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고 간절해야

2016. 8. 13. 22: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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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한라산]_한라산의 겨울  -맹헌영-


간절하고 간절해야

어떤 승려가 동산(洞山) 스님에게 물었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의발을 얻지 못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얻어야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동산 스님이 말했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이다.”
승려가 말했다.
“그저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이기만 하면 됩니까?”
동산 스님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주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하고는 학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곧장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하여도 오히려 의발을 얻기에는 충분치 않으니


여기에 부합하는 한 마디를 해보라. 자,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가?”
어떤 상좌가 있어 96번이나 자기 견해를 말했으나 동산 스님의 뜻에 맞지 않다가


마지막 한 마디에 비로소 스님의 뜻에 계합하였다.
동산 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진작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또 다른 스님 하나가 몰래 듣고 있다가 마지막 한 마디만 듣지 못했다.


마침내 상좌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상좌는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3년 동안 가까이 모셨지만 끝내 상좌가 말해주지 않아 병이 들었다.
그 승려가 말했다.
“제가 3년 동안 앞의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였으나


자비를 입지 못했습니다. 선의로 얻지 못했으니 악의로 얻겠습니다.”
마침내 칼을 겨누고 말했다.
“만약 제게 말씀해 주지 않는다면 상좌를 죽이겠습니다!”
상좌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잠깐 멈추게! 그대에게 말해 주겠네.”
그리고는 말했다.
“설사 가져온다 하더라도 둘 곳이 없다 하였네.”
그 승려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 균주동산오본선사어록(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


 




어느 옛사람의 말씀처럼 이 공부는 간절할 절(切)자 하나면 충분합니다.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흩어져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진실 하나에 목마르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엉뚱한 곳에 마음이 쏠릴 수가 없습니다.


 삼대독자 막내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가 잠시라도 아들 걱정을


잊을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어찌 마음 편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간절하고 간절해서 그 간절함이 극에 달하면 저절로 마음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온갖 분별망상을 녹이게 됩니다. 그런 순간 어떤 인연에 이제껏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 하나의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늘 그 속에서, 그것 자체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바깥으로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고, 안으로 한 물건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 말도 긁어 부스럼일 뿐입니다.

간절함은 의도적인 노력이나 조작을 통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절함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도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순수한


갈망입니다. 어떤 것도 바라는 바 없이 오직 스스로 알 수 없는


이 하나의 사실에만 저절로 몰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의도나 조작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생각으로 헤아려 앞뒤를 따질


여유가 없을 때만 저절로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절이든 사람이든 인연을 만나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해야 인연을 만나고, 인연을 만나야 간절해집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어떤 기량이나


재주를 부려 살아나올 궁리를 하는 한 막다른 골목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은산철벽에 가로 막히고, 금강으로 만든 감옥에 갇히고,


밤송이 가시를 삼키지 않고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길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살아서 완전히 죽지 못할까 걱정해야 합니다.

예화 속 동산 스님 회상의 두 승려를 잘 살펴보십시오.


사람마다 근기도 다르고 인연도 다른 까닭에 깨침 역시


일괄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상좌는 동산 스님의 질문에 96번이나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했습니다.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96번이나 물러서지 않고 스승이 제시한 관문을 뚫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일념(一念)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답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일념 자체가 바로 답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것을 엿듣고 있던 승려는 자신이 듣지 못한 상좌의 마지막 말 가운데


무슨 뜻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바깥의 무언가를 쫓아다니느라 바빴습니다.


 상좌에게 마지막 말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지만 상좌는 말해주는 것을 거절합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과 자비입니다.


설명을 통해 이해하여 아는 것을 결코 자기 살림살이, 자기 보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려는 상좌와의 인연으로 간절해졌습니다.


3년이나 시봉을 하면서 마지막 말을 물었지만 상좌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거절당할 때마다 그 승려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마지막 말을 너무나 알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만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알고 싶은 마음, 간절함이 극에 달하자


더 이상 선도 생각하지 못하고 악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승려는 마침내 말해 주지 않는다면 칼로 상좌를 찔러 죽이겠다는


막다른 골목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마디, 상황을 역전시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깨닫도록 만드는 인연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오직


알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 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념, 둘이 없는 상황은 승려가 만든 것도, 상좌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시절인연입니다.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푸른 법입니다.


 


 - 몽지님

 

 

 

 

 

 


 

[어느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시험을 봤는데,
한 학생이주관식 문제에 답을 쓰고는



 


 

 

 


답을 화이트로 지운 다음,
옆에 "전으로 긁으시면 답이 나옵니다." 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채점을 하시던
선생님이 그걸 보시고 어이가 없어서


옆 반 선생님한테 "이것 좀 보시라"고 하며 보여드리니

옆 반 선생님도 터졌다.

 

 

 

 

 

 

 

 

 

 

선생님채점하다가 동전을 가지고 화이트로 가려진 

답을 진짜 긁었는데 갑자기 자리를 일어나면서

 

 

 

 

 


 

"이런 개쉐이를 봤나!!"고 하면서
교실로 막 뛰어갔다 .

 

 

 

 

 

 

 

 

 

 

옆 반 선생님이
도대체 뭐라 쓰여 있었길래 저렇게


화가 나셨나... 하고 확인을 해봤더니

 

 

 


 

 

 

 

 

 

 

 

 

 

 

 

 

 

 

 

 

 

 

 

 

 

 

 

 

 

 

 

 


"꽝!!!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