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 법상스님

2016. 3. 12. 19: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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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 법상스님


지구별에서의 삶은 고해바다라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괴로움이라는 삶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가는 인간계의 특성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고해를 통한 깨달음은 필수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꼭 괴로움을 통해서만 깨달을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닫게 되면 괴로운 일들은 벌어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를들어, 십 년 동안 괴로운 삶을 살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왔지만 불법 공부를 통해 초기에 먼저 깨닫게 되었다면 10년 괴로울 것을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고, 1년 만에 끝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하고 복을 지으면, 복과 지혜를 증장시키면 괴로움을 빨리 끝내고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뭐랄까요, 다양한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겉모습에서 지금 이 육신을 가진 이 존재만 나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의 내부에는 불성과 거의 합일이 되어있는 나라는 또 다른 어떤 차원이 있단 말이죠. 지금 이 상황보다 더 깨달음에 앞서간 나도 지금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리석은 나, 저 중생의, 저 짐승 정도의 의식밖에 안 되는 과거의 나도 지금 이 순간에 사실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와 미래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수행하고 공부하고 정진하면 과거가 해탈이 되고, 미래가 해탈이 되고 전체 생애에 영향을 준단 말이죠.


그리고 그 전체 생에 영향을 주고 있는 모든 다차원적인 우주 속에서의, 우리가 과학에서 다중우주라고 하는 그런 수많은 어떤 우주 속에서의 수없이 많은 또 다른 차원의 어떤 나의 무한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너’라고 알려진 수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근원에서는 너와 나, 과거와 미래, 의식수준의 높낮이라는 것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부의 인연도 맺어지고,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맺어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사람을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도적으로 보라고 한 거예요.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편견일 뿐이지, 너의 생각일 뿐이지 근원의 지혜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도반으로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귀한 존재로서, 나를 살려 주기 위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나에게 등장한 사람들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또한 나를 돕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일 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인연도 함부로 미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인연들은 전부 다 '귀인'들이고, 나에게 귀하고 고맙고 감사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인연을 다 받아들여 주고, 감사해하며, 용서해주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미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그가 전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니라, 미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원에서 모든 존재는 나를 깨닫고 돕기 위한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사실은 나 자신입니다. 그가 곧 나인 동체대비의 한 몸입니다. 그러니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자비로써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우주를 향해 외쳐 보세요.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삶을 수용하고, 모두를 용서하며,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리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157

자아탐구는 마음의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이 수행방법은

억압적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보다 우수한 방법이다.

이는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 하는 것이다.


수행의 초기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부터 생각하는

자기에게로 주의를 돌리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단 <나> 라는 느낌에대한 주시가 확립 되기만 하면

이상의 노력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존재의 과정이며,

노력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무위의 과정이다.

궁극에 가서 진아를 발견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통해서다.


자아탐구를 명상과 같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깨어 있는 동안 내내,

어떤 일을 하는 동안 에라도 계속 되어야 한다.


158

진아를 찾음으로써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그대는 마음이다,

아니 그대는 자신을 마음 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생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생각의 이면에는 <나> 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다.

이 <나라는 생각>을 첫 번째 생각이라고 해 보자.

이 <나라는 생각>에 달려들어서 그것을 의심해 보고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 찾아보라.

이 의심이 그대를 강하게 사로잡으면,

그대는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그대가 진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을 갖고 추구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어떤 다른 것이 그대를 사로잡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했던 그 <나>가 아니다.


이미 변화된 나이다. 그것은 진아, 곧 <나>의 본체다.

그것은 에고가 아니며 지고의 실체, 그 자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첫 번째 <나> 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한다


159

초보자의 자아탐구 방법

마음은 <나는 누구 인가?> 라는 탐구를 통해서만 사라진다.

장작불을 지피던 막대가 장작불이 다 타버릴 때쯤에는

스스로도 거의 다 타버리듯이

<나는 누구 인가?>라는 생각도 모든 다른 생각을

사라지게 한 다음 스스로도 사라져 버린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계속 이으려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라고 물어라.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놓치지 않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으면

<나에게>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때 다시 <나는 누구 인가?>라고 물으면

마음은 마음의 근원(진아)으로 돌려지게 되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이다.

이를 계속 반복하면, 근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머무르려는 마음의 힘이 증가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쌓여온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강렬 해짐에 따라,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과연 마음의 모든 습성들이 사라지고

진아로서만 남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심조차도 하지 말고 더욱 끈질기게

자신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그 순간

이 질문을 함으로써 그 생각을 없애야 한다.

비본질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바로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음이 지혜다.

따라서 이 둘(무욕과 지혜)은 같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바다 밑에 있는 진주를 캐오듯이

무욕의 자세로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진아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다.


진아에 이를 때까지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구속되어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알게되면 그것이 곧 자유다.


마음을 진아에만 계속 고정시키는 것이 자아탐구이며,

스스로를 실재-의식-지복인 절대자(Brahman)라고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160

'나'를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 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눈으로 보는 대상에만 익숙 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는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는가?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나라는 생각>으로

나타 나서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눈을 통해 스스로를 투사하여 주위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깨어 있는 상태만을 기준으로 해서

그 상태와는 다른 무언가를 보고자 기대 한다.

또한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만을 확실하다고 인정한다.

인간은 결코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보는 과정이

모두 단 하나의 의식,

즉 진아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아가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환상을 벗어나기 위해선 자아탐구가 필요하다.

진실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대는 지금  <그대>를 어떻게 느끼고있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을 앞에 놓아 두고 보아야만하는가?

거울이 없어도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확신 하고 있다.

 

 - 마하라지의 명상 중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OST / 태극기 휘날리며 에필로그 [듣기] 

 

요즈음 우리나라는 보수 진보사이에

평행선을 그으며 다투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힘이 있는 자가

안고 가면서 조화되어야 하지 않을가

 

愛國心은 分列 되어서는 않된다.

統一을 위해 우리 함께 뭉치자

그래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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