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 윤기붕

2015. 10. 17. 21: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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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 윤기붕

깨달음은 허구이다.
왜 깨달음이 허구인가?
굳이 부처님의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삼라만상은 이미 다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깨달음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 말에 힘이 생겼는가?

부처님 이전에도 그랬었고,
부처님 이후에도 그러한 자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현재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어떤 상태를 부러워하고 그것이 되기 위해
못나고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신을 버려두고
잘나고 구족하고 완전해 보이는 그럴듯한 자신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꼭 도나 깨달음이 아니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환경으로 살기 보다는,
자신에게 없는 보다 나아보이고 편해보이는 것을 향해서

매 순간 여행을 떠나고 있다.
매 순간 그렇게 진짜 자신은 외롭게 버려두고 말이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니 뭔가 노력의 댓가는 따라왔다.
지식도 오고, 이해도 오고, 잠시나마 평안도 오고...
그래서 그것에 만족하고 자신이 마치 무언가를 이룬 자처럼 여겨지고,
또 주위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인정해주니까,
자신의 노력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니 다시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대단함이라는 효과는 사라져버리게 되니
노력의 댓가를 얻었을 때의 그 느낌과 만족을 다시 얻고 싶은 마음에

다시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화라는 미끼가 있으니까...)
그래서 또 다시 노력을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것이 바로 깨달음에 대한 구함의 과정이다.

그런데,
현재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자신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왜 생겼을까?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사심없이 되돌아보면- 어릴 때의 모습부터..-
왜 내가 있는 그대로를 버리고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물론 태어나서 젖을 무는 순간부터이지만,
의식적으로 내가 아닌 내가 바라는 어떤 삶을 선택하기 시작한 삶이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꼭 한번은 되돌아보라.
왜 내가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고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했는지를...
도나 깨달음이라는 것을 구하기 시작한 이유를...
주위의 바램과 기대, 그리고 그들의 바램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즉,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한 몸짓과 행동들이 그 밑바닥에 있었음을 돌이켜보라...
아니면, 자신의 처지나 환경과 다른 비교된 보기좋은 어떤 상태를 바라기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얻기 위해서 떠나온 여행을..
그러한 과정에서 더더욱 정교해진 것이 바로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던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라...)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해도, 사람들의 마음의 속성이 처음은
노력의 댓가로 얻은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늘 그런 것이지 뭐....' 하는 시들함 속에 들어가게 되니,
스스로도 노력이라는 것에 대해 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새로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얻으면 자신의 힘듦이 끝나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고통을 끝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해
다시금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재물을 향해...
어떤 이는 권력을 향해...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
등등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위해...

그 보다 좀 나은 이는(좀 낫다고 비교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의 상태는 똑 같기 때문에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
얻어 봐야 사라질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사랑보다는
한번 얻으면 사라지지도 않고 다시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힘을 가진 어떤 상태를 바라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그대가 깨달음을 구하는 처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태어나면서 깨달음을 구했던가?
아니면,
이것 저것 구하다보니,
이것 저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해주지 못하니까,
결국에 종착역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고,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 어떤 것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으로 인하여
떠밀려온 것이 깨달음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을 가져보라.

깨달음이란....
비록 부족하고 못나고 모자라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하다보니,
수많는 구함과 좌절과 부딪힘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구하면 구할 수록 더더욱 깊은 나락으로 좌절을 하게 되니까,
그래도, 뭔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는
한 톨의 자각이 일어나면서,
그것에 대한 의문과 그것을 향한 몸부림을 일으키게 되고
그 몸부림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부처, 예수, 수많은 선지식들....)
삶이 있었다는 것을  지식으로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책과 생애를 보면서,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부처도 사람이요,

그것에 기대는 사람도 사람이니까...)

그것에 기대면서,
늘 보아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진짜 자신의 모습과
여태껏 자신이 뭔가 구하려고 노력했던 몸부림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치가 없어 보이고
‘진정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야할 길이라면 저러한 길이다.’
하고 도를 구하고 깨달음을 구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것이 우리가 도를 구하는 모습이다.
사실 부처도 그렇게 구했다.
그렇게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하는 삶이 바로 6년의 고행인 것이다.

부처님은, 그 고행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구함이 잘못됨을 알고,
고행을 멈추고 중도로 가셔서 그냥 자신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냥 자신이 되고보니,
삼라만상이 깨닫지 않는 존재가 없더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 버려두고,
항상 존재하지도 않는 생각속의 관념적 자신을 향해 떠나는
그 노력과 여행을 중지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잘나고 바람직하고 멋져 보이긴 하지만,
생각으로 바라고 노력해 나아가야할 더 나은 자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요,
비록 못나고 부족하고 모자라, 늘 덜떨어져 보이는 자신은,
매 순간 실재하는 자신인 것이다.
그 실재하는 현재에 사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있지도 않는 자신을 향해서 그것을 이룰 것 같이 속아온 거짓된 삶이 아니라,
비록 못나고 부족하고 덜 떨어진 모습이지만,
매 순간 현재의 자신과 함께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미 우리는 모두 깨달아 있다.
진정한 우리의 모습,
즉, 진아는 아무리 찾으려고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고 바람직한 멋진 모습은
우리의 생각으로 어떤 모양을 짓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라는 것이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재의 모습은,
단 한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고 늘 변화하고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것이 우리의 모습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나의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는,
양혜왕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대는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에,
"나도 모르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양혜왕을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 모르는 것이 바로 나다.
그냥 나일 뿐이다.

하지만, 찾으려고 노력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그 여행을 그만두게 되면,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듯이
너무나 생생하게 진아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깨달음은 마음이 알기 쉽게 이해되는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알 수 없는 현재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냥 나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우리가 부족하고 못나서가 아니라,
주위에게 인정받고 싶고,
교육에 의해서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고,
인기를 끌어서 사랑받고 싶고,
지금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지 못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하는 바람에
부족하고 못나게 된 것이다.

아담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따먹고는
낙원에서 쫓겨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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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하지 않는 삶>이라는 방을 만들어 윤기붕선생님의 글과 동영상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회원여러분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 유당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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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천 윤기붕선생님의 약력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명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때 경북 구미 선산군에서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99년에 찾아온 어떤 시련에 부딪치면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면을 면밀히 살피던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가

하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부정적인 면을 없애지 않고는 절대로

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부림치면 칠수록 벗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은 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로 떨어지기만 했다.

하루 24시간 단 한순간도 그 생각을 떠날 수 없었고, 나중에는 그 생각의 무게가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 생각은 뇌리속에 꽉 새겨져서 뗄려야

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스스로를 정죄하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속에서

수없는 자살에 대한 생각과 눈물로 자신을 한탄하고 쥐어뜯고, 그러면서도 죽지도

못하는 자신을 또 쥐어뜯으며 끝도 알 수 없는 나락속에서 헤매었다.

 

그렇게 4개월을 보내던 어느날 문득,

이 모든 것이 ‘생각’ 하나가 짓고 있다는 각성(覺醒)이 일어났다.

시련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이요,

그러면서 자신이 추악하다고 하는 것도 생각이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한것도 생각이라는 그러한 각성......

 

오직 그냥 ‘생각일 뿐’ 이라는......

 

그렇게 목이 탈 듯 힘든 고통이 한 순간에 날아갔고 모든 의문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으며  자신이 생각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절대 자유’였다.

이 우주에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한 생각 착각 뿐,

그 어느것도 ‘나고 죽음’조차도 구속할 수 없는 철저한 자유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게되었다.

 

그후, 다음까페 『구하지않는 삶, 그 완전한 자유』(http://cafe.daum.net/beinnow)를

운영하면서 대구와 서울·부산 등지의 법회에서 정기적으로 경전을 통해 삶속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거짓효성에서 움튼 효부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더욱 심해진 고부갈등으로

고민에 빠져있던 윤진사가 하루는 그의 아내를 불렀다.

 

“가정불화는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오.

어머니가 얼른 세상을 떠나셔야 할 텐데 아직 기운이 좋으시오.

그렇다고 병나기를 바랄 수도 없잖소.

 

이런 생각이 불효는 되지만, 칠십 노인이 그만 사셔도 원통할 것이 없으시니

차라리 밥에 약이라도 타드려서 얼른 세상을 버리시게 하고 싶소.

그런데 고민이요. 병환이 없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외삼촌이 벼락같이 와서

원님에게 검시를 해보자고 할 것이요. 만약에 독살로 증명되면, 매일같이

불화하던 며느리의 소행으로 인증할 것인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소.

 

방법은 한 가지 있소. 부인이 한 달 동안 거짓으로 효부의 행동을 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그 집 며느리는 효성스럽다’는 소문만 나게 해주시오.

그럼 그때 가서 약을 타 돌아가시게 해도 동네 여론은 이럴 것이요.

‘그렇게 효성스러운 며느리를 죽일 년 죽일 년 하더니 이제 동네가 다

알게 되니까 무안해서 자살했다.‘ 라는 여론이 돌아 아무 일이 없을 것이요.

그렇게 해보겠소.”

 

아내 이 씨는 그 말이 반가웠던지

“효성을 어떻게 하란 말이요.”라고 되묻는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것이요. 지금이 추수시기이니까

날마다 일꾼을 부려서 타작하는 집에 가서, “어머니께서 요새 입맛을 잃어

진지를 못 드신답니다. 그래서 일집에 맛있는 반찬 좀 얻어갑시다 하고

밥까지 얻어오시오.

 

그리고 어머니께는 일집에 갔더니 반찬이 좋아서 얻어왔으니 맛있게

잡수세요. 라고 권하면 되요.”

 

“날마다 그렇게 하면, 집집마다 당신을 효부라고 칭찬하게 될 것이요.

또 내가 생밤 한말을 사다 줄 것이요. 그 밤을 매일 20개씩만 밥에 쪄서

두었다가 아이들 모르게 어머니 주무실 때에 잡숫고 주무시라고 하세요.

 

또 식전에 일찍이 밥 숭늉을 끓어서 아침이 늦겠으니 미리 잡수시라고 하세요.

그러면 나는 만나는 친구마다 당신이 하는 일을 자랑할 것이요. 그러면 안팎이

모두 ‘출천대효’라고 하게 될 것이고 그 뒤에 어머니가 아무렇게나 돌아가셔도

당신에게 의심은 아니 가게 되지 않겠소?

 

아내 이 씨가 자세히 듣더니 “그럼 생밤이나 사와요.”한다. 이튿날부터

남편이 지시한대로 철저히 실행하여 나갔다. 시어머니 김 씨는, 차차 달라져

가는 것이 고마워서 여간 잘못이 보여도 눈감아주고 자신이 해가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이 깊어져 갔다. 동네 집 잔치에 가서 국수

한 그릇만 받아도 며느리 생각이 나서 집으로 가지고와서 며느리 불러 앉히고

“네 생각이 나서 혼자 못 먹겠더라.”하고 같이 먹자 하였다.

 

어느 날은 대가 집에서 보낸 봉송음식에 귤병 한쪽이 있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가 손에 감추었다가 얼른 며느리 입에 넣어주었다.

며느리 이 씨는 ‘제일 귀한 것인데 아들과 손자도 아니 주시고 내 입에다

넣어주신다‘ 는 생각에 감격이 넘쳐났다. 날씨만 추워도 며느리가 식전에

아침 짓기에 춥겠다싶어서 밤중에 나가서 물을 끓어 놓기도 하고,

“감기 들겠다. 옷 껴입어라”를 날마다 했다.

 

어느 날 윤진사가 어머니를 위해 저고리 한 감을 사왔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방안에서 늙은이가 아무러면 어떠냐. 네가 해 입어라”하고

며느리는 “젊은 놈이야 어때요. 노인네가 따뜻하게 입어야지” 하면서

시어머니의 옷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김장을 담으려고 며느리 이 씨가 식전에 저고리를 입어보니까

자기 잠든 사이에 시어머니가 저고리를 갔다가 당신저고리 솜을 베껴서

두툼하게 솜을 두어놓으셨다. 개천에 가서 김장거리 씻기에 추울까 해서

이렇게 하셨다는 생각에, 감사에 넘치는 눈물이 솟았다.

 

‘나는 죽일 마음으로 거짓효성을 부린 것인데 어머니는 진실로 나를

아끼시는구나. 내가 벼락 맞을 년이다.’ 하고 각성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되었는데 남편이 조용한 틈에 아내를 보고 “이제는 이 근방에서 전부 당신을

효부라고 하게 되었으니 오늘 저녁진지에 약을 타 드립시다.”라고 했다.

 

이 말에 며느리 이 씨가 울면서 말하기를 “약을 주시면 내가 먹고 죽겠소.

내가 죽일 년이요. 전일의 불화가 모두 내 죄요.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이 말하기를 “천하에 부모악한 데가 없는 법이다.

부모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잠시 동안 거짓으로 효성을 해보아도 얼마나

부모가 착하신가? 계속 효성을 극진히 해서 자식들이 모범하게 하면

훗날 자식도 자식들의 효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글은 조선 명종 때, 파평윤씨 대언공파 8세손

윤명선의 실화로 전해온답니다. 그의 아들 사형제는

효행으로 특평벼슬을 받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