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啐啄同時)

2016. 8. 7. 12: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줄탁동시(啐啄同時)

범현군(范縣君)의 호는 적수도인(寂壽道人)이다. 성도(城都)에 있으면서

원오 스님에게 참문하였다. 원오 스님은 그에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살펴보게 하였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뭐라고 물어 보지도 못하였다. 살펴보고 살펴보았으나


들어갈 곳이 없자 문득 걱정도 되고 두려워 원오 스님에게 물었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있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원오 스님이 말했다.
“방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네.”
적수도인이 이 말에 깨우친 바가 있어 말했다.
“원래 이렇게 가까이 있었거늘!”

- 종문무고






선문(禪門)에는 예부터 도적의 말을 타고 도적을 쫓고, 도적의 칼로 도적을 죽이는


수단과 방편이 있습니다. 다음의 예화를 잘 살펴보십시오.

하루는 법안 문익(法眼文益) 선사가 그의 문하에서 감원(監院) 소임을 보면서도


한 번도 법문을 청하지 않는 현칙(玄則)이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묻지 않는 이유라도 있느냐?”
“전 이미 청림(靑林) 화상 문하에서 한 소식을 얻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제가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청림 화상은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 좋은 말이기는 하나 그대가 잘못 알았을까 두렵구나. 설명해 보거라.”
“병정(丙丁)은 오행(五行)에서 불(火)에 해당하니 ‘불이 불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하고 부처가 부처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짐작대로 너는 잘못 알았다.


불법이 그런 것이라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현칙 스님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법안 선사의 회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생각할수록 개운치가 않아서 다시 돌아와 법안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병정 동자가 불을 구하는구나.”
이 말에 현칙 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반드시 많은 무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정문일침(頂門一鍼)이란 말이 있듯이,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말 한 마디로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것이 선지식의 수단 방편입니다.

공안이란 수단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사람 간의


신뢰와 소통이 중요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불합리한 언구를 제시받고도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지속적인 의문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시한 사람과의 신뢰 관계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공안을 제시한 사람 역시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수시로 소통하면서 그의 공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동력을 잃은 사람은 자극을 주어 분발시켜 더 큰 의문 속으로 몰아넣거나,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은 올바른 견해와 방향 제시를 통해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예화 속에서 적수도인은 원오 스님에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제시받습니다.


어떤 설명도 없고 뭐라 물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자 걱정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원오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화두공안은 옛날 아궁이의 부지깽이와 같은 것입니다.


온갖 분별 망상을 끌어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의 불길 속에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태우고 또 태우다가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가 옵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부지깽이마저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적수도인은 답답한 마음에 앞서 제시한 화두 대신 다른 방편을 알려달라고


원오 스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러자 원오 스님은 하나의 방편이 있다면서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도적의 말로 도적을 쫓고, 도적의 칼로 도적을 죽이는 수단입니다.

원오 스님의 말끝에 가슴에 걸려 있던 의문이 타파된 적수도인은


‘원래 이렇게 가까이 있었거늘!’ 하며 깨닫게 됩니다.


이 일은 가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와 세상 전체가 원래 이것 자체였습니다.


그동안 허다한 분별 망상 속에 있느라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천만 가지 의문을 한 가지 의문 속으로 몰아넣은 다음, 그 마지막 한 가지 의문마저


박살을 내주는 것이 선지식의 기량입니다. 그리고 의문 속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 의문으로 온 천하를 가득 채우는 것은 공부하는 이의 정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줄탁(啐啄)의 인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 몽지 원명님(몽지와릴라 밴드에서)


멋진 가족,행복한 가족

 

  ◇ 법우님들

      오늘은 “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족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위 가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세 가지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 부모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내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공덕입니다.

 

   두 번째는

   성장해서 결혼하면 아내와 남편이란 부부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부부관계는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인연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세 번째는

   결혼한 후 자식을 낳게 되면 부모 자식과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자식에 대한 선택은 부부처럼 자신의 선택에 속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습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책임은 부부에 대한 책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인간관계를 맺어 갑니다.

 

 

   [2]

 

    (1) 먼저, 부모와의 관계를 보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니까 고마운 분이고,

    은혜를 입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왜 그럴까요?

    ‘나를 더 교육을 잘 안 시켜줬다, 어릴 때 야단을 쳤다,

     재산을 더 많이 안 물려줬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고마워하고 은혜를 갚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아직도 바라고,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을 갔고 있습니다.

 

  ● 부모와 갈등이 있다는 것은 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워 할 줄 모르고,

     은혜 갚을 줄 모르고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부라는 관계는

   내가 선택한 것이고, 세상에서 말하듯이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부관계가 많은 사람들이 원만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냐? 원수를 보듯 합니다.

   

  ● 왜 이렇게 부부관계가 고통이 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맺고 있는 부부관계가 큰 이기심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는 “의리가 있냐!” 이것만 하나만 따지면 됩니다.

   또 사업이나 거래를 할 때는 “신용이 있느냐!”하나만 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려고 선을 볼 때는 어떻게 봅니까?

   열 가지, 스무 가지를 봅니다. 키도 조금 커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신체도 건강해야 하고, 학벌도 좋아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직업도 좋아야 하고, 거기다가 성격도 좋아야 하고,

   나만 사랑해야 하고….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 친구를 사귀다가 의리가 없으면 친구 관계를 그만 두면 됩니다.

   또 사업을 같이 하다가 신용이 없으면 그만 둡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면서

    “ 덕 볼라고 결혼을 했는데 살아보니까 별로 덕이 없네.”

    “에이, 혼자 사는 게 더 낳을 걸.”

    그러다가 더 지나면 덕 보기는커녕 손해를 봐. 그러니까

   “같이 살 필요가 없겠다. 혼자 사는 게 낳겠다.” 이렇게 해서

    헤어질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이렇게 우리가 갈등하는 것은

   출발할 때 생각하는 관점이 벌써 잘못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안 좋아지면, 왜 안 좋은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속았다. 돈 있는 줄 알고 결혼했더니 돈이 없더라.

   성격이 좋은 줄 알았더니 성격이 나쁘더라. 속았다.”라고 합니다.

 

   ● 그 말은 "상대가 나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의 원인은 다 상대에게 있습니다.

 

   ● 부부관계가 나쁜 것은

   궁합 문제도 아니고, 사주팔자 문제도 아니고, 전생의 원수도 아니고

   바로 덕을 보려고 하는 이기심으로 만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다음은 자식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낳아서 자기가 키웠으니까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

    자식들은 성장해 가면서 부모 뜻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 이 자식을 부모 뜻대로 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 이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입고 커도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 보다는

    간섭하는 사람, 속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간섭을 안 받으려고 집을 나가는 일이 생깁니다.

    부모가 자식이라고 맘대로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나빠지게 됩니다.

 

   ◇ 부모는 자식에게 온갖 것을 해줬는데, 자식이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원망하니까 부모로서는 원수를 하나 키운 것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3]

 

    이와 같이 가족관계의 갈등과 고민이 인생살이 고민 중 90%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가족 관계를 맺고 사는가요?”

    우리는 행복하려고.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 가족관계를 맺는데,

    이 가족관계가 행복은커녕 도리어 불행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중생은 본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즉, 인간관계를 잘못 맺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잘못 맺고 있느냐?

    바로 인간관계의 올바른 원리, 법칙, 이치 이걸 모르고

    소위 무지하게 무지해서 관계를 잘못 맺고 있다 이겁니다.

 

 

  ◇ 물질에는 물질의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성질을 모를 때는 이용하는데 굉장한 불편을 겪습니다.

   지금은 그런 물질의 법칙을 이용해서 우리가 물질을 내 필요에 맞게 이용합니다.

 

  ◇ 이와같이 사람의 마음에도 작용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것은 전생의 죄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고, 하느님의 벌도 아니고

    알지못하는 것 <=무지= 무명(無明)>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모든 고(苦)의 근원이 됩니다.

 

 

  ◇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는 거기에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알게 되면, 내가 원하는 데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이 원리를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 좋게 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나빠지니까 억울하게 되고 

     결국 하늘을 원망하고, 전생을 탓하고, 팔자 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법칙, 자연에는 자연의 성질,

   생명에는 생명의 원리, 마음에는 마음 작용의 원리를 바로 알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라 하는 윤리 도덕이 아니요,


   위의 법칙과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무지와 무명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펴실 때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고 말씀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부모님 때문에 괴롭다든지,

     어떤 아내나 남편으로 인해서 인생살이가 괴롭다든지,

    어떤 자식 때문에 괴롭던지 할 때

 

    1) ‘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하는 원리와

    2)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

       이 두 가지만 알면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게 됩니다.

 

 


   (1) 노인은 노인의 어떤 성질이 있다.

   부처님 처럼 까르마(Karma=업식=행동, 생각하는 습관=고정관념)

   즉, 업식(業識)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노인은 노인의 어떤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몸뚱이도 굳어서 유연하게 휘어지지 않듯이

   이 생각도 바뀌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어르신들의 성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습관화 된 것들은 고쳐지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어르신이나 부모님을 자꾸

   자신의 생각으로 <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저렇게 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강요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자꾸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어르신과 관계를 맺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것은 부모님에 맞춰 주는 것이 좋습니다.

 

    언제나 부모님이 뭐라고 그러시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하면 부모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결국 내가 좋습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것을 “어리석다.” "무명"이라 하고,

   이런 이치를 아는 것을 “지혜롭다.” 고 하는 것입니다.

 

   ● 어리석으면 원수를 만들고,

       지혜로우면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2) 그 다음 두 번째, 부부지간에는 자라온 환경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말을 해도 그 말이 들리는 방식이 서로 다르게 들립니다.

 

   즉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만 들리고, 싫은 소리,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소리는 잘 안 들리게 됩니다.

 

   이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걸 생각 안하고,

   부부니까 항상 생각이 똑같은 줄 알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는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면 됩니다.

 

   (3) 세 번째 자식도 자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무조건 자식을 너무 과잉보호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식은 스무 살이 넘으면 부모는 자식과의 일체 관계를 끊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이 자립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주인이 돼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여러분들은 자녀의 길을 막아놓고,

   자녀가 길이 막히니 부모 밑에 붙어서 평생을 살게 되고,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을 하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은 자식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부모의 문제입니다.

 

 

   ◇ 그래서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1) 노인은 노인의 습성에 맞춰주고,

      2) 부부관계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고,

      3) 자식은 어릴 때는 돌보아 주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고,

         성년이 되면 정을 끊어주어 독립심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 그러므로 불자여러분

    어떻게 상대를 변화시켜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덕 보려고 하지마세요.

 

    내가 깨쳐서 상대에게 혜택을 주는 쪽으로

    이해가 되려 하지 않고 이해하는 쪽으로,

    사랑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랑 하는 쪽으로, 도움 받으려 않고

    도움 주는 쪽으로 내 삶을 보디사트바(Bodhisattva, 보살)로 전환 할 것이냐.

    이 기준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가족과 이웃과 세상을 억지로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을 바꾸어 갈 뿐입니다.

 

    내가 바뀌면

    가족이 바뀌고, 이웃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