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료를 믿는 까닭 / 만해스님

2016. 6. 12. 15: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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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불교를 믿는 까닭' / 만해 스님

 

 

 나는 불교를 믿습니다.

 아주 일심(一心)으로 불교를 지지합니다.

 그것은 불교가 이러한 것이 되는 까닭입니다.

 

 

<1> 불교는 그 신앙이 자신적(自身的)입니다.

 

다른 어떤 교회와 같이 신앙의 대상이 다른 무엇(신이라거나 상제라거나)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자아라는 거기에 있습니다.

석가의 말씀에 ‘심즉시불 불즉시심(心卽是佛 佛卽是心)’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사람이 다 각기 그 마음을 가진 동시에 그 마음이 곧 부처(佛)인즉

사람은 오직 자기의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을 이룬다는 것이외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자아라 함은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과 물을 통해서의 ‘자아’입니다.

즉 사람사람의 오성(悟性)은 우주 만시 우주 만유화할 수 있는 것이외다.

이 속에 불교의 신앙이 있습니다.

고로 불교의 신앙은 다른데 비하여 예속적이 아니외다.

 

<2> 불교의 교지는 평등합니다.

 

석가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나 물(物)은 다 각기 불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평등입니다. 오직 미오(迷悟)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소위 미오의 차라 하는 것도 미(迷)의 편으로서 오(悟)의 편을 볼 때에

차이가 있으려니 하는 가상뿐이요, 실제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으면 마찬가지입니다.

 

<3> 불교는 물(物)과 심(心)을 초월한 유심론(唯心論)입니다.

 

근래의 학설로나 주의(主義)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이외다. 그런데 다만 피상으로 볼 때에는 불교는 유심론의 위에 선

것이라 할지나 실상은 불교로서 보면 심(心)과 물(物)은 서로 독립치 못하는 것입니다.

심이 즉 물[空卽是色]이요 물이 즉 심[色卽是空]이외다.

고로 불교가 말하는 ‘심’은 물을 포함한 심이외다.

 

삼계가 오로지 마음[三界唯心], 마음 밖에 물이 없다[心外無物]이라 하였음은

즉 불교의 ‘심’이 물을 포함한 심인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면 하필 왜 심이라고 편칭(偏稱)하였는가. 그것은 특히 우리 사람을 두고 말하면,

물 즉 육(肉)이 심을 지배하는 것보다

심 즉 정신이 육을 지배하는 편이 많아 보이는 까닭이외다.

 

<4> 그러면 불교의 사업은 무엇인가. 이른바 박애요 서로 돕는 호제(互濟)입니다.

 

유정무정, 만유를 모두 동등으로 박애, 호제하자는 것입니다.

유독 사람에게 한할 것이 아니라 일체의 물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이 실세력을 갖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이러한 박애, 이러한 호제를 말하는 것은 너무 우원한 말이라 할지 모르나

이 진리는 진리이외다. 진리인 이상 이것은 반드시 사실로 현현될 것이외다.

 

요컨대 불교는 그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적이요, 사상에 있어서는 평등이요,

학설로 볼 때에는 물심을 포함, 아니 초월한 유심론이요,

사업으로는 박애·호제인 바, 이것은 확실히 현대와 미래의 시대를 아울러서

마땅할 최후의 무엇이 되기에 족하리라 합니다.

나는 이것을 꼭 믿습니다.

 


※ 만해스님(萬海,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 18세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하여 수행과 교학연구에 매진하다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 시베리아 등을 방랑하다가 돌아와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불교대전 등을 펴내기도 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을 이끄는 등 평생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스님은 시인, 소설가

언론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법보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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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 44, 1188 {존중경(尊重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울비라라는 마을 니련선강가에 있는

보리수 밑에 계셨는데, 깨달음을 얻으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그 때 세존께서 혼자 고요히 사색하시다가 이렇게 생각하셨다.

 

'혹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梵)·사문·바라문 등 천신(天神)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삼매보다 나으며, 지혜보다 낫고 해탈보다 나으며,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만한 것이 있으면 나는 그를 의지해 살리라.' 

 

또 이렇게 생각하셨다.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사문·바라문 등 천신이나 세상 사람 중에 내가 두루 갖추고 있는

계율보다 낫고 내가 지니고 있는 삼매(三昧)나 지혜(智慧)나 해탈(解脫)이나 해탈지견

(解脫知見)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를 의지해 살아야 될 만한 자는 어느 누구도 없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여 삼먁삼불타(무상정등각)를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마땅히 그것만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과거의 여래·응공·등정각께서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셨으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사셨기 때문이다.

 



 

 


  


 

도를 보려는 마음을 가지면 도리어 도에 미혹하고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을 두면 오히려 편안치 않네.
편안함 없는 곳에서 편안하고 보는 것 없이 보아야
바야흐로 이 일이 복잡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 원감충지(圓鑑冲止, 1226-1292)

정존견도환미도(情存見道還迷道)
심요구안전불안(心要求安轉不安)
안도무안견무견(安到無安見無見)
방지차사물다반(方知此事勿多般)

 


도를 보려 하거나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합니다. 도라고 하건 깨달음이라 하건,

그 이름들이 가리키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머지가 없는

전체라서 결코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 일으켜 어찌 하려고 하면 그만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한 편안하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편안함과 편하지 않음을

둘로 나누어 놓는 분별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편안하다고 집착하는 순간 저절로

그 반대편에 편안하지 않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헷세(Herman Hesse, 1877~1862)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쫓아다니는 한
당신은 아직 행복을 누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록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당신의 것이 된다 해도.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목표를 정하고 초조하게 있는 동안은
당신은 아직 평화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어떠한 목적도 욕망도 모르고
행복이란 말을 부르지 않을 때

그때야 비로소 세상의 만사 흐름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요,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찾을 겁니다.

완전한 편안함은 편안하지 못함마저 포함하고 있는 편안함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편안함에는 편안함이 따로 없습니다.

진정으로 보는 것에는 보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것을 본 것이 참으로 본 것이요,

아무것도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참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참된 도의 입장이라면 이미 ‘도’라는 이름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 도라는 것을 보려 하고 깨달으려 하는 것은 이미 병이 깊은 것입니다.

이 일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 없이 단순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오히려 번거로운 일입니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점을 찍으며) 그저 이 일입니다!


- 몽지님

 
첫사랑 / 조병화

밤나무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개구리 소리

♪try to remember

* JULIAN 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