 저녁 노을 저편 하늘의 아름다운 땅의 이부자리, 각양의 색깔을 자랑하며 때만 되면 어우러지는 그림 같은 낙엽의 시詩들, 먼 달의 힘에 따른 거대한 바닷물들의 끌고 당기는 힘들, 좁쌀보다 더 작은 씨앗이 그 언 땅을 헤치고 나오는 생명의 기운들. 세상의 모든 폭포들이 한결같이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는 중력의 신비함.

그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눈 깜짝거리는 자동조절기능이나 배고플 때 그때를 맞춰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들, 사람이 죽어 살점 하나 남김없이 해치우는 곰팡이의 위대한 자정능력, 사람이 만든 어떤 동력장치도 따를 수 없는 심장의 박동들, 엄지와 검지가 서로 링을 만들 수 있어서 비로소 물건을 집고 놀릴 수 있는 호모 파베르의 능력들.

그래서 진짜 신기하고 신비한 것은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일상적 주변에 있었다. 일상성이 바로 신비함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상성의 신비를 놓치고 밖의 세계에서 신비를 찾아 헤매는 장님이 되어 버렸다. 좌선하는 이의 참된 수양의 의미가 퇴색하여 기적적인 건강이나 부양효과를 떠드는 이들, 정력제의 환상 속에서 밥상 위의 음식을 버리고 불로초의 기적을 바라는 아저씨들, 자기 자식들과 교육환경에 대한 진정한 대화한 번 없이 자식의 대학합격만을 기도하는 아줌마들, 모두 밖에서만 환영을 찾아 헤매는 일상성의 장님이 되어버렸다. 

하늘을 다시 보자. 태양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서 지구가 돌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멀리 떨어져 우주의 고아가 되지도 않게 태양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는지, 태양이 끄는 힘에 부쳐 지구가 태양에 흡입되어 충돌하지도 않고 그렇게 적절한 거리에서 돌고 있는지 정말 신비한 일이다. 뉴턴은 이러한 신비한 현상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왜 그렇게 돌고 있을까? 달리 운동하지 않고 왜 꼭 그렇게만 돌고 있는 이유를 묻는 일상성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뉴턴은 그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끝내 찾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찾아내었다. 그것이 바로 만유인력법칙이라는 자연과학의 위대한 성과로 나타났다. 

이때부터 과학은 세계운동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삼가고 과학과 신학의 구획(demarcation)을 보여 주었으며, 그 대신 "어떻게"라는 현상해석에 몰두하였다. 어떻게 접촉도 하지 않은 두 물체가 서로에게 운동의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정말로 신비한 일이다. 이런 운동의 신비한 힘들을 이해하는 일을 우리는 과학에 맡겨 놓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 운동의 신비함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기 시작하였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운동현상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운동현상을 구분 지어 생각했다. 그래서 땅의 현상은 일상성에, 하늘의 현상은 신비함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뉴턴은 땅의 일상성과 하늘의 신비성을 하나로 묶어, 즉 땅의 중력과 하늘의 만유인력을 하나의 운동방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상성과 신비성이 하나라는 삶 속의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잊고 산다. 그것이 바로 지난 호에 이야기했던 인드라 망이다. 

일체의 신비성이 없으며 그 모든 것이 일상적인 인드라 망이라는 것이 있다. 나의 손가락 끝만을 볼 수밖에 없는 이선재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의 손가락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다섯 개의 개별적인 개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손가락들이 손에 붙어 있는 하나의 손일 뿐이다. 이선재는 나의 손가락들이 모두 떨어져 있는 개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내 새끼손가락이 다친 것을 동시에 엄지손가락이 같이 아파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나의 손가락들이 모두 나의 손으로 하나로 묶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손가락끼리 아픔을 공유하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손가락끼리 아픔을 동시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이선재에게는 신비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성일뿐이다. 

그래서 인드라 망이라는 것은 대단한 신비의 교조적 터울이 아니라 저편 하늘의 노을과 각양의 단풍들의 어우러짐, 작은 씨앗의 생명기운, 눈의 깜작거림이나 심장 박동처럼 일상성의 바구니와 같으며, 단지 "어떻게"가 밝혀지지 않은 일상성의 현시일 뿐이다. 이제 이선재는 우담바라의 꽃을 밖에서만 찾으려했던 신비의 환상에서 벗어나, 그의 작은 삶 한가운데서 진짜 신비한 일상성을 찾기로 했다. <끝>

007 일상성 II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1월13일)

어느 숲 속에 일개미들이 모여 사는 군집의 두덩이 있다. 그런데 일개미들 안에는 말 그대로 일만 하는 개미들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개미들이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연관하여 어느 일본 생태학자가 8년 전에 발표한 것을 이야기해 보자. 그 생태학자는 파일로트 실험이라고 하는 일종의 소규모 표본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개미 군집의 생태적 연대성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어 10만 마리의 개미군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서 7만 마리는 일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3만 마리는 놀고 있다. 그래서 일하는 개미 7만 마리와 노는 개미 3만 마리를 분리시켰다. 그런데 분리시킴과 동시에 일하는 개미 7만 마리 소군집 안에서 자동적으로 30%는 다시 노는 개미가 형성되고, 노는 개미 3만 마리 소군집 안에서 자동적으로 70%는 다시 일하는 개미가 된다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분리시킨 두 소군집 사이에서 일어난 비율의 변화가 동시적이라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서 어떤 개미는 일하고 어떤 개미는 놀게끔 하는 외형의 물리적 신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동적으로 노는 개미와 일하는 개미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의미를 우리 인간들에게 던져 주고 있다. 개미의 개체가 분리되었다는 이성적 전제를 가질 경우 우리는 이런 개미군집의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분리된 존재이해는 사물들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이 고립되고 개별적인 모든 개체적 사물들이 모여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원자론原子論적 사유방식에 근거한다. 이런 원자론적 사유는 서구 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산업사회가 낳은 개인주의의 한 단편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물질의 풍요로움을 획득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불행히도 우리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오고가는 관계의 끈들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문명론적 상황을 철학에서는 '인간소외'라고 표현한다. 

이런 소외의 상황은 서구사회에서 먼저 그 위기감으로 표출되었다. 당연히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 역시 서구에서 먼저 일어났었다.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많은 서구사회의 대안 들 중의 하나가 바로 화엄경의 인드라망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이었다. 그래서 과학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드라망은 서구인에게는 하나의 신비로운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인드라망은 신비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내재된 일상성의 세계임을 확인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역시 그 일상성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으며, 특별한 기도나 영성 혹은 신비한 주술을 통해서 그 인드라의 관계망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우리말에 엄살떤다는 말이 있다. 엄살떤다는 말은 몸의 작은 한 부분이 다쳤을 때 온 몸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엄살의 어원은 '온 살'이다. 옴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경전에서 "옴"이라는 소리가 많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옴은 파리어의 전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새끼손가락 끝을 조금 다쳤다고 하자. 그렇게 다친 것을 갖고 엄살을 떨 수 있으려면 새끼손가락 끝의 작은 몸 한 부분이 전체의 몸과 평등한 관계로서 하나의 연결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손가락과 온몸이 일대일로 대응되어야 한다. 이런 엄살은 나 하나의 몸 안에서 나를 지켜주는 일종의 자기보호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엄살이 나 하나에서 뿐만이 아니라 통합적인 연대와 관계를 통해 전체와 부분이 항상 대화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임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불행하게도 나와 너의 공동체적 대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미군집의 사례는 바로 엄살 구조의 자연의 전형적인 한 모습이다. 이는 원자론적 사유방식이 더 이상 먹혀들 수 없는 공동체적 생태계가 원래 그것도 아주 일상적으로 있었음을 예시한다. 나의 사랑하는 연인과 몸을 서로 부딪길 때 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멀리 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의 몸을 내 몸처럼 같이 하는 일은 내가 너와 만나고 내가 너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일상적인 인드라망의 한 부분임을 느끼는 일이다. 나 하나의 존재는 실은 전체의 그물망 속의 한 매듭일 뿐이다. 그 매듭은 삶 속의 작은 자비의 실현을 통해서 거대한 우주적 삶과 만나면서, 전체 그물망을 하나로 반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드라망은 억지로 만들거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에게 있었던 것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끝>

008 일상성 III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1월21일)

1935년 아인슈타인과 그의 두 동료는 하나의 획기적인 논문을 물리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운동상태에 대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발표한 실험내용은 실제로 이루어진 실험이 아니라 가상적인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양자와 같은 소립자들은 전하를 띄고 있는데, -2/1 e 와 +2/1 e 의 짝을 이루는 에너지보존 상태인 e1, e2 의 두 입자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쏜다고 하자. 이 경우 한쪽 방향으로 날아가는 입자 e1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면 그 입자는 전기를 띄고 있으므로 당연히 자석의 힘에 의해 휘게 된다.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 입자 e2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지 않았는데도, e1이 자력에 의해 휠 때 자석을 걸어주지 않은 e2도 따라서 제가 알아서 동시에 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양자세계의 운동상태는 전통 물리학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물리학은 인과율을 기반으로 하는데 e1의 입자는 분명히 인과적인 물리현상이기는 하지만, e2의 동시적 휨의 현상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사태이다. 이는 마치 두 쌍둥이 중 한 명이 돌에 맞아 머리에 혹이 난 순간, 같은 시간에 돌에 맞지도 않은 다른 쌍둥이 한 명이 동시에 머리에 혹이 나는 해괴한 사건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비인과적 사태가 텔레파시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하였고, 그런데 텔레파시는 당연히 물리학의 연구영역이 아니므로 물리학의 인과율에 거스르는 e2의 사태를 기술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바로 이 논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4달 후 닐즈 보어라는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 주장에 대한 반박논문을 게재하였다. 양자역학자로서 보어의 기본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두 개의 개체라고 보았던 e1과 e2는 실제로 독립된 두 개체가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입자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동역학과 보어의 동역학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차이를 주목한다. 아인슈타인에게서 미시세계의 개체는 그 외형적 조건처럼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분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분리된 두 개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어에게서 미시 입자의 개체들이 외형적으로는 셀 수 있는 분리된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비분리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림 삽입)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이후 50년 넘게 후대의 수많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인과성의 범위 안에서 물리현상을 국한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통적 인과율에 맞지 않는 비분리의 물리상태를 인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어 왔다. 아인슈타인 진영과 보어 진영의 논쟁은 1970년대 들어와서 사고실험이 아닌 실제적인 실험결과에 의해서 보어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문제는 여전히 양자상태의 입자들의 통일성, 비분리성을 기존의 인과적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런 양자상태의 입자운동은 고전역학에 길들여진 이성理性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다른 물리적 지평에 있는 것이어서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난 두 번의 연재를 읽은 독자라면 이 이야기를 어디로 연결시킬 것인지를 눈치챌 수 있다. 즉 양자차원의 입자운동의 상태가 바로 인드라 망의 구조에 유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는 매우 조심스런 전제가 필요하다. 무경계의 마음을 다루는 불교의 언어와 경험세계의 경계를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려는 자연과학의 언어를 그 외형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또 하나의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인연설이나 윤회설을 서구과학적 인과율로 설명하려 한다면 분명한 한계를 맞게 된다는 점에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양자 차원의 입자의 물리적 존재론을 인드라 망이라는 무경계의 존재론으로 직접 유비시키는 일도 지나침이 있다. 

양자상태와 인드라 망의 상태가 같다는 말은 현대 양자역학의 이론이 이미 불교에 다 들어 있었고, 따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불교의 사상이 위대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불교 스스로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개별이 아닌 전일적이고 비분리 상태를 유지하는 양자상태의 세계와 인드라 망의 세계를 유비하는 일을 통하여 오히려 불교가 바라보는 열려 있는 세계의 다양성을 확인하고 나의 마음을 열어 놓는 계기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자연을 설명하는 길 그리고 마음으로 깨닫는 길은 무한할 수 있지만, 자연은 하나이며 깨달음도 하나라는 점을 아는 일도 중요하다.

009 처음 이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1월28일)

우주는 무한하다고 한다.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같은 것이 4000억 개 이상이 모여 우리 은하계를 구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은하계가 우주 지평선 내에서만 1조(1012) 이상 있다고 한다. 그렇게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 이상으로 우주는 무한하다. 그런데 우주는 원래 그렇게 무한한 것이었는지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우주의 시작은 100억 년에서 200억 년 정도 된다고 말한다. 중간쯤 잡아서 150억 년이라고 말해도 좋다. 150억 년 전에 우주의 대폭발이 일어나, 초기 10-12 초 동안은 원자핵이 형성되기 이전인 스프 상태의 우주의 모습이었다. 그 후 100초 동안 현재 우주의 많은 규모들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나머지 150억 년 동안 생명이 존재하는 오늘에 우주에까지 진화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진화의 처음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진화가 아니라 최초의 창조라면 그 창조의 처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창조 이전에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들른 영국의 휠체어 물리학자인 호킹은 이미 60년대 말에 특이점의 정리를 내놓아, 특이점이 작동하는 대폭발의 시간과 함께 우주의 시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 특이점 이전의 시간은 무엇일까? 그 답으로서 시작 이전의 시간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신의 창조 이전에 시간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담동산에 있는 나무를 자르면 그 나무의 나이테가 있는지 혹은 아담은 배꼽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펜로즈-호킹의 특이점 이전의 시간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 이전의 시간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호킹의 대폭발 이전 시간은 지금과 같이 앞으로만 가는 화살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창조론에서 말하는 창조 이전의 시간은 아예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은 현상 속의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은 사물과 함께 한다. 사물의 흐름이 무상이듯이 시간도 역시 상대적이다. 그런 의미의 시간이라면 불교에서는 시간의 시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의 끝도 없다.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우주의 중심이 없다는 뜻과 같다. 그 반대로 그 어디라도 우주의 중심이 된다고 말해도 된다. 중심이 없으면서 동시에 그 어디라도 중심이 될 수 있는 우주가 곧 화엄경이 말하는 우주와 같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도 우주의 한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동시에 그 작은 티끌 속에도 모든 우주가 포함되어 있듯이 내 안에 중심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에도 중심이 없다. 그래서 그 끝과 시작이란 없다. 언제부터인지 언제까지인지 원래부터 모를 일이다. 단지 그 무엇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날 뿐이다. 윤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윤회는 윤회의 멈춤을 희망하고 있으며, 윤회의 시간사슬이 끊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윤회의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윤회의 끝은 다시 열반의 시작일 뿐이다. 그래서 열반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그 시간의 시작도 해보지 못한 그런 열반의 시작을 우리는 무심의 열망성을 갖고 아니면 부처 세계의 일상성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윤회에는 시간의 끝이 있었고 열반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윤회와 열반이 나뉘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윤회의 그늘 속에서도 열반을 보는 사람은 시간의 시작 이전의 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열반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사람도 윤회의 사슬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시간의 끝 이후의 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팽창우주의 시간의 끝이 축소우주의 시간의 처음이 되듯이 원래는 하나의 우주적 진화이거늘 그것을 둘로 보는 사람의 두 가지 시간일 뿐이다. 하나의 우주를 찾는 마음이 부처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진여(眞如)일 뿐이다. 윤회의 끝과 열반의 시작이 맺어지는 곳이 바로 진여의 우주이다. 그래서 진여의 우주 속에는 시간의 시작도 그 끝도 없다. 그 안에서 시간은 무시이래(無始以來;anadikalam)와 무종(無終)이지만, 시간의 얽매임이 없다면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한 찰라 속에서 되살아 날 수 있다. 작은 꽃잎 끝에 맺혀 있는 작은 이슬 방울방울 마다 비추어진 반짝이는 태양은 그 하나 하나가 모두 하늘의 태양을 모두 머금고 있듯이 말이다. <끝>

 

010 1/16 초의 세상살이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2월5일)

우리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 필름을 빨리 돌려서 환상의 두 시간을 마치 실제적인 현실인양 영화를 본다. 그런데 영화 필름은 불연속적인 컷들의 조합일 뿐 연속적인 현실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연속적인 영상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시신경은 잔상효과라는 특별한 신경구조로 되어 있어서 불연속적인 컷들을 마치 연속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신경의 잔상효과란 방금 전에 우리 눈으로 본 것을 어느 일정 시간 동안만큼 지난 것을 계속 보고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신경구조를 말한다. 그 잔상시간은 1/16 초이다. 그러니 영화필름을 그 잔상시간 보다 더 빨리 돌리면 불연속의 컷들을 연속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현재 필름을 돌리는 속도는 1/16 초보다 빠른 1/24 초로 돌린다. 다시 말해서 1 초 동안 24 컷을 돌린다는 말이다. 

사람의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상적임을 알 수 있는 단편의 사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상을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감각의 가상성 속에서 삶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의 가상성을 현실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의 인식구조를 밝힌 것이 바로 유식론唯識論이다. 유식론에서 말하는 감각 혹은 감각을 느끼는 사람의 구조는 단순히 외부의 감각대상과 그것을 감각하는 사람의 감각신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감각을 얻어내기 위하여 사람은 그 대상만을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속해 있는 전체 세계를 같이 감각한다. 내가 저 소나무를 보았다는 것은 소나무만을 단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놓여진 언덕과 그 위의 하늘 그리고 소나무에 걸쳐 있는 구름 등 소나무와 소나무 아닌 것 사이에 비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공간을 같이 보고 있다. 그런 소나무를 보는 나 역시 눈의 망막과 시신경에서부터 지각을 확인하는 뇌와 가슴이 같이 움직여 대상을 대상으로 알게 된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부터 보아 왔던 소나무에 대한 감각과 비교하여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소나무임을 확인한다. 이를 우리는 아는 것이라고 하고 아는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전에 본 것과 비교하여 정말 맞는 소나무인지 아닌지를 순간에 판단한다. 그래서 감각은 순간적이지만 대상의 세계 모두와 나의 인식의 전체 역사를 동원하여 비로소 소나무임을 알게 된다. 결국 소나무에 대한 인식은 나의 전체 역사와 연관하며, 나의 전체 역사란 바로 나 아닌 타인 모두의 역사와 연관할 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소나무 하나를 보고 인식하는 일조차도 우주를 관통하는 모든 인식의 눈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런 총체적 우주의 눈이 있을 때만이 나는 대상과 만남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그런 만남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인식의 세계는 많은 인식의 세계 중에서 하나 일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인식의 세계는 우주적 잔상효과에 의한 1/16 초라는 가상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가상의 공간이 존재하므로 실제 조각 필름으로 구성된 영화의 공간이 연속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실 같은 가상이 부질없는 것이어서 실재의 세계는 더욱이 실재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일러 어떤 이들은 불교가 관념적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부질없는 가상이 없다면 실재 진여 세계의 참다움을 알지 못한다. 깨달음을 각覺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아도 그 아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어야만 진짜 아는 것이라고 자주 듣고 있다. 그것처럼 감각感覺도 일종의 각覺이다. 부질없는 세계 속에서 감각을 잘 하는 일은 진짜 진여 세계로 들어가서 깨달음을 시작하는 일과 엇물려 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은 이 세계가 부질없고 가상 투성이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 부질없음과 가상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의 몸으로 느끼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이 세계가 허망하다고 말하고 어떤 철학자는 비관적이라고 혹은 관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구적인 유有의 물질 세계에서 볼 때만 그러하다. 물질이 아닌 공空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계는 깨달음 천지의 세계이다. 부질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부질없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참 좋은 세계이다. 

만약 사람에게 시각의 잔상효과가 없었다면 연속적인 영화필름을 만드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1/16 초의 세상살이라도 다음의 세계가 있기에 더욱 이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 <끝>

 

 

011 과학의 권력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2월14일)

근대 유럽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이 있었다. 서구 근대철학의 문을 열은 철학자라면 데카르트를 들 수 있는데, 라이프니츠는 그의 뒤를 이은 합리론의 철학자이며 동시에 과학자였다. 당시는 철학과 과학이 하나의 배를 타고 가는 지성의 모험이었다. 당시 지성의 모험이 지향했던 목표는 세계의 물질적 구성물을 수학으로 환산하여 사물의 실증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수학과 같은 형식과학이 천문학과 같은 경험과학의 진리근거라는 생각이 바로 서구 과학의 존재론적 배경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수학으로 환원될 수 있고 또한 환원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배경은 뉴턴의 과학혁명이 잉태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런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방법론을 일러서 환원론적 과학방법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환원론적 방법론, 즉 "계량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라", 그리고 "계량화할 수 없는 것도 최대한 계량화하라" 라는 두 명제는 근대 서구 과학정신의 정언명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계량화의 정언명법은 근대 과학혁명의 결정적인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세계에는 원래 계량가능한 것보다 계량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학을 통한 환원의 정언명법을 수행하기에는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는 원이나 사각형처럼 수학으로 계량가능한 기학하적 모델은 희귀하다. 오히려 자연은 정형의 틀이 없는 그래서 계량할 수 없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냇가에 굴러가는 돌멩이를 계산할 수 없으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계산할 수 없다. 인간의 시기심이나 욕망의 마음을 계산할 수 없으며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계산할 수 없다. 그래서 서구의 근대 초기 자연과학은 환원적 세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난제를 풀어 준 대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의 발견이었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은 계량불가능의 자연적 대상을 계량화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이었다. 예를 들어 나뭇잎의 면적을 계산한다고 치자. 사각형이나 원이 아닌 구불구불한 모양의 면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다른 방식의 계산법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미적분법이다. 그 면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우선 대상을 무한 분할하여 가상적인 미소의 사각형을 만들고, 그렇게 계량화된 미소의 사각형의 계산값을 모두 합하여 다시 전체의 자연대상체를 계량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계량화의 도구인 미적분법의 덕택으로, 이후에 서양 근대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미적분법은 계량화로 상징되는 자연관을 확립시켰지만, 그 대신 원래 연속적인 자연의 모습을 불연속의 기하학적 모델로 환원시킴으로써 불연속의 미소 단위의 사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연속적인 미소 자연을 배제하여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원래의 자연의 모습이 아닌 수학적 가상계가 탄생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수학적 가상계가 자연의 현실계를 대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과학의 권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미적분법이란 대상을 분할하여 분석하고 다시 조립하여 대상을 원래대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과 분석은 죽어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혹시 가능할지라도 살아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인과율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인과율이 살아 있다는 것은 수학방정식처럼 주어진 변수값에 의해 결과치가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수값과 결과치가 동시적으로 기승하며(同時頓起), 후 결과치가 선 변수값을 좌우하기도 하며(同時互入), 변수값과 결과치가 독립적이지를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同時互攝) 관계를 말한다. 이 세 관계를 쑤나타(Sunyata;空)론의 상입相入 관계라고 하며, 달리는 원견圓見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상호작용 속의 살아있는 존재의 인과율은 과학적 인과법칙에 포섭되지 않으며, 쑤나타론의 원견을 통해서만 사물이 제대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서구과학의 미적분법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화엄사상의 대상관이다. 서구과학의 미적분법은 대상을 영원한 고정체로 본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렇게 보다면 죽어 있는 단순 인과율에 우리의 삶을 맡겨야만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쑤나타론에서는 당연히 대상이 독자적인 존재도 아니며, 고정된 실체도 아니다. 그래서 대상을 나누는 순간 그 대상은 그 대상이 아니고 다른 대상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서구과학의 미적분법은 그 나름대로의 유물론적 의미가 있지만, 그런 수학적 도구를 통해서 살아 있는 삶의 모든 흔적들을 설명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과학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끝>

 

012 지혜 인식론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2월19일)

서구 근대 과학혁명이란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에서부터 지구표면의 운동학과 천체의 운동학을 종합한 뉴턴에 이르는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일러 말하고 있다. 이들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에게서 중요한 공통점은 당시의 정신적 배경인 기독교와 어떻게 조화를 맞추는가하는 문제였다. 갈릴레오의 교회와의 갈등을 이미 알고 있었던 뉴턴 역시 기독교의 세계관과 천체의 운동구조를 모순 없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신의 의지가 천체운동에 잠재적인 힘으로 밑에 깔려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기독교적 신의 의지는 천체운동의 원인이 되어야 했고 그 원인을 찾고자한 것이 뉴턴의 과제였다. 

쉽게 이야기해서 행성들이 "왜"why 그렇게, 그리고 반드시 꼭 그렇게만 운동하는가를 묻는 질문을 던진 것이 바로 뉴턴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원초적으로 답변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인간이 신의 의지를 안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뉴턴은 이 질문의 원초적 불가능성을 눈치채었다. 그는 "왜"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how 천체가 그렇게 운동하는가를 결국 밝히고 말다. 그것은 바로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었다. 여기서 과학자와 형이상학자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형이상학자는 대상 혹은 운동을 가져오게 한 그 무엇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와 그로부터 파생된 이유를 묻는다. 반면에 과학자는 근원적인 존재이유가 아니라 대상의 운동에 대한 현상적인 구조를 묻고 그 현상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기술할 수 있는가하는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 

결국 서구근대 과학혁명은 인식론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 인식론은 당시의 철학적 인식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당시 인식론은 보통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론적 인식론과 록크와 같은 경험론적 인식론으로 나누어 말해지고 있다. 이들 모두 "어떻게 아느냐"가 문제였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론적 인식론자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힘을 이미 생득적으로 인간이 갖고 태어난다는 생각이었고, 반면에 록크 같은 경험론적 인식론자들은 태어날 때 사람의 마음이 빈 칠판과 같아 그 위에 쓰여지는 대로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서구에서 합리론자들은 수학과 같은 형식과학을 잉태시켰으며, 경험론자들은 물리학과 같은 경험과학을 정초시켰다. 당연히 이 두 진영 모두는 현상계에 대한 인식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영역을 알라야식이라 하여, 진정한 실상實相의 지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파악하는 자아의 유심唯心과 대상의 외부적 자극이 어떻게 감각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오편행五遍行(觸, 作意, 受, 想, 思)을 통한 유식의 과정은 중요하다. 유식의 과정은 서구근대 인식론으로 말한다면 주관적 관념론과 비슷하다는 일본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서구 인식론과 중요한 차이가 내재되어 있다. 유식론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은 지식을 구하려는 인식의 경험론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智慧를 찾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지智는 대상을 인식할 때, 사물의 실상實相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종적 인식을 말한다. 그리고 혜慧는 사邪된 것과 정正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뜻한다. 그래서 결국은 불교의 인식론은 서구의 지식 인식론과 달리 지혜 인식론이라고 말해도 좋다. 

앞서 서구과학이 발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질문을 구분하는 과학적 인식론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가 무엇이냐는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대상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지식 인식론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의 인식론은 존재와 인식을 구분하는 서구과학과 달리 기본적으로 지식이 지식에 머물지 않고 연기가 연기에 머물지 않는 존재 혹은 실상에 기대어 있는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인식은 서구과학의 눈으로 본다면 "왜"와 "어떻게"가 함께 대답되어야 할 난제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난제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구분하는 서구 인식론에서는 난제일 수 있으나,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연결되는 실상의 눈에서는 아주 자연스런 인식의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인식은 이성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인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너무 복잡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그 요지는 간단하다. 첫째 양명학에서도 자주 말하는 지행합일의 자세가 인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진여 실상의 세계가 따로 저 먼 하늘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 속에 있다는 점이다. <끝>

013 나비 한 마리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0년12월26일)

아프리카 밀림 한 가운데 높은 야자수 한 그루 옆에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 나비는 날개짓을 할 수 있어서 날 수 있었고, 그 날개짓에 나오는 날개바람은 사람에게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지만 그 바로 옆에 있었던 작은 벌레 한 마리에게는 큰바람 힘이었다. 그 바람 때문에 나뭇잎에 붙어 있었던 벌레가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그 나무 가지에 붙어 놀고 있었던 원숭이 등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원숭이는 등에 떨어진 벌레 때문에 등이 가려워 등을 긁다가 옆에 있던 작은 나무 가지 하나를 건드려 그 나무 가지는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장소는 마침 실개울이 흐르는 곳인데 썩은 나무 가지들이 흐르지 못하고 뭉쳐있었던 작은 여울이었다. 떨어지는 힘 때문에 여울에 뭉쳐 있었던 나무 가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실개울 작은 둔치에 있었던 자갈들이 사태가 일어나 실개울의 물의 흐름을 막아 놓고 말았다.

그래도 물은 흐를 데를 찾다가 물꼬를 옆으로 틀어 실개울 옆에 있었던 습지 지역으로 물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습지 지역에는 간헐천 지역인데 작은 마그마 활동으로 인하여 뜨거운 증기가 간헐적으로 용솟음치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물꼬가 바뀐 개울물이 그 간헐공 위를 막아버려 뜨거운 마그마 증기압과 찬 실개울 물이 뒤섞여 땅 밑의 화산맥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 화산맥에 이어진 근처의 작은 휴화산의 화산맥을 터트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은 화산맥은 아프리카 최고봉의 거대한 화산맥을 건드리는 바람에 근래에 보기 드문 화산 대폭발을 일어나게 하였다.

화산 대폭발로 인하여 엄청난 양의 마그마와 더불어 화산재가 인근 지역을 뒤덮게 되었다. 그 화산재의 범위는 대기 상에서 지름이 800 킬로미터에 이르렀고 그런 화산재는 아프리카 중서부를 관통하여 북서부로 진행하는 고온성 난류대기의 흐름을 유럽 북서부 한랭성 대기와 충돌을 유인하였고, 다시 지중해 다습한 대기와 만나 유럽 전역에 근세기 최대의 태풍과 비를 뿌리는 재앙을 불러와 서유럽 전체에 200백만 호의 침수와 400백만 명의 이재민 등등의 어마어마한 재난을 일으켰다.

이 이야기는 물론 가상의 재난 이야기다. 그러면 유럽에서 발생한 이 재난의 사건을 거꾸로 들어가 보자. 과연 이 재난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사태를 발생시킨 최초의 원인을 아프리카 밀림 속의 작은 나비 한 마리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황당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나비 한 마리와 유럽 전지역에 일어난 기후 재앙 사이에 아무런 인과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사태에 대한 이런 질문을 두고 우리는 과학적 인과율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범위 안에서만 다루어져 왔는가를 느낄 수 있다. 서구의 고전 뉴턴과학은 인과율의 범위를 현시적인 두 사건 혹은 두 사태 사이에서 벌어지는 원인과 결과만을 다루었다. 그래서 그런 기존의 과학적 인과율로서는 작은 나비 한 마리와 유럽의 재앙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인과율로는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였다. 

그래서 60년대부터 나온 카오스 이론은 모든 자연현상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인과율의 존재를 인정하고, 인과의 끈이 1)길고 2)복잡하며 3)우회적이며 4)숨겨져 드러나 있지 않은 그런 인과성을 기술하려 했다. 그런 카오스 이론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로렌츠라는 60년대 기상학자가 만든 예가 바로 위의 나비 한 마리의 이야기이며, 그런 복잡한 인과율을 우리는 보통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고 부른다.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효과는 결국 자연의 현상들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나비효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의 숨은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윤회가 왜 인과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윤회의 인과론은 분명히 고전 과학적인 인과율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현상계에 구속된 눈이 아니라 자유로운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윤회의 그 복잡한 인과성을 한 번에 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너머서 저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볼 수 있는 니르바나의 눈이 아니라도, 이 세계 안에서 나만이 아닌 너의 세계까지도 배려하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실천에 옮기고, 나의 존재가 우주보다 넓은 관계망 속의 한 연결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면 나비의 작은 날개짓 속에 숨겨져 있는 윤회의 거울 뒷면이라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끝>

 

 

 

014 보이지 않는 인연의 타래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1월10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는 왜 태양에 달라붙지도 않고 멀리 도망가지도 않는 일정한 궤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는지, 가만 생각해보면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과 지구가 궤도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만유인력법칙 자체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질량을 가진 물질들이 있다면 그들 사이에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에 지구가 궤도를 벗어나 태양 쪽으로 조금만 기울게 된다면 여지없이 태양 인력에 끌려 태양과 충돌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구가 궤도에서 태양 반대쪽으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태양계의 미아가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은 질량을 가진 물질들이 어느 일정 공간 안에 서로 모여 있다면 그들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여 결국은 그들 모두가 충돌하여 하나로 모아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질량을 가진 물질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들은 모두 서로 더 떨어지게 되어 끝내는 분산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을 은하계가 모여 있는 우주 공간에 적용해본다면 우리의 우주가 확산할 것인지 아니면 축소할 것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별들이 서로 모여 있다면 끝내는 은하계가 축소할 것이고, 별들이 너무 떨어져 있다면 은하계는 확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 우주 공간 안에서 질량을 가진 물질이라는 것이 별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그런 별들만이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물질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을 천체물리학자들은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부른다. 

얼토당토않게 암흑물질이란 존재를 왜 필요로 할까? 60년대 츠비키라는 물리학자는 우리의 은하단이 우주공간 안에서 자체 회전하면서도 유지할 수 있는 동력학적 평형상태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존재하는 별들만 갖고서는 도저히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별들 말고도 다른 존재 방식의 질량을 갖는 물질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은 70년대 말 루빈의 나선은하 속도 관찰을 통해서 확인되었는데, 이런 물질을 암흑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물질들의 질량의 합은 우주 전체 질량의 90%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원리적으로) 볼 수 있는 우주의 물질은 전체의 1/10에 그치고 마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천문학은 그 1/10의 우주에 매달렸던 것이다. 이제는 더 큰 우주의 물질인 9/10의 우주를 볼 수 있는 우주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암흑물질의 밀도의 차이에 따라서, 즉 암흑물질이 일정 공간에 몰려 있다면 우주는 축소하고 말 것이며, 널리 퍼져 있다면 우주는 확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암흑물질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암흑물질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퍼져 있어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땅에도 암흑물질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질의 세계가 아닌 삶의 공간에서 볼 때, 암흑물질이 나를 지배한다는 말은 나의 인연을 지배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나의 인연은 나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 나 아닌 타자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내가 속한 가계의 선조와 친지들, 내가 속한 사회의 친구들과 이익집단의 구성원들만이 나 아닌 타자의 모두인가를 반성해야 한다. 저 산 위의 상수리나무, 아무 말 없이 흐르는 개울의 돌멩이들, 몇 십 년만의 처음이라고 떠드는 눈송이들, 모두 나 아닌 타자의 범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는 책상 위에 쌓이는 먼지와 들에 피어 아무도 보지 않는 꽃대에 붙은 잔털들, 맑게 갠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들 모두 타자의 한 구성원이다. 그것 말고도 내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무수히 많은, 오히려 내가 아는 것이란 아주 적은 한 구석에 지나지 않는, 그런 삶의 암흑물질들 모두가 나의 인연을 꿰어 가는 우주적 관계의 타래들이다. 

보이는 물질에만 나의 인연의 끈을 찾는다면, 내 연분은 왜 이 정도밖에 안될까라는 자조와 인과율이 맞지 않는 현생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도 있다. 생활 속에서 업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대부분 거대한 운명에 나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조적인 분위기를 띄고 그 말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보이는 물질에 국한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쉽게 알 수 없지만 그런 삶의 암흑물질에 섭동할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면 이미 부처의 마음에 많이 근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끝>

 

 

015 밀가루 반죽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1월16일)

집에서 밀가루 음식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갖고 아이들과 같이 반죽놀이를 하곤 한다. 아이들 엄마는 일하는 데 방해만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아예 놀이용 반죽을 떼어 주고 만다. 우선 반죽을 잘 하려면 채대기를 잘 해야 하는데, 손으로 대충 반죽 덩어리를 누른 다음에 그 반죽 덩어리를 다시 중간쯤에서 한 번 겹치게(주름지게) 휙 접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밀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세 번을 계속 접어 두툼해진 것을 또 얇게 눌러 펼치다가 또다시 꺾어서(주름잡아) 접어 버린다. 

깨반죽을 하기도 하는데, 그 반죽 덩어리에 깨를 넣어 다시 계속 접고 밀어서 펼치고 다시 꺾고(주름잡고) 접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 깨가 온 반죽에 어떤 때는 골고루, 어떤 때는 뒤죽박죽 퍼져 있게 된다. 접혀 꺾여지는(주름지는) 부분도 일정치 않아서 깨가 어디로 분산될 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게 된다. 처음 깨를 쏟았을 때 반죽 밀기를 한 쪽 방향으로 펼치기만 한다면 깨의 분포도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반죽을 소위 단순한 반죽 밀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꺾는 작업을 하는 순간에 이 반죽은 깨의 분포를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반죽이 되어 버린다. 복잡한 반죽은 아무리 반죽의 과정을 거꾸로 해도 원래 상태의 깨 분포 상태를 회복시킬 수 없다. 이런 상태의 반죽이 바로 복잡화된(complicated) 반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복잡성(complex)의 어원도 원래는 <con plicare>로서 서로 겹쳐 접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반죽된 밀가루는 우리 자연의 모습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은 원이나 삼각형과 사각형처럼 일정한 기하학적 형상을 갖는 것보다 기하학의 틀 안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다양성의 모습들 천지이다. 우리의 자연은 접혀지고 다시 접혀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모습들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접혀진 자연의 속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다시 펼치려고 한다면 원래의 자연의 모습은 간데 없고 틀 속에 가두어진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게 되고 만다. 그나마 펼칠 수 있는 자연의 부분들은 자연의 가장자리일 뿐이다. 자연의 그러한 가장자리를 보고 전체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과학법칙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과학법칙은 자연계의 8-10 % 정도만을 기호화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카오스 이론가는 1 %도 안 된다고 한다. 인간이 그 주름을 핀다해도 맨 끝의 부분만을 겨우 펼 수가 있어서, 그 끝 부분을 갖고서 인간의 기호를 붙이고 인간의 의미를 갖다댈 뿐이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자연의 저 안 쪽 부분을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이 접혀지면서 자연의 운동원리 자체가 구겨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접혀지면서 자연의 인과율도 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자연의 인과율을 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주욱 접혀 온 자연의 끝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파국론(catastrophe theory)이라는 과학이론이 있다. 인과의 끈에 의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온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그 과정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마지막 현상만을 보고서, 처음과 끝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두고 파국현상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접히면서 자연의 현상은 인간의 알량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접혀짐 때문에 우리는 연속적인 자연의 인과현상을 마치 급격하게 혹은 불연속적으로 혹은 우연적인 비인과율로 보기 쉽다. 

해가 저가는 황혼의 저녁은 여기서 볼 때 황혼이지만 서쪽으로 가면 아직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 있는 한낮이다. 황혼을 보고 조금 후에는 어두운 밤으로 점입되어 저녁을 끝이라고 하지만 더 먼 저기 서쪽에서는 처음일 수 있다. 저녁은 연속적인 해의 운동과정이지만 여기서 볼 때 저녁은 급변되어진 끝이라고 볼뿐이다. 그러나 저기 서쪽에서는 끝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파국은 아니다. 파국은 없지만 이쪽 인간에게는 마치 파국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녁과 한낮은 서로 다른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한낮과 저녁은 주름잡혀 접혀진 그래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모르는 태양 운동의 두 가지 면일 뿐이다. 

인연의 타래를 풀기 위해서 실 하나 하나를 따라가지 않고, 타래 전체를 가위로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굳이 불교의 연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겉에 드러난 현상에 메이지 않고, 접힘의 안 쪽을 잘 모르더라도, 그 속의 깊음이 있다는 정도만이라도 인정하는, 그런 인연의 상상력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

016 디지털과 色의 세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1월23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은 모두 몇 가지일까? 이런 질문을 받고 쉽게 답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깔을 스펙트럼으로 볼 때 비로소 색깔을 감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빛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펙트럼에서 보이는 빛깔의 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빛깔은 연속적이며 따라서 색깔도 무한정하다. 그러나 인간은 연속적인 무한성에다가 색깔의 이름을 다 붙일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이 붙일 수 있는 색깔의 이름을 만들어서 연속의 빛깔을 불연속의 색깔 이름으로 제한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색깔의 이름과 이름 사이에 끼어 있는 색깔은 앞 뒤 이름의 색깔로 그 이름을 대신한다. 

이럴 경우 이름과 이름 사이에 있는 색깔은 어떤 사람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56가지 크레파스를 만드는 크레파스 공장 주인에게는 56가지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색깔들의 존재는 일종의 색깔의 노이즈(noise)일뿐이다. 그래서 색깔의 이름이 없거나 무한한 색깔에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색깔의 노이즈로 말미암아 색의 혼동을 일으키고 만다. 그러나 일정한 스펙트럼의 간격으로 색깔의 이름을 적당히 붙임으로써 우리는 색깔의 노이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화기의 소리도 그렇다. 아날로그 방식의 전화국의 구형 송출방식은 전기신호로 환원된 사람의 소리가 연속적이어서 송출하는 전기에너지와 일대일 대응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 통화할 때 잡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방식의 송출은 연속적인 소리의 전기신호를 불연속적인 단위로 끊어주어 한 단위 한 단위로 송출하게 되어 이를 받는 수신기는 단위 전기신호를 다시 소리로 바꿔 주면 되기 때문에 잡음이 없어진다. 

이렇게 디지털 전환은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가능한 중간 미세정보들을 0과 1 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시킴으로써, 중간 미세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 전달과정의 전기 노이즈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인공신호는 원래의 자연신호와 차이를 발생한다. 연속을 불연속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불연속의 단위로 편입된 연속의 많은 것들이 사라진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실제의 소리가 아니라 편집된 소리를 듣고 있는 셈이며, 디지털로 구획되지 않았던 원래의 소리 대신 가상적인 소리를 듣는 상황과 비슷하다. 결국 전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아주 미세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가상세계를 맛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작은 미세한 차이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가상계의 미래를 그 안에 품고 있다. 

디지털을 통한 가상성과 현실성 사이의 차이는 디지털 특성과 아날로그 특성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불연속적 단위로 새로이 조합된 정보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정보는 연속적인 어떤 하나이다. 예를 들어 물이라고 하는 정보의 전달과정을 보자. 이 쪽 항아리의 물을 다른 항아리로 옮기려고 할 때, 물통을 갖고 한 통, 두 통, 세 통으로 세어서 물을 옮기면 물의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 방식의 물 전달 효과이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물의 노이즈는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쪽 항아리 들고 물통 없이 다른 항아리로 직접 부으려고 한다면 옆으로 새고 흘리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물 전달의 노이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아날로그 방식의 물 전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통으로 세어서 옮겨진 물은 전달의 효과는 클지 몰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의 물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량화된 물통 수에 맞춰진 강요된 물의 양을 상대방이 전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항아리 채 들어서 옮겨지는 물은 비록 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양만큼 부어서 물통 수와 다음 물통 수 사이의 적절한 양에서 옮기기를 그칠 수 있다. 결과는 디지털 방식의 물 옮기기는 정확한 양이 문제인 반면 상대방 사람의 의도와 어긋날 수 있으며, 아날로그 방식의 물 옮기기는 물은 흘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양을 줄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러한 수사적 비유는 결국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에 대한 은유적 비유이기도 하다. 

결국 디지털 기술의 핵심은 이 세계를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나눌 수 있으며 그것을 다시 유용성 있게 조립하고 편집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모두가 디지털처럼 전부 분할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말은 이 세계가 모두 색(色)의 존재로서 설명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다음 호로 넘겨 떠들어야 할 것 같다. <끝>

018 현상과 본질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2월13일)

서양사상의 틀은 기본적으로 현상세계 넘어 있는 초월의 세계를 찾아가는 구도를 갖는다. 고대 플라톤에서 정형화된 서구철학은 현상계와 초월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진리는 반드시 초월계에만 존재한다는 믿음 위에서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경우도 역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은 서로 넘나들을 수 없는 절대적인 구획의 경계선이어서, 신의 성곽인 저 세계는 이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서구철학의 간판 격으로 등장하는 데카르트에서도 모순으로 가득 찬 현상세계를 너머서 자족적인 실체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현상과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축이라는 생각이 바로 서구의 현상과 본질의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현상과 본질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서구 이원론은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사상적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은 갈릴레오의 운동법칙을 낳게 하였다. 갈릴레오는 지난 이천 년 동안이나 운동의 법칙을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에 대한 최초의 도전자였다. 물체를 운동시키기 위해서 외부에서 계속적인 힘을 가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과 달리, 갈릴레오는 외부의 힘을 한번만 물체에 작용시키면 영원히 운동한다고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이 옳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외부의 힘이 물체에 한번만 작용하면 얼마 못 가서 그 물체는 서고 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당연한 경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저항과 마찰이 없는 이상상태(ideal state)를 새로이 상정하였다. 

갈릴레오 당시 저항이 없는 진공상태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사고실험(思考實驗)이라는 머리 속에서만 하는 실험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이 틀리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 사고실험은 너무나 간단했다. 경사면에서 물체에 힘을 한번만 주어서 공을 아래로 굴러가게 하면 그 공은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공을 아래서 위로 힘을 가하면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느려진다. 그렇다면 위로도 아래로도 아닌 평면에서 공에 한번만 힘을 가한다면 점점 빨라지지도, 점점 느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속도도 아니고 감속도도 아닌 것을 등속도라고 말한다. 등속도란 한번 물체에 힘을 주면 그 초기속도를 계속 유지한다는 뜻이다. 결국 초등학생도 알만한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운동의 등속도 원리를 갈릴레오는 찾아내었다. 

이러한 운동법칙의 발견은 운동의 현상과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이 현상에 얽매어 있던 것이라면 갈릴레오의 운동학은 본질을 들추어 낸 결과였다. 달리 말해서 저항과 마찰의 세계를 경험의 현상계라 한다면 저항이 없는 이상상태를 경험을 초월한 본질계라고 보는 것이다. 확실히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서구의 종교와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기독교를 오늘날까지 지탱해 온 사상적 뿌리였으며, 서구 근대과학혁명을 낳은 세계관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의 생각은 물질과 정신을 구획하여 물질을 현상계에 그리고 정신을 본질계에 배속하고, 그들 사이의 우열을 규정함으로써 수많은 사회적 모순을 낳게 하였다. 먼저 물질을 저급하고 오류의 범주로 놓고, 정신만을 고급하고 진리의 범주로 놓음으로써 추상적인 세계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지배하여 물질의 현실을 오도하고 구속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사상적 동기에서 서구 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고 마는, 말하자면 환경위기 그리고 인간소외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서구 산업화의 가장 큰 문명적 질병의 하나인 인간소외로부터의 탈출을 어떻게 시도해야 할 것인가는 현대인이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라고 보아도 좋다.

그런 과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지난 지면에서 말했던 공과 색의 관계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한다면, 공과 색은 서구 이원론에서 말하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서 공과 색이 하나라는 말은 너무나 자주 들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공과 색의 범주에 대하여 은연중에 우열의 판단을 하는 잘못된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색의 세계에 오히려 충실하지 못하는 현실의 결과를 자주 볼 수 있다. 색을 분별의 세계에서만 보면 미망함에 빠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공을 이치의 세계에서만 보면 그 공도 허무해 질 수 있다. 기계와 정보에 얽매이기 쉬운 현대인에게 본질과 현상의 구별됨 없는 중도의 눈은 삶의 중요한 좌표계이기도 하다. <끝>

019 유전자 결정론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2월20일)

최근에 유전자 지도가 발표되었다고 해서 과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들 한다. 유전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여러 견해가 있었는데 이번에 발표한 것에 의하면 약 사만삼천 개 정도라고 한다. 작년에 발표한 것에 따르면 십만 개였는데 이번 발표는 반 이하로 뚝 떨어져 발표되었다. 

10억 개 이상의 염기서열이 생명체의 특정한 표현 형질을 나타내는 구성체를 유전자라고 부른다. 그런 유전자의 의미는 모든 유전자가 각각 생명현상의 특정부위에 일대일 대응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혈액암이나 간질 혹은 천식을 발생시키는 생물학적 요인이 고유한 특정 유전자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유전자 연구는 유전자 결정론의 생각을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작년에 발표한 십만 삼천 개의 유전자 수와 이번에 발표한 사만삼천 개의 유전자 수의 차이는 이런 유전자 결정론의 생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우선 사만삼천 개라는 인간 유전자의 수가 쥐의 유전자의 숫자보다 불과 칠천 개 정도만 많다는 점이다. 인간만의 존엄성을 강조하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과학의 결과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숫자 자체가 인간의 생명 현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라는 점이다. 사만여 개의 유전자들은 23개의 디엔에이 구조로 되어 있는 염색체에 안착되어 있다. 책으로 말하자면 개체 생명체를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할 때, 그 책은 고유한 염색체의 소제목을 갖는 23 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수천 가지의 유전자라고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유전자 결정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5번 염색체 중의 특정 유전자가 천식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어떤 특정 유전자는 눈의 색깔, 또 다른 유전자는 머리카락의 성질, 11번 염색체 중의 어떤 유전자는 혈액암 유발인자 등의 일대일 대응되는 방식으로 유전자의 인과법칙이 설명되기를 희망했지만, 4만여 개의 유전자를 갖고는 어림도 없는 숫자였다. 예를 들어 1998년 중반에 천식 유발인자는 5번 염색체에 8개의 후보가 있고 6, 12번에도 천식 유전자의 후보가 2개 씩 그리고 11, 13, 14번 염색체에도 그 후보를 발견하였다. 또 과학탐구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다. 유전자 차원에서도 특정 유전자가 질병 등의 특정 생리학적 현상에 대한 충분 조건이 아니라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유전자 결정론을 따르던 과학자들도 유전자 공학의 과학탐구가 발전하면 할수록 오히려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이 무참히 붕괴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간암 등의 유전자를 발견하면 간암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여 장밋빛 희망만 던져주고 있다. 어떤 유전자는 분명히 특정한 생명현상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연관방식이 단순히 일대일 대응되거나 직접적인 인과율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연관방식은 매우 복잡한 조합구조를 갖는 유전정보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어서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일의一意적인 해명이 불가능하다.

유전자의 이야기를 불교사상과 직접 연결시키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유전자의 특성을 단순히 물리학적인 소립자와 같은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와 통하는 점이 있다. 생명체의 유전자는 그 생명체가 살아 있는 시간대의 실체적인 원인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5억 년이라는 과거의 진화론적 시간을 모두 머금고 있는 역사적 존재이다. 모든 시간을 통해 있는 역사 존재로서의 유전자는 단순히 살아 있는 지금 이 시간대에 국한된 현상적인 인과율 법칙에 절대로 묶여 있지 않다. 생명체가 먼저 있었고 유전자는 그 생명체를 역사에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후조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공이 앞서 있으며 연기가 나중에 오듯이 생명현상이 먼저이고 유전자가 나중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지도를 찾아내어 모든 유전자의 인과적 대응현상을 전부 찾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생명체가 기나긴 생명의 역사를 거치면서 환경과의 섭동을 통해 (1)자신을 바꾸고 (2)새로 만들고 (3)없어지기도 하고 (4)전혀 다른 것으로 되기도 하는 진화의 과정을 무시한 결과일 수 있다. 생명 유전자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하여 궁극적인 세계의 모습은 모든 것이 결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과정임이 중론의 중요한 생각이다. 이런 생명의 모습을 잘 관찰한다면 아마도 존재의 무상과 비어 있음을 어깨너머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공이 앞선다는 중론의 생각을 생명과학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마도 직접적 인과율로 따지려는 유전자 지도의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과학적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끝>

 

 

020 우주 한 모퉁이의 인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2월27일)

산탄총으로 새를 쏘는 경우, 새를 맞추어 떨어트리려는 총의 발사행위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 행위이다. 그러나 산탄총이 발사된 후 총구에서 벗어난 산탄들(많은 총알들)이 새를 맞추게 된다면 그 많은 산탄 총알 중에서 어느 총알이 새를 맞출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속한다. 이 이야기는 목적과 관계없는 우연과 목적에 부합하는 필연이 서로 상충되기보다는 조화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하나의 은유이다. 우연과 필연의 이 같은 연결성은 특히 생물의 진화과정에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뼈 속이 성글게 된 진화적 과정은 진화의 먼 과거 역사에 한 육상 생명체가 하늘을 날게 되는 단편으로 보아서는 우연에 속한다. 그러나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반드시 뼈가 가벼워야한다는 생리학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진화과정은 필연에 속한다. 진화는 특정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명체의 미래가 어떤 필연적 진화를 가져다 줄지는 전적으로 알 수 없다. 진화과정에 놓여 있는 생명체는 강 위로 흘러가는 미아의 바구니와 같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나는 새 중에서 3톤 짜리 체중을 갖는 새로 진화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생명체의 진화는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지만, 아무 우연이나 행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1859년 다윈이 불과 천이백오십 부로 출판한 책인『(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은 유럽의 지적 풍토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단지 생물학적 혁명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플라톤 사상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축 위에 서있던 유럽사유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다윈 이전의 서구 인간관의 기본은 기독교적 인간관으로서, 인간은 신의 모방체로서 다른 동식물과 달리 매우 특수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목적론적 세계관을 갖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달리 진화론의 인간관은 우연적이고 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무중심의 태도를 지닌다. 

인간의 유전자는 침팬지의 유전자와 비교해서 98%는 같고 나머지 2%만 다를 뿐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고 해서 최고의 영장류 혹은 다른 생명체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특수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쥐는 초음파 탐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수한 지위를 가지며, 낙타는 물을 장기간 섭취하지 않고도 이동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생명체이며, 박테리아 역시 외부환경에 강한 증식력을 갖는 특수한 존재이기도 하다. 노벨상을 수상한 프랑스 화학자 자끄 모노(Jacques Monod)는 인간을 "우주 한 모퉁이를 떠도는 집시"라고 표현했다. 결국 인간은 무수히 많은 생명종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지위가 보잘 것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생명종, 모든 생명개체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존재이유와 존재의 특수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인간 유전자의 2%만이 침팬지의 것과 다르고, 진짜 하등하다고 생각한 초파리의 유전자의 숫자도 인간 유전자 수의 1/3 정도나 된다는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인간과 침팬지의 생물학적 차이가 엄청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2% 정도일지라면, 나머지 인간과 침팬지가 공유하는 98%라는 생명체 일반의 신비로움은 더욱더 엄청날 것이라는 점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초파리의 유전자의 수가 인간 유전자의 1/3정도라면 그 나머지 숫자인 30%가 갖는 생명의 비밀은 어마어마한 보고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만이 지니는 특수한 지위를 따지기 전에 인간과 초파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 일반이 갖는 신비로운 생명성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바로 최근 발표한 게놈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로서 되새겨져야 한다. 

다윈 이전에는 인간만이 생명체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이런 목적론적 사유를 정면으로 붕괴시켰다. 그래서 필연적인 방향을 인정할 수 없으며 우연의 역사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키워드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앞서 말했듯이 우연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필연이기도 하다. 진화론과 같은 생물학의 이론은 물론 아니지만 우연으로 나타나는 필연의 세계를 삶의 전체성과 연관하여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연기의 세계이다. 연기의 세계는 삼세간(三世間)의 상호장엄(相互莊嚴)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삼세간 중에서 생명체의 세계인 衆生世間 사이의 생명체들은 어느 무엇이 다른 어느 것보다 우월하거나 비속한 것은 하나도 없는 평등의 존재자들이다. 나아가 깨달음의 세계인 智正覺世間, 생명체의 세계인 衆生世間 그리고 산천초목의 세계인 器世間이 서로 평등한 지위를 갖고 서로의 존재의미를 서로에게 부여해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진화론이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국한하지 않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의 겸허한 자세를 요청하는 새로운 과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끝>

 

021 이타주의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3월5일)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면서 당시 서구 사회의 사상적 풍토에 큰 요동이 일어났다. 과학적 진화론이 기독교의 인간관과 정면으로 충돌된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아가 종교와의 갈등말고도 당시 유럽의 사회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법칙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자본시장의 이론적 원천인 자유주의의 맹아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노동착취, 인간소외 등의 자본의 피폐성이 노골화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그 어느 것도 이론적 합리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이론적 배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떤 과학법칙을 찾고자 했다. 이때 마침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과 변이라는 두 축 위에서 성립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진화론에서 약육강식의 논리를 견강부회로 끌어댔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은 생명종들의 조화론을 끌어내어 자신의 이론적 무기로 삼았다. 당시 극단적으로 상반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동일한 진화론을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진화론을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유기체의 자연선택과 적응논리를 자유경쟁 체제의 논리적 근거로 보고 싶어했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은 생명종 내의 개체의 이타심이 궁극적으로 그 집단의 존속을 유지시키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개체간의 조화가능성의 논리적 근거로 보고자 했다.

19세기 말 중국은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진화론을 수용하게 되는 중국의 사회적 배경은 당시 계속되는 전쟁의 패배로 인한 부국강병론의 일환이었다. 부국강병론 혹은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경쟁 논리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진화론의 자연선택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강한 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고 약한 것은 자연도태되는, 약육강식이라는 매우 처절한 논리가 중국도 강해져야 한다는 정치논리로 연결되었다. 이런 경우 내가 살아 남기 위하여 네가 죽어야 하는 집단 이기주의만이 팽배해 질 것이 너무 뻔한 일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진화과정에서 반드시 강한 것만이 살아 남는다는 논리만 이야기하는 것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일반인의 가장 큰 오해이다. 다윈은 일개미의 경우와 아프리카 어떤 종족의 사례를 통하여 나를 희생시켜 자기가 속한 종족 혹은 개체군집 전체의 자손증식과 종의 존속을 유지케하는 개체의 이타적 행위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도덕심이나 이타심도 자연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타심도 집단의 종족보존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자아낼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될 수 있다. 

최근 그런 이타주의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화생물학자 사이에서 있어 왔다. 예를 들어 먼 훗날 모종의 보상을 바라고 남에게 이타적 행위를 한다면, 그것을 과연 진정한 이타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아무리 먼 훗날이라도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절대로 이타적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경우, 이타주의는 선천적인 그 무엇이어야 한다. 단기간에서만 볼 때, 생명종의 개체들이 이기적일 경우, 분명히 더 자손증식에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볼 때 오히려 이타적인 것이 더 자손증식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아주 간단히 생각해서 어떤 공장주가 자신의 이익만 챙겨 오염물질을 마구 방출하는 공장을 운영한다고 할 때 자신과 자신의 자식 정도야 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류종 전체의 입장에서는 종의 존속과 자손증식에 불리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대승의 차원에서 이타주의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행위, 그리고 무엇을 바래서가 아닌 행위는 그 자체로 서양적 잣대의 윤리적인 틀조차도 벗어나 있다. 윤리라는 틀도 역시 세간의 분별심에서 나온 규범이기 때문이다. 선진유가의 텍스트에서는 그 첫 장에서 인간의 욕심을 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장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된다는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썼다. 불교의 첫 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썼는데, 그러나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욕심을 버려야 된다는 그런 욕심조차도 버려야 된다고 했다. 이렇게 규범화된 윤리조차도 벗어나는 일, 무심의 이타성만이 진정으로 인류의 진화에 선택될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이타성은 생각으로 하는 계산된 이타성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자연스런 이타성이기 때문에 인간종 진화에 휠씬 높은 적응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022 이타주의 II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3월13일)

벌에 쏘여 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몇 년 전에 말벌에 쏘여서 119에 실려 간 적이 있었던 지독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벌이 사람에게는 위협적이지만 그 꿀벌의 집단 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한 이타적 행위를 한 것이다. 벌의 침은 끝이 낚시바늘처럼 되어 있고 안쪽은 자신의 내장과 독액샘에 연결되어 있어서, 한번 쏘면 침이 빠지면서 내장도 함께 빠져 벌은 죽고 만다. 동시에 독액이 뿜는 냄새는 다른 벌들을 자극하여 다발적인 공격을 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벌의 죽음은 개체의 입장에서 자살이지만 군집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군집을 지켜주고, 여왕벌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이타적인 결과를 낳는다. 생물체에서 진화의 기준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기제를 따르지만 그 방향은 후손 번식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일벌의 탄생 자체가 후손번식과 무관한 무정란의 탄생이며, 유전자의 손실이 전혀 없어서, 일벌의 존재의미는 말 그대로 일하고 자신을 희생하는데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 병정 흰개미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 흰개미들은 응고 분비샘으로부터 노란 분비액을 복부 근처에 모아 놓고, 다른 적을 공격할 때 상대방에 접촉하여 복부를 강하게 수축시켜 자신의 복부를 터뜨려서 액을 분출시키고 자신과 상대방을 응고하게 하여 같이 죽고 만다. 이런 흰개미는 자신의 후손 번식을 포기하는 대신에 번식력이 뛰어난 자매 흰개미를 보호함으로써 전체의 자손을 늘려 자신과 같은 희생용 흰개미를 간접적으로 늘어나게 한다. 이와 같이 친족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의 번식방식을 친족선택이라고 한다. 이런 친족선택 역시 생물계 자연선택 중의 하나인 훌륭한 선택 방식일 수 있다.

많은 작은 새들은 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매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가는 수가 최고다. 그런데 새떼의 모든 새들이 매의 접근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면 먹이를 제대로 찾아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새떼 중의 어떤 한 마리만이 일선 경계를 한다. 경계를 하는 새는 최전선에서 매가 오면 경계음을 내어 다른 새들이 미리 도망가도록 해준다. 그러나 경계를 맡은 새는 매에 가장 접근되어 있는 동시에 경계음의 소리까지 내느라 매에게 잡혀 먹을 확률이 매우 높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는 이타적 행위를 한다. 

앞에 든 세 가지 이타적 사례는 실제로 자연 동물계에서 일반적으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특히 포유류와 같은 고등동물의 경우 이타적 행위는 드문 편이다. 원숭이의 일종인 비비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하여 공동의 희생을 통해서 대장 수컷에 대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미의 모성애를 통한 이타적 행위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포유류에게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직계 혈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불행히도 사람의 경우는 사실 더욱더 이타성을 찾기 어려워진다. 붓다의 고행은 인간 군집의 극심한 이기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붓다는 고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기성이 윤회 시스템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풀려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간은 이타성보다는 이기성으로 꽉차 있다는 것이 차가운 현실이다. 이런 인간사의 현실을 부정하고 세간 속에서 인간의 이상적인 이타성만을 찾으려했다면 아마도 붓다는 고행을 계속해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행을 멈추고 인간세계 밑에 더 깊이 있는 윤회의 흐름을 보았던 것이다. 그 흐름은 아마도 일벌이나 병정 흰개미의 이타성과도 맥이 닿아질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벌이나 흰개미가 최소한 어떤 명예욕의 의도를 갖고 이타적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 쓴 것처럼 훗날 보상을 바라거나 혹은 자기가 속한 소집단만의 이익을 위하여 집단구성원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이타적 행위는 궁극적인 이타주의가 아니다. 어린 붓다는 당시 자비심을 빙자하여 자신의 친지만을 위하고 다른 이를 배척하는 숨겨진 이타심을 보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후일 붓다는 의도조차 없는 자비심만이 영원한 삶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 이수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 보여준 진정한 이타성은 단지 남을 위한 희생으로만 보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얀마의 니바닉(Nibbanic) 불교에서는 이타주의를 통해서 진정한 개인의 보존을 구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수현의 죽음은 남을 위한 희생의 차원에서 더 더하여 그의 영원한 삶의 길과 연결되어 있음을 한번 더 생각해 본다. <끝>

023 평등한 생명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3월20일)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35억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자연의 책을 써왔다. 그런 자연의 책은 최초의 아미노산 유기성분의 성립에서부터 영장류의 최고라고 하는 오늘날의 인간종에 이르는 기나긴 생명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런 생명의 역사 속에서 개별 생명체는 나름대로 환경에 대한 관계와 섭동을 거치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그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표류하는 존재였다. 표류하는 가운데 삼엽충같은 생명종은 2억 년 전에 이미 진화의 역사 너머로 사라져 버렸지만, 아메바나 도마뱀 같은 생명종은 끈질긴 관계와 섭동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렇게 진화의 표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방향과 끝을 모른 채 생명의 진화는 표류하고 있다. 그런 시간의 진행 속에서 오늘날 남아 있는 생명종들은 식물과 동물로 갈라졌고, 양서류나 포유류 등으로 갈라져 진화의 종착점을 서로 달리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결과를 두고 식물은 동물보다 진화적으로 우월하고, 포유류는 양서류보다 우월하다고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이런 생명종의 우위비교는 인간종의 아주 못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인간인 나만이 진화적으로 가장 우월한 영장류 중의 영장류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심보와 같다. 인간의 이런 못된 심보는 생명 진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생명종들을 비교하면서 은연중에 인간사에서 이루어지는 다툼과 뽐냄이라는 인간의 역사를 그대로 생명의 역사에 투영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의 진화에서도 더 잘 적응한 것과 덜 적응한 것으로 생명종들을 분류하면서, 인간종은 스스로의 지위를 가장 적응도 잘 하고 뛰어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명종의 역사는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혹은 덜 적응된 것은 없다. 그냥 모든 생명종들은 모두 잘 적응한 결과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개구리는 차가운 온도변화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에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최소의 에너지를 갖고서도 생명을 존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겨울잠을 선택함으로써 최적화의 적응을 이루어 낸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쪽을 행해 3000 킬로미터 이상을 비행한다. 철새는 따듯한 날씨를 찾아 옮겨 갈 수 있는 탁월한 비행능력과 방향감각이라는 고도의 적응력을 갖추게 되었다. 펭귄과 물표범은 두터운 지방피부를 가짐으로써 매서운 추위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종의 하나인 인간은 인위적인 옷과 불을 만듬으로써 겨우 추위에 적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생물분류학의 하나는 계통발생학에 관한 것이다. 35억 년 진화의 시간동안 최초 유기체 성분이 모여서 단세포 원핵생명체를 만들고 이것이 진화하여 진균류로, 이어서 수생동물로 이어지고 수생동물은 양서류로 진화하다가 파충류로 이어지고 파충류에서 시조새나 혹은 후일 포유류로 되었다가 영장류로 진화하고, 그리고 나서는 최종적으로 인간종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진화의 가지가 단 하나일 뿐이라는 가설 위에만 성립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 때문에 인간이 최고라는 우월적 지위를 못 버리고 있다. 그러나 진화는 나무는 단 하나만의 가지를 갖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많은 가지를 뻗고, 그 가지가 다시 작은 많은 가지로 뻗어나가듯이, 진화의 나무도 역시 수많은 가지를 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존하는 모든 각각의 생명종들은 진화의 과정이 아니라 진화의 완성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보자. 민둥산 산꼭대기에서 물방울을 계속 떨어뜨린다고 하자. 그러면 꼭대기의 물방울들은 처음에 같이 흐르다가 금새 나뉘어져 길을 달리한다. 순전히 우연적인 방식으로 물방울들의 흐름은 계속 갈래를 치고 다시 갈래를 쳐서 마지막 바닥에 와서 갈래치기가 끝날 것이다. 그러면 최초의 물길은 하나로 시작했지만 최종의 물길이 닿은 도착지는 매우 많게 된다. 이러한 물방울의 갈래치기 흐름이 바로 물의 표류이다. 이를 생명 진화에 비유시킨다면 물길의 다양한 갈래치기 분화현상이 바로 진화의 표류이며, 그 결과는 새로운 생명종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도착지는 바로 오늘 현존하는 생명종들의 현주소가 된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하는 진화의 도착지에 도달한 현존하는 모든 생명종 혹은 생명개체들은 누가 더 우월하거나 저급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자연의 험한 환경 속에서 똑같은 진화의 섭동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뿐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환경위기이다. 그런 위기를 자초한 것은 결정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인간 이기주의에서 연유하며 이는 곧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에 대한 천시에 있다. 무수히 많은 생명개체들이 오늘날 어떻게 진화했는가에 대한 앞서의 이야기를 잘 새기기만 해도 아마도 인류가 안고 있는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 . 유정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 도법스님이 한 말을 인용해본다. "생명 위에 생명 없고 생명 아래 생명 없다"

024 소유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3월26일)

어제 요리를 하기 위하여 부엌에서 양파를 다듬었다. 우선 겉껍질을 벗기고 칼질을 하려는데 양파속의 맨 겉층이 물러서 다시 한 겹을 더 벗겨 내었다. 그런데 그 다음 겹도 물러서 다시 벗겨냈는데도 또 물러 터져 다시 한 겹을 더 벗겨냈다. 이렇게 자꾸 벗겨 내니 막상 먹을 양파가 없어지고 말았다. 양파는 양파 내용물이 겹층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까지 내용이고 어디까지 겹층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양파는 사과처럼 껍질과 내용물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 옛날 신석기 말기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에게서 언어와 삶이 유리되면서 우리는 존재와 인식 그리고 행위를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다. 존재를 지칭하는 주어가 반드시 먼저 있어야만 인식과 행위를 기술하는 동사를 그 주어에 갖다 붙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존재는 고정된 어떤 틀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고정된 존재가 있어야만 비로소 인식과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세계를 분화시키는 사유의 출발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이분화된 사유는 대상과 나를 구분하여 나를 중심으로 대상을 보려는 자아 중심적인 언어행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유는 결국 양파를 겹겹이 벗기다 보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게 되는 원숭이의 얄팍한 재주에 비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아와 대상의 구분은 인간에게서 소유의 영원한 욕심을 낳게 하는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동물들에게 소유의 의미는 욕망의 인식이나 그것을 얻으려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행위가 같이 녹아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아메바의 포식작용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메바는 먹이를 포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 일부를 뻗어 먹이에 부착시킨 후, 몸체를 끌어 당겨 그 먹이를 감싸는 행위를 보인다. 그렇게 뻗어 내리는 자신의 몸 일부를 우리는 허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허족과 몸체는 따로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 일뿐이다. 이렇듯 아메바의 몸이 아메바의 존재라면 행위를 담당하는 허족도 아메바의 존재이다. 그래서 아메바에게서 존재와 행위는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허족의 뻗침은 아메바에게 있어서 행위이듯이 동시에 그 행위는 먹이를 포식하려는 인식작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메바에게서 인식과 행위는 같은 것이다. 결국 아메바에게서 존재와 인식 그리고 행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에서 존재와 인식 그리고 행위의 일체가 깨어지고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간은 문명사회를 누리면서 인식과 행위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더욱 줄어들었다. 문명은 인류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은 끝없는 소유의 유산이었다. 그래서 나의 소유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나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너의 결핍을 동반하였다. 소유의 나는 살아 남을 수 있고 결핍의 너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강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문명사회의 지배논리로 되었다. 

인간 소유욕구의 특징은 소유욕의 충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고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인식 그리고 행위가 통합된 동물의 소유는 존재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소유의 욕구도 그치고 만다. 이 점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동물은 존재의 소유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소유의 행위도 그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영원히 소유를 지향한다. 존재를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소유를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땅의 사자나 혹은 물의 상어도 자기의 배가 채워지면 먹이사냥도 그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배가 불러도 소유를 위해서 소유를 계속 하고 있다. 

인간의 소유 욕망은 더 이상 개체의 존속과 종의 증식을 위한 인식적 도구가 아니라, 문명사회와 함께 주어진 가장 큰 인간의 존재 특징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소유욕이 오히려 인간 상실과 집단 절멸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환경위기, 인간소외, 자원고갈, 국제분쟁 등에서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화내고, 다투고, 시기하고, 뽐내고 남 업신여기는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세간사의 분화된 존재는 모두 소유의 질곡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쯤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석존의 무소유의 논리는 단순히 소유가 욕심을 불러오니 그 때문에 소유를 하지 말자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무소유의 논리는 나의 존재가 인식/행위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생명적이고, 가장 존속가능한 인간의 삶의 태도라는 능동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 <끝>

 

025 본능과 학습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4월3일)

1965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생명과학자인 프랑수아 자콥(Francois Jacob)이 쓴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 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강가에서 전갈 한 마리가 강 저편으로 건너는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이때 개구리가 나타나자, <네 등위에 나를 태우고 강을 건네주겠니?> 전갈이 물었다. <내가 미쳤니, 넌 나를 찌르고 말걸.> 개구리가 답했다. <절대 아니야. 널 찔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랬다간 둘 다 모두 빠져죽고 말게. 그리고 보상은 충분히 할게.> 반신반의하면서도 개구리는 등에 전갈을 태운 뒤 강 저편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물에 들어간 전갈은 개구리를 마구 찔렀다. 죽어가면서 개구리는 물었다. <그런데 너 왜 이런 짓을 했지?> 전갈이 대답했다. <내 천성 탓이지.> 그리고 둘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물에게서 본능의 행동은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생리적 현상이다. 전갈이 개구리를 찌른 행동은 전갈의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전갈의 본능적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앞선 연재에서 일벌이나 꿀벌의 사회적 행동에 대해 말했지만, 실은 몇몇 동물의 그런 사회적 행동도 개체들 모두가 사회적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 유전자에 실려 있는 행동정보 양식에 따라서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가이다. 

1922년 인도 북부 뱅골 주의 한 마을에서는 두 소녀가 태어난 직후 늑대에 의해 양육되었다가 구출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당시 여덟 살과 다섯 살쯤으로 추정되었다. 두 소녀는 그때까지 사람을 만나 적도 없었으며 인간의 문화적 환경에 노출된 적도 없었다. 작은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죽었고, 큰 아이는 10년 정도를 더 살았다. 그들은 두 다리로 서지를 못 했으며 날고기만 먹었고 늑대처럼 네 발로 다니고 그것도 밤에만 활동했다. 물론 말을 못 했던 것은 당연하다. 키플링의 창작동화에 등장한 정글소년 모글리와는 전혀 딴 판으로 결국 늑대소녀들은 인간 사회에 적응 못하고 죽었다. 

위의 두 이야기는 본능과 학습이라는 동물 혹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현대 분자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생명 형태가 유전자 정보에 의존한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개별 생명체의 행동양식이 유전자에 전적으로 의존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떤 거부감을 갖는다. 특히 인간의 행동양식은 주어진 유전자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후천적 학습과 반복적 관습에 기인한다고 보는 쪽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는 오리새끼들의 그림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사람을 처음 본 오리새끼들은 그 사람을 자신들의 어미로 기억할 수 있는 선천적인 혹은 본능적인 인식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갓 태어난 새끼양도 태어나자마자 몇 시간 동안 어미와 떼어놓으면 다른 양들과 달리 불안해하거나 비친화적인 이상 행동 양식을 보인다는 보고가 있다. 어미는 갓 태어난 양들을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핥아내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런 이상 행동 양식이 생긴다고 한다. 즉 어미와 새끼 사이의 시각적 혹은 화학적 접촉을 해주는 초기의 핥는 행위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행동 양식에서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학습이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인간에게서 본능보다 학습을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본능 역시 인간의 행동양식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인간에게서 본능이란 주로 물질적/신체적 욕망의 원천밖에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본능을 주로 부정적으로 보아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의지나 사랑의 힘을 낳을 수 있는 원천으로서 본능을 말할 수 있다면, 본능 또한 인간 행동양식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선진유가에서 인仁을 풀이할 때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곧 우물에 빠질 상황에 놓여 있는 걸음마 아기를 본능적으로 구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이 본능적으로 지니는 인을 설명한다. 우리는 그런 본능을 선천적이라고 한다.

선악의 대립구도에서 인간의 본능은 항상 악의 원천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불성이 내 안에 들어와 있듯이 본능도 선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본능과 학습의 진정한 내적 차별을 두지 않는다. 수심결 13장 일부를 인용해보자.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실하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026 연속의 깨달음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4월10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연속적으로 흐른다고 말하고, 눈이 내릴 때 눈송이는 불연속적으로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연속적인 것은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하나, 둘 셀 수가 있지만 연속적인 것은 셀 수가 없다. 수학의 정수는 하나 둘 셀 수 있는 불연속의 단위 수이지만 1/3 (0.3333 . . )처럼 무한소수는 연속의 수를 표현하는 한가지 방식이다. 로봇 기계는 불연속적인 단위 부속품들의 조립물이지만,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내장기관과 뼈마디를 부속품으로 갖는 그런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 연속의 어떤 유기체이다. 

진화의 과정이 연속적임은 이미 이야기했다. 단지 진화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갈 지를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연속의 과정이다. 그런데 굴드(Stephan Jay Gould)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한 생물종과 다른 생물 종 사이의 차이를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단속평형설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단속평형설은 어떤 생물종은 그것이 종으로서 자기의 자리매김을 한 다음, 그 이후에는 안정된 생물학적 평형을 유지한다고 하는 말이다. 독자는 이 설명이 더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어쨌든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어떤 과정이 개입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생물학이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론이 있다. 그것은 파국이론(Catastrophie)이다. 이 이론은 개울가 여울에 몰려 있던 잔가지 뭉치들이 어느 순간에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는 모습이며, 어느 우연적인 작은 자극에 의해 눈사태가 한꺼번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을 기술한 하나의 이론이다. 이러한 자연의 사태들은 분명히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무엇으로 보여진다. 인간의 스트레스 역시 외부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연속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다가, 그것이 누적되어 외부 자극과 관계없이 한꺼번에 터져 버리는, 그래서 갑자기 혹은 불연속적인 증상으로 여겨지는 일종의 질병이다. 

인지 심리학에서는 심리 형성의 과정을 단편적 과거 기억들을 소재로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심리 형성의 과정은 연속적인 그 무엇으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외부 자극에 대하여 갖는 인상印象은 사람마다 그 정도와 강도가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아이는 어렸을 적 본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나 어느 배우의 캐릭터가 어른이 되도록 그의 심리 저변에 근저로 놓이는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머리 속에서 기하학적 구조를 상상함으로써 갑자기 수학문제를 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불교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에서 깨닫는다 함은 대부분 깨우침이다. 그런 깨달음은 깨우치고 난 그 이후, 그 깨우침 자체보다는 깨친 대로 실천을 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그럴듯한 깨우침이라도 이후의 실천적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진정한 깨침이 아닐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주변 일상사 속에서 이런 것조차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깨닫는 일과 깨달은 후의 일이 연속적이어야 한다. 연속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가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윤회와 열반이 연속적이라고 지난 연재 가운데서 한번 쓴 적이 있었다. 즉 윤회의 끝이 열반의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윤회의 끝이 열반의 끝이 아니라 열반의 시작이라는 점은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불교의 깨달음의 논의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말하기에는 곤란함이 많다. (첫째) 세간의 언어로 깨달음을 과연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며, (둘째) 아울러 깨달음의 문제를 깨달음에 근처도 못 가본 내가 쓸 자격이 없다는 점과, (셋째) 더불어 깨달음에 대하여 여러 훌륭한 선승들이 해 놓은 실천언어에 대하여 덧붙여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깨닫는 과정은 무엇인가? 돈오인가 아니면 점수인가, 이는 보조국사 이후 깨달음을 찾아가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앞서 말한 파국론에 유비시켜, 깨달음이란 깨닫게 된 개인의 체험의 연속 상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돈오는 그 연속이 누적되었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경우일 수 있고, 점수는 그 체험이라는 연속의 끈에서 깨달음의 동아리를 쥔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돈오는 마치 불연속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점수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둘 다 깨달음 이후의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을 먼저 깨닫는 것이 세간인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끝>

 

 

 

 

 

 

 

 

027 모순과 반대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4월17일)

흰색의 모순되는 색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 아닌 모든 색이다. 흰색과 검은색은 굳이 말한다면 반대 색 정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모순 개념은 여성이다. 남성과 여성은 인간이라는 집합을 구성하는 보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만,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은 반대이면서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 관계이다. 물론 남자와 여자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를 들어 철수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가 될 수 없다는 뜻에서 개념의 공존불가능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모순과 반대 사이의 간단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사 속에서 그 차이를 혼동하는데서 오는 오류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된 왜곡까지도 있다. 

그 차이를 혼동한데서 온 역사적 오류의 예를 들어 보자. 구 소비에트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을 거치면서 국제사회에서 냉전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과거 냉전의 핵심 역시 모순과 반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데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굳이 말하면 반대 관계는 됐을지언정, 논리적으로 모순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 냉전의 현실은 민주국가와 공산국가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 관계를 강요해 왔다.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혹은 공존하면 그들 각자의 정체성의 권력이 깨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대리 전쟁이 일어나고 상대방의 간첩이 잡혀 사형 당하는 등의 역사적 오류가 일어났었다. 민주 개념과 공산 개념이 그렇게 공존할 수 없었던 모순 관계였다면 오늘날 서유럽에서 기독교민주당과 같은 보수당과 사회당이 공존하는 경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년 전부터 종교계, 확실히 말해서 기독교계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지고서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심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비유적인 예를 들어보자. 치악산이 1300 미터냐 아니면 1700미터냐를 따지는 것은 분명히 모순관계를 따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1300 미터의 치악산과 1700 미터의 치악산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악산이 1300 미터라는 주장과 설악산이 1700 미터라는 주장은 하등 부딪칠 필요 없는 공존의 주장들이다. 그렇듯 진화론과 창조론은 서로 다른 범주에서 하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논쟁하는 이유는 모순과 반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어떤 생물학자는 과학자로서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창조론을 수용할 수 있다.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 종교로서의 창조론은 흰색의 저고리와 검은색의 바지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진화론과 창조론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 관계가 아니라, 다른 범주에서 주장되는, 그래서 서로 공존가능한 다양한 주장 중의 한 단편일 뿐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말할 때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 이 지면이 불교 신문이기 때문에 더욱 망설여진다. 마치 종교 갈등을 부추기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기독교와 불교 그 어디에 편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나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진화론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어서 진화론 여부 논쟁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창조론은 시간의 기원과 세계 존재의 당위성 등을 통해서 역시 너무 당연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주장들을 동일하고 유일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말할 경우 얼마나 심각한 싸움이 번질 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획일화된 하나의 문화 범주만을 인정할 경우 결국 동종 교배의 문화적 유전병을 발생시키며, 나아가 그 문화를 소유한 집단의 소멸을 자초한다. 또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범주만을 온갖 것에 잣대로 휘두르는 마음의 획일성은 독선과 위선을 낳으며,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만을 낳을 뿐이다. 문화의 다양성은 마음의 다양성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마음의 다양성은 남을 인정하고 내가 갖고 있는 잣대의 범주만이 아닌 다른 범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불교에서는 이런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말한다. 자비는 남들이 속한 많은 다양한 범주들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까지도 인정하는 다양성의 마음으로부터 움터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의 완성은 나말고 다른 것도 나처럼 똑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앎과 깨달음이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자비는 논리적으로만 보아도 범주논리의 차이를 확인하는 성유식론의 논리를 구현하며, 동시에 세간사에서는 서로 다른 모순된 두 개를 하나의 자리에 공존시킬 수 있는 삶을 지향하는 초논리이기도 하다. <끝>

028 탄생의 신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4월26일)

생명체이거나 무생명체이거나 그 탄생은 모두 신비롭기만 하다. 생명을 너머 우주는 더 그러하다. 천체물리학에서 본 우주의 탄생은 빅뱅이라는 대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주 대폭발을 통한 우주의 탄생은 없는 것에서 잇는 것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원래 무었인가가 있는 것에서 다른 방식의 있는 것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있는 것과 새로이 탄생되어 있는 것 사이에는 소위 특이점(critical point)이라는 경계로 구분되어 있어서, 그들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전혀 다른 물리계의 영역이다. 전혀 다른 물리계라는 말에서, 그 다른 점은 우선 시간이 흐르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주와 전혀 다른 물리계라면 지금의 시간 개념 즉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으로만 화살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거꾸로 가는 시간일 수 있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맞지 않는 다시 말해서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의 시간 개념이라고 말한다. 물론 대폭발 이전의 물리계에 대한 측정이나 실험적으로 검증된 내용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어쨌든 우주 탄생의 시점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는 서로 우주적 기억의 다리가 놓여 있지 않아 서로 대화할 수 없는 분리의 성곽이 놓여져 있다. 

현재 물리학의 수준에서 볼 때 우주 대폭발의 시점을 140억 년에서 170억 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50억 년 전쯤 태양계가 탄생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함께 말이다. 태양계의 탄생은 참으로 신비 그 자체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태양과 그 주위를 도는 행성들이 적절한 주기를 갖고 운동하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더욱이 지구의 탄생은 적절한 대기권과 풍부한 물, 태양열과 대기권의 조화를 통해 생긴 지구 표면의 적절한 복사온도, 물과 공기의 대류 현상 등 지구는 우주 한 가운데서 대서양 모래 한 알에 붙어 있는 박테리아 하나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우주의 총체적 신비를 모두 갖고 탄생한 듯한 신비로움을 주었다. 

이런 지구의 조화는 결국 생명체를 탄생시켰다. 진균 세포에서부터 수생 생물로, 식물류와 동물류, 그리고 나중에 동물은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종의 분화가 단계적으로 일어나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거듭되었다. 생명성의 특징은 먼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정한 패턴으로 보인다는 점과 생명체의 자기 존속을 위하여 에너지의 유출입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과 그리고 종의 유지를 위하여 자기와 같은 생명체를 증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 자체가 생명의 대단한 신비로움이다.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나 개천에 널린 돌 같은 무생명체도 마찬가지이다. 강물이나 돌들도 소나무나 물고기에 비하면 생명아닌 무생명으로 보일 수 있으나 우주의 탄생 이전과 비교하면 엄연한 생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신진대사니 진화니 하는 것보다 같이 함께 더불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강물이나 소나무나 아프리카 호랑이나 인간 역시 같이 함께 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고, 더불어 살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무생명이다. 더불어 살 수 있음이 결국은 가장 큰 신비로움이다. 

한 사람의 인체구조에서 볼 때 모든 속의 장기와 겉의 인식기능 구조가 모두가 서로서로 누가 말 안 해도 너무 조화로운 연결이 되어 있다. 먼지나 돌이 날라 오면 우리의 눈은 자동적으로 깜짝거린다. 배가 고프면 자동적으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경보음을 울려 준다. 외부와 온도 차이가 나면 자동적으로 피부에 소름이 생겨 온도조절을 해준다. 나무의 나이테는 세월의 기억장치를 보여주는 식물의 신분증이기도 하다. 더더욱 크나큰 생명의 신비로움은 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적절한 시간 안에 스스로 소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죽음은 탄생의 시작을 다시 알리는 중요한 생명의 신호이며 또 다른 가장 큰 신비로움이기도 하다.

오늘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이다. 그 분의 탄생은 우주의 시작과 같이 하였지만 뭇 중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탄생을 인간의 생사유전에 맞추어 또 다시 보여 주었다. 그래서 우주의 탄생과 달리 부처님의 탄생은 탄생 전과 탄생 후를 연결하는 기억의 다리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탄생은 만물의 조화와 더불어 있음을 알려주는 생명의 신호이기도 하다. 작은 인연과 큰 연기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광대하기도 하다. 한 올 털끝 위에서도 우주의 광대함이 다시 펼쳐져 있듯이 가장 작은 인연에도 가장 큰 연기의 네트워크가 얽혀 있다. 이것이 바로 탄생의 더불음이며, 가장 큰 신비로움이며 신통변화의 조화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탄생은 더불어 살 수 있는 희망을 깨어나게 하는 개울가의 한 반딧불이기도 하다. 그 작은 반딧불이 광대한 우주의 탄생을 과거를 미래처럼 비추어 주고 있다. <끝>

 

029 면역학과 상호작용의 자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4월30일)

20세기 의학의 발전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연장시켰음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태어나자마자 맞는 여러 예방주사 덕분에 유아 사망율은 아주 많이 줄었다. 아이들 전염병 중에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 가장 피해가 컸던 천연두 역시 예방 접종 덕분에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한 접종은 면역 의학의 최대 결실이었다. 

면역학은 서양에서 19세기 후반 메치니코프(1845-1916)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면역학적 임상치료는 그보다 먼저인 16세기 경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문헌이 있다. 중국과학사가의 대표자로 불리우는 죠셉 니담에 의하면 그 당시 중국에서는 소의 고름을 부드러운 천에 묻혀 코 안쪽 점막에 넣음으로써 천연두를 예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일종의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동양의학적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독공독이란 독을 독으로 치료한다는 뜻으로 일종의 동종요법에 해당한다. 외부의 나쁜 기운 혹은 전염병의 인자인 세균이 들어오기 전에 신체가 그 외부인자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약한 세균을 미리 접종시켜 신체로 하여금 나중에 센 세균이 들어와도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세포를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이독공독의 개념은 신체가 외부인자에 반응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먼저 약한 외부인자를 받아들이는 신체의 세포는 그 약한 인자와 작용하면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침입자인지를 구별해 내야 한다. 자신의 몸이 받아들이는 예방 접종으로서의 약한 독은 처음에는 침입자이지만 받아들인 후에는 주인으로 변한다. 그렇게 주인으로 변해야만 나중에 진짜 센 독이 침입자로서 들어 올 때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면역학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인과 침입자가 서로 바뀔 수 있고, 주인의 범주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범주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제 주인을 자아라는 말로 침입자를 비자아라는 좀더 철학적인 용어로 대신해서 쓰기로 하자. 그렇다면 면역학에서 말하는 면역학적 자아는 고정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 조건에 따라 만들어 가는 자아이다. 그래서 면역학적 자아의 정체성은 폐쇄된 것이 아니라 개방된 시스템이다.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서 면역 작용을 설명할 때 나오는 그림 중에 요철형의 설명이 있었다. 항원이 둥근 형이거나 뽀족한 형태라면 항체도 둥글거나 뽀족한 끝을 갖는 그런 것이라는 주형(template)모델은 이미 폐기된 설명방식이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면역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항체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몸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면역성이라는 작용이 있을 뿐이다. 면역성이라는 세포 단위의 과정은 사과나 돌, 소나무나 김철수 혹은 신장이나 소뇌처럼 특정 위치를 점유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저 면역성일 뿐이다. 

인간은 이미 언어에 구속된 존재라서 언어로 표현된 명사형의 사물이 먼저 있어야 그 사물이 기능이나 작용을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명사형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고 기능과 작용만 있는 것도 얼마든지 존재할 할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어 주가가 600에서 500으로 떨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주가의 명사형 주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가가 떨어졌다느니 올랐다느니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면역성은 외부 이물질의 침입으로부터 숙주를 보호하고, 손상된 부위를 고치며, 죽은 세포를 청소하며, 악성물질을 분해하는 활동을 일러 말할 뿐, 기존의 개념처럼 면역의 고정된 주체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면역학에서의 자아 개념은 전통적인 서구과학과 철학에서의 자아 개념과 사뭇 다르다. 서구 전통의 자아 개념은 고정된 실체 개념이거나 객관적인 대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뚜렷한 감각주체이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는 이원론적 철학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그러나 면역학에서의 자아는 앞서 말했듯이 주관과 객관이 뚜렷이 구분 안 되는 상호 작용자로서의 자아이다. 

상호 작용자로서의 자아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의 자아를 생각해 볼 때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자아는 집착과 모순만을 낳는 그런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는 諸法無我를 말하고 있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고착된 자아의 허무함을 말한다. 자아는 강물의 흐름과 같아, 강물의 한 곳을 떠내어 자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 자아는 허상이 된다는 뜻이다. 고착된 자아는 소유와 집착을 낳는다. 그러나 강물의 흐름과 같은 자아 즉 상호작용으로서의 자아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설하신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法燈明).”라는 말씀 속의 그런 자아이기도 하다. 명사 형태의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지만, 진리와 섭동하며, 동사 형태로서 열려진 상호작용으로서의 자아는 여전히 우리가 찾아가야 할 깨달음의 언덕이기도 하다. <끝>

 

030 소외와 중독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5월8일)

나는 누구인가? 복잡한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기껏해야 나는 내 직장의 총무부 대리이고 동네 조기축구회의 총무이며, 고등학교 동창회 간사이고, 두 아이의 아비이며 등등의 역할의 집합으로서 나를 규정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자아는 지난 호에 이야기했듯이 집착의 자아를 낳을 뿐이다. 이런 자아는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양파와 같은 자아이기도 하다. 역할의 집합으로서의 자아는 결국 기계 부속품들의 집합으로서의 자아와 연관성을 지닌다. 

기계를 조립하는 공장에서 공장 노동자들은 똑같은 부속품을 똑같은 방식으로 컨베어벨트의 속도에 맞추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할 뿐이다. 어떤 노동자가 소변이 마려워도 그 노동자의 생리적 상황에 맞추어 컨베어벨트가 멈추지 않는다. 단지 컨베어벨트가 정기적으로 멈추는 휴식시간에 그 노동자는 참고 있던 소변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공장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서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셈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이를 일러 철학에서는 "소외"라고 말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소외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로부터 혹은 물질문명으로부터 당하는 문명적 소외를 말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30년대 영화 중에서 <모던 타임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제목처럼 그 영화가 말하려는 내용은 톱니바퀴로 상징되는 엄밀한 시계의 기계성에 의해서 인간의 인간성이 상실되고 기계의 노예로 전락되어 가는 피폐화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철학적 소외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삶의 소외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되었다.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기술이 이제는 오히려 과학기술이 주인 행세를 하고 인간이 도구화되어 가고 있다. 도구화되어 버린 인간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난다. 

극도로 산업화되어 가는 현대 과학기술사회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란 일종의 중독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은 물론이거니와 요즘은 종교를 가장한 주술과 신비주의 중독이나 정보유토피아를 가장한 인터넷 게임중독 혹은 소비 중독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중독현상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면서 어디엔가 자신을 천착시킬 데 없는 표류하는 삶의 방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신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나아가 미래를 상실하는 중독증이 인간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상업주의가 결정해 준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런데 잉여의 소비재까지 소비하도록 만드는 현대 산업사회의 진짜 문제는 소비재뿐만이 아니라 소비 주체인 자기 자신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역류 구조에 있다. 

아마도 현대인에게서 과학기술은 피해갈 수 없는 문명적 통과제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래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상황들이 현실적으로 우리 인류에게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미래 상황이라면 소외에 따르는 다양한 중독 현상들도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기술에 소외된 인간은 어디에 인지는 모르나 분명히 정착해야 할 자비와 사랑의 터전이 있어야 한다. 결국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종교가 없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필요해 질 것이다. 

이렇게 과학과 종교는 삶의 양쪽 날개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라도 좋다. 문제는 중독현상을 일으키는 주술적 종교로 가는 것을 미리 경계해야 한다. 종교를 빙자한 주술주의는 과학의 맞은 편 날개가 아니라 과학과 종교 모두를 거꾸로 내동기치는 회오리바람이다. 그래서 추락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과학과 종교가 삶의 양쪽 날개라는 이야기는 과학과 종교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부작용을 치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종교의 미래가 안고 있는 문명적 과제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폭이 너무나 크다. 신비주의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고, 문명 중독증을 해독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

 

 

031 E = mc2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5월16일)

아인슈타인의 E = mc2 이라는 자연법칙의 공식이 있음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 공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물질과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등가여서 질량을 갖는 모든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인간이 찾아낸 최고의 자연법칙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활자로 찍혀 있는 마침표 점 하나에만 은하계에 있는 별들보다 더 많은 수의 양성자가 들어 있는데, E = mc2 아인슈타인 공식에 의하면 그런 양성자 하나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질량이 200 MeV 에너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는 이 현대불교신문 한 장의 질량은 전 세계 인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계산이 어림잡아 나오게 된다. 물론 모든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불안정한 상태의 우라늄이나 플로토니움 같이 질량값이 큰 원자만이 아인슈타인 공식을 현실에서 응용하는데 쓰일 뿐이다. 

그런데 이 공식이 나오게 된 이론적 배경이 흥미롭다. E = mc2 아인슈타인 공식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를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법칙이라고 말한다. 질량과 에너지는 하나이고 가시적인 물질과 비가시적인 에너지가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200년 전에 이미 화학자인 라부아지에에 의해서 형성되었었다. 이것이 바로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20년 동안 하루 6시간 이상을 금속의 녹이 나는 실험 관찰에 몰두하면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녹이 슬기 이전의 금속과 녹이 난 후의 금속의 질량을 정밀한 저울을 통해서 비교하였다. 녹이 스는 현상은 금속 산화현상으로서 일종의 화학반응이다. 금속이 녹이 슬면 슬수록 그 원래의 금속의 질량은 당연히 줄어 들 것이다. 그러나 녹이 슬면서 나오는 산화열을 고려하고, 녹의 질량 그리고 남아 있는 금속의 질량을 합하면 원래의 금속 질량과 같다는 실험값을 얻어내었다. 결국 화학반응 이전과 반응과정 이후의 전체 질량의 값은 같다고 라부아지에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라부아지에의 생각을 이어 받았고, 에너지가 보존되는 체계를 실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광대한 우주 영역에 펼쳐 놓았다. 

에너지 보존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에너지가 없어지거나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 없이, 그 전체 총량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물질 체계에서 물질이 없어졌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체계로 옮겨진 것일 뿐이며, 새로이 생겼다는 것은 다른 체계에서 전이해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전이과정에서 물질이 전이되어지는 그러한 물질 형태는 가시적이고 부피를 지닌 질량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형태를 띄게 된다. 그래서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말한다. 그때 에너지 총량이 보존되는 체계는 국지적인 체계가 아니라 우주 총합적인 전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 총합적인 전체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지구 체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말하고 있지만 전체 우주계의 차원에서 본다면 생성되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장작이 타고 없어진다고 말하지만 원래의 장작과 장작이 타면서 발생하는 열과 재 그리고 남은 숯의 에너지를 합하면 원래 장작의 잠재 에너지 값과 같은 것이다. 그 화려하던 황제의 몸둥아리도 죽지 않는 것이 없으며, 죽으면 썩을 뿐이다. 사람이 죽고 썩어지면 그 사람은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원래 에너지의 값과 썩으면서 생긴 산화열, 그리고 그 살을 파먹은 벌레와 곰팡이의 신진대사 에너지 등을 모두 합하면 원래의 사람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썩고, (요구르트가) 발효하고, (식혜가) 삭고, (메주가) 띄워지고, 곰팡이 나고, 녹슬고, 불에 타며, 화학적인 산화반응에, E = mc2 의 과정을 통해 핵분열 하는 등등은 모두 같은 자연의 현상이며 단지 산화하는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물론 핵분열 과정은 좁은 의미의 산화과정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폐쇄계에서 일어날 때 물질이 전환되거나 소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전환과 소멸은 단지 에너지의 전이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에너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물질 세계는 생성되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단지 다양한 물질의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우주 연극의 배우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주라는 극장 객석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생성과 소멸에서 오는 인간의 집착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032 블랙홀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5월22일)

진공청소기는 압력차를 이용한 강한 흡입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쓰레기를 청소기 안으로 빨아들인다. 비슷한 원리로 중력의 의한 압력차가 있어서 지구상의 모든 물체들은 땅을 향해 떨어지기도 한다. 달은 지구보다 중력이 1/6 밖에 안되어 달 표면의 물체들은 지구의 가속도보다 1/6 정도밖에 안 되는 중력 가속도로 떨어진다. 그리고 물체를 표면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달의 중력권의 범위도 그 지름에 비례하여 지구의 1/6밖에 안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구보다 10배의 중력이 작용하는 행성이 있다면 그 행성의 중력권이 범위는 지름 비례하여 지구보다 10배 더 높고 떨어지는 가속도도 10배 빠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우주에는 초신성이라는 것이 있다. 초신성은 적어도 태양 질량의 10배 이상 되는 별이 그 수명을 다해 죽어 가는 일종의 대폭발이다. 대폭발을 하면서 그 별은 중성자 별과 블랙홀이라는 잔해로 변한다. 중성자 별은 반지름이 10km 정도이지만, 그 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1000억 배나 된다. 중력이 1000억 배라는 말은 그 크기에 비례하여 지구보다 1000억 배 더 높은 중력권의 범위를 가지며, 동시에 1000억 배 빠른 가속도를 갖고 중성자 별 표면으로 물체를 흡입하게 될 것이다. 1000억 배의 중력이라는 것은 말이 그렇지 상상을 초월하는 흡입력이다. 아마도 그 중성자 별 근처를 지나는 작은 별똥이나 아주 작은 우주 먼지까지도 남김 없이 빨아들이는 어마어마한 그런 강력한 중력의 진공청소기가 될 것이다.

블랙홀은 중성자 별 보다 훨씬 강한 중력을 갖는 것이어서 빛조차도 빨아들이고 마는 일종의 초고밀도의 작은 별이다. 고무 풍선이 바람을 자꾸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뿜지 않는다면 그 고무 풍선은 두 가지 형태로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는 고무 풍선이 늘어나 점점 더 커지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고무 풍선 표면이 단단하여 늘어나지는 않지만, 그 안의 공기 밀도가 엄청나게 커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블랙홀은 그 중에서 후자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래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은하계 범위 안의 우주 블랙홀은 빛까지도 흡입하는 강력한 중력아래서 질량을 갖는 모든 물질을 흡입함으로써 크기는 작아도 점점 더 밀도가 높은 방향으로, 어쩌면 무한의 밀도까지 진화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함께 쏘아 올린 벳포삭스 위성에서 1997년 12월 일회적으로 관측한 우주 감마선은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지구표면에서 관측될 수 없고 우주 공간에서만 관측가능한 그 우주 감마선이 지니는 의미는 초신성의 대폭발에서 생기는 에너지 방출량 갖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를 추정하게 하였다. 이 블랙홀은 중성자 별과 달리 폭발하여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별 안으로 급속히 빨아들여 거대한 중력을 만들어 낸다. 그 수축은 너무도 급속하여 빨려 들어가지 못한 많은 고온 가스가 확산하면서 주변의 우주 가스에 충돌되면서 막대한 충격파가 광속의 속도로 형성되기도 한다. 관찰된 일회성의 감마선은 그때 나오는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물질들이 한 점으로 수축하여 블랙홀이 되는데, 우주에는 이와 같은 블랙홀이 수없이 더 형성되고 있다고 천체물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블랙홀의 존재는 비록 완전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지구 인간에게 우주의 범위가 단순히 인간이 관측가능한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최근 들어 영국의 휠체어 물리학자인 스테판 호킹은 질량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뱉지 않는 우주적 기이 현상에 대하여 열역학 제일 법칙과 제이 법칙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웜홀의 존재를 상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웜홀로 이어지는 또 다른 우주는 이 우주와 전혀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우주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판명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주의 존재 양상이 지구가 위치한 한 모퉁이의 우주의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는 대부분의 천체물리학자들이 공감한다. 

시방세계에서 역시 우주는 모든 이에게 다 같은 우주가 아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수 없는 겁(劫)의 시간을 소요하는 우주 각각은 색법에 갇힌 중생들에게는 단견(斷見)의 잘려진 우주이지만. 부처의 눈에는 하나의 우주이기도 하다. 반산 스님이 이야기했듯이, 중생의 우주는 처마 지붕이 다 일 수 있지만, 부처의 청정 광명한 우주의 크기는 천 개의 태양과도 같다. 천년의 어둠을 한 순간에 밝게 해주는 것이 하나의 촛불이거늘, 천 개 태양의 우주의 크기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달리 관심을 둔다면 천 개의 태양이 비추인 길이지만 밤이 되면 어두워지고, 밤이 되어도 그 같은 길을 촛불 하나만 갖고 걸어가기도 한다. <끝>

 

033 물질의 끝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5월29일)

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는 2500년 전 이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물이라고 했다. 당시의 어떤 철학자는 불이라고 했다. 어쨌든 오늘의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유치한 답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질문이었으며 그 답 또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이전 사람들은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무슨 힘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 방식을 신화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세계가 거북이 등에 업혀 움직인다거나, 거인의 손으로 받쳐 들려진 것이라는 등의 설명을 신화적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그런 신화적 질문이 아니라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물질이 무엇인가 하는 과학적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시대의 획기적인 전환이였으며, 이로부터 서구철학과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탈레스에 이어 데모클리토스는 그 궁극적인 구성요인을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다는 뜻에서 아톰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러한 생각은 달턴이 근대적인 의미의 원자를 찾아내기까지 2000년 이상이나 서구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왔다. 

근대과학은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요소를 분자라고 했다. 18세기 말 화학자인 라부아지에가 등장하면서 물 분자가 산소와 탄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분자는 그보다 더 작은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물의 궁극적인 요소물질은 원자라는 생각이 이후 100년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1899년 러더포드는 방사선을 방출하는 우라늄이 두 가지의 방사선을 방출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중 한 방사선은 원자를 투과해야 하는데도 극소수의 방사선이 원자에서 튕겨 나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이런 방사선을 그는 알파선이라고 명명했다. 이 실험결과를 분석한 러더포드는 결국 알파 입자보다 무거운 그 무엇이 원자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과 충돌하여 튕겨져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무엇의 입자는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단단한 입자이며, 그것이 바로 원자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물질의 최종 구성요소가 원자가 아니라 이제는 전자와 원자핵이라는 결론으로 발전하였다.

러더포드의 발견은 소립자 연구를 현대 입자물리학의 무대위로 본격적으로 올려놓게 한 발단이 되었다. 이후 러더포드가 있었던 캐번디시 연구소의 젊은 연구자인 채드윅은 원자핵이 다시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체드윅은 이 발견으로 1935년 노벨상을 받았고, 이제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 최종 요소가 바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소립자들이 계속 발견되어 백여 개가 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수의 소립자들이 과연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기본 구성물질이 그 수에 있어서 자꾸 많아지면 그것들을 기본 구성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1964년 겔만과 츠바이크는 독자적으로 마지막 구성물질이라고 생각했던 양성자와 중성자가 그 보다 작은 쿼크라는 이름의 소립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는 6 종류의 쿼크와 전자를 포함한 6 종류의 렙톤이라는 기본입자가 물질 세계의 끝을 구성하는 입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소립자 발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문제는 이런 소립자 발견의 역사가 아니라 물질의 끝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단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극미極微의 단위이다. 극미는 가장 작다는 뜻에서 최세색最細色이라고 하는데 이는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최소단위로서 단순히 물질의 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空과 만날 수 있는 물질의 끝이다. 극미의 단위는 입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소립자처럼 당연히 감감적인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이처럼 극미가 소립자와 같이 최세색으로서 물질의 최소단위이면서도 소립자와 다른 점은 경험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연의 방식으로 극미의 단위들이 묶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미의 묶임을 불교에서는 인연의 취집聚集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바로 색온色蘊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불교의 물질 단위의 이해는 입자물리학처럼 단순히 물질세계에 대한 끝을 찾는 작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끝을 찾는 작업과 반드시 연결해야 한다. 서구사유에서는 물질의 끝과 마음의 끝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불교에서는 그 서로의 끝이 맞닿아 있다. 그것이 바로 공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극미는 아마도 앞으로 발견될 최고의 전자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혜안慧眼의 현미경을 갖고 있는 이라면 볼 수 있을 것 같다. <끝>

034 암흑물질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6월5일)

인력은 물체들 사이에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고 척력은 서로 미는 힘이다. 물체들 사이의 거리가 짧으면 그들 사이에서 인력이 작용할 것이다. 우주 공간에서는 이런 힘을 우주 중력이라고 한다. 우주 중력은 우주에 산재해 있는 별이나 미세한 우주입자와 같은 물질에 힘을 미친다. 그러나 이 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들과 함께 그리고 물질로부터 발생되는 힘이다. 쉽게 말해서 물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 물질이 다른 물질에 대하여 인력을 방사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개 이상의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동시적으로 그들 사이의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 물질들의 존재는 원천적으로 상호적 힘의 관계를 내포한다. 그래서 물질과 힘은 하나이다. 

예를 들어 우주 안에 신의주와 개성 그리고 부산이라는 물체가 있다고 치자. 신의주와 개성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고 있는데, 동시에 개성과 부산 사이에도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신의주가 개성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부산이 개성을 끌어당기는 인력보다 크다면 개성은 신의주로 다가가 충돌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라면 개성은 부산 쪽으로 충돌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거리 비례해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인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다면 개성은 현재 위치에서 중력의 적절한 비례관계를 유지한 채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물질들이 태평양 건너 무수히 많을 경우, 다시 말해서 그 물질들의 거리가 멀어 그 하나 하나가 큰 힘은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작은 힘들이 무한히 많다면 그 작은 힘의 합은 큰 힘이 되어 부산이나 개성이나 신의주가 모여 있는 공간과 반대의 외곽방향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물질들 사이의 간격은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개성과 신의주 사이에 혹은 개성과 부산 사이에 미세의 작은 물질들이 무수히 끼어 들어 있다면 그들 사이의 인력이 작용하여 신의주와 개성 그리고 부산은 결국 충돌하여 하나로 합쳐 질 수도 있다. 

말도 안될 것 같은 이런 예는 실제로 우주 공간에서 인류의 시간을 초월한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결국 우주 속의 뉴트리노와 같은 미세물질들이 존재한다면 그 물질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그 물질들의 밀도가 얼마나 되냐에 따라서 우주가 팽창하느냐 아니면 축소하느냐 하는 우주의 진화론적 역사가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미세물질이 실재로 존재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1933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 츠비키는 머리털자리 은하단을 조사하는 중, 은하가 따로따로 흩어지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운동이었다면 우주가 진화해온 150억년 동안 은하는 제멋대로 흩어지고 말아 은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오늘의 우주는 은하단을 가지고 있다. 결국 츠비키는 은하의 별들말고 대량의 어떤 물질이 존재하여 그 물질이 인력을 미쳐 은하단을 뭉치게 하는 인력을 방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불려지는 극미세 물질 개념의 시초였다. 

1995년 텔아비브 대학 골드위스 교수는 우주 대폭발 이후 이제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헬륨의 양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해석결과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에 의하면 암흑물질은 우주에 존재하는 (원리적으로)보이는 물질의 최소한 10배 이상이 되어야 현재 우주의 이동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 우주의 질량분포도에서 암흑물질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암흑물질의 존재량에 따라서 우주 밀도가 달라질 것이고, 우주밀도를 결정하는 암흑물질의 양과 분포도에 따라서 우주가 팽창할 것인지 아니면 수축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주밀도가 수축 임계치 보다 클 때 이 우주는 팽창하다가 나중에는 수축으로 돌아설 것이며, 우주밀도가 수축 임계치 보다 작을 때는 계속 팽창할 것이다. 

암흑물질은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우주의 진화론적 미래를 결정하는 최대 변수이다. 그런데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물론 우주물리학의 암흑물질과 비바사론의 空界色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우주진화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은 당장 보이는 것에만 매달려 번뇌의 틀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중생들에게 반성의 작은 씨앗을 주는 물리학적 지식이기도 하다. 유견(有見)과 유대(有對)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보이지 않는 삶의 끈들을 인연의 시나리오로 삼는 그런 무견(無見)과 무대(無對)의 세계를 헤아릴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끝>

 

 

035 정보사회와 불교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6월12일)

현대사회를 흔히 정보사회라고 말한다. 정보사회의 의미는 정확히 어떤 현상을 일러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우리 삶의 양식과 사회의 구조가 컴퓨터와 통신 그리고 뉴미디어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정보사회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지식의 영역을 확장시켜 놓았으며, 과거 전문가 집단만이 소유했던 지식의 빗장을 열어 놓아 대중으로 하여금 지식의 공유를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통신과 컴퓨터가 결합함으로써 직접적인 대면적 관계가 아닌 간접적인 비대면의 관계를 통한 정보교환 및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정보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수합방식을 뜻할 때가 더 많다. 급격한 산업화가 낳은 인구 과밀화와 통신의 발전으로 인해서 지식의 양산이 이루어지고 그 많은 지식을 개인의 관심에 따라 어떻게 분류하고 어떻게 종합하는가가 문제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화에 따른 지식의 의미나 지식의 양상이 아니라, 정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도구로 전락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어떤 집단이 이러한 정보의 특성을 가장 크게 자기의 이익으로 실현하고 있는가를 살핀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로 정보사회 속의 대중들이 이익을 가장 많이 실현하고 있는가, 지식 전문가 집단인가, 정보 마니아들인가, 아니면 국가기관인가?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집단보다 기업집단에서 정보의 특성을 가장 크게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하여 상품의 소비영역을 넓힘으로써 상업화의 전략이 정보의 특성을 규정하는 왜곡된 정보의 신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비대면 광고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식의 지적 재산권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소프트웨어 관련 국제기업들이다. 예를 들어 최근 한글 도메인 확장과 관련하여 볼 수 있듯이, 국제 인터넷주소 관리기구(ICANN)가 누리고 있는 장기적 이윤창출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과학과 산업화의 소산물인 컴퓨터는 영상매체와 통신 발전의 등에 업혀 복합 뉴미디어라는 새로운 상업주의의 칼자루를 만들어 놓았다. 그 칼자루를 누구든지 쥘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팽배해졌지만, 실제로 그 칼자루는 산업자본이 독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정보의 기능과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 내적인 문제만 다루어서는 안되며, 정보 외적인 사회/문화/과학/철학/정치의 총체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정보시대랍시고 멀티미디어나 컴퓨터산업 혹은 영상산업등의 산업화에 눈이 멀어, 정보사회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은 아주 미미한 편이다.

정보사회의 방향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의 건강함이 무엇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나가야 한다. 이 점에서 정보의 공공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오해와 주입된 선입관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소유자는 없다고 쉽게 말한다. 분명 인터넷은 폐쇄된 통신망과 달리 특정한 주관 시행자는 없다. 유형의 재화와 달리 무형의 인터넷은 소유의 개념이 다르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기업자본의 상혼이 이미 깊게 들어와 있다. 예를 들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대표적인 기업인 아이비엠과 마이크로소프트사는 80년대까지 불법복제를 눈감고 있다가 90년대 들어와 갑자기 지적 재산권 주장을 강하게 들고 나와 불법복제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도있게 시행하였다. 10년간이나 불법복제를 눈감아 오면서 세계 시장은 어느덧 그들만의 하드와 소프트웨어로 뒤 덮혀진 상태이고, 이제는 그들의 제품을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독과점 지배가 용이해졌다. 결국 그들의 고도 전략의 결과는 이미 특정기업의 개인 컴퓨터와 프로그램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상업화의 극치로 연결되었다. 

초기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인간소외의 문제가 커다란 문명위기로 등장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은 기계에 의한 소외가 아닌 정보에 의한 소외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더 큰 문명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정보제국주의의 신호탄에 이어 정보제국주의에 길들이기 훈련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불교는 전통 동양종교 혹은 과거의 동양사상이나 철학의 한 구석으로 밀려 날 수 없다. 불교는 현대화된 정보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절한 대응과 더불어 미래사회에 대한 삶의 방향제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에 의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나침반을 보임으로써,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삶의 현장에 불교의 모습이 다시 드러날 수 있다. <끝>

 

 

036 관용과 공존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6월19일)

이 연재는 <불교와 과학>이라는 제호아래 자연과학의 주제들이 불교의 우주관이나 석존의 살아 있는 음성과 어떻게 관련성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공간이다. 그런데 한 호흡을 늦추어 왜 굳이 불교와 과학을 비교하거나 그 상관성을 찾으려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불교와 과학은 처음부터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범주일지도 모른다. 불교는 근원적으로 우주에 대한 언어에 제한됨 없는 존재인식과 삶에 대한 행위인식의 범주이지만 과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언어영역 내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와 과학을 직접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범주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같은 공간에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둘이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양자색역학에서 입자들 사이의 비결정론적인 인과율이나 카오스 현상의 피드백 적인 인과율을 연기론과 직접 비교하는 일은 그것들 사이의 외형적인 유사성이 아무리 많다하여도 성급한 비교작업이거나 아니면 불교의 포괄적 위대성을 과대 포장하여 보여주려는 억지춘향일 수 있다. 불교는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식의 범주에서 포괄하려는 것이기보다는, 과학적 세계관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과학문명의 병리적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 광대한 관용의 눈을 갖고 과학을 대할 수 있다.

서구에서 중세 이후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배척적인 관계였다가 근대 중반 이후 겨우 화해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처럼 과학과 기독교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지점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구 정신사에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사상적 기둥이 되어 왔다. 배척에서 화해로 가는 서구 정신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시민 사회로 전환하는 서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들 사이의 화해를 성립시키는 반면에 제국주의의 발길을 신대륙에 돌려놓아 서구와 비서구라는 인종적 배척의 관계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런 배척의 역사는 엄밀히 말해서 과학보다는 권력화된 중세 교회에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불교는 처음부터 관용의 역사를 지닌다. 그래서 배척보다는 화해를 또한 배제보다는 공존을 그 깨침의 방법론으로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불교는 기독교와 비교해서 종교적 특성이 약하고 철학에 가깝다고 한다. 밖에 존재하는 유일신이 아니라서 혹은 종말이라는 시점이 없어서 신앙과 포교의 특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서구 중심적인 잣대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불교는 외재하는 유일신과 종말이 없기 때문에 가장 종교적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자비와 관용이라는 불교의 우주론적 미소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김용옥의 노자와 논어 방송강의를 예로 들어본다. 개인적으로 김용옥 선생 강의 내용에 대하여 깊은 우려의 마음을 갖기도 했다. 마침 불교 신자 한 분이 <도올에게 던지는 사자후>라는 제목으로 김용옥 선생 강의를 반박하는 비판서를 출판하여 불교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보고 나는 김용옥보다 더 큰 실망을 숨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 기독교에서 교회 이단자를 마녀사냥 했듯이, 김용옥을 불교와 화해할 수 없는 배불주의자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들어오기까지 노자와 공자 나아가 하다 못해 샤마니즘까지 관용과 화해를 나누어 왔다는 사실을 그 책의 저자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김용옥을 불교의 가면을 쓴 유교 전파자로만 단정지었다. 더더욱 문제는 불교방송에서 아무런 학문적인 필터 장치 없이 그 저자만의 이야기를 방영했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가 말한 배척의 근거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배척은 중세기독교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우려가 있기도 하다. 김용옥의 불교 이해는 옳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훼불은 결코 될 수 없다. 김용옥의 비교연구가 지나친 점이 분명하지만, 그를 훼불로 간주한다면, <종교와 철학은 하나다>라는 제목으로 金輪 제9호에 실린 서양철학과 불교의 연대성을 강조하신 청화큰스님의 법문 내용도 훼불이 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결국 김용옥의 강의를 훼불로 단정짓고 만다면, 불교는 너무 자기 울타리에 갇혀버리는 비관용의 종교가 될 수 있다. 

성씨혁명을 일으킨 조선이 불교를 배척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조선을 배척하지 않고 관용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의 불교가 있다. 관용은 다른 것에 대하여 문을 닫아버리는 폐쇄를 거부하며 다양성을 지향한다. 불교가 과학을 포용하는 이유는 과학적 성과물의 지식이 불교적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불교와 과학이 상식적 앎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과학은 상식적 앎에서 체계적 앎으로 외형만 바뀔 뿐이지만, 불교는 앎의 관용을 통하여 상식적 앎에서부터 그것을 뛰어넘는 우주적 앎을 보고 있는 것이다. <끝>

 

 

 

 

 

 

037 마음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6월27일)

마음이 무엇인지 묻는 순간에 벌써 그 마음은 이미 대상화된 마음이어서 마음의 본연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대상화되어서는 안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상화했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이다. 선풍기가 무엇이고, 책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이 원래 대상화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계량적으로라도 설명할 수 있으나, 내가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할 때 가장 어렵듯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답하기가 가장 어렵기도 하다. 법구경에서 말하듯이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거늘, 근본을 묻는 일은 그것이 원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질문하기는 쉬우나 답하기는 어렵다. 

서구에서 마음을 가장 많이 이야기한 이가 바로 철학자 데카르트였다. 그에게 마음이란 생각함을 낳는 어떤 실체인데 마음의 실체를 직접 알기는 어려우나,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데카르트에게서도 마음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리 알기 어려워도 서양 사람들이 생각한 마음은 결국 대상화된 마음이며, 데카르트는 이를 실체라고 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생각한 실체로서의 마음에는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실체이듯 신체 역시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라고 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인데, 마음과 신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라면 그 두 실체는 서로 독립적이고 따라서 서로의 연관성이 전혀 없게 된다. 쉽게 말해서 마음먹는 대로 몸이 따라 행동하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고민고민하다가 나름대로의 묘안을 내놓았다. 즉 해부학적으로 뒷머리 아래 부분에 송과선이라는 것이 있어, 마음이 몸의 행동을 지령하는 연결 부위를 바로 그 송과선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이런 데카르트의 제안은 말도 안 되는 것이어서 곧 폐기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이 인간의 해부학적 두뇌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런 생각 즉 마음의 원천이 곧 두뇌라는 생각이 서양에서는 지배적으로 되어 버렸다. 이후 기계론적인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현대 생물학이 발달하면서 뇌에 대한 연구가 증폭되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서도 뇌는 인체의 마지막 블랙박스라고 할 정도로 가장 알기 어렵고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보공학과 유전공학 분야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결국 뇌 공학으로 미래 기술이 집중될 것이라는 예측을 모두가 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현재의 인공지능 과학으로는 엄두도 못 낼 신비의 영역이며, 엄청난 수의 신경 세포로 구성된 뇌 구조의 네트워크는 수학적인 기능 이상의 다중적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140억 개의 신경 세포와 1300억 개 정도의(숫자는 추정치임) 글리어 세포들은 서로간의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면서 더욱더 활성화되어 간다. 그 신호에 의한 정보 유출입은 시냅스라고 하는 세포 연결 부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의 신경 세포는 많을 때는 수십만 개의 시냅스를 갖고 있어서 그들의 정보 유출입 과정이 간단히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서구의 과학과 철학은 마음을 대상화하여 인식하려 했고, 마음의 처소를 뇌라고 보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유형적인 물질과 달라 마음과 신체 혹은 정신과 물질을 같은 범주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난관은 데카르트를 포함한 서구의 철학자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루는 최근의 서구철학은 마음을 대상화하기보다는 무엇을 지향하는 어떤 지향성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서구 인식론은 마음을 대상화시킴으로써 지식의 영역 안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혀 있다. 

마음은 실체로서의 마음이나 대상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성과 반응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아니라 작용일 뿐이라는 점이다. 작용으로서의 마음은 三界를 만들기도 하고 緣分을 만들기도 한다. 삼계를 만드는 마음은 識이나 빈나나vinnana가 될 수 있고, 연분을 만드는 마음은 意manas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될 수 있지만, 또한 그런 만큼 흔들리기 쉽고 혼탁해질 수 있으며 미묘하고 들떠있고 찌푸려 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와 원망 노여움과 두려움 그리고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을 무시하거나 단칼에 잘라버림으로써 마음을 평정하게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아니라 작용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망의 마음을 달래고 그런 마음과 실랑이하며 나는 왜 이렇게 이런 헛된 마음밖에 가질 수 없나 라는 자기괴리와 자신의 허약함을 느끼면서 그 가운데서도 그러면 안되지 하며 다시 마음의 작용을 분발하고, 항상 새롭게 물결치는 마음의 작용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씩 평정한 마음을 찾아가는 일이 오히려 심성청정心性淸淨의 불성에 겨우 다가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끝>

038 시간과 함께 하는 물질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7월4일)

근대 서양철학과 과학에서는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고대 그리스 이후 다시 재기되었다.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었다. 하나는 어떤 물질을 바로 그 물질이게끔 하는 물질의 기체基體로서 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물질이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성질인 속성屬性으로 답하는 방식이다. 기체는 감각적으로 잡혀지는 대상이 아닌 반면에, 속성은 감각적인 무엇이다. 감각의 대상이 아닌 기체를 언급하는 일은 아무래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추상적인 것은 우리 자연 안에 없다. 원래 자연은 모두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대상뿐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자연을 다루는 학문을 고대 그리스에서는 피직physic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경험의 자연을 너머 추상적이고 저 하늘 세계에만 존재할 것 같은 대상을 다루는 학문을 피직 그 다음 너머 있다고 해서 메타피직meta-physic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해서 말한다.

19세기 말 까지도 자연철학이라는 용어가 오늘의 과학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피직의 세계를 다루는 자연철학과 메타피직의 세계를 다루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물질을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었다. 앞에서 기체의 설명 방식과 속성의 설명 방식을 나눈 이유가 바로 형이상학은 추상적인 물질의 기체를 다루는 한편 자연철학 즉 과학은 감각적인 물질의 속성을 다루는 것이 그 주요한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철학과 과학의 경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었다. 

이렇게 서구의 과학이 문제삼는 물질의 탐구는 경험적 대상으로서의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속성 즉 물질의 성질이 인간의 인식 범주 안에 모두 포섭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서구인이 생각한 인식의 범주란 대개 대상이 계량화 될 수 있을 경우를 인식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계량화될 수 없는 지식은 진정한 인식이 아니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물질적 대상이 있다고 하자. 그 물질은 일정한 면적과 부피와 무게를 갖으며, 색깔과 소리, 냄새 그리고 어떤 경우는 맛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면적과 부피와 무게는 수數로써 표현할 수 있는 반면에, 색깔과 냄새 그리고 맛 등은 수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물질의 성질은 수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과 수로 표현할 수 없는 성질로 구분된다고 본 것이 서구 근대인의 생각이었다. 근대과학의 문을 열게 한 갈릴레오와 그 완성을 이룬 뉴턴, 그리고 서구 경험론 철학자인 록크는 한결같이 그런 구분을 중시하여 전자의 성질과 후자의 성질을 나누었으며, 전자를 제일차 성질 그리고 후자를 제이차 성질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제일차 성질과 제이차 성질을 나눈 기준은 오로지 물질의 성질을 수학적으로 표현가능한가 혹은 불가능한가라는 차이에 두었다. 그리고 일차 성질만이 물질의 근원적인 속성이 될 수 있으며 이차 성질은 물질의 부차적인 속성이라고 보았다. 최근 들어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과거 이차 성질이었던 색깔과 소리는 옹스트럼Ao 이라는 단위를 통해서 수학적으로 표현이 가능해 졌고, 냄새나 맛 등까지도 수학적 표현이 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근대인이 생각했던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수학적인 계량화 여부가 물질의 인식을 가름하는 기준이 서구과학과 철학의 기본줄기였으며 아직도 그런 기준은 유효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질을 보는 관심은 계량화의 조건만이 모두는 아니다.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며 항상 변화 속에 있다는 점에서 서구식의 계량화라는 조건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불교에서는 물질의 무상성無常性을 깨닫는 일이 그 시작과 끝이라고 보아도 좋다. 서구의 물질관에서 볼 때, 물질은 시간과 독립된 기체와 속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서구 특히 과학의 물질관은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변화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물질을 수학화하는 서구과학의 초점은 변화하는 물질의 변이과정을 정지상태로 억지로 이성을 통하여 바꾸어 놓는 추상화에 두고 있을 뿐이다. 마치 변화하는 운동과정을 사진기의 정지된 한 컷으로 찍어 놓고서, 그것이 바로 물질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교 특히 구사론에서는 물질을 시간과 분리시켜 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물질의 成住壞空이 있으며, 이런 물질의 변화를 인식하는 일은 한 컷의 사진필름을 보는 일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물질의 동영상을 한 순간에 깨닫는 일과 비유될 수 있다. 식물도감에 나오는 할미꽃의 그림은 할미꽃의 모든 변화를 안고 가는 생태학적 생생함을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교의 무위법을 직접 들어가지 전에 먼저 시간과 얽매어져 있는 물질의 유위법을 아는 일, 그것은 무위의 진리를 차근차근 깨달아 가는 소박한 입문이기도 하다. <끝>

 

039 공간과 물체는 하나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7월10일)

  바람 바람 
  바람은 서 있는 놈이 없으면 
  바람도 아니야

이 시는 우리 시대 생명사상의 스승이셨던 故 無爲堂 장일순 선생의 화폭 안에 바람에 흔들리는 난초와 함께 쓰여진 글그림이다. 그 짧은 시구 안에서 우리는 광대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고뇌를 엿보게 된다. 

인생은 고뇌라고 한다. 그러나 고뇌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겨우 고뇌를 깨쳐 가는 가운데 비로소 삶의 흔적을 알게 된다. 그 사람 앞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물이 아예 없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급류의 저 강을 건너야만 하는 그의 절실함도 없을 것 같다. 해와 달의 지고 뜸이 없었다면, 늙음과 태어남이 없었다면 시간의 변화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변화 그 자체를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구름과 천둥, 번개가 없다면 하늘이 무슨 필요가 있을지, 하늘이 무엇일까라는 호기심도 없었을 것이다. 달빛과 별빛이 있어서 밤이 있고, 어두움과 무서움이 있어서, 어렸을 적 그런 밤이 무서워 군밤 까먹으며 도깨비 귀신 이야기에 이부자리 소동도 일어났다. 

모진 바람 앞에 서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뼘이 갈라지는 아픔이 있었기에 비로소 바람의 존재가 다가온다. 세상살이 또한 번뇌와 갈등이 아예 없었다면 그것을 깨닫거나 깨우칠 일도 없게 된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사 속에서 "아 그거였구나!" 라는 느낌이 올 때 이미 실패와 좌절을 격은 후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생활 속의 작은 깨우침도 없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젊은 여인을 보고 겨우 눌러 놓은 색정과 숨겨진 하찮은 물욕이 불끈 뛰쳐 나오려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과 좌절을 할게 아니라,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깨달음과 깨우침으로 가려는 추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면 더 좋다. 그래서 원래 깨달음을 가진 이보다 깨달음의 길을 나서야겠다는 서원의 깨달음을 갖는 이가 더 아름다운 구도자일 수 있다. 비록 완전한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깨달음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물체들이 없다면 공간의 존재와 의미를 알 수 없다. 자연과학에서 공간은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부피, 즉 철학용어로는 延長性으로 설명가능하다. 그러자니 연장성을 지니는 물체가 없다면 공간도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공간을 물체의 경험적 파악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순수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공간의 직관성은 물체가 없으면 그 의미도 사라진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도 공간과 물체의 상관성이 매우 중시되고 있다. 그 상관성의 기본은 물체가 있을 경우에만 중력을 낳는 공간의 존재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과학이나 서구철학에서 공간과 물체는 여전히 서로 다른 두 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람은 그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사람이 있어서 바람일 수 있다. 공간은 물체가 있어서 공간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바람과 서 있는 사람이 둘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 먼저이다. 마찬가지로 공간과 물체가 둘이 아니다. 물체는 극미의 물질 원천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원리는 바로 인연의 끈이다. 서로 다른 인연에 따라 동일한 물질 원천들이 다른 물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윤회의 사슬이 이어지니, 각양의 물체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하나이다. 질적으로 동일한 물질 원천들이 모이면 각양의 물체가 되고 흩어지면 공간이 될 뿐이다. 그래서 공간과 물체는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기 언덕 위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그 소나무는 소나무이지만 그 소나무를 물질 원천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 나눠진 것을 다시 佛性의 인연을 통해서 法身으로 재구성 할 수 있다면 그 소나무는 곧 법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추론은 이미 起信論에서 설파되었고 반야의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논리를 떠나서 이러한 변화의 깨달음 혹은 무상의 깨달음이야말로 바로 일상사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앞서 말한 색정과 물욕 역시 무조건 버리고자만 한다면 계속 따라 붙을 뿐이니, 고뇌 없는 깨우침은 없으며, 시행착오 없는 구도는 없을 것 같다. 석존의 깨달음을 거울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한낱 시름에 지나지 않는 욕정에 빠짐과 벗어남이 하나라는 세간의 인연 구조를 알 수 있다면 삶의 깨우침으로 가는 길이 더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

 

040 단순 형질 유전의 환상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7월18일)

중앙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 하나 있는데, 겸형 적혈구 빈혈증이라 불리는 일종의 유전병이다. 이 빈혈증은 어떤 유전자 혈액 단백질의 돌연변이로 생기는 것으로 이미 알려졌다. 이 돌연변이체는 혈액에서 산소를 날라다 주는 헤모글로빈의 능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세포 조직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게 되어 강한 빈혈 증세를 일으킨다. 어린이 뇌에 산소 공급을 원활히 해주지 못하여 치명적인 뇌졸중에 걸리고, 살아 남은 어른이라도 심장병이나 성장 저해 현상 등 인체 손상이 매우 큰 유전병이다.

이 유전병의 원인은 특정하고 단일한 유전자의 변형 때문이다. 이렇게 한 특정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유발시키는 유전의 현상을 "단순 형질의 유전"이라고 부른다. 단순 형질의 유전은 한 유전자가 하나의 단백질을 발현시키고, 그 단백질은 한 가지 특정 형질을 발현시키는 경우를 일러 말하고 있다. 단순 형질의 유전 이야기를 여기서 쓴 이유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연구결과가 뉴스거리로 떠들썩하게 나온 요즘 모든지 한 가지 형질이나 질병의 원인이 특정 단일 유전자에 있을 것이라는 뜬구름 잡는 생명공학 기술의 환상이나 과학적 신화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특정 단일 유전자가 특정 형질이나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생각을 한마디로 말하면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최근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환상은 유전자 결정론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쇠, 비만 혹은 두뇌 아이큐나 심장병 등의 특정 형질을 유발하거나 조절하는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여 그 특정 유전자의 DNA 구조의 암호만 밝힐 수 있다면 모든 인간 생명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과학기술이 특정 형질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환상이 바로 유전자 결정론이다. 

물론 이미 40년 전에 발견한 겸형 적혈구 빈혈증은 그 유전 메커니즘이 매우 간단한 "단순 형질의 유전"의 한 임상사례로서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의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인간의 전체 형질 중에서 아주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조차도 사실은 그렇게 간단히 유전자 결정론의 한 사례로 보기 어렵다. 이 빈혈증은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로 발병하는데, 이 지역은 원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이다. 아직도 말라리아는 전지구로 볼 때, 해마다 2억에서 3억 명 정도의 환자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그 중에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겸형 적혈구 유전체를 지닌 사람들은 말라리아 병원충에 대하여 강한 저항력은 나타내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특정 유전 형질은 아버지의 유전체와 어머니의 유전체 반반씩 나눠 갖고 있다. 그 반쪽의 두 유전체가 모두가 겸형 적혈구 유전체일 경우에만 빈혈증 유전병이 발병한다. 한 쪽만 겸형 적혈구인 경우는 빈혈증 발병이 없고 그 대신 예방접종 없이도 그 무서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된다. 참으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아프리카의 거센 풍토병에도 다 살수 있을 만한 자연환경과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결코 인간의 현대 생명공학의 신화인 유전자 결정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순전히 과학이론으로만 따진다면 겸형 적혈구 빈혈증을 일으키는 유전체를 소유한 사람들이 강한 질병 증세 때문에 빨리 사망하게 된다면, 이론적으로는 그런 유전체 소유 환자들이 줄어들게 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질병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병이 없어진다면 아마도 말라리아 질병은 더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고 끝내는 빈혈증이 아니라 말라리아 때문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다 죽어 없어지거나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살 수 없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살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 갈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다. 유전자는 그렇게 결정론적이고 단순히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 형질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겸형 적혈구 빈혈증조차도 이럴 진데 다른 노쇠현상, 어떤 유전질병들 등등 대부분의 형질을 나타내는 복합 유전체들은 유전체끼리의 내부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유전체와 외부 환경과의 섭동작용의 결과로 표현형질이 드러난다. 그 내적인 상호작용과 외적인 섭동작용의 결과는 그렇게 단순히 일의一意적인 과학적 인과작용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의 게놈 프로젝트와 관련된 생명공학은 모든 유전자 암호를 다 풀 수 있다는 유전자 결정론에 근거한 기술만능주의의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아마도 불교의 인과관계를 몸으로 익히고 있는 과학자라면 혹은 그런 시민이라면 그렇게 단순하고 일의적인 결정론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과학뉴스 토픽의 속임수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끝>

041 있을만 하니까 있을 뿐이다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7월24일)

192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색인종과 빈민 유럽인들이 폭증하자, 미국 정부는 앵글로-색슨계가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를 노골화하면서 우생학적 차별을 전제로 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이민제한법 이전인 1911년에서 1931년까지 미국은 30개 주에서 정신박약인의 강제불임법이 법제화되어 있었다. 이런 악법은 60년대 들어와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버지니아 주에서는 70년대까지 강제 불임시술을 강행했다. 이렇게 미국에서만 1910년대부터 25년간 10만 명 이상의 정신박약인들이 불임시술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도 그러했고 스웨덴은 6만 명에 이르며, 악명 높았던 독일은 40만 명 이상을 불임시켰고 나중에 그 대부분을 학살하였다. 

1997년 체세포 복제를 통한 돌리양의 탄생은 인간복제의 미래를 꿈꾸는 많은 과학 신봉자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다. 체세포 복제란 기존의 육종학자들이 해 왔던 생식세포 복제와 달리 손오공의 머리 한 올을 입김으로 불어서 수많은 동일한 손오공을 만든다는 이야기와 원리적으로는 같다. 이런 유전공학의 성과는 결국 과연 '내가 누구인가'라는 극단적인 자아 정체성의 철학적 문제가 제기 될 수 있으며, 그에 앞서 실용화 단계에서 사회적 책임의 혼란을 유발할 수 잇는 생명윤리의 문제가 심각해 질 수도 있다. 과거 우생학이 가져다준 사회 윤리의 괴멸은 기본적으로 생식세포의 변형을 통한 과학의 무책임성에 있었지만, 이제 체세포의 인위적인 교체를 시도하는 유전공학은 미래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생명윤리의 괴멸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32만개의 염기서열 구조의 암호를 하나 하나씩 풀어가면서 불치의 인간 질병을 치료 예방할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을 생각하면 분명히 유전공학의 과학적 성과를 인정하고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그러한 과학적 성과들이 순수한 목적에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목적으로 도용된 역사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다. 그래서 인간복제 혹은 신 괴물 창조의 이종간 교배와 같은 우려할 만한 상황들이 현대 유전공학의 결과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주의의 농락에 과학적 성과들이 오용되는 사례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벌써 유전자 암호 해독 연구를 전담하는 대규모 사기업이 나왔고, 그들의 연구결과를 돈 받고 팔고 사는 행위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문에서 볼 수 있었다. 

유전공학의 성과들이 현실에 응용될 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너무 확연하게, 그리고 너무 이기주의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논에 난 피는 벼에 대해서 나쁜 것이지만 전체 생물 생태계에서는 피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논의 피는 전체 생태계의 입장에서 볼 때, 좋고 나쁘다는 인간의 가치평가를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서구사에서 보았듯이 우생학적인 편견은 좋고 나쁘다는 가치평가를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적인 기준에서 내려졌다는 것을 보면서, 인간사회의 역사적 모순들이 반복될 수 있는 과학적 가능성들을 다시 한번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새끼 돼지 저금통의 역사는 미국 캔사스 주에 살았던 한 어린아이가 어떤 한샘병(나병) 환자를 위해 작은 동전을 모으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나치가 혹독하게 다룬 정신박약인이나 한샘병 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우생학적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감으로써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을 갖게 하는, 한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조화의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똥은 더럽지만 땅을 기름지게 하며, 구름은 어둡지만 생명의 비를 내려준다. 곰팡이는 균을 퍼트리지만 모든 것을 썩혀 깨끗하게 해준다. 지렁이는 징그럽지만 중금속을 분해하여 흙을 살아나게 한다. 양귀비꽃은 그렇게 매혹적이지만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킨다. 산소가 없다면 숨을 못 쉬어 곧 죽게 되지만 그 산소가 바로 세포의 노화를 가져다 준다. 잡초라고 해서 다 뽑아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밥상 위의 맛깔 나는 씀바귀와 쇠비름이었다. 오존이 대기권에 있으면 우리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생명의 차양막이 되지만, 그것이 땅 근처에 있으면 치명적인 광화학 산화제 오염물질이 된다. 사랑니도 다 있을 만 하니까 있는 것이고, 배속의 대장균도 다 있을 만 하니까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쁘다는 것은 나의 이기적 기준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배제의 우생학이 아니라 공존의 생태학이 필요하다. 이렇게 지금까지 말하고 보니 전부 불교의 이야기를 대신 한 것 같다. <끝>

 

042 이분법적 경계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7월31일)

사이언스science라는 말을 번역한 과학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번역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좋은 번역이다. 원래 사이언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진리추구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분류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철학과니 사학과니 하는 과科나, 생물을 분류하는 종강목 다음의 과科라는 말이나 다 분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를 찾는 것인데, 진리를 찾는 그 방법이란 눈에 보이고 지각가능한 자연계의 사물들을 비슷한 것끼리 모으고 다른 것과는 다르게 분류하는 데서부터 진리가 찾아진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같은 것과 비슷한 것, 그리고 다른 것을 구분하는 정확한 눈을 가져야 했다. 

어쨌든 과학은 지각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지각된 것끼리 모으고 나눈 다음에 그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지각되는 개별 사물과 달리 추상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추상적인 이름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구의 과학과 철학은 그 이름이 개별 사물보다 앞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철학적 언급을 한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이었고, 그의 철학적 주장들을 묶어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 서구의 과학과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의 실재론 철학은 서구사상사에서 가장 큰 기둥 구실을 해 왔다. 

예를 들어보자.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대포가 날아가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개별 현상들을 포괄하는 법칙을 중력법칙이라고 말한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은 그 자체로 과학이 될 수 없지만, 그런 유사한 현상들을 묶어서 그들의 공통점을 뽑아내어 그것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중력법칙이며, 그 법칙은 과학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서구과학은 그런 법칙이 단순히 현상들을 설명하는 수학식이 아니라, 이 법칙세계에 실재하는 선험적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미로의 탈출구가 있기 때문에 그 미로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법칙이 먼저 실재하기 때문에 그 법칙을 찾아 나서는 과학의 탐구행위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법칙의 세계만을 오로지 실재하는 세계로 보았고, 개별자들의 세계는 현상적일 뿐이며 실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은 구체적이고 지각 가능한 개별자에서 출발하지만 그 궁극은 추상적인 법칙의 발견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은 감각대상의 탐구학이면서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형이상학이기도 하다. 이러한 서구 과학과 나란히 철학은 2000여 년 이상이나 실재론 논쟁을 해 왔다. 실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엄격히 분리하여 이원론의 철학적 구도가 자리잡았다. 진리의 위상을 실재계에만 부여하여, 현상은 실재의 그림자 일뿐이라는 이원론의 구도는 객관과 주관, 나와 너, 법칙과 개체,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 자연과 인간 나아가 하늘과 땅과 같이 모든 것을 엄격히 둘로 구획하는 이분법적 경계를 형성해 놓았다. 

이분법적 경계는 데카르트와 칸트에 와서 더 단단히 굳어져 서구 사유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구도를 인간과 바바리안이라는 인위적인 틀에 적용하여 그들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고 먼 대륙으로부터 착취의 자본을 쌓아 왔다. 제국주의와 함께 서구 산업혁명은 서구인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 주었지만, 인간의 소외와 환경의 파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이는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철학적 원인으로까지 인식되었다. 

한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동양은 서양으로부터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방어기제와 대안을 찾는데 급급하였다. 중국의 경우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들고 나와 서구의 힘을 선별적으로 수용/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熊十力(1885-1968)이라는 불교학자는 서구사상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중국의 유식론을 반성하는 대응책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때 웅십력은 전통의 유식론을 서구의 이분법적 구도와 비슷하게 간주하였다. 그 주장의 요점은 유식론이 본체와 현상을 구획하는 이분법적 구도를 지니고 있어서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웅십력의 해석, 즉 본체를 진여의 세계로 보고 현상을 허망함으로 보는 이분법적 해석은 그 이후로도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어, 일본의 한편에서는 불교를 서구 시각적인 회의주의 철학으로 간주하는 버릇을 들게 되었다. 우리도 이런 잘못된 불교 이해를 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다. 이는 과학에서 자연계의 현상과 법칙의 이분법 체계를 그대로 불교에서 단절된 의식의 假幻과 연기의 일체 간의 관계에다 비교한 오해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는 현실 세계와 쉽게 단절되고 은밀한 비전에 그칠 수 있으며, 자기방어적 종교에 갇힐 수도 있다. 불교는 이 세계가 단순히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

043 色을 뛰어 넘어 

출처 :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 jdchoi@mail.sangji.ac.kr

(2001년8월13일)

물질 만능주의와 과학과 기술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구실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라는 토론을 많이 한다. 과학은 눈에 보이거나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첨단의 검측기를 통해서 원리적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을 다루는 반면에 불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차이는 하나는 인간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욕심을 잠재울 수 있는 깨달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데 있다. 욕심을 없앤다는 것은 이미 욕심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인간에게서 집착과 욕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런 욕심을 없애야 되겠다는 발원조차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원래부터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라는 철학적 논쟁이 따르기도 했다. 

생물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욕심을 인류의 가치관에서 탈피한 생물학적 조건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한 생명체의 욕심은 그 생명체가 생명성을 유지하고 존속하려는 물리적 대사작용의 한 과정으로 환원시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은 인간의 욕심을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런 과학적 사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욕심들을 강제적으로 조정하고 상호 계약을 통해서 분배하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런 생각은 서구사회에서 법과 계약 관계가 발전하게 된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법과 사회적 계약관계가 아무리 우수해도 인간 사회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술문명사회가 보여준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종교가 강하게 요청되고 있다.

종교 중에서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기독교는 과학적 인간관에 어울리는 적극적 물질관을 갖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의 물질관은 물질을 인간의 후생이용에 맞게 지배하고 통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불교는 물질적 욕심을 버리라고 했지, 그 물질을 어떻게 지배하고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의 정도가 뚝 떨어져 있었다. 옛 사회나 지금의 과학세대나 할 것 없이 인간의 욕심이 가져다준 폐해는 상당할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리라는 명제가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 벗어나 철학적 의미를 담지하게 되었다. 색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끔 하기 위해서는 색色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어서空 굳이 그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색의 허구를 중생들에게 여실히 알려주어야 했다. 색이 공이라는 것은 중생의 차원에서 보면 색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생의 차원이라고 했지만, 사실 외국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보는 불교의 첫인상은 대부분 색의 허무함 나아가 불교 물질관의 빔(비어 있음)에 대한 강한 각인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 사회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지난 호에 쓴 중국 현대사회구성에서 불교의 허망함을 신랄하게 꼬집은 중국 철학자 웅십력의 불교 비판이나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그인 권근이나 정도전의 불교 비판 척불론은 그들의 비판이 다른 정치적 목적을 지녔거나 구국론적 변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물질을 무시하는 불교 일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오해는 사실 현대에서도 일부 지식인이나 일반인들에게도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다면 불교는 과학과 기술 사회가 가져다준 윤리적 병페와 문명적 소외의 구멍을 막아주는 일시적인 치유책은 될 수 있을지언정 다가오는 변화의 문명기를 앞장 서 끌고 갈 적극적인 삶의 희망이 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는 색이 공이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도 뒤집어 보면 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더불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색이 공이라는 생각은 사실 헤라클리투스나 괴테처럼 서구 철학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다. 그러나 공이 색이라는 말은 불교가 갖고 있는 특이하면서도 어려운 철학적 명제이기도 하다. 어렵다고 했지만 공의 색 됨은 실천불교의 아주 쉬운 단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식 수능고사 잘 보게 해달라는 기복 기도보다는 집에 가서 자식과 진정한 삶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 실천의 한 현장이다. 부모가 먼저 요행이나 헛튼 것을 바라지 않고 인과적이고 진지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물질의 복을 구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낳은 것이라는 생각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의 색 됨을 실천하는 빠른 길이기도 하다. 

불교도 어느 정도 과학적이어야 한다. 물론 불교 전체가 현대 과학기술을 좇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현실불교에 잠식되어 있는 기복주의나 그에 상응하는 주술주의, 권위주의, 의도된 허무주의 등을 거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과학적 사유' 라는 사다리를 써먹어야 한다. 불교는 단순히 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

 

001 물리학과 화엄사상 -“신과학”과 불교에 직접 관련된 자료- 

2002.01.19

가장 최근의 과학이론서 중 하나인 <신과학 산책-김재희 역 1994 김영사>에서 발췌한 내용에 소승이 불교적으로 연관되어지는 사상이나 단어를 생각나는대로 { }안에 넣어 보았습니다. 

앞으로 “과학불교”란 이름으로 몇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아래 내용들은 주로 화엄사상과 대비시켜 보았습니다. 좀 어려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하고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성 법> 

=중략= 
일상생활에서는 물질{色} 
이란 게 그냥 그렇게 어떤 재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지만, 원자의 세계에서는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원자는 양자로 이루어져 있는데{事事無碍} 
이 양자라는 것이 도무지 물질적인 재료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理事無碍} 

양자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거기에 물질적인 재질{色} 이 존재하지 않습니다.{色卽是空} 거기 존재하는 것은 쉬지 않고 서로 변형되는 역동적인 구조들과 끊임없는 에너지의 춤일 뿐입니다.{眞空妙有} 

현대물리학이 보여 주는 세계상은 옴살스럽고(holistic) 생태론적(ecological)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현상{諸行또는 因} 이 서로 얽히고 설켜{緣} 드러나는 이 세계상{實相} 에는 그들의 결속 관계 그리고 상호의존의 관계들이 두드러져 나타나며{相依相關, 緣起}, 그들 자체의 물리적 실재란 내부에 존재하는 ‘역동성’ 다시 말해 끊임없는 움직임과 활력 그것뿐입니다.{果또는 諸法無我} 

그런데 생명체, 즉 살아 있는 유기체를 이러한 관점에서 관찰하여 보면 이제 단순한 물리의 세계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상이 드러납니다. 
현대물리학의 개념을 훨씬 멀리까지 확장시키는 또 하나의 사상체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체계를 보통 ‘시스템이론(system theory)’이라고 칭합니다. 

시스템이론에서 드러나는 세계상은 아주 많은 관계로 이루어지지만 결코 낱낱으로 떼어 놓을 수는 없는 하나의 옴살스런 전체(wholeness)입니다.{重重無盡緣起} 

따라서 시스템이론에서는, 개개 구성요소 각각의 특성을 연구하는 대신 그들이 서로 얽혀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어 가는 원리의 기본적인 특성들을 강조합니다.{一卽一切多卽一} 

이러한 시스템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예는 자연에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미세한 박테리아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물체 각각의 개체마다 모두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꾸려 가는 시스템입니다.{一中一切多中一} 

예를 들어 모든 생명체의 최소단위라고 일컬어지는 세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으며{一微塵中含十方}, 생체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세포조직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가지 부속기관도 모두 그 나름으로 옴살스런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습니다.{一切塵中亦如是} 

인간의 두뇌는 이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스템의 예입니다. 시스템적인 측면은 사회현상의 모든 단위, 예컨대 한 가정이나 작은 모임과 같은 사회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무기물을 흡수하고 또 배출하는 다양한 생물체로 이루어진 생태계 전체{仍不雜亂隔別成} 도 역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 시스템은 모두 그 통째가 하나의 옴살스런 전체로서, 구성요소들이 얽히고 설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 특정한 기능이나 활동{理事冥然無分別} 을 영위해 나갑니다. 

=중략=.

 

002  양자론과 법성게 -신과학 이론의 핵심중 하나인 “양자론”과 불교사상(주로 법성게)-

2002.01.20

신과학 이론의 핵심중 하나인 “양자론”과 불교사상(주로 법성게)을 대비해 봅니다. {▶}안의 글은 역시 소승의 곁다리 입니다. 
<성 법> 

=중략= 

양자역학을 통해 자연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특이한 섭리는, 상호 연결이라는 것이 공간적인 접촉에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묘하고 깊고깊은 극미한 진성이여, 제자리 벗어나듯 세계를 나툼이여} 

이 말은 다시 말해 입자와 입자들이 혹은 장(場)과 같은 힘의 다른 요소와 입자들이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실제에 있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九世十世互相卽: 삼세와 구세십세 엉킨 듯 한덩인 듯} 

따라서 세계는 그저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을 때에만 힘의 작용이 성립하는 제각기 분리된 물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속에 하나있어} 

물질을 이루는 기본요소인 입자끼리 서로 이어져서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데에는 공간적인 거리의 제약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一卽一切多卽一: 하나곧 전체이고 전체곧 개체이다} 

이러한 개념은 벌써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식 사고방식{▶이것을 현대 물리학자들은 뉴튼(Newton)식 이분적(二分的) 사고, 즉 기계론식 세계관-흑백논리라고 비판합니다}과 엄청나게 어긋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인슈타인의 제창한 힘의 장에서도 공간이라는 요소는 임의로 삭제될 수 없었습니다. 

‘힘의 장’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실체인 입자{▶色}나 장{▶空間}이 밀집도에 의해 서로 접촉하거나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을 때에만 국부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지, 서로가 본래의 성질{▶本性, 自性}상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가상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양자이론의 세가지 특성이 기계론식 세계관에 어떻게 모순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모든 움직임이나 그들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종국적인 단위는 더 이상 쪼개어 지지 않는 양자(量子)입니다. 

다시 말해 삼라만상의 모든 요소는 항상 움직이고 서로 부딪치면서 작용을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 간다는 뜻입니다.{▶眞性甚深極微妙,不守自性隨緣成: 묘하고 깊고깊은 극미한 진성이여, 제자리 벗어나듯 세계를 나툼이여} 

따라서 이 세상은 서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각들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속에 하나있어, 하나곧 전체이고 전체곧 개체이다.} 

또한 양자역학에서는 이 세상을 관찰하는 자와 그가 관찰하는 이 세상, 이런식의 분리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경계 바탕이 한몸이니} 

고전물리학에서는 나라는 관찰자와 분리하여 존재하는 외적(外敵)세계가 따로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현대 물리학에서는 “뉴튼식”, 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 이분론이라 이미 배척되었다} 

나아가 외부세계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것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또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인간이라는 관찰자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특정한 입자의 현상에 대해 서술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양자론과 불교를 연결시키는 핵심이론 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상호작용 속에 있다는 다시말해 나의 마음이 물질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흔히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이 물리학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다음 계속되는 설명을 읽으시면 명확해집니다} 

일상생활과 같은 거시세계에서는 상상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원자의 미시세계에서는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산출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다시말해 관찰자가 둘 중 하나를 선택(개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량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알면 다른 하나는 전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mer Heisenberg)가 주창한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이 문제는 “아인쉬타인”까지도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수용하지 못 했었을 만큼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하는 난제였습니다}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알 수 있는 것이 물질이 본성이므로, 관찰자는 이 두가지 속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관찰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여야 합니다. 

측정할 속성을 관찰자가 선택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관찰자 스스로가 관찰대상의 속성을 함께 지어낸다는 뜻입니다.{▶理事冥然無分別: 있는듯 이사분별 그러나 걸림없고}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대상을 그대로, 즉 인간의 경험과 동떨어진 하나의 개관적 현실로 관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화엄의 法界緣起-四種法界를 양자역학에서 증명해 주고있습니다.} 

=중략= 

 

003  과학과 신비주의 -“시간과 공간” ‘ “마음과 물질”등에 관한 과학자의 견해-

2002.01.21

이번엔 총체적 이해를 위해 곁다리를 붙이지 않겠습니다. 
<성 법> 


=중략= 
신비가들은 3차원의 일상적인 현실을 쉽사리 초월하여 더 높은 차원의 경지로 오르는 체험을 하는데, 수리 아우로빈도(Sri Aurobindo : 1872~1950) 같은 성자는 명상적 체험을 통해 4차원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는 심오한 체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현실은 마치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에 따라 드러나는, 일상과는 다른 차원인 미시세계 혹은 거시세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물론 신비가와 물리학자가 ‘다른차원’이라는 표현을 할 때 세세한 내용까지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구체적으로는 서로 다른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비가들은 초월체험(3차원의 공간과 불가역(不可逆)의 시간이라는 환경의 조건에 제한되는 인간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능력, 즉 시각/미각/청각/후각/촉각의 경험세계를 뛰어넘는 광활한 감수성의 체험. 본서에 실린 그로프 편 ‘초월심리학’참조)을 통해 궁극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는 바와 첨단에 선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현대과학의 시공(時空)에 대한 이론적 견해는 너무나 유사합니다. 

예컨대 다양한 부류의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을 훑어보면 신비가들은 분명히 상대성원리에서 말하는 시공연속체의 속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시간과 공간은 서로가 완전히 결합하여 있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시간성을 배제한 공간이란 있을 수 없고, 공간성을 배제한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순수한 경험적 사실’이라고 불교의 석학 스즈키 다이체스(鈴木大拙 : 1870~1966) 박사는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히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를 소개하는 모든 교본에 표지제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과학에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상은 이처럼 철저히 생태론적인데, 이는 심각해지는 환경오염을 방지해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환경보호라는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생태론적인 세계관이 서구문명의 전통에서는 물론 현대과학에 의해 새롭게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는 원래 과학의 범주에 머무는 대상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도 생명이란 우주안에서 여러 차원의 계층과 주기적 변환을 그리며 발현하는 다채로운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직관적 인식과 체험을 통해서도 우주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며 결국은 한 몸을 이룬다는 시스템적이며 생태론적인 세계관의 근간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생태론적인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곧 우주와 내가 하나로 되는 그런 직관에 관통됨을 뜻합니다. 

내가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주와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그러한 강렬한 체험은 생태론적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체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생태론적인 마음상태란 종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라틴어에서는 종교라는 말이 ‘religio(結合)’, 부연해 본다면 인간과 신이 혹은 개인과 우주가 밀착되어 다시 결합한다는 뜻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서양어의 종교에 해당하는 ‘요가’는 합일(合一)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태론적인 새로운 세계상이 신비가들의 체험에 따른 직관적 세계상과 일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중략= 

인용:”신과학 산책” 중 <카프라(Fritjof Capara)>편 에서

004 형태장과 업 -최신 생물학의 “형태장(形態場)”에 관한 이론-

2002.01.22

아래 글 중 형태장을 “업(業)” 혹은 “공업(共業)과 대비시켜 이해해 보십시오 
<성 법> 


=중략= 
형태장의 구조는, 그 형태의 장을 갖는 생물의 종 내에서 시간적으로 앞서 존재하였던 유사한 개체들의 실제 형상에 따라 꼴지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고양이의 모습을 정해 주는 장(場), 다시 말해 고양이의 형태장은 이제껏 존재했던 고양이의 실제 형상이 모두 합해진 일종이 누적물입니다. 

그런데 형태장의 영향력은, 유전물질인 DNA속에 담겨있다가 물리적인 작용과 화학적인 반응을 겪으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벗어난 원격(遠隔)적인 활동을 통해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한 마리의 고양이가 지금 태(胎)의 상태로 발생하기 시작했다면, 이 고양이의 태는 이제껏 존재했던 유사한 고양이의 실제 형상이 모두 합해진 결과인 고양이의 형태장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장은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 1875~1961)의 ‘집단무의식”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반복이 다 합해져 누적된 인류 공통의 기억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종류의 생물체에 누적되어 있는 모든 사건은 그 생물종이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는 그 종의 형태장에 기억됩니다. 

여기서 저장된 요소들은 새로 발생하고 탄생하는 다른 개체가 꼴을 갖추는 데 다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한 종에 속하는 모든 개체의 활동은 그 생물종의 형태장에 영향을 주며, 이러한 영향을 통해 조금씩 변형되어 가는 형태장은 다시 새로 발생하고 탄생하는 미래 개체의 모양새를 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상호작용에 대해 여러분은 분명 커다란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지껏 학교제도를 통해 교육받고 몸에 익은 뉴턴 식 과학의 사고방식으로는 너무나 불합리한 설명이어서 얼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좀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기 위해 우선 하나의 모형을 그려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모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종의 형태장이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되는지를 간략하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식물이나 동물은 지구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진화의 과정 안에서 하나는 특정한 시점을 잡아 지구상에 출현하므로, 그 종(種)에 속하는 모든 개체는 하나의 시조(始祖)에서부터 번성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첫번째 시조가 지구상에 어떻게 등장하는지, 그 점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이론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다음부터를 다룹니다. 

그토록 다양한 생물체의 종이 지구상에 각각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신 제 연구의 초점은, 이미 출현하게 된 하나의 생물종이 독특한 모양새를 유지하여 생태계에서 그 모습으로 자리를 굳혀 가는 과정의 수수께끼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 
-①----②-----③--------④-------⑤- 
[a]---[ab]---[abc]----[abcd]---[abcde] 
------------ 시간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에 살았던 조상으로부터 형태공명의 영향이 축적되어간다. 
======================================================== 
<도표>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번째 조상, 그러니까 이 종(種)의 시조에 해당하는 그 개체의 형상은 두 번째 세대뿐만이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등등으로 전 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세대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등등으로 계속 영향을 미치며, 세 번째 세대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등등으로 해서, 한 종이 생물체 안에서 첫 시조로부터 대대손손 내려온 경험이 모두 누적되어 새로운 개체가 형태를 갖추어 가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중략= 

# 소승은 이 글에서 많은 것을 연상 할 수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하나 소개하면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은 한량이 없어 우리 모두 가피를 입고 있지만 무명(無明)으로 모를뿐>이란 새삼스럽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005   형태장과 아함에서 화엄까지 -생물학의 형태장(形態場)에 관한 이론-

2002.01.22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중략= 
대학이나 연구소 혹은 제약회사나 다른 화학산업 분야에서 일을 하다보면 화학반응을 통해 분자들이 재배열되면서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는 일은 수시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바로 이 현상을 제 이론과 관련시켜 해석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태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물질이 형성될 때에는, 그러니까 화학적으로 말해서 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분자가 새롭게 배열될 경우에는 이 결정구조에 해당하는 형태의 장은 아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방식이 결정형태가 없었을 테니까요. 

따라서 처음에는 이 물질이 결정되어 생성되기가 좀 어려울 것입니다. 

적어도 그 새로운 물질의 형태장이 나름대로의 모양을 굳혀 독자적인 기능을 발휘할 때까지는 좀 기다려야만 할 것입니다. 

제 이론이 맞다면, 일단 그 물질이 한번 새로운 결정구조를 형성하게 된 후 두 번째부터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라도 그 반응이 비교적 쉽게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결정구조의 형태장은 그 모양새를 가진 물질이 다시 이루어지는 반응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동일한 사건이 반복됨에 따라 형태장의 성격이 더 분명해질 것이므로 세 번째는 좀더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네 번째는 더 쉬워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전세계 어디에서라도 어려움 없이 그 물질이 생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화학자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인데, 어떤 새로운 물질이 처음으로 합성되는 것은 어려워도 일단 이루어진 결정구조는 전세계 어디에서든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수월하게 합성됩니다. 

이러한 일은 무수히 일어나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일하는 화학자들은 몸소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어떤 식으로 풀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실험에서 이미 성공을 거둔 화학자에게 직접 그 요령을 배울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물론 설득력 있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개선된 실험요령이 새 물질이 결정효과를 높인다는 설명 외에 화학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좀 우습게 들릴 다른 해석도 한 가지 있습니다. 

이미 합성된 결정구조의 분자가 그 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화학자의 옷 속에 그리고 특히 그의 수염 속게 숨어 있다가 적당한 때에, 그러니까 다른 장소에 있는 실험실에 들었을 때 살짝 빠져 나와선, 다시 기회를 보아 그 곳에 있는 실험용기 안으로 들어가 동일한 결정구조가 쉽게 합성되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화학자들이 긴 수염으로 전세계를 휩쓸고 다님에 따라 그 물질의 결정이 수월히 진행되는 효과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화학자라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상당히 경험에 입각한 추리극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화학자를 친구로 두신 분이 계시면, 이런 일을 실제로 겪은 적이 있는지 한번 넌지시 물어보시기 바람니다. 

그 중 몇 사람은 분명히 수염에 얽힌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과서에 실려있는 어떤 이론은 아니어도 화학자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은 담소거리로, ‘효과적인 화학반응의 확산성’에 대한 공공연한 해석으로 간주됩니다. 
=중략= 

# 소승은 처음 이 이론을 대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메모를 해두지 않은 이 부분을 찾기 위해 책을 몇번 다시 읽는 어리석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소승이 “화엄경 총론”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소승은 불교사상의 핵심적인 난제들에 대한 이해를 경전이 아닌 오히려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최신 이론등에서 해결한 바가 큽니다. 

일상의 예를 들어 위의 이론을 부연 설명하면 가전제품의 경우 TV, 세탁기, 냉장고 등 최신의 제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회사가 있음에도 거의 같은 주기에 비슷한 성능의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쟁관계인 그들이 제품의 정보와 출시시기등 회사의 생존이 걸린 비밀을 “정보교환”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소승은 위의 한 예에서 “空”, “業”에서 “重重無盡緣起”에 이르기까지, “아함에서 화엄에 이르기까지” 온통 법계를 한바퀴 돌아본 듯 하였습니다. 

<성 법> 

 

006 물리학과 불교적 체험 -총체적 사고로- 

2002.01.23

앞에서 제시한 자료 과학불교(1)~(5)까지를 읽어 보셨다면 이번의 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교적 용이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글의 단락에서 회원님이 직접 불교사상을 대입시켜 보십시요.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총체적 사고”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성 법> 

=중략= 
물리학자인 나에게 평생을 두고 새로운 성찰을 만들며 그럴 때 마다 새삼스레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벅찬 사건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란 금세기 초 약 3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물리학의 기본개념과 물리에 대한 사고방식의 극적인 대변환을 말합니다. 

물질에 관한 현대물리학의 모든 이론은 이 근본적인 변환을 발판으로 하여 새롭게 편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에서 얻어진 새로운 개념들은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길들어 있던 기존의 세계관을 철저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짐에 따라 데카르트와 뉴턴식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옴살스럽고(holistic) 생태론적인(ecological) 아주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옴살스럽다 : 모두가 ‘한 몸같이 가까운 사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신과학은 분석을 위주로 하는 종래의 과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며 개별 요소들 간의 보다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내면적으로는 하나로 이어진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이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그리스어 ‘holos(온, 모든)’에서 유래한 ‘holistic’, ‘holism’, ‘wholeness’ 등등에 대응하는 적당한 말고 ‘옴살’이라는 순수 우리말이 있다고 서강대학교의 김영덕 선생님께서 제안하셨다. 당장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기왕 있던 우리말이니 자주 쓰다 보면 쉬 친숙해지리라고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으로 얻어진 새로운 시각이, 고래로 어느 시대 또는 어느 전통에도 존재하였던 여러 신비가들의 체험적 진리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동양의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서구의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시각이나 청각 혹은 촉각이나 후각과 같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는 분명히 서로가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지는 사물이나 현상도 결국은 서로가 얽혀 있고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설사 외형상으로는 완연히 구별되어 보이는 현상일지라도 본래는 모두가 동일한 실재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가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들은 각각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한편, 우리 자신을 이 세상과 맞서 있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망상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외관으로 구별하고 양적으로 분별하여 측정하고자 하는 지성이란 사실상 똑똑함이 아니라 어리석음, 곧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의 전통에서는 이를 진정 극복하여야 할 정신의 혼란상태라 하여 무명(無明 : Avidya)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접하는 대자연의 삼라만상에서 각각의 현상과 사물을 구별하고 분석하는 행위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유용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그렇게 구분시키는 절대적인 기반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동양의 종교전통이나 가르침에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여 모든 현상과 사물을 변화무쌍한 흐름 안에서 파악하였습니다. 

우주만물은 기계적이며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구전통의 기계론식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에서는 철저히 생태론적이고 옴살스런 안목의 사고방식이 발달했습니다. 
=중략= 

007 물질,반물질과 色,空

2002.01.23

이번 글은 “반물질”에 관한 기사입니다. 
<성 법> 

빅뱅(Big Bang·우주대폭발) 직후 반물질(antimatter)이 사라지면서 오늘날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미·일 등 14개국 공동연구팀은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고에너지 물리 국제 학술회의’에서 “쌍으로 만들어진 물질과 반물질의 붕괴율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반물질은 모양과 질량 등 모든 성질이 물질과 같으나 전기 전하만 서로 반대값을 갖고 있는 입자다. 물질이 양화라면 반물질은 음화인 셈이다. 현대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약 150억년 전 빅뱅이 일어난 직후 물질과 반물질이 쌍으로 생성됐다. 

그런데 양화와 음화를 합치면 형태가 사라지고 회색 배경만 남듯이 물질과 반물질이 충돌하면 둘 다 소멸하고 에너지만 남는다. 따라서 물질과 반물질이 쌍으로 생겼음에도 원자·분자·별·은하 등 물질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우주가 버젓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학계의 큰 수수께끼였다. 

연구자들은 일본 쓰쿠바에 위치한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에 세계 최고 성능의 입자가속기를 설치해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소립자)의 하나인 ‘B-중간자’와 그 반물질인 ‘반B-중간자’ 쌍을 만들었다. B-중간자는 생성된지 약 1조분의 1초 만에 붕괴돼 사라진다. 

연구자들은 찰나에 불과한 이 기간에 B-중간자와 반B-중간자의 붕괴율 차이를 측정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서울대 물리학과 김선기 교수는 “B-중간자 3100만쌍의 붕괴자료를 분석한 결과 B-중간자와 반B-중간자가 서로 다른 붕괴율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즉 똑같은 수의 쌍으로 생긴 물질과 반물질 중 반물질이 먼저 붕괴했다는 빅뱅 직후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김 교수는 “오늘날 우주는 빅뱅 초기 생성된 물질 중 반물질과 만나지 않아 살아남은 것들로 이루어졌다”며 “이런 모든 상황은 빅뱅 직후 1초 이내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 뒤 우주가 급팽창하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살아남은 불안정한 소립자 물질은 전자·양성자 등 안정된 입자로 바뀌어 오늘날의 우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물질}+{반물질}=쌍소멸{에너지} 을 설명하고 있는 이 글을 간단히 불교식으로 도식화하면 {色}+{色}=쌍소멸{空-에너지(妙有)}---{色卽是空}, {事事無碍}등 

소승의 비약적 억지 주장일까요. 
아니면 소승이 시도하고 있는 일련의 작업--“불교의 논리를 현대과학이 이제 증명해 주고 있는 하나의 작은 예” 일까요. 

<성 법>

 

008 (8)-과학불교(7)추가자료 

2002.01.24

- 이 글은 과학불교(7)에서 소승이 밝힌 견해를 보충해주는 추가자료 입니다.-
< 성 법 >

- 물리적 진공, 복잡한 그물망으로 연결- 
- 색계도 단면일뿐 …모든것 서로 이어져 - 

물리적 진공에 에너지를 주었을 때 입자-반입자의 쌍이 생성되는 쌍생성,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에너지를 방출하고 자신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쌍소멸의 현상만으로도 반야심경이 표현한 공불이색 색불이공은 더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된 표현이지만 쌍생성과 쌍소멸은 물리적 진공의 성질을 나타내는 현상중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진공은 기술(記述)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상태에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은 몇가지 종류의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소립자마다 짝이 되는 반입자가 있는데 입자-반입자가 결합하여 서로서로 끊임없는 상속작용을 하면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물리적 진공이다. 

이 그물망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창조와 소멸을 되풀이 하고있다. 끝없이 쌍생성과 쌍소멸도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입자와 반입자가 제멋대로 생겨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지는데 단지 인간에게 관측되지 않고 그물망 속에서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 그물망은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끊어진데도 없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물망으로 서로 연결된 것은 인간이 볼 수 없다. 

강한 에너지를 주면 이 그물망의 한 곳을 절단할 수 있는데 절단면이 바로 우리가 보는 물질계를 이루는 입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철사줄로 된 그물망을 예로 들겠다. 철사망의 한곳을 잘라 철사를 구부리면 두개의 면이 나타난다. 한쪽면이 입자이고 다른 면이 반입자다. 

실제의 그물망은 두곳을 잘라 철사조각 하나를 완전히 그물망에서 들어낼 수 있지만 진공의 그물망에서는 철사조각 하나를 완전히 들어낼 수가 없다. 철사조각 하나를 들어냈다고 가정하더라도 철사조각 중간부분이 다시 다른 철사줄로 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입자를 가상입자(假想粒子, Virtual Particl)라 부르고 우리가 보는 물질계 즉 색계(色界)를 이루는 입자를 그냥 입자라 부를뿐 가상입자나 실제입자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색계를 이루는 입자도 다른 입자와의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입자를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색계의 입자 모두는 다시 철사줄에 비유한 가상입자를 통해 진공의 그물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실제의 입자는 단지 잘라진 철사줄의 절단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상입자는 철사줄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이와같은 그물망으로 물리현상을 다루며 계산하고 있다. 

그러니 색계라고 해서 진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그물망의 여러곳을 절단하여 철사를 구부려 그면이 보이게 했을 때 보이는 절단면에 불과하다. 

중요하기에 한번 더 강조하지만 색계를 절단면으로 보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이 실제 문제를 풀고 계산하는 방법이요 모델이다. 

그물망과 절단면은 자연에 대한 실제모델이니 즉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의 입자가 절단면에 불과하다면 연결되지 않고 존재하는 절단면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물망의 모델대로 입자는 가상입자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입자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들 즉 색계는 다시 진공과 가상입자를 주고받으면서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상호작용의 효과를 실제로 이론적으로 계산하고 실험적으로 측정한 것은 대략 50년전 쯤의 일이다. 

이것을 최초로 계산한 사람은 램(Lamb)인데 색계와 진공과의 상호작용에 관해 램이 발견한 효과를 램-이동(Lamb Shift)이라 부른다. 

색계가 단순히 그물망의 절단면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을 색불이공이라 불러야 할까? 공불이색이라 불러야 할까? 이 두마디의 말은 어딘가 부족한데가 있다. 

그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그냥 진공에나 있는 하나의 절단된 자국에 불과하다. 그러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일 수 밖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그물망의 모델을 표현할 말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떠나 달리 찾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반야지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009 (9)-과학불교(2)추가자료 

2002.01.24

- 이 자료는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 직접 관여 한다는 소승의 과학불교(2)에 대한 보충입니다.-
< 성 법 >

- “입자의 위치·속도 동시에 알수없어 ”- 
- ‘본다’는 생각이 존재를 창조한다 - 

색수상행식이 다 공한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자연이 이렇게 전개되어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공한 가운데서 이렇게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자연을 설명하자면 물리학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 설명하는 것도 일체즉 유심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물리학에서도 인간이 관측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관측자 자신이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확정성 원리와 이 원리를 일반화시킨 상보성원리라는 것이 바로 일체즉 유심조를 뒷바침하는데 먼저 불확정성원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사물을 관찰한다고 해서 사물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북한산 꼭대기의 백운대를 쳐다본다고 해서 백운대의 모습이 바뀌거나 백운대가 어디 다른데로 옮겨가지 않는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백운대가 항상 거기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다면 백운대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본질이라면 이러한 자연에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과 자연현상의 기본을 이루는 미시적 세계 즉 원자(原子)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때 물리학자들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알려진 고전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순간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서는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속도가 크게 변해 다음순간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속도를 알아내면 이번엔 어느 위치에서 그런 속도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어머니가 밖에서 노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나를 알기 위해 살펴볼 때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서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린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사라진 아이를 찾아 여기저기 살피다가 냇가에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또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이 관찰행위는 언제나 관찰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기에 관찰자의 관찰행위는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물리적인 양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매우 간단하지만 이 표현속에 바로 일체즉 유심조에 이르는 원리가 있다.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알고자 하면 이 입자에 빛을 쪼여 빛이 입자에 부딪친 후에 나오는 빛을 보아야 하는데 입자에 부딪친 빛이 입자를 때려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마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과 같이 빛이 입자를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입자의 위치를 아는 순간 입자의 속도가 크게 변하는 속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도를 재면 위치가 변하여 어디에 입자가 있는지 모르게 된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관찰할 때는 입자와 사람사이를 강한 빛으로 묶어 놓아야 하는데 이 강한 빛이 입자의 속도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관찰할 때마다 변화를 주게되니 ‘본다’는 것은 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을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관찰하기 전에 입자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있었기에 빛을 쪼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빛을 쪼여 입자를 보기 전까지는 입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확률만이 전 공간에 파동처럼 퍼져 있었을 뿐이다. 

빛을 쪼인 순간 확률파는 붕괴되어 버리고 어디선가 입자가 불쑥 튀어나올 뿐이다. 사람이 입자를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뜻이다.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창조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김성구<이화여대 교수·물리학과>

010 (10)-과학불교-신과학과 불교

2002.01.27

다음은 “초월심리학”의 “그로프”란 학자의 글입니다. { }안은 역시 소승의 곁다리 입니다. 
<성법> 

=중략=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서구과학의 기계론식 사고방식은 사상누각이 되어 허물어졌습니다. 

프리초프 카프라(Fritijof Capra)가 그의 책 「物理學의 道(The Tao of Physics, 1975)」와 「전환점(The Turning Point, 1982)」에서 명약관화하게 보여 준 것처럼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물리학은 새로운 발전을 거듭하여, 항상 불변하며 확정적이라고 믿어 왔던, 뉴턴과 데카르트의 소위 기계론식 합리론에 입각한 여태까지의 과학모델에서 상정하였던 가설(假設) 모두를 의문에 부쳤습니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즉 원자물리학과 우주물리학에서 입증된 우주만물의 새로운 질서는 17세기에 확립된 기계론식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실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이 이론들은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계속되어 거시세계의 “지동설”적 사고의 전환을 미시세계에도 요구하게 되었다.} 

우주를 형성하는 기본단위인 원자{▶色-물질} 는 본질적으로 비어 있다{▶空} 는 사실이 구체적인 실험과 이론에 의해 밝혀지면서, 뉴턴 물리학의 특성인, 물질은 고정적이며 없어지지 않는다{▶이 고전 이론을 굳이 종교철학에 비유하면 미래는 예정되어 있는대로 흐른다는(뉴턴의 물리학과 천문학적 방정식과 같이“宿明論”이나 “예정조화론”이 세상의 실체가 되고 맙니다. 아인슈타인까지도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선듯 받아들이지 못하였다)}는 수백 년간의 신화가 깨어졌습니다. 

양자·전자·중성자로 환원되는 원자는 더 이상 개별적으로 어느 특정한 위치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존재{▶이 이론은 불교 “俱舍論”의 물질관이기도 하다.} 가 아닙니다. 

원자란 오히려 수백개의 아원자(亞原子)입자가 고에너지 상태로 융화되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生住異滅 또는 成住壞空} 

확률적 ‘경향’임이 판명된 것입니다.{▶미시세계가”확률적”이라는 의미는 거시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고전이론의 “숙명론”은 부정되고, 과정[緣]에서 얼마든지 다른 결과[果報]가 나올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소립자{▶微塵} 들은 빛이 가지는 특성을 띠기 때문에 실험상황에 따라 입자(粒子)도 되고 파장(波長)도 되는 모순된 성격{▶”緣”에따라 “果”가 다르게 나타 난다는 의미다.} 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고정되어 있는 물체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이 세계는 이제 끊임없는 과정(過程)과 사건(事件)의 연속적인 춤 그리고 얽히고 설키는 그들의 관계 속에 자욱하게 빠져들게 되었습니다.{▶”인드라망”과 같은 “重重無盡緣起”나 화엄의“四種法界”를 연상케 한다} 

원자를 구성하는 아원자를 분석하면서부터 딱딱했던 뉴턴의 물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율동과 형상 그리고 추상적인 질서의 꼴이 나타난 것입니다.{▶”色卽是空”이고 “카오스”적인 “무질서의 질서”의 현상을 말함} 

수학자이며 물지학자인 제임스 진스(James Jeans:1877~1946)의 말대로, 우주는 이제 더 이상 기계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커다란 ‘마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주와 내가 “주인공”인 한 몸, 곧 부처와 중생이 한 몸이 되는 순간이다} 

공간은 3차원이고 시간은 따로이 존재하는 1차원이라는 뉴턴의 생각은 아인슈타인에 와서 허물어졌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아무런 연관없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차원으로 된 하나의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영락없이 “법성게”의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삼세와 구세십세 응킨 듯 한덩인 듯,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이여]를 설명하고 있다} 

곧이어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객관적 세계는 저 혼자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항상 관찰자의 주관(主觀)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마음이 물질에 관여 한다”는 이론, 전자의 위치나 질량을 파악하려면 동시에 두가지를 다 알 수 없으므로 위치와 질량 중 어느 것을 파악할지 관찰자가 미리 결정해야 한다} 이 증명되면서, 수백 년 동안 서구 과학을 지배해 온 직선적 인과율의 절대법칙, 그러니까 우주의 모든 현상은 항상 특정한 원인과 일정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기계론식 사고체계{▶자연과학에서는 “뉴턴식”, 인문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이분적 사고체계라 부른다.} 가 무너져 내렸습니다.{▶그 결과는 아래의 말과 같이 이 우주에 “神”이 설 자리가 그 많큼 좁아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의 성립으로 이제 우주는 더 이상, 한치의 오차도 없도록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신(神)이 제작해 놓은 거대한 시계(時計)에 비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확고부동한 뉴턴식 인과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측불허한 수많은 사건과 그들의 관계로 얽히고 설킨,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요동하는 새로운 우주관이 탄생하였습니다.{▶지금까지 소승이 미흡하나마 대비시킨 이론들을 상기하십시오.} 

우주를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그래서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게된 것입니다.{▶이 이론대로 라면 역시 고전적 의미의 “神”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집니다} 

=중략= 

 

011 과학불교(11)-형태공명과 인과

2002.01.29

<쥐의 행동양식에 대한 흥미있는 실험입니다. 불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미에 몇자 적겠습니다.> 

=중략= 
실험실에서 쥐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이들에게 새로운 재주를 가르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관찰하는 일은 용이합니다. 

실험실에서는 동물의 행태를 연구하는 기본재료로 쥐를 널리 사용하기 때문에 쥐의 행동심리에 관한 연구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자료를 종합하여 검토해 보면 다시 제 주장에 부응하는 형태공명이 효과가 역력히 드러납니다. 

물론 이 실험의 결과만을 증거로 제 이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십 년 전에 이루어졌던 이 실험들의 결과를 제가 다시 인용하는 까닭은, 마침 제가 주장하는 형태공명의 이론이 이 분야에서 나타난 불가해한 결과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920년에서 1954년 사이에 행해진 유사한 실험들 중에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1930년대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였던 맥더걸(William McDougall : 1871~1938)에 의해 실시되었습니다. 

맥더걸 교수는 쥐에게 물에 잠긴 꼬불꼬불한 미로에서 빠져 나오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맨 처음 이 훈련에 참여했던 쥐들은 이 기술을 배우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습니다. 

쥐들은 실수를 할 때마다 전기쇼크로 체벌을 받았습니다. 

아주 잔인하게 들리지만 이는 유감스럽게도 동물실험에서 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출구를 제대로 못찾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놈은 매번 전기쇼크를 하여 다시 제길을 찾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쥐는 수백 번까지 실수를 되풀이하였습니다. 

맥더걸 교수는 이제 이 쥐들을 교미시켜 새끼를 치게 한 수, 다음 세대에 오는 쥐를 상대로 같은 실험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 훈련에서 새 세대의 쥐들은 앞세대의 쥐들보다 길을 찾는 요령을 빨리 습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쥐들은 더 빨리 익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실험을 근거로 맥더걸 교수는, 획득형질(獲得形質)이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라마르크(Lamarck)식 유전법칙을 지지하는 입장에 동조하였습니다. 

1920년대까지만 하여도 유전법칙에는 정실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직 다윈설(다윈은 획득형질의 유전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여, 진화는 오로지 돌연변이와 열등종의 자연도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과 라마르크설은 팽팽히 맞선 채 양편에 속하는 유사한 의견의 대립이 대단히 분분했다고 합니다. 
=중략= 

▶다소 전문적인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결론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소승은 이 글속에서 부처님의 성품[佛性]이 나에게도 분명히 있겠구나 하는 위안과, 지구상의 생명체로서의 “한 중생”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꼈습니다. 

한 생각, 무심코 한 말과 행동이 여지없이 인과의 과정에 포함되니 얼마나 무섭도록 실증적인 교훈입니까? 
이 글 이면에는 화엄의 깊은 뜻도 접혀있지만 이 정도로만 해두겠습니다. 

<성 법> 

 

012 과학불교(11)-형태공명과 인과

2002.01.29

<다시 “초월심리학자”의 말을 들어볼까요. 과학불교(11)에 대한 보충 자료입니다. 이번 것은 인간을 예로 들었습니다 > 

=중략= 
저의 이론이 타당한 것이라면, 이제껏 서술한 형태공명은 기타 동물에게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숱한 어린아이들이 자전거를 탔을 터이니 더불어 자전거타기를 배우는 일도 좀 수월해졌으리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자전거가 발명된 이후 지금까지 수천만의 인구가 자전거타기를 배웠을 테니까 말입니다.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자전거 타는 법을 퍽 쉽게 배웁니다. 

물론 지금 한 이 진술 역시 과학적으로 허점 투성이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자전거타기를 쉽게 배우는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많이 있으니까요. 

옛날에 비해 요새 자전거는 아주 많이 개량되었고, 자전거 타는 모습을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되니까 요령도 쉽게 터득할 수 있고, 또 이웃아이들이 모두 다 타니까 꼭 배워야 할 종목이 되었고 등등 여러 요인이 추가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즘 아이들이 자전거타기를 더 쉽게 배우는 이유를 오로지 100여 년 동안 자전거를 타 온 그 운동행태에서 비롯하는 형태공명과 관련지어서만 설명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이 형태공명의 가설에 들어맞는 예는 우리 주변에 우연치고는 너무나 많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시면 제 가설이 그저 황당무계한 것으로 일축될 수만은 없음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이론은 종래의 유전(遺傳)법칙에도 매우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여태까지의 유전은 오로지 DNA분자라는 유전물질이 갖는 유전정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각 세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유전자, 즉 유전물질인 DNA에 의해 형성되며, 동물의 경우 유전되는 행태, 즉 본능적인 행동양식도 바로 이 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포 안에 존재하는 유전물질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면 DNA,즉 디옥실보뉴클레익에시드(deoxyribonucleic acid)라는 화학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분명히 유전현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유전학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DNA에 작은 변화가 올 경우 생체 전체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저의 이론에서는 생명체의 모양새나 조직은 원칙적으로 유전자가 원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른바 형태의 공명현상에 따라 조상에 해당하는 모든 개체로부터 유전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이제는 형태공명(形態共鳴)이란, 신과학의 造語가 불교의 어떤 사상이나 용어와 대비 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지요. 
<성 법> 

인용: “신과학 산책” 중 <셀드레이크 Rupert Sheldrake>편 에서

1. 불교와 과학
2. 불교의 매력

 

 

1. 불교와 과학

 

 

 

"물리학이 대체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물리학의 주장대로라면 그 누구도 물리학이 말하는 진실을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 또 설사 알 수 있다고 할진댄 이는 이미 물리학 이외의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대로라면, 어떤 유기체도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어떤 유기체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물리학이 아닌, 보다 빈틈없이 분명한 그 어떤 원칙, 가장 수승한 유추 방식을 알지 않고선 안 된다."

-물리학과 경험에서- 버트란드 러셀
주1

이상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사전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이 우주의 온갖 신비를 다 푸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던 시대에는 생명에 대해서도 유물론적인 해석이 확고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열쇠를 돌리기만 하면, 다시 말해 원자의 세계를 열어제쳐 조사하기만 하면 모든 물질적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원칙들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과 사고 과정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종교와 같은 초자연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기계적 과정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물리학의 이와 같은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천문학, 심리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 등 여러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이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자 세계의 속성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만약에 어떤 특정한 순간에 있어서 모든 원자들의 상대적 위치, 방향 그리고 힘(원자력)을 알기만 하면 미래의 시공(時空)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다고까지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은 문제는 자료를 모으는 일 뿐이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열쇠는 마침내 돌려졌다. 원자의 구조가 분석된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은 뜻밖에도 원자는 그 자체가 에너지화한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한 가지 형태의 에너지 방출에서 다른 형태의 에너지 방출로 변환하는 과정이며, 전자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멸해 가는 사이클이라는 것이었다. 양자 역학이 발견되자 기존의 엄격한 인과율의 체계에 새로운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다. 즉 예측률은 원자 집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타당하지만 개개의 원자들에 대해서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발견된 것이다. 결정론적 인과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많은 원자 집단들을 취급하는 경우에 한해 통계적, 또는 수량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념은 이른바 '불확정성의 원리
주2 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사실 순수 과학자들은 엄밀히 말해서 현상을 탐구할 뿐 현상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므로 철학적 관점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불확정성 원리'는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성립될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일체의 예외적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인과법만으로 이 우주가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우주관에서는 자유 의지가 발붙일 틈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의 개념이 정적 개념으로부터 동적 개념으로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견지해 오던 유물론적 이론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이는 과학 그 자체의 성격상 자신이 취급하고 있는 물질이 실체를 갖고 있거나 또는 실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식 자체를 대하는 과학의 자세에 있어서만은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현상계를 조사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 자신의 두뇌 활동을 들여다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기라고 여기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인 것이며, 따라서 그로부터 벗어나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용이할 리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이 제시하는 우주의 그림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감관을 통해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그의 감관이 '여기에 형상과 실체를 갖춘 고체성의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해 주는 상황에 대해서, 물리학은 '거기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바의, 영구한 변천 상태에 있는 힘들의 어떤 배열이 있을 뿐이며, 더구나 그 고체적 형상이란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
주3 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소위 물질적 대상이란 것도 그 자체는 주로 공간이라고 물리학은 이야기해 준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말 그대로의 '고체적'인 것과 같은 것은 없으며, 그것은 단지 감관이 제공하는 기만적 자료에 근거한 언어적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외부에 생기는 사건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우리의 감관이며, 따라서 물리학이 다루는 자료들도 이 감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그 그림을 우리는 진실한 그림으로 믿어도 좋을 것인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그림은 순전히 이론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로 수학적 공식의 문제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 마음이 가장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의 우주는 전적으로 정신적 개념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주4 의 시-공 다차원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도 그려낼 재주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이 증명해 주는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우리의 정신적 경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 차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물리학자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하는 일까지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마음 그 자체가 완전히 현혹적인 허구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러셀은 서두에서처럼 "만약 물리학이 진실이라면,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혁명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대상을 구분하는, 주객관계에 의한 인식 자체가 송두리째 문제가 된다. 가령 마음이 어떤 인상을 입력시킬 때 즉, 흔히 말하는 대로 '어떤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보여진 그 대상이 우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과 조금이라도 닮은 어떤 사건이 시공속에 실제 일어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은 것인가? 이 점에 대해 과학은 어떤 확실한 해답도 주지 못한다.현상적 우주에 대한 과학적 관점은 이러한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는데 이 국면을 좀처럼 타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주의 모습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마음 그 자체가 현상계의 전개 과정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하며, 일체의 주객 관계 내지 인과의 영역을 떠난 초월적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리학이 아닌 어떤 것을 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까지는 과학이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우리가 불교 원리인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 설명하는 우주의 모습이 불교 철학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되기 때문이다. 우주 전개 과정의 무상한 흐름[諸行無常]과 물질의 본질적 무실체성[諸法無我]은 불교 교리의 기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리상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선정(禪定) 과정을 통해 실제로 관찰,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 전개 과정을 '자아'라고 착각하기를 멈춘, 즉 불교 용어로는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주5 을 여읜 마음에게는 원자의 구성 요소들이 보여지고 느껴지며, 그것들이 생멸하는 고[諸行皆苦]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본래 불교의 출세간적 지혜는 과학이 하차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불교는 궁극의 진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제반 발견이, 오늘날 보듯이, 불교의 지혜를 일일이 확인시켜 주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현상들이 부질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은 범어의 '마야(maayaa)'라는 단어에 의해 포괄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보통 환영(illusion)이라고 번역되지만 반드시 정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야란 말이 뜻하는 범위는 '상대적 실재'란 말이 뜻하는 범위와 같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수준에서는 실재이지만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어떤 차원, 혹은 어떤 파장 선상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한 고체는 오관을 통해 나타난 모습대로의 단단한 고체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식에게 그 고체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며 어쩌면 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원자들의 집합체로 보여질 것이다. 그 때 이 '고체'라는 대상은 주로 공간으로 보여질 것이며, 그 공간 속에 원자 성분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넓게 퍼져 있고, 또 우주의 온갖 행성계들이 인력과 척력에 의해 서로 유지되고 있듯이 이 요소들도 오로지 전기적 인력과 척력에 의해 각기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어떤 법칙의 작용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차원의 의식에서 보면 그것이 비존재(非存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공(空) 또는 무위법(無爲法)
주6 일 뿐일 것이다. 그 차원은 인과율의 영역 밖일 것이며, 시공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을 의식 대상으로 하는 보통의 마음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일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생도 멸도 없는 저 열반(涅槃)이라는 궁극적 상태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현상적 지각의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는 초월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여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체가 점차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져 의식 수준이 올라갈수록 이전 수준에서보다 점점 더 비물질적으로 보여지게 되는 이런 현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범주처
주7 와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사범주처에 이르면 의식은 조잡한 물질의 환영으로부터 해방되게 되며, 물질 대신 그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성을 인식하게 되고, 궁극에 가서는 '물질'이란 그 법칙의 표현에 불과하며 이 표현 방식은 다양한 인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제각기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욕계(欲界)의 식(識)에게는 루파(ruupa),즉 색은 단단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차원에서는 나타나 보이는 그대로가 존재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을 얻은 식에게는 인과법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색 대신에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존재의 세 가지 특징이 인지되게 된다.

지성의 차원에서 보면 인류는 발전의 종착점에 이르른 듯한 징후들이 보인다. 즉 물질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 관한 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물질의 궁극적 비밀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작용하는 인과의 영역은 이미 다 밝혀냈지만 마음이 탐구해 내지 못하는 세계가 저 너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다음 발전 단계는 전혀 새로운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간과 인간의 거주처인 이 지구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성 관념을 우주적 모형에 맞춰 완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들이 그 동안 충분히 발생되었으며, 여태껏 판쳐 오던 정령 숭배나 유물론적 견해에 비해 보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우리의 이성도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고 있다. 개념적 사유의 한계성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하는 주체인 '자아'와 관찰되는 객체인 '생'의 전개 과정을 구별해 내겠다는 가망 없는 헛 애를 쓰느라고 끝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집착을 불교에서는 유신견이라 부르며 인간의 향상을 가로막는 가장 기본적인 장애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 생의 전개 과정 이외에 따로 '자아'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나' 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언어는 단지 문법적인 인습에 불과한 것이다. 사유의 전개 과정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언어를 쓰지 않고도 표현해 낼 수 있다. 이 점은 버트란트 러셀이나 그 밖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들에 상응하는 것이 심리학에도 있다. 정신적 과정을 분석함에 따라 여태껏 숨겨져 있던 많은 정신 활동들이 밝혀졌으며, 마음의 의식층과 무의식층 간에 분명한 인과 관계가 작용한다는 것도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개인이 쌓아 온 경험을 저장하고 있는 무의식은 심리적 경향(Tendencies)을 마련해 주며, 이 경향은 의식적 활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한 상태의 의식과 그 다음 상태의 의식 사이에 일종의 연결체 역할을 하는 유분(有分)
주8, 즉 생명 연속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주9 교수는 의식이 점과 같은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세운 최초의 심리 학자였다. 그는 이런 점-순간(point moment)들이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지속하는 실재처럼 인식되지만, 실제 그것들은 단지 연속물을 이루고 있는 극미 단위들에 불과하며 각각은 몇 분의 일 초 동안 존재하다가 후속물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것들은 사실은 필름 감개에 감긴 수천 장의 정지된 사진과 같은데, 영사기를 통해 돌리면 하나의 활동 사진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각각의 그림을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야 겨우 지각할 따름이다. 이러한 까닭에 점-순간들은 왕왕 사멸점(death spots)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이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은 기억에 의존한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인과율을 따라 생기(生起)하기에 각 순간은 그 앞의 순간에서 발생 동기를 찾을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별도의 연결 고리는 있지 않다. 심리학에서 우리는 생각, 정신적 인상 그리고 인지의 모든 분야를 한결같이 관통하고 있는 인과적 전개 과정과 지속적 유동 상태를 보게 되는데 어디서도 이들 연속 사항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항구적 실체는 찾아낼 수가 없다. 결국 여기서도 물리학에서처럼 우리는 다만 인과적 관계성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아비담마의 분석은 모든 분야에서 그 타당성을 견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프로이드(Freud)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의식적 마음의 행위는 그에 선행(先行)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며 어떤 생각도 임의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그는 그의 저서 '일상 생활에서의 정신 병리학'에서 증명해 보였다. 그는 의식 속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찾아보았다. 연구를 해나감에 따라 그는 대부분의 소위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던 잠재 의식의 결과라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즉 잠재 의식은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그런 사건들을 획책해 낸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놓고 그 후 많은 연구가들이 분분한 논쟁을 벌여 왔지만 프로이드는 프로이드대로 자기 이론을 뒷받침해 줄 방대한 자료를 모아 놓았던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 진실은 될 수 있다 하겠다. 어떤 개인이 지어 온 업력이 점점 쌓여서 마침내 그 개인의 경향(傾向)과 소인(素因)을 이루게 되고 이 경향과 소인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의 무의식층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개인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사건이나 경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 그 부분(무의식)의 활동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적 마음이 그 사건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다만 유분(有分)의 성질을 가질 뿐으로 과거의 습관적인 사고에 의해 지배되는 흐름에 불과할 뿐 의지(意志)하는 자질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자질은, 의식적인 마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인 것이다. 다만 '우연적 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무의식의 마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업에 알맞은 경험을 겪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기능을 기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지게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Mano-Pubbangamaa dhammaa, manose.t.thaa manomayaa. 모든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마음은 주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프로이드가 실수한 점은 잠재의식에 있어서의 인과 과정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 못한 탓으로 이것을 의지 행위로 오해한 것 뿐이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매우 성공적인 실험을 하고서도 끝내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불교에 접근은 하지만 마지막 문을 열 열쇠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 하겠다.

유물론자들은 마음이나 정신 상태가 물질적 기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단언하는 반면에, 유심론자들은 물질은 오로지 마음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마음은 단지 뇌의 생산물에 불과한데 이 뇌는 물질적 실체라는 것이다.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대상들은 눈, 귀, 코, 혀, 피부에 이어진 신경 통로를 통하여 접촉된다. 그 접촉의 결과로 생기는 감각은, 복잡한 물질적 신경 중추인 뇌가 그렇게 얻어진 자료들을 모으고 연관짓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 주기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뇌가 손상되면 감각은 불완전하게 작동하고 뇌가 파괴될 경우 감각은 아무 기능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요소들에 의존하는 하나의 인과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타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모든 사실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정신적 과정이 순전히 기계적인 것이어서 물리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물리적 원인은 다시 그 근원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하고 또 엄정한 인과법에 매여 있을 뿐이라면 자유 의지가 작용할 여지는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진화는 미리 결정된 자동적 과정이 되고 말 것이며 그럴 경우 갖가지 대안을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없어진다. 하지만,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자유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특수한 진화 형태의 출현은 대개 자연스런 선택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가령 마스토돈, 뇌룡, 익룡과 그 밖의 멸종된 종들의 경우 그들의 형태는 특정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발전의 결과였는데, 환경이 다시 바뀌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나치게 특수 진화해 버렸던 것이며 환경의 변화에 재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의 진화에서는 자동적인 것은 없다. 

일련의 시행 착오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성공의 경우 못지않게 실패의 경우도 많다. 바로 인간도 이런 실패의 사례 중 하나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리적 힘은 나날이 증대시키면서 이에 상응한 정신적 진화는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멸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H.G.웰스 주10 같은 사람은 2천년도 훨씬 넘는 옛 불교도 아쇼카 왕에게서 계명 통치의 극치를 보면서, 인간은 그 후 발전은커녕 정신적으로 퇴화해 왔으며 마침내는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진화를 통한 부단한 진보라는 생각은 이미 과학에 의해 폐기되었으며, 현재의 진화 이론들은, 개개인의 향상에 관한 이론들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진화는 옳고 그른 행위 중에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업(業)이 선 악중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진보 또는 퇴보가 있게 되며, 업의 개념은 전적으로 자유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때때로 오해되는 것처럼 숙명론이 아니다. 전생의 업은 금생에 겪어야 할 경험과 상황들을 결정하지만, 그런 상황들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그 개인의 개성적 경향의 문제인 것이며, 이 경향은 그 개인이 쌓아 온 의지적 행위들이 형성해 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우연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학에서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는 개개의 원자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예에서 보듯, 미지의 원인들이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을 놓고 볼 경우, 우리가 그 사람의 특징적 경향을 잘 알고 있다면 어떤 주어진 상황하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다. 정직한 사람도 환경의 압박이나 또는 잠재업의 경향으로 인해 부정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며, 용감한 사람이 겁장이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인간성이 왜 일관성이 없고 곧잘 모순성마저 띠게 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항상 정확하게 '성격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개성이란 순간순간 바뀌는 유동적 구조물이며 이를 지배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행(sankhaara-축적된 성향 또는 습관 형성력)에 해당되는 다소 광범한 원칙들 뿐이다.

여기서 행에 관해 말해 둘 것은 이 행의 개념은 개인의 진화 체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도 일찍이 그 어떤 철학 체계도 이에 대해 합당한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으며 오로지 불교에서만 그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37조도품
주11 중의 한 항목인 4정근 주12 이 가르치듯이 나쁜 성향은 제거하고 좋은 성향을 증강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쌓아나가면 우리 자신의 심리를 이상적으로 주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습관 형성력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대 심리학이 보여주고 있듯이 행(行)의 개념은 관념 연합의 개념과 긴밀히 이어지게 되었다.

파블로브(Pavlov)
주13 는 조건 반사에 관한 실험에서, 연상 관념과 신체적 반응 사이의 상관성을 정립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개들에게 종소리나 그 밖의 특정한 소리를 들려 주면 음식의 관념을 연상하도록 훈련시켰다. 개들은 그 특정한 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보거나 냄새를 맡았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개들은 침을 흘렸을 뿐 아니라, 다른 기쁨의 표시도 나타내었는데 이로 보아 개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 소리와 음식의 관념이 단단히 연합되어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개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에 비해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개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추이와 그것이 신체상에 일으키는 결과를 추적하기가 휠씬 용이하다. 그것은 거의 조건 반사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개의 이성적 능력은 초보적이며 또 하위층의 생물체로 내려갈수록 더욱 더 본능적이고 기계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미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한 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적 단위에 불과하다. 흰개미 집단에 관한 최근의 실험에 의하면, 지령자는 여왕개미이고 개미떼는 두뇌와 신경 중심을 여왕개미에게 온통 맡기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만일 여왕개미가 제거되면 흰개미들은 혼란되어 아무 방향으로나 미친 듯이 달려가 버려 개미 집단의 질서 정연한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미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유기체가 아니며 단지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몸통에 붙은 사지와 같다. 따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꼭 한 마리 동물의 손발 같은 기능을 한다. 그들은 여왕개미로부터 나오는 일종의 레이다 같은 것에 의해 지시를 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왕개미가 죽거나 상처를 입으면 상황은 마치 동물이 두뇌를 다쳐서 미친 사람처럼 수족을 함부로 흔들어대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 여왕개미라는 두뇌는 딱하리만치 발전이 제한된 기관이다. 그것은 대대로 여왕개미에게 전수되는 선천적인 경향에 따라서 개미 집단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능만을 수행한다. 

그 필요성의 한계 내에서 그것은 완벽한 유기체이지만,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진화상의 한정된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 더 이상 가능한 대안에 대해서 선택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능력을 포기했으며 고정된 자동 기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업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그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 가운데 하나란 것을 표시한다. 그와 같은 의식 세계의 수준에서는 이전에 지은 선행 조건들이 가져온 결과대로 살 뿐, 그 상황을 향상에 도움되도록 선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각기 정도는 다르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4악취(四惡趣)
주14 의 공통 특징인 바로 그 의식 형태라 간주해도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아비담마 요론(Abhidhammattha Sangaha) 주15 의 '개체들의 분류' 절에서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자동적 의식 형태의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바, 권위나 전통 앞에 자기의 독립적 사유 능력을 제물로 바치고 노예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이 개미의 예야말로 적절한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개미 수준의 의식을 기르고 있는 셈이며, 만일 그들이 개미로서 환생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독립적인 선택에 따르는 모험과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손쉽고도 안이한 방법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책무이다. 그러나 책임을 떠맡은 이상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저버릴 수는 없다. 불교는 우리 인간이 서 있는 위치를 우리 안팎의 우주와 관련시켜 정확히 비추어 줌으로써 인성(人性)의 초인적 가능성[佛性]을 분명히 자각하게 만들어 준다. 불교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가장 힘찬 웅변인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색이 불러들인 혼란에 도로 빠져 버려 갈피를 못 잡은 채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도덕과는 전연 무관한 물리적 힘만으로 형성된 우주, 일정한 중심도 없는 불안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헛그림자만 설쳐대는 마술의 환등 같은 무상한 변화를 그 속에서 바라보며 자기 눈에 비치는 것들이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지성적(知性的) 입장은 절망에 찬 영웅이 전개하는 비극적 서사시의 한 편이라고 적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도덕적 가치를 믿어야 할 근거를 찾지 못하게 된 그는 도덕적 가치들이 과연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인류가 만들어낸 집단적 상상의 소산에 불과한지를 의심하게끔 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인생이 '한갖 천치가 지껄여대는 이야기, 격렬한 소동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정의, 자비, 지혜 그리고 진리와 같은 중요한 추상적 관념들이 그들에게는 단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라 결정될 뿐인 한낱 상대주의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자연히 윤리적 기준은 약해지고 편법이 판을 치게 되는 추세로 되어 가고 있다.

'물리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써 보다 높은 지혜가 갖추어야 할 여러 요소 중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 요소-그 밖의 모든 요소를 각기 제자리 잡게 하여 완벽하고도 명료한 형태를 갖추도록 해줄 그 요소-는 불교만이 마련해 줄 수 있다. 붓다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세상을 바라볼 경우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일찍이 알려진 어떤 수준보다도 높은 수준에서 재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재어 보고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경험 요소들을 분석해 보도록, 그래서 도그마의 울타리를 치거나 선입관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불교는 우리를 격려해 주는 것이다. 붓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엄격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도록 가르치신 현재 겁(劫)
주16 에 있어 최초의 종교적 스승이셨으며, 이러한 그 분의 말씀은 2천5백년 전이나 다름없이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생생하게 울려 주고 있다. 우리는 그 분의 가르치심을 비단 긴 세월 동안 보존되어 온 불법을 통해서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 과학의 제 발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 분의 가르치심에는 어쩌면 후기의 해석자들이 첨부시킨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치신 핵심적 진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늘날의 사상가들이 놓치고 있는 결정적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에 넉넉하다. 오늘날 사상가들이 발견한 것들을 불교의 교의에 덧붙이면 그 전체상은, 합리적 마음이 음미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완벽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의 영역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보다 높은 불교의 선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확인해 보는 도리 밖에 없다. 

지금 인류는 기껏 자신을 해칠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주의 비밀을 캐내고 있는 듯싶으며, 이 점은 우려에만 그칠 수는 없는 실재적 위험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대세에 일대 변화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의 과학 그 자체가 많은 그릇된 생각의 기반을 제거해 냄으로써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를 깨닫는 쪽으로 우리를 접근시켜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의 제목을 '불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라 붙인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의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불가항력적으로 불교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정신적으로 '자꾸만 커져 가는 고통'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제 곧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일상적인 종교적 도덕적 신조의 기반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거부해야 하는 고통을 치루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정의, 진리 그리고 자비와 같은 보편적 원칙들에 대한 신념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체계적 연구에 근거한 보다 높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지금은 인류가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고 믿어마지 않는 분들도 그 때에 가면 그들이 한 가닥 실낱처럼 막연히 걸어보던 미래에의 전망이 활짝 트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침내 무지와 미망의 족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열반이라는 저 궁극적 목표의 의미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 1872-1970)

1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평론가. 트렐레크에서 출생. 켐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배움. 수학자로 출발하여 화이트 헤드와 공저로 대저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내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 철학자로서는 물질도 정신도 아닌 중성적인 실재를 상정하는 신 실재론 또는 중성적 일원론을 대표. 정치 교육 인생 등에 관한 다수의 평론이 있음. 1920-1921년 북경대학 교수. 1938년 시카고 대학 강사. 1939년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 1940년 뉴욕 시립대학 객원교수. 1944년 이후 트리니티 칼리지 특별 연구원. 1950년 노벨상 수상. 저서로는 「German Social Democracy」(1896), 「The Problem of Philosophy」(1911), 「Scientific Method in Philosophy」(1914), 「Roads to Freedom」(1918), 「The Scientific Outlook」(1931).

 

 

 

불확정성 원리

2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기본원리. 원자 등의 미립자 현상에 있어서는 위치와 운동량, 시간과 에너지와 같이 일조를 이루고 있는 물리량 양쪽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원리.

 

 

 

시공 연속체(4차원 공간)

3 

보통의 3차원 공간에 제4차원으로써 시간을 합친 4개의 차원을 통일적으로 생각한 연속체, 시공 세계라고도 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4 

독일 태생의 미국 이론 물리학자.
1905년 물리학 연보에 '광양자 가설', 분자 물리학에 신생면을 개척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 '특수 상대성 이론'등의 세 논문을 발표. 당시 물리학계의 대가 프랑크의 주목을 받았다.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 1917년 '상대론적 우주론'을 발표.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29년에는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장하여 만유인력 및 전자기력(電磁氣力)의 일체를 포함한 '장의 통일 이론'을 발표. 그의 연구는 뉴튼의 물리학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옴으로써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었으며, 또한 당시 발전도상에 있던 양자역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평화주의자로서 세계 연방운동을 주창하였다.

 

 

 

유신견(有身見,Sakkaaya-di.t.thi)

5 

인격 주체(personality)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 우리의 수행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를 이룸. 10가지 족쇄 중 첫째 것으로 예류과를 성취할 때 완전히 버릴 수 있다. 여기엔 4가지 종류가 있는데 ①5온이 바로 그것이란 생각, ②5온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 ③5온과 따로 있다는 생각, ④5온의 주관자란 생각.

 

 

 

무위법(無爲法)

6 

무명으로 말미암은 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苦)의 존재를 이루어가는 유위법(有爲法)을 초탈한 법, 즉 무명의 인연 조작을 여읜 법으로서 열반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사범주처

7 

보리수 잎 다섯 「사무량심」 참조.

 

 

 

유분(有分, bhavanga)

8 

아비담마의 해설에 의하면 존재(bhava)의 기초 또는 조건(karana). 강물처럼 흐르는 성질을 가졌음.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모든 인상과 경험이 여기에 저장되어 있으며, 또한 기능하고 있다고 함. 기억 작용, 초과학적 심령 현상, 정신적 육체적 성장, 업과 윤회 등은 이 유분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짐.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subconscious life-stream)' '생명의 암류(暗流, undercurrent of life)' 또는 '생명 연속체(life-continuum)'로 번역함.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9 

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 기능주의적 경향의 심리학, 프레그마티즘의 창시자. 1890년 미국 심리학의 초석이 된 '심리학 원리' 두 권 저술. 의식의 추이적 성질을 중시, 이것을 끊임없는 유동, 즉 의식의 흐름으로 보고 로크 이래의 정적 구성 심리학에 혁신을 꾀함.'종교 경험의 제상'으로 종교 심리학 발전에 기여. 철학에서는 개념적 반주지적 다윈적 상대주의를 주장. 그의 인식론적 저서 '근본 경험론'은 추상주의를 배격, 경험을 그대로 구체적으로 포착, 경험이 즉 실재라고 보고 있다. 한편 그의 실용주의는 듀이를 거쳐 더욱 발전, 심리학뿐 아니라 제반 인문 과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미국의 생활 철학으로 큰 의의를 말해 주고 있다.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

10 

영국의 문명 비평가, 역사가. 켄트 주 출생. 독학으로 이학사가 되었다. 1903년에 페미앙 협회에 가입. '세계 문화사 대개' '생명의 과학' 등을 썼다. 그는 자유롭고 상식적인 영국 지식 계급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문필가였다. 저서로는 '도둑 맞은 병원균', '공중 전쟁', '분노 방지'가 있음.

 

 

 

37조도품(助道品)

11 

초기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37가지 수행 방법.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가 이에 해당한다. 37菩提分法, 37覺分, 37道品 등으로도 불리운다.

 

 

 

사정근(四正勤)

12 

37조도품에 속하며 팔정도 가운데 정정진(正精進)의 내용이기도 한데, ①이미 생겨나 있는 선(善)은 더욱 증대시키고, ②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은 생겨나게 하며, ③이미 생겨나 있는 악,(惡)은 없애려고 하고, ④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은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四正斷 四正勝 등으로도 불리운다.

 

 

 

파블로브(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

13 

러시아의 생리학 교수, 페테르부르그 대 졸업 후 독일 유학, 생리학 전공. 타액선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유명한 조건 반사의 연구에 의해 대뇌 생리학 탐구로 세계적으로 알려짐. 
젊었을 때는 췌장을 지배하는 신경, 후에는 심장의 원심성 신경, 그 외에 소화기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04년 노벨상 수상. 저서로는 「심장의 원심성 신경」(1938), 「양반구의 활동에 관한 강의」(1927) 등이 있음.

 

 

 

사악취(四惡趣)

14 

업으로 인해 태어나는 세계 가운데 특히 나쁜 네 가지 세계로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말함. 사악도(四惡道)라고도 한다.

 

 

 

아비담마 요론

15 

옛 인도 칸치푸라 성(城)의 고승 아누룻다 장로의 저서로 알려진 아비담마 불교의 요약 해설서. 스리랑카의 나라다 스님에 의해 빨리 영어 대역본이 BPS에서 간행되었음(1980).

 

 

 

겁(劫)

16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로 중겁, 아승지겁, 대겁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세로부터 늘어나 무한수에 이르렀다가 다시 10세로 줄어드는 기간을 한 중겁이라 하며 스무 중겁이 한 아승지겁, 네 아승지겁이 한 대겁을 이룬다. 한 대겁은 길이, 폭, 높이가 각기 한 유순(40리에 해당)인 그릇에 가득 담긴 겨자씨를 백 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다 비우는 데 소요되는 시간보다도 길다(아비담마 요론에서). 본문에서는

 

2. 불교의 매력

 

 

 

1958년 6월 1일, 세일론 라디오 방송국의 '불자 토론회'에서 불교로 개종한 분들에게 "불교의 어떤 점이 가장 내 마음을 끄는가?" 하는 주제로 발표 요청이 있었다. 다음은 프란시스 스토리(법명:재가 수행자 수가타난다 Anaagarika Sugatananda)씨가 발표했던 방송 내용이다.

제가 불교도가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로 14세에서 16세 사이의 무척 어렸을 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저로 하여금 불법의 진리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무엇보다도 윤회(환생)와 업의 두 가지 사실들이었습니다. 제가 '사실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많은 비불교도들 사이에서도 이제 윤회는 증명된 진실로 잘 알려져 가고 있으며, 일단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업이 실재한다는 것도 함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두 가르침들은 인생에 있어서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을 모두 설명해 줍니다. 그 교의들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일견 불공평한 일들, 세속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는 그런 일들을 설명해 줍니다. 이들 교의는 또한 우리 인간의 개인적 삶이 속절없이 허망하며 만족스런 모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해명해 줍니다. 사실 무한한 영원으로부터 한 생애를 떼어놓고 볼 때 인생은 분명 무의미하기만 하며 미해결의 문제점과 불완전한 설계로 충만되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근래에 많이 보도된 한 소년의 예, 인간의 과학으로도 신의 자비로도 구할 수 없었던 레드 스켈튼 씨 아들의 비극적이고 짧은 생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고 또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기형아, 정신박약자와 정신병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가련한 상태는 분명코 이 생에서 저지른 그들의 과실 탓이거나 또는 인간의 사회 조직이 지닌 개선 가능한 결함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과학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결코 이러한 재난들을 온전히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학 때문에 신용이 떨어져 버린 종교 쪽에서도 더 이상 위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 진보가 고통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억울하게 불운을 당한 희생자들이 이 생에서 지은 도덕상의 문제야 여하튼 간에 내생에서는 무슨 특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익한 짓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정의감이 유별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까닭과 그리고 그 일들의 배후에 숨은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을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신(神)의 정의(正義)'가 인간적인 정의와는 별도로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나 관념은 인간의 기준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적 의미에서 옳지 않은 조건들이라면 그 조건들은 완전히 잘못된 조건인 것이며, 불합리성을 신의 정의라는 말로 확립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의 정의'란 신학자들의 날조물로 불합리성의 마지막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만나게 되면서 저는 제가 그렇게도 구해마지 않던 정의와 목적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저는 마침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 인생의 처절한 모습, 즉 비참과 헛됨 그리고 맹목적이며 비정한 잔인성들로 뒤범벅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다소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업과 윤회는 불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힌두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나의 과학적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제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될 수도 있는 다른 보편적 법칙들과 합치되는 원리라는 뜻입니다. 변화하면서 연속적으로 지속한다는 것은 자연 전반에 공통되는 원리이며 모든 과학적 원리들의 기반이 되는 기본적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무아의 원리로 나타나는데 이 무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윤회의 개념이 원시적 애니미즘 주17 수준을 벗어나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아(anatta)는 영혼이 없음(non-soul), 자아가 없음(non-ego) 그리고 자기가 없음(non-self)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전개 과정에 있어 상주하거나 일정 불변한 요소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윤회하는 '영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전개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체입니다. 한 생에서 나타나는 개성은 지금까지의 존재의 흐름이 지어 온 활동의 결과인데, 그것은 마치 한 특정 순간에 있어서의 물리적인 어떤 현상이 수많은 같은 성향의 일련의 사건들이 차츰 그 현상으로 다가온 최종 결과인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심오한 연기(緣起)의 원리를 숙고함으로써, 무아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저는 불법이 동적(動的)인 우주 질서에 대한 완벽한 계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법은 과학적으로 완벽하니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하등에서 고등까지의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의 생 전부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며, 또 도덕적으로 보아도 완벽하니 이 모든 형태의 생명들을 하나의 도덕적 질서 속에 전부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포용하는 불법의 체계에서 설명되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의 어떤 행성에서 지각력이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해도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의 존재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지구상의 어떤 생명 형태와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의 몸은 다른 화학적 구성물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들보다 훨씬 우수하거나 아니면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똑같은 오온(五蘊)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온은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의 기본적 구성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업의 결과대로 존재하고 또 죽어가야 하니, 무상 고 무아야말로 보편적 원리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 역시 생명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나 유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의 생물을 위해 따로, 또 어떤 별의 생명을 위해 따로 특수한 창조 계획 내지 구원 계획을 마련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디서도 통용되는 우주적 법칙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불교의 도덕률인 정신적 향상은 어디서든 가장 중요한 도덕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우주의 법칙과 도덕적 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처음부터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 누구를 향해서도 그 사람이 어쩌다 불교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원한 지옥에 가도록 저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후에 고통받는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그가 지은 악업이 그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쩌다 잘못된 교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어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그 교회의 특정한 신조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반감을 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응보는 필연입니다. 하지만 어떤 신이나 그 신을 둘러싼 특정 신화를 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하는 따위의 사악한 교의는 윤리적 원칙과는 믿전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지극히 비도덕적이며 아마도 인류 역사상 단일 요인으로 이보다 더 세상에 해악을 끼친 요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불교는 순간적인 죄, 즉 한정된 시간들 내에서 범해진 나쁜 짓에 대해 영원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법은 사람이 스스로 초래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그가 지은 악한 행위의 무게와 정확하게 같으며 더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매우 무거운 악행 때문에 몇 생에 걸쳐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통을 야기시킨 악이 제 값을 다 치르게 되면 그 고통도 끝이 나야 합니다. 인간이 짧은 한 생애에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식의 잔인한 발상법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에는 형식적인 회개 행위나 또는 사람이 지어낸 그 허다한 신 중에 하필 어떤 특정한 신만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씻게 된다는 따위의 불공평한 교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또한 벌을 내리는 인격적인 심판자도 없습니다. 단지 중력의 법칙처럼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은 특히 중요한데 어떤 심판자도 심판을 하다 보면 공정성과 자비로움 중 하나는 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일 냉혹하리만치 공정하다면 자비롭다고 할 수 없게 되며 또 죄인에게 자비롭다 보면 철저히 공정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면 자연의 법칙이 얼마나 비할 데 없이 공정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이 할 일은 자비를 닦는 일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을 닦아 스스로 신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윤회와 고통은 무명과 갈애가 결합하여 일으킨다는 진리는 인간과 동물의 심리 상태와 그리고 생물학적인 진화 과정에서 작용하는 생명 충동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결론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생명체의 진화에 관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보충해야만 되는 요소를 제공합니다. 존재하고,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한 투쟁 뒤에 숨은 원동력은 붓다가 생사 윤회의 근원에서 발견한 바로 이 갈애라는 힘입니다. 이것은 무명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맹목적이며 더듬거리고 헤매는 힘이기는 하지만, 한편 복잡한 유기체가 그 단순한 시초로부터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의 덕분입니다. 그것은 또한 존재가 정신적 진화의 눈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윤회의 바퀴를 부단히 돌고 있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구경 해탈, 즉 영원 불변의 상태인 열반의 증득은 바로 이 두 기본적 결함에 뿌리를 박은 모든 재생의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과 갈애라는 이 두 가지 굴레의 성질을 깨달음으로써 이러한 합리적 신념이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조건지워진 것이 아닌 것'(asankhata), '늙지 않는 것'(ajaata),'견고한 것'(dhuva),'죽지 않는 것'(amata) 등으로 표현하신 이 열반은 '조건지워진' '환영과 같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난 진실한 실재인 것이며, 탐 진 치 삼독심의 불기를 끔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불교에서의 믿음은 이성과 경험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하면 할수록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신앙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불법은 모든 이들이 와서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성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분석을 가하도록 요청하신 유일한 종교적 스승이십니다. 불법이 진실이라는 증명, 붓다의 깨달음이 진실이라는 결정적 증명은 가르침 그 자체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발견이나 마찬가지로 불법의 진리도 실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성과 직관적 통찰에 의해서 그것을 시험하고 증명할 수 있으며, 불교도에게는 이와 같은 지성적 자유의 헌장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은 제가 진리를 찾아 처음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저를 사로잡았던 불교의 특징적 내용 몇 가지를 들어보인 것입니다. 그 후로도 매력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많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법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 것입니다. 법을 탐구해 나가면 우리의 시야에는 항상 새로운 전망이 열려 옵니다. 진리의 새로운 측면이 계속하여 드러나면서 신선한 아름다움이 펼쳐집니다. 그저 법을 지적으로 즐기기만 해도 그처럼 많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거늘 직접적 통찰, 즉 관법(vipassanaa)을 실제로 닦을 경우 어떤 경계를 체험하게 될지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치고 이에 비견될 만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저의 생각만 밝혀 둘 뿐입니다.

 

 

 

애니미즘(물활론, animism)

17 

모든 자연물에도 마음 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학설.

 

 

 

 

2. 불교의 매력

 

 

 

1958년 6월 1일, 세일론 라디오 방송국의 '불자 토론회'에서 불교로 개종한 분들에게 "불교의 어떤 점이 가장 내 마음을 끄는가?" 하는 주제로 발표 요청이 있었다. 다음은 프란시스 스토리(법명:재가 수행자 수가타난다 Anaagarika Sugatananda)씨가 발표했던 방송 내용이다.

제가 불교도가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로 14세에서 16세 사이의 무척 어렸을 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저로 하여금 불법의 진리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무엇보다도 윤회(환생)와 업의 두 가지 사실들이었습니다. 제가 '사실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많은 비불교도들 사이에서도 이제 윤회는 증명된 진실로 잘 알려져 가고 있으며, 일단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업이 실재한다는 것도 함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두 가르침들은 인생에 있어서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을 모두 설명해 줍니다. 그 교의들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일견 불공평한 일들, 세속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는 그런 일들을 설명해 줍니다. 이들 교의는 또한 우리 인간의 개인적 삶이 속절없이 허망하며 만족스런 모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해명해 줍니다. 사실 무한한 영원으로부터 한 생애를 떼어놓고 볼 때 인생은 분명 무의미하기만 하며 미해결의 문제점과 불완전한 설계로 충만되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근래에 많이 보도된 한 소년의 예, 인간의 과학으로도 신의 자비로도 구할 수 없었던 레드 스켈튼 씨 아들의 비극적이고 짧은 생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고 또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기형아, 정신박약자와 정신병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가련한 상태는 분명코 이 생에서 저지른 그들의 과실 탓이거나 또는 인간의 사회 조직이 지닌 개선 가능한 결함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과학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결코 이러한 재난들을 온전히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학 때문에 신용이 떨어져 버린 종교 쪽에서도 더 이상 위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 진보가 고통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억울하게 불운을 당한 희생자들이 이 생에서 지은 도덕상의 문제야 여하튼 간에 내생에서는 무슨 특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익한 짓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정의감이 유별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까닭과 그리고 그 일들의 배후에 숨은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을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신(神)의 정의(正義)'가 인간적인 정의와는 별도로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나 관념은 인간의 기준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적 의미에서 옳지 않은 조건들이라면 그 조건들은 완전히 잘못된 조건인 것이며, 불합리성을 신의 정의라는 말로 확립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의 정의'란 신학자들의 날조물로 불합리성의 마지막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만나게 되면서 저는 제가 그렇게도 구해마지 않던 정의와 목적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저는 마침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 인생의 처절한 모습, 즉 비참과 헛됨 그리고 맹목적이며 비정한 잔인성들로 뒤범벅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다소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업과 윤회는 불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힌두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나의 과학적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제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될 수도 있는 다른 보편적 법칙들과 합치되는 원리라는 뜻입니다. 변화하면서 연속적으로 지속한다는 것은 자연 전반에 공통되는 원리이며 모든 과학적 원리들의 기반이 되는 기본적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무아의 원리로 나타나는데 이 무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윤회의 개념이 원시적 애니미즘 주17 수준을 벗어나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아(anatta)는 영혼이 없음(non-soul), 자아가 없음(non-ego) 그리고 자기가 없음(non-self)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전개 과정에 있어 상주하거나 일정 불변한 요소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윤회하는 '영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전개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체입니다. 한 생에서 나타나는 개성은 지금까지의 존재의 흐름이 지어 온 활동의 결과인데, 그것은 마치 한 특정 순간에 있어서의 물리적인 어떤 현상이 수많은 같은 성향의 일련의 사건들이 차츰 그 현상으로 다가온 최종 결과인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심오한 연기(緣起)의 원리를 숙고함으로써, 무아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저는 불법이 동적(動的)인 우주 질서에 대한 완벽한 계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법은 과학적으로 완벽하니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하등에서 고등까지의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의 생 전부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며, 또 도덕적으로 보아도 완벽하니 이 모든 형태의 생명들을 하나의 도덕적 질서 속에 전부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포용하는 불법의 체계에서 설명되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의 어떤 행성에서 지각력이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해도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의 존재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지구상의 어떤 생명 형태와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의 몸은 다른 화학적 구성물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들보다 훨씬 우수하거나 아니면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똑같은 오온(五蘊)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온은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의 기본적 구성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업의 결과대로 존재하고 또 죽어가야 하니, 무상 고 무아야말로 보편적 원리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 역시 생명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나 유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의 생물을 위해 따로, 또 어떤 별의 생명을 위해 따로 특수한 창조 계획 내지 구원 계획을 마련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디서도 통용되는 우주적 법칙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불교의 도덕률인 정신적 향상은 어디서든 가장 중요한 도덕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우주의 법칙과 도덕적 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처음부터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 누구를 향해서도 그 사람이 어쩌다 불교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원한 지옥에 가도록 저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후에 고통받는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그가 지은 악업이 그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쩌다 잘못된 교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어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그 교회의 특정한 신조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반감을 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응보는 필연입니다. 하지만 어떤 신이나 그 신을 둘러싼 특정 신화를 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하는 따위의 사악한 교의는 윤리적 원칙과는 믿전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지극히 비도덕적이며 아마도 인류 역사상 단일 요인으로 이보다 더 세상에 해악을 끼친 요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불교는 순간적인 죄, 즉 한정된 시간들 내에서 범해진 나쁜 짓에 대해 영원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법은 사람이 스스로 초래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그가 지은 악한 행위의 무게와 정확하게 같으며 더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매우 무거운 악행 때문에 몇 생에 걸쳐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통을 야기시킨 악이 제 값을 다 치르게 되면 그 고통도 끝이 나야 합니다. 인간이 짧은 한 생애에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식의 잔인한 발상법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에는 형식적인 회개 행위나 또는 사람이 지어낸 그 허다한 신 중에 하필 어떤 특정한 신만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씻게 된다는 따위의 불공평한 교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또한 벌을 내리는 인격적인 심판자도 없습니다. 단지 중력의 법칙처럼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은 특히 중요한데 어떤 심판자도 심판을 하다 보면 공정성과 자비로움 중 하나는 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일 냉혹하리만치 공정하다면 자비롭다고 할 수 없게 되며 또 죄인에게 자비롭다 보면 철저히 공정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면 자연의 법칙이 얼마나 비할 데 없이 공정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이 할 일은 자비를 닦는 일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을 닦아 스스로 신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윤회와 고통은 무명과 갈애가 결합하여 일으킨다는 진리는 인간과 동물의 심리 상태와 그리고 생물학적인 진화 과정에서 작용하는 생명 충동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결론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생명체의 진화에 관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보충해야만 되는 요소를 제공합니다. 존재하고,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한 투쟁 뒤에 숨은 원동력은 붓다가 생사 윤회의 근원에서 발견한 바로 이 갈애라는 힘입니다. 이것은 무명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맹목적이며 더듬거리고 헤매는 힘이기는 하지만, 한편 복잡한 유기체가 그 단순한 시초로부터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의 덕분입니다. 그것은 또한 존재가 정신적 진화의 눈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윤회의 바퀴를 부단히 돌고 있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구경 해탈, 즉 영원 불변의 상태인 열반의 증득은 바로 이 두 기본적 결함에 뿌리를 박은 모든 재생의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과 갈애라는 이 두 가지 굴레의 성질을 깨달음으로써 이러한 합리적 신념이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조건지워진 것이 아닌 것'(asankhata), '늙지 않는 것'(ajaata),'견고한 것'(dhuva),'죽지 않는 것'(amata) 등으로 표현하신 이 열반은 '조건지워진' '환영과 같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난 진실한 실재인 것이며, 탐 진 치 삼독심의 불기를 끔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불교에서의 믿음은 이성과 경험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하면 할수록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신앙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불법은 모든 이들이 와서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성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분석을 가하도록 요청하신 유일한 종교적 스승이십니다. 불법이 진실이라는 증명, 붓다의 깨달음이 진실이라는 결정적 증명은 가르침 그 자체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발견이나 마찬가지로 불법의 진리도 실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성과 직관적 통찰에 의해서 그것을 시험하고 증명할 수 있으며, 불교도에게는 이와 같은 지성적 자유의 헌장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은 제가 진리를 찾아 처음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저를 사로잡았던 불교의 특징적 내용 몇 가지를 들어보인 것입니다. 그 후로도 매력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많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법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 것입니다. 법을 탐구해 나가면 우리의 시야에는 항상 새로운 전망이 열려 옵니다. 진리의 새로운 측면이 계속하여 드러나면서 신선한 아름다움이 펼쳐집니다. 그저 법을 지적으로 즐기기만 해도 그처럼 많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거늘 직접적 통찰, 즉 관법(vipassanaa)을 실제로 닦을 경우 어떤 경계를 체험하게 될지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치고 이에 비견될 만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저의 생각만 밝혀 둘 뿐입니다.

 

 

 

애니미즘(물활론, animism)

17 

모든 자연물에도 마음 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학설.

 

 

좋은 벗 / 잡아함경 중에서

어느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어떤 사람이 객지에서 가장 좋은 벗입니까.?"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집안에서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정숙하고 어진 아내는 집안의 가장 좋은 벗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일가친척이니라."

"그렇다면 미래의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평소에 닦은 선행이 미래의 가장 좋은 벗이니라."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 - 선비들의 노변 야담

 

 

어느 날 송강[松江] 정철[李月沙]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교외로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하여

심일송[沈一松], 이월사[李月沙]등을 만나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술판이 무르익자 . .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내놓기로 하였다.

 

먼저 송강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맑은 밤, 달 밝은 때에 다락위로 구름지나는 소리가 제일 좋겠지.”

 

이어 삼일송이 말하기를

“만산홍엽(滿山紅葉)인데 바람앞에 원숭이 우는 소리가 제일이로다.”

 

그러자 유성룡이 뒤를 이었다.

“새벽에 졸음이 밀리는데 술 거르는 소리가 제일이다.”

다음에는 월사가 말하였다.

“산간초당(山間草堂)에서 선비가 시 읊는 소리가 아름답지.”

서로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백사가 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 . .

 

“제일 듣기 좋기로는 동방화촉(洞房花燭) 좋은 밤에

신부가 다소곳이 치마끈 푸는 소리(해금성解襟聲)가 제일이지!!”

 

그러자 모든 이가 박장대소를 하며

이구동성으로 백사의 의견에 동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