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법

2015. 9. 19. 21: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통도사]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법

부증불감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미 원만 구족되어 있으나,
우리의 분별심이 늘어나고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차별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도리를 바로 터득하면
참으로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열립니다.

여기 백만 원의 돈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대답하자면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돈일 것입니다.
즉, 어떤 이에게는 많은 돈이며,
어떤 이에게는 적은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백 만원을 가지고,
평범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재벌들에게 백만 원의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작은 돈일 수 있습니다.

본래 백 만원이란 돈에, 많다, 혹은 적다라는
고정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백만 원은, 한없이 가난한
인도나 북한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 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천 원, 몇만 원과도 같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만 원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 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공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 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즉,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 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으며,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 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
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이 있게 됩니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의 철학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
타인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인 것입니다.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증불감이기에...

 

 

 

 

'방김거사야거 (訪金居士野居)' 

 

가을 그늘은 아득하고 사방의 산은 비었는데

낙엽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히 붉었네.

 

시내 다리에 말 세우고 돌아갈 길 묻나니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을 모르네.


秋雲漠漠四山空(추운막막사산공)

  落葉無聲滿地紅(낙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입마계교문귀로) 

不知身在畵圖中(부지신재화도중)

 

 


 

프란치스코 교황의 10계명 

 

①자신의 삶을 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게 내버려두라.

②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당신을 퍼주라.

③조용히 나아가라.

④건강한 여가감각을 가져라.

예술, 문학을 즐기고 아이들과 가까이하라. 소비중심주의가 불안을 낳는다.

⑤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⑥젊은이들을 고귀하게 만드는 일자리를 창조할 혁신적 방법을 찾자.

⑦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라.

⑧부정적 태도를 버려라.

남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이 낮은 것을 반영한다.

이런 태도를 버리면 건강해진다.

⑨남을 개종시키려 하지 말고 남의 신념을 존중하라.

⑩평화를 위해 행동하라.

 

○“행복은 최신 스마트폰, 쾌속 스쿠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자동차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서 온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이야기할지 다시 공부하는 것이다.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대화를!”

○“좋은 가톨릭 신도가 되기 위해 토끼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잘 양육할 책임이 있다. 이는 명쾌한 진리다.”

○“누군가 내게 어머니에 대한 쌍욕을 하면 한 방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남에게 도발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신앙을 모욕해서는 안 되고 조롱해서도 안 된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젊은이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쓸 모 없는 데 쓰고 있다. 웹과 스마트폰에서의 채팅,

과도한 TV 시청은 정말 중요한 것에서 우리를 떼어낸다.”

○“아무런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 형태의 독재다. 자본주의는 공공선을 위해 시장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하는 국가의 권리를 묵살하는 새로운 독재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