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8. 17:4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시간을 깨뜨리고 허공을
가른다
우리의 가장 큰 장애는 그저 생각과 감정과
감각적인 산물을
실재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특정한 존재로 살아간다고 여깁니다.
육체를 가지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렇게 특정한 개체로 존재한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깨달은 사람들은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간은 관념일 뿐이고 공간도 마찬가지로 생각과 감각의 투사라고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내가 따로 존재한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오직 이 세계 속의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
그것을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추구하고 얻으며 경쟁하며 삽니다.
이것이 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보이는 평범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중생(衆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말을 자세히 보면 그것의 개체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衆生)이란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무리 지어 생겨난 인연 화합이라는
말입니다. 인연 화합은 허망한 것이고 헛것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영상처럼 드러난 임시적인 존재이고 가변적인 환상이고
실체가 없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참된 실상을 깨닫지 못한 이에게는 중생이든, 사람이든,
인간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재 존재해서가 아니라 착각이 빚어낸 결과물이지만
그렇게 믿는 이에게는 이 중생의 생사 여부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시대마다 생겨났습니다.
스스로가 믿고 있는 자신이란 존재가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실체가 없는
가변적인 존재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부여했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저 생각과 감정과
감각의 투사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나의 개체성뿐만이 아니라 드러나는 온갖 사물들, 사건들, 존재들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불러옵니다.
자기를 깨달으니 온 세계의 참상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가변적인 것들이
스스로에게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생각이고 감정이고 감각입니다.
지금 이렇게 일어난 생각과 감정과 감각적인 산물이 어우러져
나를 비롯한 온 세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온갖 허망한 것들이 항상한 자기의 성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은 바로 지금 한 생각이 일어나는 여기에서
생각이 되고
감정 또한 감정이 올라오는 여기에서 감정이 되며,
감각적인 산물 또한 지금 보고 듣고 맛보는 여기에서 그것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의 당처는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온갖 경험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여기가 세상이 시작되는 곳이고 여기가 세상이 사라지는 지점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이렇게 이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서 온갖 것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내가, 사실은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본성으로 인해 허망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눈 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온갖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전환입니다. 이 성품은 누구나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누구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성품이 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것을 증명하며, 느낌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온갖 일이 바로 이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세계도 지금
이렇게 스스로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지금 이렇게 스스로에게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있는 일, 없는 일조차 바로 지금 이렇게 스스로에게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 사이에 혹은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사이에
어떠한 충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의 모양 없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에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갔다올 수 있고, 온갖 것을 소환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습니다. 한 생각에 과거 현재 미래가 나고 사라지고 뒤죽박죽
섞여 드러나도 아무 일이 없는 것입니다.
현상을 따라간다면 시간과 공간이 섞일 수 없지만 진실로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없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여기에는 공간과 공간을 채우는 존재들의 한계가 없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 경험하고, 알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모양을
따르면 정해진 규칙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몸은 땅 위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은 하늘, 땅, 바다,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골고루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구속이란 몸의 구속이 아니라 마음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거운 것은 마음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분별된 상들을 실재로 여겨 거기에 존재감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습으로는 온갖 것이 다 있고,
한계가 분명하지만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계 없는 자유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해탈입니다.
우리 참된
존재 자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 릴라님
이와 같고 이와 같으니 이것이 이와
같네.
이와 같음 바깥에 따로 이와
같음 없거늘
세상 사람들 이것이
이와 같은 줄 알지 못하고
이곳저곳
헤매며 이와 같음을 찾고 있네.
- 백봉 김기추
여시여시시여시(如是如是是如是)
여시외별무여시(如是外別無如是)
세인부지시여시(世人不知是如是)
좌왕우왕멱여시(左往右往覓如是)
이와 같습니다. 이러합니다. 이렇습니다. 이 말도 허물이 큽니다.
‘이’라는 말이 일어난 자리가 이와 같고, 이러하고, 이렇습니다.
허물에 허물을 더했습니다.
‘이’라는 말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가 이와 같고,
이러하고, 이렇습니다. 온통 허물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이와 같고, 이러하고, 이럴 뿐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이러합니다. 이렇습니다.
이것 이외에 달리 이와 같고, 이러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눈으로 온갖 사물을 봅니다. 이와 같습니다. 귀로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이러합니다. 몸으로 온갖 느낌을 느낍니다.
이렇습니다. 생각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킵니다.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
이와 같음입니다.
알지 못하는 그것이 때로는 알기도 합니다. 이러합니다.
그것 자체는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습니다. 이렇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인연을 만나면 즉각 작용합니다.
이것입니다.
여기를 가도 이와 같고, 저기를 가도 이와 같습니다.
찾아도 이와 같고, 찾지 못해도 이와 같습니다.
얻어도 이와 같고, 잃어도 이와 같습니다.
깨달아도 이와 같고, 깨닫지 못해도 이와 같습니다.
부처도 이와 같고, 중생도 이와 같습니다.
번뇌도 이와 같고, 열반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입니다.
- 몽지님
진리
진리란 바로 '진리' 이 자체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가 의미하는 것을 쫓아가서는 곤란합니다.
뜻을 쫓고 이미지를 쫓는 것이 병이라고 말하면,
뜻을 쫓고 이미지를 쫓지 말아야 겠구나하는데,
이것 또한 병입니다.
뜻과 이미지 가운데 뜻과 이미지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자리가 변함없는 진실이고 지극한 도리인 것입니다.
세상만사 만 가지 법이 예외없이 다르지 않으니,
온갖 일이 있어도 좋은 시절입니다.
역시 이런 말을 들어도 그뿐입니다.
곧장 보고
곧장
듣고
곧장 행할 뿐.
- 릴라님 (몽지와 릴라 밴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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