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단멸론 |…… 강병균 교수

2016. 6. 25. 21:0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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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단멸론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자기 몸안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신(身)사리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을 심(心)사리라 한다

유럽은 1,600년 동안 천동설을 지지하는 무수한 논문을 생산했지만
천동설은 망원경 하나에 그냥 무너져 내렸다

동양은 3,000년 동안 윤회설을 지지하는 무수한 경전을 만들었지만
윤회설은 진화론의 발견으로 무너지고 있다



I. 유전자와 진화론의 발견은 영혼론과 윤회론에 치명타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주장은 유전자를 모르던 원시시대의 주장입니다. 생명과 문화는 유전자, 즉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에 의해서 이어지므로 절대 끊어질 수 없읍니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세세생생 이어집니다. 당신이 부처가 되어 무여열반에 들더라도, 당신을 닮은 후손은 길이길이 이어집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후손이 없더라도, 형제나 친척의 후손을 통해서 이어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전자도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네팔사람은 부처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한국사람도 그럴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처님의 ‘생사리’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유전자라는 생사리! 통도사 금강계단에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는 부처님 몸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유전자도 없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론도 주장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생물계와 종(種)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이유는 죽은 생물이 환생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읍니다. 전생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영혼에 담아 다음 생으로 옮겨서, 종의 특성이 유지된다고 보았읍니다. 이 특성의 담지자를 영혼, 건달바, 중음신 등으로 불렀읍니다. 예를 들어 용수보살은 “중음신의 모습이 태어날 몸과 비슷한 모양을 띤다”고 생각했읍니다. 당신이 개 같은 짓만 하다가 그 벌로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나게 되면, 당신의 중음신은 개모양이라는 겁니다.

(환생과정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습니다. 중음신이 개 모양을 띱니다. 개로 태어납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死者의 書)를 믿는 사람들은, 49재가 여법하게 지내져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중간에 개모양의 중음신이 사람모양 중음신으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21째 날, 승려가 조급해하는 유가족에게 말합니다. “사자가 개모양에서 점점 더 사람모양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태아의 초기 모습은 개나 인간이나 비슷하므로 이 말도 필시 구라입니다.)

그런데 49재를 집전하는 승려는 어느 누구도 사자(死者)의 중음신이 개, 닭, 소, 돼지 모양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지구상에 날로 늘어나는 엄청나게 많은 수백억 두의 동물의 존재는, 엄청나게 많은 인간이 동물로 태어난다는 증거임이 분명할 터인데도 말입니다.
 
유전자의 발견과 더불어 영혼론과 통속적인 윤회 환생이론은 기반을 잃었습니다.
천문학과 지질학의 발달은 천국과 지옥을 주장하는 육도윤회론을 코너로 몹니다. 


옛날 사람들은 동물이 식물과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지간이라는 사실과, 같은 구조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동물은 식물과 16억 년 전에 갈라섰습니다. 만약 누가 전생을 다 기억할 수 있다면, 당연히 16억 년 전 식물이었던 시절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힌두교도나 불교도 중 어느 누구도 식물전생을 기억하는 이는 없습니다. 힌두교경전에도 불교경전에도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설사 윤회가 참이더라도) 식물이 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器官 organ)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 귀 코 혀가 없으니 들어오는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뇌가 없고 기억도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에 비해 동물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므로 새로운 주변환경에 맞추어 생존하려면, 즉 낯선 먹이가 안전한지와 다른 동물이 포식자인지 먹이인지를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가 필요해서 눈·귀·코·혀가 발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참나(眞我 아트만)가 한 일이 아닙니다. 같은 참나가, 왜 어떤 놈은 독초나 독버섯이 되고 어떤 놈은 약초나 식용버섯이 되며, 왜 또 어떤 놈은 누에나 지렁이가 되고 어떤 놈은 전갈이나 거머리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식(識)의 상속(相續)·전변(轉變)·차별(差別)을 주장하는 유식학은 영혼을 지지합니다. 이게 엉뚱한 곳으로 잘못 나가면 참나(眞我 true atman)가 됩니다. 그런데 유전자는 상속이고 전변이고 차별입니다. 유전자는 종자(種子)이고 집지(執持)이고 이숙(異熟)이기도 합니다. 유전자의 집합인 게놈(genome)은, 유전자라는 종자를 보존하는, 창고(藏)입니다. 유전자의 이러한 특성은 생체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읍니다. 식의 상속·전변·차별을 주장하는 유식학은 반밖에 보지 못했읍니다, 즉 문화유전자(밈 meme)만 보았읍니다. 나머지 반인 생체유전자(DNA)는 보지 못했읍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십 억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100년도 살기 힘든 인간이 명상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혜를 명상으로 한정시키면 유전자나 진화론은 죽었다 깨도, 천불이 탄생해도 발견하기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교의 지혜를 과학적 마음으로까지 확장시켜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부처님은 과학적 마음을 갖춘 최초의 수행자이자, 구도자이자, 종교지도자이자, 뇌과학자였습니다. 과학은 불교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강화합니다. 무아와 연기라는 진리의 디테일을 채워줍니다. 다각도에서, 무아와 연기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고 음미하게 만듭니다.

과학이 위대한 점은, 명상 등의 수행은 개별적인 행위이며 그 결과 일어나는 해탈 역시 개별적인 현상이지만, 과학은 수많은 개별마음을 연결하여 거대한 ‘생체병렬컴퓨터’를 만들어 개인이 이루어낼 수 없는 경천동지할 진리를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한마음(一心)의 구현입니다. 사실상 최초의 구현입니다.

생체유전자는 문화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상속·전변·차별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전자는 유전이 되고, 유전된 유전자는 돌연변이하고, 돌연변이 후 살아남은 유전자는 차별상을 나타냅니다. 이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새로운 종(種)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천만이 넘는 종이 지구상에 만개(滿開)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체유전자를 모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진짜 이유에 무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유식학은 진화유식학 또는 유전자유식학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천만가지 종류의 ‘몸과 마음’의 생성소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種)의 생성과 소멸은 누가 결정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이 있읍니다. 예를 들어 공룡이 사라진 것은 누구의 업 때문입니까? 모든 공룡들이 특정한 업을 지어서 그 벌로 사라진 것입니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공룡이 사라진 이유는 6,500만 년 전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유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지름 40km의 유성이 만든 충격은 핵폭탄 수만 개의 위력이었으며, 그 결과 화산재가 하늘을 뒤엎어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지구의 기온을 급강하시켜 이 거대생물이 멸종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인간이 어떤 동물 몸을 취하느냐, 즉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느냐 하는 것은 우연한 자연현상에도 달린 듯합니다. (설마 어느 누구도 인간이 비·지진·바람·해일·산불·벼락·기후·화산폭발·계절변화와 유성충돌 등 자연환경을 조정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인간이 생겨나기 전인 수십억 년 전에는 말입니다. 어떤 인격을 가진 존재가 조정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유신론자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은 우리 의지·행위와는 관계없는 우연한 현상입니다. 인과와 연기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인과와 연기이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환경을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즉 현재가 과거를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연(偶然)’이 가능한 것입니다.)

50억년 후에는 태양이 식는다 합니다. 그럼 에너지원을 잃은 지구상의 식물·동물들이 연쇄적으로 멸종할 터인데, 그때 인간은 동물로 환생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육도윤회가 무너집니다. 동물적인 성향을 가진 자나 나쁜 업을 쌓은 자가 갈, 축생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조계종 종정(宗正 가장 도가 높은 사람 또는 최고의 영적권위자)인 진제 스님은 진화론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고적부터 동물은 동물로, 말은 말로, 소는 소로, 그 모양 그 꼴로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만 육도윤회계가 보존되기 때문이겠지요.



II. 동물이 나쁜 짓을 하면 인간으로 태어난다


‘인간이 나쁜 짓을 하면 동물로 태어난다’는 이론은 비윤리적인 이론입니다. 동물들을 벌 받은 존재로 보는 것은 동물들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는데, 그럼 벌 받은 전생의 인간을 잡아먹는 것입니까?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나쁜 존재로 간주하기까지 하면서 동물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줍니다. 사악한 건 동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제멋대로 자연계를 오염시키고 함부로 동물을 죽여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들입니다.


인간의 동물 학대와 비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인 학대와 비하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일입니다. “똥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바로 이 “동물은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악한 주장입니다. (동물들은 거의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초식동물들이 특히 그러하며, 육식동물인 사자 호랑이 늑대조차도 인간의 악행에 비하면 천사들입니다; 육식동물은 그 수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염소, 사슴, 소, 말, 양, 토끼, 참새, 벌새, 지렁이가 무슨 악행을 저지른다는 말입니까? 특히 햇빛도 안 드는 땅속에서 흙이나 먹고 사는 지렁이는 너무 억울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 불쌍한 지렁이에게 “지렁이”라는 제목의 한 줄짜리 시를 헌정했읍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인간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다른 인간에게 고해를 하면 죄가 없어진다는, 교활한 제도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몹시 사악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쁜 짓을 하고, 다시 고해하면 그만입니다.)


태평양에는 인간이 버린 오물이 모여 한반도 크기의 거대한 ‘쓰레기 섬’을 만들어 떠다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시무시한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죽일 뿐만 아니라, 코끼리 코뿔소 버팔로 호랑이 늑대 고래 등, 인간이 마구 죽여대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 어디 하나둘입니까? 이렇듯 환경오염과 생물살생 등 인간이 저지르는 만행(蠻行)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이 죄를 지으면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야 옳을 정도입니다.



III. 근본주의적인 육도윤회론의 문제점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육도윤회론(六道輪回論)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최소한 지금형태로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화론과 우주론을 모르던 원시적인 시대에 만들어진 이론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인들이 별생각 없이 육도윤회론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평균수명이 100년 안짝이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없어진다 해도 50억년 후의 일이니 그 까마득한 세월 뒤를 근거로 현재를 생각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스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믿기 힘들더라도 스님이 믿는 바를 믿어주어야 하는 점도 있을 것입니다.)

35억 년 전에는 지구에 아무 생물도 없었는데, 그리고 지난 35억년 동안 육지동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때 인간과 축생은, 특히 바다생물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지렁이와 세균은요? 결핵균, 나병균, 천연두균, 에이즈균, 말라리아균 등 병원균은요? 회충, 촌충, 편충, 요충, 거머리, 메디나충 같은 기생충들은요? 전부 천상세계에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천상세계에 바다가 있을 리도 만무하고... 그 나쁜 놈들이 천상세계에 거(居)했을 리도 만무하고...

다른 별에서 왔다구요? 그럼 이 물질적 우주가 생기기 전인 빅뱅 이전에는요? 도대체 당신은 왜 이런 모든 (현대 과학적) 지식이 고대 승려들 머리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천문학자가 아니지 않읍니까? 그냥 고통해결사들 아닌가요?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들을 없애는 방법을 일러주는 ‘번뇌제거 전문가’들 말입니다.



IV. 균형있는 사고의 실종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질, 요통, 두통, 등창 등으로 몸이 불편하면 의사 기바(Jiva)에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육체적인 질병의 치료법에 대해서는, 최소한 기바보다는,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부처님이 암, 에이즈, 광우병 등 난치·불치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진실을 진실이라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정신적 고통치료의 독보적인 일인자, 즉 심의왕(心醫王)이었을 뿐입니다. 다른 과학적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과학적 진리가 종교경전에 들어있다면, 종교경전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진리도 아니고 발견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수혈, 기차, 전화, TV, 라디오, 냉장고, 자동차, 내연기관, 인공위성, 스마트폰, 수력발전, 원자력발전, 내비게이션, 사물인터넷, 자기부상열차, 장기이식수술, 마이크로웨이브 등은 어느 종교경전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전쟁을 멈추는 물리적인 방법도, 아마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불교계율에 의하면 국왕이나 전쟁에 대한 대화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죄가 아니며 수치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가’입니다. 부왕 파세나디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비유리가 카필라국으로 쳐들어갈 때,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두 차례, 침입로(侵入路) 위에 앉아 막은 것이 다입니다. 세 번째로 쳐들어온 비유리에게 카필라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자는 겸애사상으로 유명한 중국의 묵자는,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대단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방어전을 깊이 연구하여 여러 가지 농성용(籠城用) 방어무기를 발명하고 개발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천하를 주유하며, 이 방어용 기계들을 이용해서 침략자들로부터 약소국들을 지켜냈습니다.

어차피 무한히 윤회하는 것, 지금 죽으나 다음에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묵자의 전쟁억제 노력을 폄훼하는 것은 궤변 중의 궤변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병원도 필요 없고, 법률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지붕에서 떨어져 한쪽 발이 부러져 너덜거려도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겠지요. 그냥 장애인으로 살다 죽으면 될 일이겠지요. 어차피 무한히 윤회할 터이니까요. 이들은 변명하기를, 깨달음을 얻어 윤회계를 탈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해탈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바세계가 고통의 세계이기 때문이며 고통의 제일 원인이 전쟁(貪瞋癡의 폭발)임을 볼 때, 전쟁을 막으려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탐욕·증오·어리석음을 없애면 장기적으로 지구상의 전쟁이 줄어들 것은 분명합니다. 묵자의 가르침처럼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 부귀빈천 민족·이민족 가족·비가족 친소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인, 겸애(兼愛)를 실천하면 지구상에 평화가 올 것 역시 자명합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들의 실천방안입니다.

한국불교계의 병폐는 균형있는 사고의 실종에 있습니다. 초기경전 여기저기서, 부처님은 행복하게 세속생활을 영위하는 슬기로운 길을 일러주십니다. 결코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초월적인 신통력에 치중하여 정작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의 삶을 무시합니다. (그런 신통력은 ‘그랬으면 좋겠다 력力’일 뿐입니다.) 모순은, 그들의 ‘현실 삶에 대한 무시가 말로만 그렇다’는 점입니다. 행은 자신의 의식주의 편리를 도모하면서도 말은 (의식주 등 현실 삶을 초월한 것처럼) 그리하여, 신도들을 정신분열증으로 인도합니다. 그리하여 설법은, 들을 때뿐이라, 일상적인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친 상담사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읍니다.) 철저히, 성(聖)과 속(俗)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놉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승려들은 형이상학적인 환희 속에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형이상학적인 환희는, 현실의 삶속에 살아야 하는 재가자들에게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육체적인 고통은, 특히 치통은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V. 연기법은 불교도들을 편애하는 인격신 같은 법칙이 아니다


서양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한 것은 동양종교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부를 경멸하던 기독교 신학을 극복한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므로,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 신의 영광과 섭리를 깨닫는 길이라고. 즉, 신이 헛수고를 해서 우주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물질세계와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동양을 넘어서게 된 것입니다.

청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동양은 서양보다 잘살았습니다. 당시 청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은 청나라를 천국처럼 묘사했습니다. 청나라는 서양에 비해서 월등하게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거리는 깨끗했습니다. 당나라, 송나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작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 폭 528.7cm 높이 24.8cm)에 나타난 송나라의 풍요로움은 대단합니다. 동양도 불교 도교 유교 등의 영향으로 물질세계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벼농사의 융성으로 큰 문제없이 잘살며 현실에 안주하다가 결국 추월당한 것입니다. 서양은 농작물의 생산성이 3배 정도에 그쳤지만 동양은 20배에 달했습니다. 즉 벼 한 가마니를 파종하면 20가마니를 수확했습니다.

종교인들은 마치 세상에 자기 혼자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은 여럿이 사는 것이며, 여럿이 살지 않으면 종교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럿이 살기 때문에, 남이 변할 때 자기도 따라 변하지 않으면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걸 부처님은 연기(緣起)현상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상유지라도 하려면 계속 달려야하는 세상을, 전직 수학자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종교인들은 불생불멸하고 상주불변하는 ‘자기(我)’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큰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我)는 없기에, 세상이 변하면 자기도 변할 수밖에 없어서, 옛날 기준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는 옛날 기준으로 살겠노라고 고집을 부려도,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예를 들자면, 그냥 총칼로 강압하면 그만입니다. 총, 대포, 비행기를 동원해 절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쫓아내버리면 그만입니다.

1950년대 문화대혁명기에 침략자 중공(中共)에 의해서 티베트에 벌어진 야만적인 일입니다. 뒤늦게 분신자살을 하고 항의해보았자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길이 없읍니다. 

연기법이란, 이놈도 저놈도 다 보살펴주는 자애로운, 인격신이 아니라 법칙일 뿐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이 따르는 법(法)말입니다. (우주감옥인 지옥이 그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는 법가(法家)입니다. 단, 세속 법가와의 차이는 사람들이 (인과)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자기를 희생해가며, 교화를 한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열심히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읍니다만, 불교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용서가 있을 수는 있으나, 우주적인 용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남의 업(業)은 대신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남의 죄를, 그것도 모든 사람의 죄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죄까지, 모두 대신 받았다는 예수님과 대비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 악이 횡행(橫行)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용서건 신의 용서건, 용서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VI. 진화론 등 과학을 부정하는 자들이 진짜 단멸론자


윤회 근본주의자들은, 누가 윤회론을 비판하면 단멸론자(斷滅論者)라고 공격을 합니다. 예를 들어 “윤회론 중에 지옥윤회는 문제가 있다. 수정되어야 한다” 하면, 단멸론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육도윤회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멸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단멸론이란 ‘인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단멸론이란 인간 행위가 인(因 cause)이 되어 과(果 effect)를 초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는, 선한 행위에 따른 선과와 악한 행동에 따른 악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 함부로 살아도 좋다고 주장합니다. 이걸 단멸론이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통속적인 윤회론을 안 믿더라도, ‘선한 인간이 선한 결과를 악한 인간이 악한 결과를 얻는 사회’를 만들어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과론의 구현일 것입니다. 소위 ‘정의구현’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평등·박애의 구현입니다.

인간세상에 이나마 정의가 구현된 것은, 종교의 공이 아니라 과학과 정치·경제·사회·사법·교육제도 발전의 공이 가장 큽니다.

윤회론은, 수천 년 전에 세상의 길흉화복과 영고성쇠는 신이 결정한다는 설명에 맞서서 세상의 일견 모순된 모습을 설명하고 혼란한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도입된, 인과론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형태의 통속적인 육도) 윤회론이 참이 아니더라도 인과론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인과(因果)와 연기(緣起)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윤회론은 단지 인과론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가장 철저한 인과론입니다. 이 점에서 과학적 발견을 부정하는 무리들이 진정한 단멸론자들입니다. 원시적인 믿음으로, 진정한 인과론인 과학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문명이 과학발전의 빛을 받아 끝없이 발전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진리는 과거에 다 밝혀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억과 의식이 있는 인간이 “윤회가 있다, 없다; 없다고 하면 단멸론이다, 아니다”라고 떠들 뿐이지, 우주는 무심합니다. 묵묵히 인과법과 연기법을 실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35억년 동안 한 마디 말이 없는 우주의 침묵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전처럼 앞으로도, 일반사면이나 특별사면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인생은 내릴수 없는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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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보이지 않는 승차권 하나
손에 쥐고 떠나는 기차여행과 같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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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의 기회도 없이
한 번 승차하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되돌리지 못하고
절대 중도에 하차할 수 없는 길을 떠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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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보면~
강아지풀이 손 흔드는 들길이며
푸르른 숲으로 둘러진 산들이며
금빛 모래사장으로 눈부신 바다도 만나게 되어
밝은 아름다움이 주는 행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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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둠으로 찬 추운터널과
눈보라가 휘날리는 매서운 길이며
때로는 뜨겁게 숨막힐듯한 험한길을
지나갈 때를 맛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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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고통과 막막함이 느껴지는 곳을 지난다고 해서
우리의 손에 쥐어진 승차권을
내팽개쳐 버리거나 찢어버릴수는 없는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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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지에도 채 도착하기전에
승차권을 찢어 버리고
중도하차 하려는 인생은 어리석다 하겠지요.


인내하며 가야겠지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나면
보다 아름다운 햇살이 나의 머리맡에
따스하게 내릴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 박성철의 "등불 2"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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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이란 무엇인가 ?

 

 

 인간이 이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살아 갈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  한번 궁굼한 마음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하루 24 시간 중에 3분의1은 수면을 취해야 하고 ,3분의 1은 삶을

 

 영위 하기 위하여 자신을 잊어 버려야 할때 나머지 3분의 1, 즉 8시간

 

 이 인생을 즐길수 있는 시간 이라고 보았을때,

 

 과연 한평생 얼마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까요 ?

 

 인간의 수명을 통계치 기준에 의하면 남자 72세,여자78세 기준으로

 

 하였을때,이세상에 태어나 유년기 시절의 철모르는 시절 18년을 제외

 

 하고 노년기의 65세 이후의 삶을 잊어 버린다고 하였을때 한 인간의

 

 인생을 즐길수 있는 기간은 47년 이란 세월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보면, 이중에서 3분의 2를 제외 하고 나머지 3분의1을 즐긴다고 보았

 

 을때 15.6년 이란 길지도 않은 인생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전부가 아니라 살아 가면서 ,,,의 시간을 제외 한

 

 다면 불과 10년 이내 일 것입니다,

 

 일수로는 3,650일,시간으로는 8,670시간으로서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이순간도  삶의 일부분 으로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전체의 시간이고 , 우리의 현재 모습에서 보았을때

 

 과연 얼마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요?

 

 여러분 궁굼 하지 않으 십니까?

 

 만약  50대 이라면 과연 얼마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격언을 새삼 느껴 보면서,,,,,,

 

 길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 가면서,서로 반목 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이 모두가 부질 없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자주 듣고는 합니다 마는 과연 이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모르고 살아 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혼자서는 살아 갈수 없도록 되어 있어 언제나 상

 

 대성이 있기에 서로의 이해 관계로 부딪치다 보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감정을 느끼다 보면,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 지기도 하고 심지어 원한이

 

 사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생겼을때 우리의 삶이란 무엇 인가를 생각 하면서

 

 마음을 비울수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