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수행은 참회가 따라야

2016. 7. 16. 21: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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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은 참회가 따라야








  불교수행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쉽고 어려운 것으로 나눈다면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참선은 대표적인 난행문이죠. 어려운 수행입니다.


 흔히 어려우면 더 수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말씀 중에 어떤 것은 쉬우니까 가치가 떨어지고 어떤 것은 어려우니까 더 좋은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 주변을 봐도 복잡하고 현학적인 이야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오히려 내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아요. 참선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습성,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우리는 스님들처럼 주야장창 앉아서 정(定)에 들기 힘들어요.


바쁜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염불은 이행문으로 아주 쉬운 수행법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고 둘째는 부처님의 중생구제


원력(願力)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장 비구의 48대원을 보면 ‘만약 시방의 중생이 지극한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내 국토에


왕생코자하여 열 번만 나의 이름을 부르고도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정각을 얻지 않으리라.’


이것을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이라 그래요.


‘임종시 열번만 부르면 내가 반드시 대중들과 함께 영접을 하리라.’ 부처님의 원력이


중생제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염불을 통해 갈구하면 정토에 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아주 유능한 선생님이 있는데 그 유능한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서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이 있으면 성심성의껏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해 가르쳐주리라’


하는 것과 같아요.


이것이 줄탁동시(啐啄同時. 주-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닭이 쪼는 것을 탁이라 하는데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부화가 가능하다는 비유.)에요.


학생도 간절히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할 것이고 선생님도 능력을 갖추고 있고


거기다가 잘 가르치려는 마음도 내야 할 것이고….


그러면 그 학생은 결국 공부에 성공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처럼 부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통달하신 분, 깨달은 분이자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력을 가진 분이세요. 그래서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기만 하면 항상


만반의 준비를 갖춘 부처님의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쉽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염불수행을 하는데 있어 전제가 있습니다.


꼭 염불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수행에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참회’와 ‘발원’입니다.


선도스님이란 분이 「관무량수경소」에서 ‘모든 수행자들은 먼저 불상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지은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지극하게 참괴(慙愧)한 마음을 내어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면서 허물을 뉘우치고 마쳐야한다’고 했어요.


스스로 지은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이것을 발로참회(發露懺悔)라 그럽니다.


니 잘못했지! 해서 잘못했어요! 하는 것은 발로참회가 아닙니다. ‘


스스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외부의 압력 때문에 별수 없이 하는 참회는


효과가 별로 없어요.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효과 백프롭니다.  


모든 신행의 기본은 참회예요.


그것도 적당히 참회해서는 안 되고 눈물로, 절실히 참회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참회해야 하느냐.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무조건 참회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현상세계는 전부 연기(緣起)해서 존재합니다. 연기한다는 것은 서로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길다는 것은 짧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고, 짧다는 것은 길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고,


예쁘다는 것은 미운 것이 전제된 것이고… 뭐든지 전제된 조건하에 인식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현상세계뿐만 아니라 의식세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의식, 생각이란 것도 마차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휴, 그럴싸하네…


하는 것도 이미 여러분에게 전제된 마음상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제가 아무리 비단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옳은 이야기를 하고, 똥을 똥이라 된장을 된장이라


해도 기독교인이 들으면 그것은 마귀사탄의 헛소리야.


그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가 전제되어 있어서 수긍하지 못합니다.




 




  물질도 연하여 일어나고 의식도 연하여 일어나고 시간도 연하여 일어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여러분은 현재를 삽니다마는 과거가 있으니까 현재가 있는 겁니다.


우리 전부 과거가 있는 사람들이예요. 전생이 있으니까 현생이 있는 것이고 다시 내생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시간적인 연기입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사건이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전제된 것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아무 전제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절대 없어요. 열매가 맺힌 것은 분명히 씨앗이 있었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겁니다.


씨앗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씨앗을 낳은 과거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열매는 과(果)고 씨앗은 인(因)입니다.


그런데 씨앗의 원인은 열매인 고로 과가 인이고 인이 과가 되는 것이죠.




 




  지금 이생을 이렇게 괴롭게 사는 것이 원인 없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다시 말하면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장애가 없고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난센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회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과거 생에 지은 악업의 종자가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불행이 닥치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하잖아요.


어떤 놈은 동창회 따라 평생 처음 외국에 나와서 사격장에서 헤헤하고 있는데 펑 터져서


가버렸잖아요. 인생이 이런 거예요.


크면서 철없이 부모님한테 막무가내로 속 썩히고 짜증 다 내고 고집부리고,


부모는 뼈 빠지게 고생해도 저는 좋은 옷 입어야 되고 택시 타야 되고…,


자식이랍시고 보이지 않는 폭력행사를 하는 거여, 부모란 이유로 죄인이 되는 거여…


그러나 금생이든 내생이든 그 다음 생이든 죗값은 반드시 전부 치르게 되어 있어요.


참회해야 돼요. 이유 없이 뭇 생명을 죽인 죄를 참회해야 하고 부부로 살면서 서로


원망만 하고 사는 것도 참회해야 하고…. 눈물로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 없이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한번 악업의 종자를 뿌리면 그것이 열매를


만들고 다시 종자가 뿌려지고 그렇게 끝없이 계속 되는 거예요.


역으로 선업의 종자를 뿌려도 마찬가지예요. 악업의 종자를 소멸시키는 것이 참회이고


선업의 종자를 뿌리는 것이 발원, 원력을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악업은 소멸되고 선업이 쌓여야 미래가 보장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최근에 보면 신종플루라든가 소행성의 충돌이라는 것 때문에 사회가 뒤숭숭한데


이런 때 돈 버는 데가 어디에요? 종말론을 주장하는 집단이 돈을 법니다.


세기만 바뀌어도 종말이 왔다고 그러고…. 종말론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기독교는 창조가 있어요, 창조. 창조는 최초의 시작이에요.


시작이 있으면 뭐가 있어요. 끝이 있어요. 이렇게 시작과 끝을 가진 단선적인 생각는


종말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에 모순이 있어요.


모든 시작은 뭐가 전제돼야 합니까? 끝이죠. 끝이 없는 시작은 없어요.


따라서 최초의 시작이라는 말은 모순입니다. 창조론은 모순이에요.




 




  불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에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순환만 있어요.


그래서 원이에요. 종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 완전한 끝이란 없는 것이니까.


종말을 두려워할게 아니라 자신이 쌓은 업을 두려워해야 돼요. 왜냐 하면 그 업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니까…. 종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종말이 두려운 사람은 다른데 가지 말고 여기로 가져와요. 아까우니까 어디 가지 말고….


종말이라는 개념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느님이 내려와서 종말이 언제 어느 때에 온다고 했어요? 전부 인간이 만든 것이거든요.


그래서 다 달라. 각자 지 입맛대로 시기가 다 달라. 종말론 이야기하는 사람들 전부


데려다 놓고 물어봐. 똑 같은 점은 전부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거야.


계시는 한 사람이 했을 텐데 내용은 다 달라. 중생이 지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생각에 갇힌


것일 뿐이에요. 이게 생각의 놀음이라는 거여. 허상! 전부 그렇다는 거여.


 






  우리도 장사를 잘 해야 하는데 너무 솔직하게 부처님말씀만 전해서는 안 된다니까….


어쨌든 염불은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건데 염불을 하는데 있어 참회와 발원, 원력이


전제돼야 합니다. 내가 오고 싶으면 오고 안 오면 말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이러면 안되고 끊이지 않는 정진력 이것을 원력이라고 합니다.


원력을 바탕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죄업이 소멸하고 복이 증장되어 미래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오전 10시경 외양간에서
놀던 하루살이 아들이 소꼬리에 맞아 죽어 

 

하루살이 가족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치루고 하루살이들이 모여 앉아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넘 아깝다"

 

젊은 나이에 그리 일찍 가다니...

 

오후 3시경에

 

또 한마리가 잠자리에 먹혀버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또 하루살이 가족들은 모여서 추도를 했습니다.

 

"운이 없어서" 제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그러나 해가 지자 남은 하루살이들은

 

모두 주어진 생을 장수하고 다 죽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오전에 죽은 하루살이와 오후에 죽은 하루살이,

 

그리고 천수를 누리고 저녁 때 죽은 하루살이의

 

삶이 차이가 없어 보이고, 먼저 죽은 하루살이를

 

추모하는 짓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시간을 지배하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50세나, 100세의 삶도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서로 시기하고,

 

서로 미워하고,

 

심지어는 자기 삶을 위해 타인의 삶에

 

피해를 주고, 속이는 짓을 한다면

 

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이겠습니까?

 

주어진 인생 행복하게 살다가 가야 할텐데,

 

욕망에 얽매여

 

그 짧은 시간을 낭비 하면서 바보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과 하루살이 "생"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삶은 순간입니다!!! 오늘을 살아 가는 우리들..

 

후회 없이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 된다는 소서도 지났습니다..

 

다시 장마 비가 시작 되나봅니다

 

새벽 부터 부슬 부슬 비가 오는군요.. 

 

습한 기온에 음식들 조심 하시고

 

늘 즐거운 마음으로 긍정 적인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루도 멋진 인생 ...살아 보자구요~~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