智慧는 밝고 알음알이는 어둡다 / 현웅스님

2016. 7. 16. 20:5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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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참선을 오래하고 오래하지 않고를 가리지 않는다

스님 노릇 오래하고 오래하지 않고도 가리지를 않는다

본성에는 먼저 했다거나 나중에 했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1.智慧는 밝고 알음알이는 어둡다.

 

“집 앞의 작은 길이 서울 장안으로 뚫려져 있다”
옛 사람 어록에 있는 이 말은 理致의 길을 따라 이해하기로는

내 집 앞 사립문을 벗어나 나오면 이렇게 저렇게 서울 장안으로 들어와 진다.    
 
법사가 이 언구를 들고 나와 법문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저 말이 法師가 깨달아서 온 소리인가

책을 보고 옛 사람의 말을 옮겨 놓는 것인가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어리등절 하다.

 

어록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사실에 있어서 내 마음이 예수, 공자, 부처에게 닿아있고 모든 깨닫는 사람에게

닿아있고 또 못 깨닫는 사람에게도 닿아있고 또, 개미, 병아리, 닭, 개에게 생명이 있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야 큰 길에 뚫려진 것 아니겠는가! 이다. 그러나 여기엔 두가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깨닫는 이가 텅~빈 하늘을 본 뒤 아래 구름을 보고 하는 것이 그 하나요. 

그다음은 깨달음이 없는 이가 구름 속에서 푸른 하늘을 그림 그리듯 그려 나오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이 두 번째 있는 사람도 이치를 따라 푸른 하늘을 구름 속에서 만들어 지어놓고 스스로

나만 알고 있다는 생각에 붙들린다. 그리고  그것을 애지중지한  것으로 알고  선을 삼는다. 

이 알음알이가 禪門에서 가장 쉽게 생기는 病이다.

그러나 구름 벗어난 사람은 밝고 구름 속에 있는 이는 어두우니 어쩌랴 !


알음알이를 따라  들어가는 길은 말은 같은 말로 나오지만 행이 나오지 못하고

아는 것에 얽매임을 당해 스스로 밝지 못한 허물이 있다. 곧 큰 길을 막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가 본 푸른 하늘은 모든 중생 속에도 있다고 보고 나온 분이다.  

다만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윤회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부처는 그런 중생을 보고 그의 마음에 자비심이 인다.
 
그러나 이 언구를 들고 나와 설법을 하는 방장이나 조실은 중생 속에도 있는 것을 소홀히

하고 그들만이 뚫려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은 자비심이 적고 지혜가 밝지 못하다.

모든 聖人은 이 중생 속에 있는 평등한 性을 보고 나온 분들이다.

 

성인은 살아있는 생명마다 그 속에 佛性, 神性을 보지만 범부는 작은 法의 흔적만 보고 

집착하여 가리지 않는 불성을 만나지 못한다. 聖人은 사랑과 자비가 있지만 작은 법에

집착한 이는 지혜와 자비가 성인과 같지 못한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가려진 불성이 드러난 선지식은 마땅히 지혜복덕이 나와져야한다.
 
聖人의 눈에 뵌 평등성은 지금 사람에게도 그대로 있다.

이 평등성을 본 사람은 불성을 본 사람이다.
 이런 선지식은 중생이 고통의 윤회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역시 그의 마음에 자비심이 이

~인다. 이런 스승은 그의 삶이 항상 새로워져 간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편안해진다.  불법이 그로부터 살아나기 때문이다.

世尊이 남긴 金剛經에 이 길을 밝게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마음에도  안 머문다는 말이다. 머문 것 대신에 8정도라는

행으로 번져 나온다. 사실 깨달음이 없는 이 몸에서도 세포가 자라고 변하고 있다.

숨을 들어 마시면 내쉬고 몸이 찰나 찰나를 고정 된 바 없이 변하고 있다.

이렇게 몸은 변하고 있다.  마음 또한 변하고 있다.


사람은 이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있다. 東山 水上이라는 화두가 나온 출처이기도 하다. 

공부하다가 작은 지견이 나온다고 해서  ‘이것이네!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작은 지견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법은 그 知見을 허락지 않는다. 

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法의 성질 곧,“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 는 말이 곧 그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전혀 안 오던 경험 때문에 그걸 못 잊어 한다. 그리고 대법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네!  하고 오도송을 짓고 요란하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은 곧 나를 가린 어둠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바른 경험은 사람

사람에게 뚫려져 있는 것이다, 이를 아는 사람은 자랑대신에 겸허가 찾아들고 자비와

지혜가 날마다 크고 넓어져 간다.


금강경은 이 어둠을 멈추게 하는 경전이다. 고정된 법이 없는 것이  아뇩 다라 삼먁삼보리가

그것이다. “그것이네! 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세존의  귀한 메시지인 것이다.

금강경은 나안에 있는 불성의 성질을 말하고 나온 경설이다.

불성을 본 사람은 날마다 내가 먼저 새로워져 간다.  절로 풍요롭다.

그래서 법은 복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텅텅 빈 곳엔 지키는 마음이라곤 없다. 

할 것은 다 한다. 하지만 그 하는 것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의 싹을 잃은 알음알이는

그만 아는 법이 있다는 지견을 짓는다.  그리고 세상을 따로 본다.

그러나 살아있는 법은 世上을 떠나지 않고 있어 이 삶속에서 나를 밝혀 준다. 
      
2. 北斗를 보려거든 얼굴을 南쪽으로!  <南面北斗>

 

 ‘남면북두南面北斗’라는 말은 원오 극근 선사가 남긴 말이다.

북두칠성을 보려면 얼굴을 南향하라. 어떻게 남쪽을 향해서 북두를 볼까 !  남면 북두


조사 스님들의 말뜻은 그 방향을 모두 같이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평생 參禪만 해온

한 토굴 스님은 어느 간화선 법회에서 “남면북두’라는 공안을 들고 나와 佛性은 공간이

없어서 남쪽에도 있고 북쪽에도 있다”라고 그의 견해를 보여 준적이 있다. 
이건 눈에 있고 마음에는 아직 닿지 못하는 원오의 본뜻을 지나친 것이 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이 공안은 말 풀어 놓는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화살이 관역을 벗어나 있다. 납승의 눈이 못된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나온 것이다.  이런 맘 밖에서 내어다 보는 눈이 그의 佛性을 멀리한다.

알음알이에서 오는 의리 禪이 그것이다. 이 공안은  사람 본성을 보기 위하여 북두를 들고

나온다. 본성은 내게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북두’ 가 북쪽에 있는데 남쪽을 향한다. ~ ? 보는 사람이 북쪽을 보고 있는 동안 이미 그 눈이

경계를 따르는 눈이 되어 버린다.  보는 것이 그에게 있는 佛性을 덮는다.

그러나 남쪽을 향하면 우선 경계인 “북쪽” 을 놓는다.

향하는 눈은 저절로 내 맘이 있는 안을 행할 수밖에 없다. 내 안에 본성을 보게 한다.

회광 반조가 그것이다. 밖을 향하는 마음의 눈이 나에게 있는 성품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참작함이 온다. 그래서 참선인 것이다. 이 참작하는 곳엔 조작이 없는 의심만 있다. 

이 의심은 있지만 알 수 없는 것이다. 몸을 통해 앉고 서고 하고 있지만 의심으로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이 없다.


그러면 몸을 통해서 몸이 아닌 본성에 내 눈이 간다. 

몸을 지나  보는 것이 그치는 곳에 북두를 대신하는 말, 佛性이다.

몸 아닌 것을 보는 다른 말이 된다. 저 공안을 이렇게 접근하는 이는 공부에 든 사람이다.

그러면 저 사람은 북두를 보나 남쪽을 보나 상관없다. 그러기 전에는 북두칠성을 보려거든

남쪽을 향해야한다. 조고각하 라는 말이 이 뜻을 대신한다.
이 말을 더 일상으로 가져 와보면 남의 허물 보는 것을 돌이켜 내 허물을 본 것도 덤으로 온다.

참선은 이렇게 일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공부이다.

 

하나만 바로 하면  열 가지가 풀리는 것이 이 禪공부이다.

성품은 내가 깨닫고 못 깨닫고 와는 관계없이 본시 나에게 존재한다.

돌아봐 허물이 고쳐지면  누구나 이 자성인 성품에 이른다. 눈이 사물을 따르는 것은

성품을 등지는 길이다.    말을 하는 즉 남쪽을 의지해서 남쪽 아닌 것을 본다는 말이다.

無자도 무를 의지해 조주 뜻을 안다, 또 몸을 의지해 몸 아닌 것을 본다,

번뇌 망상을 의지해 번뇌 망상 아닌 것을 본다.  번뇌는 저절로  떨어져 나가 버린다. 

시궁창에서 연꽃을 본다.  연꽃을 보고 있는 동안 시궁창은 안 뵈는 것과 같다.   

아 ~ 연꽃! 연꽃이 없을 때는 시궁창만 있다.  연꽃을 봐버리니 꽃만 있다.

시궁창을 놓고 본다.


번뇌 없애는 것도 이와 같다.  번뇌가 있는데 스스로 있는 성품을 봐버리니 번뇌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번뇌를 내가 없애려고 밀어내면 번뇌는 더 생깁니다. 그것이 번뇌의 성질이다.

이 차이가 큰 길을 가른다.  어려움은 애써 하려는  노력을 그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노력이 번뇌를 더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법문을

듣고는 잘못 익힌 습을 돌이켜 그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은 智慧가 있는 사람이다.

禪은 참선을 오래하고 또 많이 알고 스님 노릇 오래하고 안하고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본성에는 참선 많이 하는 것을 기억하고 또 먼저 한 사람 나중한 사람도

기억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석가와 중생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한번 봐버리면 옛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고 나온다. 성이 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부는 그런 공부이다. 경험이 오면 그 사람은 번뇌 속에서 번뇌에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온다. 일상에서 불교 공부를 한다.

 

이처럼 간단한 공부가 안 되는 것은 믿음의 방향을 모르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이 없는 공부는 내 맘에 상대를 짓는 습만 늘어난다.   그 습이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비교하는 마음만 늘어난다. 비교를 하면 남이 있고 나가 있고, 악과 선이 있고,

지옥과 천당이 있고, 俗人과 僧이 있고, 많고 적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이 이~일고 단견 상견에 떨어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를 통해 버리면 양변을 벗어난다.  물질을 다루는 것, 사람 대하는 것,

南面北斗 ·  照顧 脚下 ·無,  東山水上 그런 것이 싹 한 곳에서 풀려져 버린다. 

불교인이 보기에는 낯선 다른 종교 성경에서 까지도 禪의 智慧를 품고 있는 구절을 본다.

베드로는 , 주여 !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예수는 말한다.

“너는 새벽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등질 것이다”   닭 우는 소리는 깨달음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세 번은 인간에게 있는 三 毒心 곧, 고린도전서에 보이는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지혜롭지 못한 것” 을 말하고 있다.
이는 貪心과 嗔心 癡心 3독심이다.

이것이 일어 날 때마다  베드로는 그가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등지고 있는 것이 된다. 

主는 삼독심이 없는 사람이다. 삼독심이 들면 저절로 진리를 등진다. 

베드로가 이 말 듣고 있을 때가 저녁 시간인 듯하다. 새벽 닭 우는 시간 까지는 짧은

그렇게  먼 시간이 아니다.  어떻게 잠든 속에 있는 사람이 세 번이나 그를 만나며

또 배신하고 있겠는가!  그는 꿈속에서 잠만 쿨쿨 자고 있는 시간일 것이다.

 

서쪽에서 온 禪家의 初祖 보리달마는 말한다. 世尊은 3말 6되 우유를 마시고 成佛 했다는

비유 또한 그것이다. 이는 계정혜 三學과 六바라밀  비유를 들고 나온 것이다. 

남면 북두, ‘북두칠성을 보려면 얼굴을 남쪽으로 돌린다.’는 언구 또한

육안을 벗어난 心眼에서 온 뜻을 품고 있다.


저 쪽에 밝은 불이 있다. 그 불을 보려고 반대쪽을 본다. 이것을 화두라고 한다.

보는 눈이 글자에 붙어 있는 동안엔  일반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이다. 

북두칠성은 佛性 본성, 神性의 뜻을 품고 있는 말이다. 보려고 하는 자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육안이 있고 심안이 있다. 심안에 지혜가 있다.  


불성을 보려는 자가 다른 쪽을 봐야 하는 이유는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보면 그 사람 눈이 곧, 상하고 미혹에 합류하고 만다. 

조주 무자 화에 조주 무자는 불타는 덤불인데 그 가까이에 가면 얼굴이 타져 버린다가 그것이다.

그리고 “佛, 佛이 不相見“ 부처는 부처를 보지 못한다. 가 또한 그것이다.


우리는 가끔 길가다가  공장 주변에서 산소용접을 하는 것을 본다.

용접을 할 때 그 산소 불빛이 너무 밝아 직접 보면 그 사람의 눈이 상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눈을 보호하는 것을 착용한다. 안 그러면 불빛을 바로 보지 않고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용접 일을 한다. 이 남면 북두 또한 이와 같다. 


불성이나 신성은 사람의 눈으로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곧 불성 있는 곳에 내가 닿으면 나라고 하는 에고가 녹아져 없어져 버린다.  無我가 된다.

난 변하기 시작한다. 거듭난다. 내가 진리의 몸으로 돌아간다.  귀의불이다.

그래서 “南面 北斗” 는 貴한 언구이다.

 

- 현웅스님


<나를 변화시키는 초정리법>

1. 버리는 일부터 시작하라.
쓸데없는 것은 소유하지 않는 일,
바로 이것을 습관화 하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 진다.
그저 시간 떼우기식으로 만났던 인간관계도
산뜻하게 정리 할 필요가 있다.

2.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라.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
책을 읽는 편이 훨씬 생산적인 일이다.

3.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부터 하라.
행복의 기준은 자신이 만들어라.
평범하긴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이다.
지금 당장 건강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건강관리에 시간을 투자한다.
건강한 몸 안에서 자라나게 될무한한 가능성을 떠 올린다면
행복도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4. 계획보다 50% 여유 시간을 잡아라.
하루 활동하는 시간 중에도 일의 능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잇는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내
그 시간 내에 하루 처리할 업무의 대부분을 해결하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일은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커다란 해를 입힐 수 있다.

5. 단순하게 생각하라.
무슨 일이든 단순하게 생각하면
중요한 부분에 자신의 능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피하려고 하기 보다는
어떻게 쉽게 생각할지 방법을 궁리하면
어느 순간 집안사정처럼 환히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6. 쉽게 그리고 즐겁게 일하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장 행동으로 옮겨라.
아주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대견해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즐겁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에 뛰어든다.
지금이라도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자.

7. 나만의 능력을 찾아라.
능력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하챦게 여기는 것이라도 스스로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나만의 능력이다. 능력은 단시간에 생기는 게 아니다.
바로 그점이 도전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갖게 된다.

8. 목표는 구체적으로 숫자화시켜라.
목표는 나는 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세우는 게 효과적이다.
이왕이면 목표를 숫자화시키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결과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1%정도라면 누구나 쉽게 도전할 만한 수치다.
일단 1%를 달성한 다음 자신감이 생기면 수치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매일 1%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한다면
한 달 아니 1년 후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9. 일을 인생의 수단으로 삼아라.
일은 인생의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언제든지 회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웬만한 일은 대수롭지 않아, 할 만한 베짱이 생기지 않겠는가,
가치 있는 자리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이다.
자신감과 노력이 뒤따르는 그 정도의 배짱은
일상의 여유를 선물 해 줄 것이다.

10.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지 마라.
한 가지 일에만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하라.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로 자신을 몰아치는 동안
내안에 잠자고 있는 진정한 재능이
그대로 잠들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