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을 하세요 /지금 이 순간, 현존의 기쁨

2016. 5. 28. 20: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이런 사랑을 하세요

나를 위해 사랑을 하지는 마세요.
내가 기쁘기 위해 상대를 사랑하지는 말고요.
대신에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나를 내바치는 사랑을 하세요.

나를 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고 집착일 뿐...
'내 사랑', '내 사람'이 되야 그것만이 사랑인 줄 알지만,
사랑이 소유가 되면
사랑 그 자체의 맑음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소유키 위해 사랑하지 마세요.
자유를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소유나 집착이 되어선 안 되지요.
그냥 상대가 기쁘면 그것으로 나의 사랑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설령 먼 훗날 헤어질 인연이 되었을 때라도
상대를 위한 이별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런 지혜로운 사랑을 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사랑은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음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느끼고 있음입니다.
사랑은 그저 느끼는 것이지 그 느낌을 가지려 하면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게 마련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괴로울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이별의 괴로움을 질투의 쓰라림을
그 깊은 너머에 간직하지는 마세요.

사랑....
그 반대의 경우는 그냥 맑게 비워 두고
온전히 사랑만 하기로 하세요.
앞으로라도 괴로울 일 없는 그런 맑은 사랑을 하세요.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오더라도
사랑했음에 행복했노라고 미소 지을 수 있을
그런 맑고 넉넉한 사랑을 하세요.

 

- 법상스님

 

지금 이 순간, 현존의 기쁨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들녘엔 새봄을 맞이하는 꽃들이며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렇게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내 속 뜰의 공부는 얼마만큼 그 흐름에 부응하며 보내왔는지, 하루 이틀, 일분일초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날이 갈수록 단순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뻐근한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기회 이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음 순간이란 그다지 소중하지 못하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에 가장 소중한 때다. 백일 천일 공부할 것도 없고, 전생이나 다음 생을 논할 것도 없으며, 과거나 미래를 논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 찾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 돈을 벌기 바라고, 지위가 오르길 바라고, 성공하기 바라며 계속해서 무엇인가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순간 그 마음은 '지금 여기'에 없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린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주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순간 온전히 거기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은 일이 내 삶의 완전한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집중하며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수많은 어려운 일, 큰일들 또한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선적인 수행의 힘이 생긴다.

 

 



  내 밥 먹는 사소한 일상을 돌이켜 본다. 매일 같이 하루 세 번을 나누어 공양供養을 하면서도 공양을 위한 공양을 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밥을 먹으면서 늘 다른 것을 계획하고,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거나 무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고 밥 먹는 것은 소홀한 뒷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 먹을 때 온전히 밥만 먹지를 못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임을 늘 그렇게 놓치고 산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순간이 온전한 ‘지금 여기’의 순간이자 내 생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몸은 밥상 앞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곤 하는 것을 본다.

  밥을 먹는 순간, 일을 하는 순간, 운전하는 순간, 걷는 순간, 대화하는 순간, 그 어떤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은 온전히 거기에 있어야 한다. 매 순간 도착해 있어야 한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필요는 없다. 우린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임을 알면 된다. 그랬을 때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고,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명상이며 깨어있음이 된다.


  사람 성격은 운전대를 잡아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도 운전대를 잡으면 갑자기 급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스님도 평소에는 정말이지 그렇게 여유가 있고 차분한데,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그냥 폭주족 저리가라 하고 질주를 한다. 물론 내 경우도 비슷하다. 가만 보면 운전대를 잡을 때 참 공부가 많이 된다. 마음이 얼마나 바쁜가, 마음에 얼마나 일이 많은가가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운전대만 잡으면 고스란히 드러나 스스로에게 들키고 만다. 그래서 더욱 내면의 뜰을 잘 지켜볼 수 있을 때가 운전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운전을 할 때도 운전이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만 운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한가. 운전하고 가는 순간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운전을 위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걸어서 어떤 목적지에 가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 때 길을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빨리 도착하려는 조급한 마음도 비워지고 오직 걷는 그 자체로써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마음은 분열을 멈추고, 내적인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왔지만 사실 우리가 산 세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그 순간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자.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우리 삶이란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남들을 더 많이 재끼면서 달려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지 한 시도 멈추고 비우며 자족하는 도착의 삶, 순간의 삶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모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마음, 결과와 목적을 향해 치닫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 보자. 그 목적지를 향한 삶의 속도를 멈추는 순간, 이미 행복의 정원에 도착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빨리 달릴수록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멈출수록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가 생겨나고, 기차며 비행기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지만 우리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빨리 도착하도록 해 주는 운송수단이 생겨나면 빨리 도착한 만큼 더 많은 휴식과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반대로 우리의 삶은 더 빨라지고 정신이 없어지며, 목적지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세상이 부유해졌고 편리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 세상의 부유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유함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내달려도 힘겨울 판이다. 그러니 어찌 멈출 수 있는가. 죽을 때 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어찌 마음을 비우고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멈춰 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달려서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뿐이다. 그렇게 달려가는 목적지가 성공에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그 속도감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목적지에 더 빨리 다다르게 할 뿐이다. 우리의 속도전은 죽음 앞에서 겨우 멈춰 서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한 한없는 후회와 함께. 죽음의 목적지에서 모든 사람은 지난 삶을 되돌아 볼 것이다. 왜 매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느끼며 즐기며 살지 못하고 이 순간만을 향해 달려왔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왜 그 때에 가서야 깨달아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기만 한다면 행복과 평화, 고요함과 깨어있음이라는 참된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現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수행이며 명상, 기도란 것도 사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과 명상의 궁극도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멈춰 서는 깨어있음에 있다. 그러니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선 안 된다. 참선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미 본래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순간 또한 그대로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닌 바로 깨닫는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절에 가는 순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그대로 경행수행이 된다. 그랬을 때 절에 가는 과정도 참선이며, 절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참선이다.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꺼내어들고 방석을 펴는 순간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깨어있으면 수행과 생활이 따로 없고, 과정과 목적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주말에 있을 참선모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무엇하러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소모해야 하는가. 기다림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순간이 온전한 참선의 순간이 된다. 수행을 위한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수행이라는 '마음' 닦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부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은 방편일 뿐이다. 중생이나 마음이나 부처가 그대로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다 온전한 순간이고,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온전한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내 삶을 돌이켜 보라. 내 삶의 속도를 느껴보라. 시간이란 것이 다 우리가 만들어 낸 조잡한 관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살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순간을 살면 시간은 없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데 시간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매 순간 도착해 있으며, 매 순간 현존의 깨어있음이 빛을 피워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잡는 것은 ‘그 순간’만을 잡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잡는 것이다. 이 새로운 순간. 이 소중한 시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자.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정훈희 - 꽃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