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찰나

2015. 10. 3. 20:1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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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문명속에서 "철학" 하기

http://chaos.inje.ac.kr/Alife/philosophy_season&discretion.htm

사라진 계절,철없는 과일


현대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계절과 밤낮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생명은 계절의 주기에 민감하다.한낱 땡볕에 무성하던 신록도 가을

이면 겨울을 대비해 잎을 떨어뜨린다.가을이 오면 벌레들은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땅속에 알을 낳고 죽는다.인간은 계절을 모른다.무더운 여름은

차가운 에어컨의 냉기 속에서 겨울처럼 살고 추운 겨울에는 난방된 실내에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여름처럼 산다.


동물은 해가 떠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잠자리를 찾아 든다.(물론 야행성

동물은 그 반대주기를 따른다.)휘황한 조명아래 밤이 사라져 버렸다.요즈음

대형마켓은 밤이 되면 쇼핑하러 온 손님들로 더 붐빈다고 한다.



『黃帝內徑』에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인간생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요점은 봄,여름에는 활동을 많이 하고 가을,겨울에는 활동을 적게 하여,

天地의 陰陽에 생활을 맞추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현대인의 살아가는 양태를 보면 걱정되는 점이 많다.겨울에도 여름과

똑같이 활동하고,밤에도 낮과 같이 사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모든

운동을 살펴보면 수축된 후에야 팽창할 수 있다.그처럼 사람도 겨울에 충분히

수축해야 여름에 힘차게 팽창할 수 있다.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처럼 겨울에

활동을 많이하면 여름에 팽창하기 위한 수축을 할 수 없게 된다.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체력이 약한 것은 바로 음기로 수축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것도 똑같이 문제다.혹 대신 낮잠을 자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그러나 낮잠을 자면 비록 육체는

잠들지 모르지만,몸 깊은 곳에 있는 精氣까지 잠들지 못한다.그러므로 잠은

반드시 밤에 자야 하는 것이다.물론 낮잠을 자는 것 만으로도 살도 찌고,피도

생길 수가 있다.그러나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근원적인 氣는 우주의 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낮에는 잠을 자지 못한다.(박찬국,『한의학 특강』

,집문당,152-153면)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도 속일려고 한다.왕성한 젊음의 열정이 있으면

조락해가는 늙음의 관조도 있다.그러나 요즈음 "늙은 젊은이"가 유행이다.

장수의 비결을 찾아 늙은 젊은이로 꽉 채우겠다는 것이 현대의학의 주요

관심사이다.오늘의 우리의 정치는 도무지 늙을 줄 모르는 그래서 "철없는"

"불멸의 청춘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은퇴는 꼭 기력이 쇠했기 때문은

아니다.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에서처럼 다음 세대에 길을 터 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조병화,『시간의 宿所를 더듬어서』,(1964)



이것이 자연의 이법이고 자연이 자신을 건강히 되살려내는 방법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계속)

 

철없는 문명속에서 "철학"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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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계절,철없는 과일

계절이 사라진 것의 대표적인 것은 우리들의 먹거리이다.봄에는 풋풋한

생명력을 토하고 있는 달래,냉이,쑥 등으로 겨우내 무기력해진 생명력을

보한다. 여름은 과일과 채소의 계절이다.포도,복숭아,딸기,수박,참외,

토마토를 먹고 가을에는 햇곡과 사과,배,감,대추 등의 과일을 먹는다.

이것들을 우리는 "제철 과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과일에는 계절이 없다.겨울에도 슈퍼의 매장에 가면 수박이나

참외를 사서 먹을 수 있다.이것은 물론 노지에서 재배된 것이 아니고

하우스에서 재배된 것이다.하우스 재배가 늘어난 것은 자연재해 등을 우려해

농민들이 갈수록 노지재배를 꺼리는데다 도매상들도 안정적인 물량확보를

위해 하우스 재배를 권장하기 때문이다.농산물이 점차 공산품을 닮아가면서

제철과일을 먹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철의 과일을 먹으라고 한다.나는 그것이 하우스 재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도 그것이 땅과 계절의

왕성한 정기를 뽑아서 자란 제철의 노지의 과일과 같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일단 그 향기와 맛이 다르지 않은가? 이래저래 "철없는 과일"이

대세를 이루면서 우리는 자연의 미각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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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2가지 의미


우리말에 "철"은 2가지 의미가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철1 ①일정한 특징의 기후를 나타내는, 봄이나 가을이나 겨울과 같은 때. 계절

봄철/철이 지난 옷/철따라 피는 꽃/철이 바뀌다/철이 이르다.

②일년 중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거나 어떤 일이나 현상이 으레 이루어지는

일정한 때

김장철/농사철/모내기철/장마철/요즈음은 장사가 잘 안되는 철이다.

철2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세상사는 이치나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

상태. 또는, 세상 이치나 사람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정신적 능력. 지각. 분별

철이 나다/철이 들다/아직 철이 없는 아이.


철1의 의미에서 철2의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면 이것의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조상들은 자연의 이법이 바로 우리가 지켜 나가야할 인간의 규범으로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가진 분별력은 다름 아닌 자연의 철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철"(철2)이 없는 것이고 이것은 자연의

"철"(철1)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영어와 비교해 보면 차이를 잘 알 수 있다.영어에는 이 두 의미에 대응

하는 단어가 하나가 아니고 각각 다르다. 우선 철1에 해당하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계절을 의미하는 season일 것이다. 그래서 제철과일은 seasonable fruit

( fruit in season)이고 그 반대는 unseasonable fruit( fruit out of season)

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계절에 맞지 않는","시기가 좋지 않는" 등의 뜻이다.

말하자면 영어의 season에는 철1의 의미 밖에 없다.


"철없는 행동"을 unseasonable behavior로 번역하면 아주 어색할 것이다.

그것은 분별없는 행동을 의미하므로 indiscrete behavior(또는 thoughtless

behavior)로 번역해야 본 뜻에 가까울 것이다."철이 들었다."고 했을 때 이

말은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눈-반성력

reflection-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시건"이 든 것이다. 이것은

have a discretion으로 discretion이 철2의 의미와 부합한다. 그것은 season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길(道)를 하나로 본데 대해서 서양-적어도

근대의 서구의 주류사상-은 그 둘을 무관한 둘로 본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낳는데 예컨대 인간의 복제는 자연이 취하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취해야할 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의 도-차라리 자연법칙이라고 불러야겠지만-와 인간의

도(윤리학)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season과 discretion 만큼이나 다르다.

과학자는 말하자면 season(사실)에만 관여할 뿐 discretion(가치)은 그들의

관여사항이 아니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사회에 던지는 파문과 폐해는 과학기술

자체에 있다기보다 인간이 그것을 악용한데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정신이 원자폭탄을 죄책감 없이 만들게 했으며 유전자 조작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이원론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지식욕에 불탄 파우스트 박사는 그것을 준다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혼을 내 주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season을 준다면 discretion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지만 하나인 "철"의 철학에서 볼 때 이미 계약과 더불어 그의 혼은 악마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둘은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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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문명


이 둘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 박사는 철(season)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철(discretion)이 박탈되었음으로 진정한 철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 구원해 주리라는 괴테의 귀결도 철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구 난장판 짓을 해 놓은 다음 신이 사태를 수습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재벌 2세의 망나니 질처럼 보인다. 그것을

서구문명이 희망했다면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나는 신이 그런 식으로 구원의

손을 뻗어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신이 야훼든 알라든 미륵불이든

한울님이든..


철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효율성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연을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자연이 가하는 구속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모두가

지켜야 하고 또 지키고 있는 구속인 만큼 그것을 어길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익은

곧 밑천을 드러낼 것이다. 더군다나 그 빚은 그것을 빌린 사람이 아니라 전체가

갚아야 한다. 공적 자금 비슷한 것이다. 어떤 재벌이 저지른 짓을 우리 국민

모두가 갚아 나가야 하듯이 말이다.(자신이 진 부채를 모두에게 떠넘기는 이것

또한 전형적 철없는 짓의 하나이다. 우리 모두 공적 자금이란 말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 된다. 현란한 말로 장식해본들 그것은 부채 떠안기기이다.)


요즈음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 여부를 두고 "폰지사기"란 말이 언론을 타고

있다. 몇년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이낸스사의 사기와 비슷하다. 폰지

사기는 미래의 수익을 핑계로 빚을 끌어다 현재 약속한 수익을 지급하는

수법이다. 즉 나중에 참여한 투자자의 돈을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지급해 그

사업이 성공적으로 보이는 게 하는 방법이다. 1920년대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었는데 찰스 폰지란 사기꾼이 떼돈을 벌게 해주겠다면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첫 투자자들의 이익금은 그 다음 모은 사람들의

납입금으로 지불했다. 더 이상 사람을 모을 수 없을 때 사기극은 끝장이 났다.


과학기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이 아니다. 과학기술을 통해 한 방울의

기름도 공짜로 만들어낼 수 없다.그것은 자원을 조직하고 집중시키는 방법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은 그것의 효율성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에 착취의 강도의 증가의 표현일 뿐이다. 폰지사기에 초기투자자들이 모두

이득을 보듯이 우리 모두는 이득을 본다. 그러나 그것이 끝났을 때 막차를 탄

사람들이 그 부채를 끌어안게 된다. 그 막차가 우리의 아들대일 수도 있고

손자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더 연장될 수도 있다.(개인적으로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파장이 오리라 생각한다. 파장에 다가갈수록 불안감이 그것을 더

가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분명히 막차는 있다. 오늘 빚으로 흥청망청

하면서 그 빚을 자손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넘긴다면 철없는 조상임에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그 효율성의 비결은 그 무책임성이다. 마구 가져다 쓰고 거기서

생기는 부산물들-오염, 자원고갈 등-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것을 모두 고려한

생산양식에 비해서 엄청난 효율성을 가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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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찾아서


哲學은 원래 Philosophy에 대한 일본인의 번역이라고 한다. 철학은 "밝은 이치"

(哲)를 "궁구"(學)한다는 의미이므로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을 의미

하는 Philosophy에 대한 그럴듯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것을 60년대부터 길흉

화복을 점치는 점술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전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이미지-그러나 이 발상만큼 반 철학적인 발상도 없다-로 각인되기 시작

했다. 그래서 일반인은 철학 하면 점치는 기술 정도로 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철학도들은 이 이미지 때문에 보통 집안에서 난리를 겪은 경험을 다 갖고 있다.

이 깃털처럼 가벼운, 이 척박한 反철학적 시대에 그래도 철학을 하겠다고 작정한 우리 학생들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철학이란 말의 이미지도 잘못 각인되어 "철학하고 있네"라면 "놀고 있네"라는

경멸조의 의미까지도 일상어 속에 들어왔다. 탁상공론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떤

모 대학 철학과는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 명칭을 바꾼 경우도 있다.

요즈음은 "생존"자체가 지고의 가치가 되고 있는 도착된 세상이기는 하지만

아이덴티티를 바꾸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과연 철학도가 추구할 길인지 회의를 갖고 있다. 가끔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철학이 있는 분"의 식인데

이것은 보통 높은 사람을 언론이 추켜세울 때 가끔 쓰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어느 높은 분으로부터 들은 말은 "자네는 철학이 없어!"라는 일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철학이라는 말을 바꾸자는 논의가 철학회 안에서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착된 용어를 바꾸기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하되 그것을 순수 우리말로 해독

했으면 한다. 우리말의 함축이 훨씬 더 본래의 철학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지혜에 대한 사랑"이나 "밝은 이치의 궁구"라는 함축 보다 더 깊은 내포와 더 넓은 외연이 부여될 수 있다. 그러면서 총체성과 더불어

구체성의 함축도 아우르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철학이 가져야할 중요한 요소인

실천적 측면 까지 아우르고 있다.


철학, 그것은 철을 밝히고 철을 배우고 철을 실천하는 학문이다. 철을 밝힌다는

것은 이 우주 속에 인간의 위치에 대한 궁구이며 철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말 그대로 "철들음"의 과정이다. 그것은 성숙의 과정이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철없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크게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작게로는 편의 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있는 일상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결합은 "철없음"에 기초한 전형적 문명이다. 또

그것이 그것의 융성의 비밀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것의 반 철학적 태도는 그 기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융성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탑 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가 애써 외면할려고 할 뿐이다.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떠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시적 이득을 미끼로 모든 사람에 최면을 거는 폰지사기에 가깝다. 이 문명으로 하여금 주문에 풀려나 "철들게 하는 것",그것이 철학의 과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유예해 줄지 우리는 모르지만 말이다

영원과 찰나..크기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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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시간

어린 초등학교 시절. 아침을 먹고 나온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3교시

들어가면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무더운 여름, 학교를 파하고 냇가에서

친구들과 뒹굴다가 한참 놀았다 싶어 하늘을 쳐다보면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아침을 걸리고도 배고픈 기색이 없고 점심 먹고 나면 금방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 초 중 고등학교 12년은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건만 지금

에 와서 12여년은 바로 엊그제 같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간의 유수 같은 흐름을

한탄했던가?


해가 지고 달이 뜬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시간을 측정 한다. 이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일률적으로 흐른다. 이것이 우리의 주관적 경험과는 관계없이 외부에서 무차별적으로 흐르는 뉴턴의 절대시간이다. (아인시타인의 시간도  그 시간 자체가 의식적 경험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뉴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이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느낌으로는 어떤 때는 시간이 빨리 날라 가고  어떤 때는 느릿느릿하게 기어간다. 과학의 논의와는 별도로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칸트, 그리고 베르그송 까지 철학자들은 시간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주관적 현상임을 강조해왔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철학자들의 관점도 철학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며 객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서 주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 까지 걸치는 넒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전자에 칸트가 있다면 후자에 베르그송이 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은 우리의 선천적 직관형식이기 때문에 객관적 실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 경험 안에서는 보편적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적으로 그것은 "지속(持續)"(필자는 아직도 이것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이며 그것은 우리 경험의 충실도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는 이 중간쯤에 이 둘을 매개시키는 다리를 놓을 수 없을까 생각해 왔다. 필자가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크기와 시간을 연관시킨 동물생리학자들의 시간 개념이다. 다음절은 동물생리학자 슈미트-닐센의 생리학적 시간에 관한 논의이다.

(Schmidt-Nielsen,Scaling,Cambridge Univ.,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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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시간


심장박동수와 시간


작은 동물은 큰 동물 보다 더 빠른 템포로 일생을 산다. 호흡은 더 빠르고, 심장은

더 빨리 뛰며 다리는 더 빨리 움직인다. 모든 것이 큰 동물에 비해 더 빠르다.

시계상의 시간이 큰 동물이든 작은 동물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생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뾰족뒤쥐의 심장박동수는 분당 1000회인데 대해 코끼리는 30회에 지나지 않는다.

코끼리의 심장이 1000회 뛰는 데는 약 30분이 걸린다. 다른 생리적 기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뾰족뒤쥐는 코끼리보다 더 빠른 삶을 살고 그래서 시계상의 시간

단위는 이 두 동물에게서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생리적 시간은 상대적 개념

이며 동물의 크기가 그 동물의 시간을 규정한다.


작은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뛰고 박동간의 간격도 더 짧다. 진동수와 시간(주기)은

반비례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진동수는 시간의 역수다.

진동수=1/주기


체중(Mb 단위kg)에 대한 심박수(fh)는 통상 분당 심박수로 표시하는데 슈탈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1회 박동에 요하는 시간(th,단위 분)은 다음과 같다.


Mb가 1kg이면 심장박동주기는 0.249초로 1초의 1/4이다. 초당 4번 뜀으로 분당

240번 뛰게 된다.


생리적 빈도 가운데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은 포유동물들의 호흡 빈도이다. 슈탈에

따르면 동물들의 호흡 빈도는 아래와 같다.



이 식에서 동물들의 호흡시간을 알 수 있다.


심장박동수와 호흡수에서 체중의 지수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심장박동수와 호흡수간의 비율을 계산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지수 0.01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장박동수는 호흡수의 대략

4.5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율은 동물의 크기와는 무관하며 모든

포유동물에 대해서 타당하다. 물론 이 경험식은 평균값이며 동물에 따라서는

이 일반 값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새는 포유동물 보다 더 느리게 호흡하며 심장 박동율도 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호흡수에 대한 심장박동수의 비는 약 9.0이다. 이것은 호흡 당 심장박동수가 새가 포유동물의 2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대사율과 시간


동물의 삶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측도는 대사율이다.

아래 식이 보여주듯이 대사율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한다.



시간은 대사율의 역수이기 때문에 대사시간(tmet) 또는 생리적 시간은 체중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이것은 우리가 심장 박동률에서 본 것과 동일한 관계에 있다. 아주 작은 동물에게는

심장이 1초에도 서너 번 뛰지만 큰 동물에게는 그 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똑같은 것이 모든 대사율의 과정에도 적용된다. 생리적 시간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시계의 시간의 척도에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대사적 시간을 생리적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며 실제

시계의 시간은 동물의 크기에 따라 그들의 삶에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동물들의 삶: 얼마나 길고, 얼마나 빠른가?


작은 동물들의 삶은 아주 빨리 전개되며 그래서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나 생리적 시간에서는 그 동물이 크든, 작든 무관하게 똑같은 수명을 누린다.

30g의 쥐는 분당 150회 호흡하고 일생(3년)동안 2억 회 호흡한다.5톤의 코끼리는

대략 분당 6회의 호흡을 하며 40여년의 생애동안 쥐와 대략 같은 수의 호흡을

한다. 쥐의 심장은 분당 600번 뛰며 일생동안 8억 번 뛴다. 코끼리의 심장은 분당

30회 뛰는데 일생동안 뛰는 심장박동수는 쥐와 비슷하다.


물론 수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가혹한 자연환경 하에서 동물들이 평균적으로 살아가는 기간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포식자가 없는 상황에서 살수 있는 최대값을 잡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사육장의 동물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조사해 보면

포유동물의 수명은 그 크기에 의존하며 다음 식에 따른다.


새장속의 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위의 두 방정식은 인상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수명이 몸의 크기에 따라 증가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포유류와 조류의 식에서 그 지수 값이 사실상 같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포유류보다 새가 더 오래 산다. 그 계수의 차가 약 2.5이기

때문에 새가 같은 크기의 포유동물 보다 약 2.5배 오래 산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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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의 하루


생리적 시간으로 보았을 때 모든 포유동물들의 수명은 같다. 그러나 천문학적

의미에서의 수명은 다른데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그 몸의 크기이다. 동물

들의 일생 동안의 심장박동수와 호흡수 그리고 대사의 횟수는 동일한데 사이

즈가 커질수록 그 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논의를 확장시키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생리적 시간은 바로

의식 경험의 가장 원초적 형태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생리적 시간을 산다는

것은 그 의식 경험의 양에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질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의식경험이 더 고차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고차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

필자가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있는데 다음 책을 참조)

다만 두 동물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어린이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노인의 시간은 빨리

간다. 같은 시간 안에 어린이가 겪는 의식의 경험량은 노인의 경험량 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10대가 끝났을 때 70수명의

2/7를 살은 것이 아니라 이미 반 이상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리적 시간으로 본다면 20대초에  -가속도까지 감안하면-이미 40대에 접어든

것이다.(이 수치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편의상 붙여본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서서히 시작해서 점점 가속되는 차에 비유할 수 있다.20대초에

살날이  앞으로 2/7가 남았고 느긋해할 일이 아니다. 시간상으로 보아 이미

반을 훨씬 지난 것이다. 천재들은 이미 20대에 그 과업을 완수한다.

(아!필자의 초라함이여!)


시간의 의미는 개인의 일생에서도 달라지지만 크기가 다른 두 종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10g의 쥐에게 시계상 시간으로 하루가 100톤의 푸른

고래에게는 거의 2달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종이 사는 생리학적 시간은 같다.

그들은 똑같은 양의 시간을 향유하고 죽는다. 하루살이의 하루도 그 자체로서는

영겁이다.


다시 걸리버로


걸리버와 릴리푸트인이 생리적 시간에서는 동일한 시간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시간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에

1년동안 머물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기간이 릴리푸트인들에게 생리적 시간

으로는 얼마일까?



  52년이 흘렀다! 걸리버의 1년은 릴리푸트인들에게는 52년에 해당한다.

걸리버를 맞이했던 릴리푸트의 왕을 비롯한 그 세대는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

걸리버가 소인국을 떠날 때 그가 도착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노인들은 걸리버가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의

그날을 마치 전설처럼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 만다라 한 점에 전 우주공간 포함 -

-‘부분과 전체의 대응’도형으로 설명 -


불교, 특히 밀교에서는 만다라가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태장(胎藏)

만다라의 태(胎)는 여성의 태, 자궁(子宮)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그

속에 여러 부처와 보살이 자신의 목적과 사명에 따라 자리잡고 있다. 중심에

대일여래(大日如來)가 8개의 연꽃에 둘러싸여 있고 그 주변에 4분의 부처, 4분의

보살이 앉아 있다. 상·하·좌·우(동서남북)의 각 자리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다.

귀에 익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그리고 다소 귀에 설은 보당

개부화 무량수 천고뢰음 여래도 있다

금강계 만다라 중심은 윗면 한가운데 대일여래가 있고 아미타, 보·생(寶·生),

불공성취(不空成就) 등의 부처가 있다. 요컨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부처와

그 모임 등이 공간의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전체를 상징한다.

‘전체와 부분은 같다(多卽一, 一卽多)’를 구현한다.


만다라의 세계는 어느 구석이든 그것을 지키는 부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디에나 부처가 있다’는 불교 철학을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근 컴퓨터의 등장으로 C.G(Computer Graphic)가 새로운 공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C.G는 원과 사각형 등 기하학적 도형을 되풀이하는 그림을 그린다.

접하는 두 원 사이에 작은 원을 그리고 또 이들 3개의 원과 원 사이에도 보다

작은 원을 그린다. 이 작업은 이론상 끝없이 진행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부처가 그려지는 영역일지라도 이 사이에는 또 새로운 부처가

존재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저마다가 대일여래를 구현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구도는 혼돈스럽게 보이면서 전체로서

질서가 유지되어 있다.


이 사실은 같은 공간 내의 영역이라면 전 공간과 같은 정도의 무한점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수학적 발상과도 같다.


만다라는 불교적인 세계를 상징하고 또한 그것은 현실의 세계를 이상화한다.

목석(木石)에도 부처가 있고 모든 인간에게도 부처가 내재한다는 사상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 궁극에는 부처의 뜻을 내가 구현하고 있으며, 이 나라, 이

국토는 부처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의 조상은 그런 뜻을 천원

지방(天圓地方, 즉 圓과 方)의 우주를 구상했다. 4대문을 갖는 방(方)형이다.

원과 방은 만다라의 기본도형이다. 남산, 북악이 있고 그 사이에 도성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동서로 위치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복을 위한 풍수사상이 아니다. 현실의 환경을

성역화 시키고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윤리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키는 작업

이기도 했다.


컴퓨터는 새로운 공간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여 만다라

적인 공간의 의미를 실감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한이 몇 개의 단순한 도형에

환원되고, 그 속에 전체의 구도가 있다.


밀교의 수행법에는 만다라를 앞에 두고 자리를 잡아 합장하여 다라니경을

외우는 것, 또는 명상을 하는 것 등이 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마음이

부처의 세계(만다라)에 몰입해 가고 또 거꾸로 만다라가 나의 마음에 들어

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되는 절대의

경지를 희구하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이 작업을 ‘무한의 유한화’, ‘부분과

전체의 대응’ 등으로 말한다.


불교적 우주관, 시간관,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에 입각한 수행법이다.

부처의 세계는 무한이면서도 작은 평면상에 만다라로 그려지기도 한다.

유한 세계에는 부분이 전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부처와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는 찰나의 빅뱅 이래의 영겁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렴되고

한 점에 전우주 공간이 내포된다.

김용운<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불교,삼라만상의 보이지 않는 변화사유-

-수학,함수개념 명확한 변화요인만 파악-


불교의 근본사상인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은 현상을 연기의

결과로 본다. 즉 무상과 연기는 동전의 앞, 뒤와도 같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근대 수학의 근본 개념은 현상을 이루는 요소의 변화는 하나의 결과를 가져

온다는 함수적 개념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변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이지만 불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보이지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까지도 변화의 요인으로 삼는데 비해 수학은 오직 확고히 인식되는 요인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필자는 고대 유적의 발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왜 중요한 유적은 한결같이 땅에

묻혀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곤 했다. 땅위에 그대로 있었다면 풍우로 마멸되거나

흩어져 버렸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답이 아닌 무엇인가 다른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답은 진화론으로 유명한 C. 다윈에 의해서 설명된다. 흰 석회가루를 잔디밭에

살포하고 그대로 방치해 둔후 10년후 다시 그곳을 찾은 다윈은 석회가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파 보았다. 그러자 땅에서 약 7㎝의 자리에

하얀 석회층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바로 지렁이의 활동 때문이었다.


지렁이는 조금 조금씩 땅 속을 파헤치고 다니며 자신들의 배설물로 비옥한 땅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 유물들의 대부분은 땅

속에 묻혀지게 된 것이다. 땅의 표면에 있는 재나 쓰레기와 같은 것이 서서히

파묻혀 수십 년이 지나면 땅 밑으로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면서 층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을 발견한 다윈은 고대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으로 달려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지렁이의 작은 구멍이 고대 건물의

어디에나 있음을 확인했다. 그 후 전 세계에 걸친 지렁이에 관한 연구결과로 1에이커(약 1200평정도)당 평균 약 5만 마리의 지렁이가 있음이 추정되었으며, 실제로 지렁이는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에서나 옥토 조성에 맹활약을 하고 있다. 짧은 기간동안엔 눈에 띄지도 않던 지렁이의 미미한 작업이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산의 폭발 못지않은 엄청난 지질학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인류 문명 사상 최대의 발명의 하나가 괭이였고 인간은 그것으로 땅을 갈아 왔다. 그러나 지렁이는 괭이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땅을 가꾸어 왔으며, 4억년 이전의 지층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렁이의 화석은 그 활동이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음을 증명한다. 그 미미한 작업이 동식물 모두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상에는 우연한 동기로 시작되고 엄청난 긴 세월을 통해 면밀히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공기, 물도 땅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렁이의 활동

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꽉 차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의 극히 작은 부분이

어느 천재의 예지에 의해서 밝혀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관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연의 묘미라는 말속에 감추어져 있다. ‘산천은 고금동(古今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확고한 것처럼 보이는 하늘과 땅을 포함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순간에도 삼라만상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철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제행무상”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 변화의 목적은 무엇이며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생물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때때로 똑똑한 사람들은 ‘무엇 무엇 때문에’라는 식의 말을 하지만 그것들은 한낱 가설에 불과하다. 요컨대 변화를 야기하는 그들의 행위에는 인간이 말하는 목적, 또는 의도라는 것이 없다.



지렁이는 고대 유적을 감추기 위해서 배설물을 땅 위에 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들 삶의 양식의 결과가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자연은 변화하기 위해서 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기론의 핵심은 세상 모든 것이 무목적, 무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 변화의 바다 속에 헤매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함수 개념이 명확한 변화 요인만을 파악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상 처음부터 그 한계가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지성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그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것에 지성인간(호모사피엔스)의 존귀함과 한계가 있다.



김용운<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가을 편지

 

 

이해인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 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무량한 말씀들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 온 날을 고마워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 이해인(본명 명숙, 필명 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1945 ~ 강원도 양구 출생
1964
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 시작

1975년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과 졸업,

1985년 서강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70 `소년`지에 `하늘` `아침`을 발표하여 등단.

그의 시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으로

인정 받기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따라서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시에는 깊은 종교적인 신앙과 영감이 깔려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게 함축되어 있다.

작품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겪는 고독과 슬픔,

영혼의 병에서 오는 깊고 심한 갈등을 진솔하게 나누고자 하는데 있다.

그의 시는 마치 영원한 구원자에게 바치는 한 떨기의 꽃,

눈물의 제단에서 피어 오르는 향불처럼 이 세상의 고뇌와 법열의 진정한 고백이다.

시인의 겸손하고 자신을 바치는 진지한 자세가 느껴진다.

1인칭과 2인칭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독자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고통을 시인과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그는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고 있다.

시집

민들레 영토 (1976),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979),

시간의 얼굴 (1989), 사계절의 기도 (2000), 다시 바다에서 (1998),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1999),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1999)

9회 새싹문학상 (1981), 여성동아 대상 (1985), 부산여성문학상 (1998)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