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0. 20:3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분석과 객관의 눈으로 꿰뚫어 보며 미국인 한 분이 어떤 불교학자에게 “불교를 삼천단어로 쉽게 설명해 달라”고 청탁 했습니다. 이에 불교학자는 “열 단어로 하면 어떨까요?” 하고는 “세상만사는 모두 늘 변한다”고 답했습니다. 세상만사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법칙에 맞게 살자는 뜻인데, 조금 억지 같아 보이지만 불교를 잘 설명한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Everything is changing”이라고 표현할 텐데 이는 곧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뜻합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고 세련된 말을 써서 얘기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佛法 설천해야 참회 부처님이 보는 세상이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등의 삼법인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법당에서도 여러분들이 줄을 맞춰서 앉아 계신데 사실 저는 편안하게 둘러앉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정견에서 바를 정(正)자가 여러분들 앉아 계시는 것처럼 줄 맞추는 것이 바를 정 일까요? 저는 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줄을 이루는 우리들의 따뜻한 가슴과 마음이라고 봅니다. 세상을 멋지게 만들어 보겠다는 그 마음, 그러니까 껍데기로 보이는 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줄 사이사이에 흐르는 마음이 얼마나 더 따뜻하고 끈끈한 것인가가 중요하며 그 마음이 순수해야 바를 정(正)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는가’가 ‘위빠사나’입니다.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을 지극히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꿰뚫어 보는 것, 즉 통찰입니다. 직관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또 하나는 분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분리라는 말은 떨어져서 본다 즉, 띄어놓고 본다는 말입니다. 객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위빠사나’라는 말은 분석과 객관의 눈으로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업 탓’이전에 바른 행동을 여기서는 다른 말로 의도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도라는 말은 목적 의식인데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간의 측면이고, 하나는 세간의 측면이 될 수 있습니다. 출세간 측면에서 보면 궁극의 목적인 열반과 해탈의 성취가 목적일 것이고 세간 측면에서 보면 지금 보다 더 지혜롭고 더 자비롭게 살겠다는 현실성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목적’은 ‘발원’에 해당되는 것이라 봅니다. 정어는 바른 말이요, 정업은 바른 행동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정업을 좀 들여다 보겠습니다. 정업에서 ‘업’을 단순한 ‘업’으로 이해되면서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일단 이 ‘업’은 ‘행동’과 우리가 익히 말하고 있는 ‘업’과 분리해 생각할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하는데 무슨 뜻일까요?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로 실천할 때 그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따라서 그냥 외워버리면 소멸된다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불교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생명과도 연관되지만 이해를 위해 ‘생계수단’을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바른 생계수단’이라고 할 때 바르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가 살자고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정말 간단하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생계수단이요 직업입니다. 고기를 잡지만 어떤 의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생명을 해치는 일을 재미삼아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부들은 천도재를 많이 올리는데 참으로 올바른 행동입니다. 어떤 직업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이어가든 그 생활 속에 남을 해치는 의도성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정명이 아닌 것입니다. ‘정념’은 깨어 있는 것 어떤 최선의 노력이냐 하면 생기지 않은 악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이미 만들어진 악업은 없애도록 애쓰는 것이며 생겨난 선업은 키워나가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업은 생기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정정은 여러분 큰스님들 법문을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니 오늘은 정념을 좀 짚어보겠습니다. 너무 쉬우니 간과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팔리어 경전에서 보면 ‘정념’의 염(念)자는 기억을 뜻합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말은 우리가 머릿속에 집어넣는다는 의미(Input)와 기억한다는 의미(Memorize) 또는 상기한다는 의미(Recall)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유념’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또 하나는 항상 깨어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 하고 연결시켜 보면, 업은 의도성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결국 수행이라는 말은 지금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것과 관련된 일을 제대로 알고 꼭 의도된 행위로 만들자는 겁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념은 정사로도 연결 되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불교를 다른 말로 통 틀어서 말한다면 우리가 늘 성성히 깨어서 자신이 현재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정황들을 낱낱이 제대로 알아서 반드시 모든 행위가 내가 마음먹고 하는 행위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만드는 행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업이고, 업설입니다. , 어거지로 떠밀려서 억울하게 처벌받듯이 뒤집어 쓴 것 같이 여기지 않습니까? 반대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제 1선정부터 제 4선정까지의 선정을 제대로 닦고 그것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 ‘정정’이 맨 뒤에 있다고 해서 최후에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것도 잘못된 사고 입니다. 다시 삼학(三學)즉,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라고 하며, 정업, 정념은 계(戒)라 하며, 정진, 정념, 정정은 정(定)이라고 합니다 . 팔정도를 공부한 분 들 중에서 가끔 “정견부터 정정까지 순서대로 가야 하나요?”하고 묻습니다 . 당연히 정견 없이는 뒤에 것이 일어지지 않을 테니까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다음을 본다는 것이 분명하긴 합니다만 정정이 제일 뒤에 있으니까 그것이 가장 뒤로 가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이것도 서로 기대고 기대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덟 가지 중에서 한 가지가 빠지면 나머지 일곱 가지는 허깨비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연기의 이해를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정-혜 각각 분리 안 돼 그러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도덕적 삶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세상을 알고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음만 좋고 깨끗하다 해서 ‘계’라고 할 수 없듯이, 계는 정과 혜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혜 역시 계와 정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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