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란?

2016. 2. 13. 21: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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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란?

독일의 신학자 '찡크' 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현대인을 진단하였습니다.
"어느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장비를 준비하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식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길을 떠난지 하루만에 식수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는 기진하여 쓰러졌고, 마침내 실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참 후 그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습니다. 
그는 이제 죽을 때가 되어 환각이 보이는구나 하고 애써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귓가에 물소리와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 이제 정말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고 또다시 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사막의 베두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물가에서 입술이 타들어가 죽은 청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모습에 너무도 이상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야!여기 죽어 있는 젊은이가 바로 현대인이란다' "
오아시스 물가에서 목말라 죽은 현대인.....
정말 그럴듯한 비유라 생각합니다. 많은 것들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
미래의 노후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 
늘 행복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헤매며 찾아 나서다 일찍 지쳐버린 현대인,

나누면 반드시 행복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알고

실천을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
결국 서로가 파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연,지구 파괴의 길을 버젓이 걷는 우매한 현대인,

벌어놓은 재산은 그저 쌓아 놓기만 했지,
정작 써보지도 못하고 자식 재산 싸움으로 갈라서게 만드는

이상한 부모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는 현대인,

시간을 내어 떠나면 그만인 것을 앉아서 온갖 계산에 머리 싸매가며 끝내는

찾아온 소중한 여행의 기회도 없애 버리는 중병에 걸린 현대인,
끝없이 으르렁 거리며 저 잘났다고 뻐기며 평화를 살지 못하는 불쌍한 현대인 .....

우린 다시 옛 순수의 감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다시금 편한 마음, 행복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아니,지금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행복의 오아시스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금 눈을 뜨면 보이는 야자수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아야 합니다 .
행복은 바로 앞에 있습니다.
바람과 함께 묻어오는 물내음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의 오아시스가 지천이었는데

우리가 "물... 물 ... 물..." 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다시 우리는 현대인의 질병을 온 몸으로 울어야 합니다.
세상 욕심 때문에 곁에 두고 있었던 행복을 찾지 못한 나의 잘못에 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빼앗긴 소중한 나의 행복을 되찾아야 합니다. 
정작 실천할 기회가 수 없이 있었음에도 눈감아 버렸던

무관심의 죄에 펑펑 울어야 합니다.

다시금 진실에, 행복에 눈 떠야 합니다 .
순수의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

"이름 없는 들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별 경치도 볼 것 없는
그곳으로 나가
나는 풀빛 울음을 혼자 울 거야 "


라고 노래한 '박재삼' 시인의
<들풀 옆에서> 의 시에 장석남 시인은 이런 글를 썼습니다.

"울음은 혼자 우는 것이 진짜야.
울음은 호젓한 데에 가서 참는 울음이 진짜야.

울고나면 조금은 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서, 울음 쏟아져나간 만큼의 품이

새로 생겨서 안에 들일 수 없던 것들도 안아들이지 울고 나면 용서할 수 있지
울음은 작은 들꽃 들 곁 울음이 진짜야 그것들이 같이해주거든"

그래서 다시 시를 읽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를 듣습니다 .
그래서 다시 시를 노래합니다 .

한 점 여유를 잊어버렸던 우리네 삶에 시가 다시금 생기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얼마나 짧은 글 안에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 담아 내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시를 잊어버린 세대,시를 노래할 줄 모르는 세대,
시를 더 이상 읊지 못하는 벙어리 새가 되어버린 현대인에게 

 오늘 시는 또다른 오아시스로 다가 옵니다.

풍경-20151126


                                 - 꼭 쥐어야 하나 / 이상은






 내 어릴 적 어머니 말씀은 곱고 조심스러웠는데 언젠가부터 걸쭉하고


거침이 없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들인 내가 듣기에는 때로는


시(詩)같고 영화 대사 같은 구석도 있다. 


 지난주 주말 고향집, 아버지의 돋보기를 빌려 쓰고 나는 아버지가 내민


전립선 비대증약 처방전을 읽었다. 아버지는 소변이 시작도 잘 되지 않고,


보고 나서도 개운치 않다는 말씀을 하고 있었다. 




나이 든 남자들 오줌 누고/ 흔들어봐야 헛방이라./ 너 아부지 /오줌


눈다고 버티고 선 뒷모습을 슬쩍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 시절도


있었는데 / 요즘은 겨을산(겨울산) 같이 횅한 뒷머리만 보여. 




 아버지 속옷 빨래를 개던 어머니는 일손을 멈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들보기 무안하신지 아버지는 말씀을 멈추고 빈 입맛을 다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나이든 남자의 <흔듬>은 <헛방>이라는데, 여기서 잠깐,


<헛방>이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 정확히 알아보자.


포털 사이트 다음 사전에는 <헛방>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쏘아서 맞히지 못한 총질 ② 실탄을 재지 아니하고 쏘는 것


③ 미덥지 아니하거나 보람 없는 말. 말뜻 ①과②에 <흔듬>을 더하면


실탄 없는 빈총을 들고 흔들며 방아쇠를 당긴다는 말인데 웃음이


나오다가도 머지않아 나에게도 일어날 일들을 미리 듣는 것 같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몇 마디 말씀으로 아버지 말문을 닫게 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막내 여동생이 신랑감을 데려 왔을 때 아버지는 결혼 허락을


차일피일 미루셨다. 애가 타던 여동생은 안방 아랫목에 벽을 보고


돌아누워 시위를 했건만 아버지는 시집가는 게 뭐가 그리 바쁜 일이라고


서두르느냐고 오히려 타이르셨다. 그 때 어머니가 한 말씀 하셨다. 




저 년 꿈적도 안하는 거 보소. 당신 고만(그만) 하소.


당신 말, 개 방구소리로도 안 여기요. 지금 여어(여기) 눕어있어도


(누워있어도) 그 놈하고 살닿는 거 같을 거구만.




 어머니의 <살닿는 거 같을 기구만.> 이 구절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부엌으로 가  막걸리 세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니 그놈한테 그리 가고


싶거든 고마 시집가라.>하고 여동생에게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매제가 우리 집에 장가 온 것의 5할은 아버지의 심금을 울린 어머니의


명대사 <살닿는 거 같을 기구만.> 때문이지 싶다. 




 앞에서 어머니 말씀이 때로는 시 같고 영화 같다고 했는데 진짜 시 한편을


감상하고 어머니 말씀과 비교해 보자. 




팔다리가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 등에


업힌 듯한 그 /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무의미시(無意味詩)로 유명했던 김춘수 시인의 <처용 단장 1-9>라는 시다. 


 팔다리가 뽑힌 게가 걸을 수 없듯이 실탄 없는 빈총으로도 사격 할 수 없다.


두 문장 모두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뜻이 통하지 않는다. 무의미(無意味)한


문장이다. 같은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같은 듯


다르다. 김춘수는 실존(實存)하지 않는 게를 통해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을 드러낸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허무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눈앞에 앉은 남편 이야기를 한다.




 내친 김에 시 한편을 더 보자.




풀이 눕는다. /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의 일부다. 김수영의 풀은 살아 있다.


 김수영의 풀은 내면이 아니라 밖을 향한다. 비와 바람과 울음은 풀을 둘러싼


세계다. 김수영의 시는 시인이 살던 당대의 사회를 말하고 아파한다. 


 보라. 내 어머니는 김수영처럼 , 김춘수처럼 말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도 시 같은 구석이 있지 않은가. 아들의 제 어머니 편들기가


지나친가? 




 그런데 내 어머니는 참 좋은 분이신데,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참으로 훌륭한 분이신데, 요즘 와서 말씀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


콸콸 쏟아진다. 흠이라면 요것 딱 한 가지다. 저 기운찬 말씀이 아버지 소변


줄기였으면 하고 바래보지만 글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사람에게 성당 가서 기도를 해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랫동네 박 씨 영감 지나가면 지린내 나더라. 냄새 나면 남들 흉본다.


너도 옛날 같으면 중늙은이라. 내가 이집에 시집 올 때 너 할배 니보다


젊었다. 오줌 누고 털지 말고 화장지로 고추 끝을 꼭 쥐어라.


돈 많이 벌려면 깨끗이 씻고 다녀야 한다. 봐라. 여어(여기) 너 아부지


빤스 봐라. 누렇제. 비벼도 비벼도 얼룩이 안빠진다. 새빠지게 힘만 들고


소출(所出)이 안나. 늙어이 이제 이런 걸로 사람을 귀잖게 하네.


가수 문주란이 말이 딱 맞는 기라. 진짜. 진짜로 남자는 여자를 귀잖게 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각 팬티 한 장을 펼쳐 흔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아버지는 뒤꼬리가 짧은 헛기침을 했다. 김춘수 시인이다 김수영 시인이다


해서 얼렁얼렁 둘러 댔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 말씀에는 내가 생각해도


내 이야기가 해당 사항이 없다. 이왕 내 어머니 편을 들고 나섰으니 끝까지


한번 해보자. 




허구적인 것, 이데올로기, 거대 담론, 잘 짜인 수사로 현혹하는 말,


지식인이 기막힌 논법으로 만든 시스템, 미래를 약속하는 말들, 그런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깨부수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을 집중해서 보는 거예요.


계속 집중해서 보면 새로운 구체(具體)를 느낄 수 있어요.


그게 큰 덩어리를 왕창 깰 수 있거든요




 영화감독 홍상수의 말이다. <가까이 집중해서 보는 것> 그래 내 어머니의


말이 지질한 듯 보이지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하시는 하는 말씀인가?


어머니의 말씀 속에 어디 거대 서사가 담론이 끼어들 수 있겠는가.


이만하면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 영화감독 홍상수의 말과 닮지 않았는가.


그러니 우리 어머니 말씀이 영화 대사 같기도 하다고 해두자. 우리의 삶도


자세히 들어다보아야 바짝 다가가야 진실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수필도 그러해야 할 텐데.




 혹시 여기까지 읽고 이 글 뭐지 하는 분이 계시다면 홍상수 감독의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면 좋겠다.




영화를 보면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


계속 '이거 주제가 뭐지?' 하는 사람은 약간 이상한 사람이에요.


누군가에게 '왜 그 여자를 사랑해?'라고 물으면 '발목이 예뻐' 또는


'착한 것 같아'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아니거든요.


수천 개의 어떤 것들이 작동을 해서 그 여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말로 정리해요?


 


에필로그. 




 해가 붉다. 지려나 보다. 어머니 하시던 말씀 멈추고 내 얼굴만 요리조리 살핀다.


 눈만 껌뻑이신다. 나도 어머니 얼굴을 본다. 호호할매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기억에 담고 계실 거다. 객지에 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지난번보다 얼굴이 검어졌네. 살이 빠졌나? 건강이 나빠졌나.


힘들었나 하신다. 사노라면 만남도 이별도 거듭된다. 죽고 나는 것도 그러하다.


하지만 같은 만남 같은 이별은 단 한 번도 없다. 반복되지 않는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차이가 없는 만남은 아무 뜻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머니가 내 얼굴을 유난히 오래 보신다. 지금의 차이는 유난히 오래다.


어머니가 나에게는 보내는 메시지는 좀 있다 가라, 사느라 고생이 많다,


아니면 내가 내 아들을 몇 번이나 더 볼꼬?  뭐 이런게 아닐까. 때가 되면 더


이상 만남이 반복되지 않는 순간은 오게 마련이고 거부 할 수도 없을게다.


집사람에게 전화를 한다. 내 밥  먹고 갈란다.  어머니가 신이 났다.


부엌으로 달려가신다. 어머니 새로 밥을 지으시려나 보다. 해가 아래채


지붕에 걸렸다. 우리 어머니 또 밥상머리에 앉아 아들 구경 하시려나 보다.  


그나저나 어머니 말씀대로 꼭 쥐어야 하나.


 


꽃샘 추위 / 정연복
                       
이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

겨울 끝자락의
꽃샘 추위를 보라

봄 기운에 떠밀려
총총히 떠나가면서도

겨울은 아련히
여운을 남긴다

어디 겨울뿐이랴
지금 너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 보라

바람 같은 세월에
수 많은 계절이 흘렀어도

언젠가
네 곁을 떠난

옛 사랑의 추억이
숨결처럼 맴돌고 있으리



그 말 / 나태주          
                      
보고 싶었다
많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남겨두는 말은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입속에 남아서
그 말
꽃이 되고
향기가 되고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어째, 조금 신선하고 무언가 씻겨지는 느낌이 있나요?  
그렇다면 아직 당신은 현대인의 중병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곁엔 분명히 행복이 있습니다.
그 행복을 만들며, 그 행복의 창을 열으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럼 고려시대의 시한 수 읊을까요?

인간의 한 생애란 / 최유청

인간의 한 생애란
그물그물 바람 앞 촛불인 것을

부귀를 탐하여 살아 생전
어느 뉘 족한 줄 알더뇨?

신선 되기야 애당초 기약이 없고
세상 길 엎뒤치락 변덕뿐이니

어쩌랴 잔들고 노래부르며
멀거니 집마루나 바라보나니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문숙 최유청'
(1095 - 1174)의 시였습니다

 

 

이별 / 李白

 

청산은 북쪽 마을에 가로 놓이고

맑은 물은 흘러 동편 성(城)을 도는데

여기서 한번 나뉘면

나그네의 만리 길 지향도 없으렸다.

떠가는 저 구름은 그대의 마음인가.

지는 이 해는 보내는 내 정일레.

손을 휘저어 드디어 떠나는가.

쓸슬하여라. 말 우는 저 소리도.

 

靑山橫北郭  白水撓東城  此地一爲別 孤逢萬里征

浮雲遊子意 落日故人情 揮手自玆去 蕭蕭班馬鳴

 

 

 

한 알의 모래 속에서 宇宙를

한 송이 들꽃 속에서 天國을 보려거든

그대 손바닥 안에서 無限을

지금 이 순간 속에서 永劫을 붙잡으라.

 

- 윌리엄 블레이크


     

    장사익거문고병창 -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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