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 홍산문화

2016. 9. 11. 17:12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대종교(大宗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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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화

홍산문화 우하량에서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적석총[塚], 신묘[廟], 대형 원형제단[壇]을 모두 갖춘 동북아 최고最古 문명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5,500년 전에 이미 종교를 중심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조직을 갖춘 상고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보다 1~2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으로서, 인류 제천祭天문화의 고향이요, 동서양 피라미드, 거석문화의 원조이다.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 시대 배달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은 환국·배달·고조선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천자天子 문화의 고향


천자天子는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준말이다. 천자가 등극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하늘에 천제天祭를 올리는 일이었다.  이 천자라는 말과 천자제도가 한민족에게서 유래했음을 중국의 사서에서도 증명하고 있다.

 

한나라의 채옹이 지은 『독단』에 보면 “천자는 동이족이 부르든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천자라 부른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 故稱天子.]”는 대목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치우는 구려(九黎)의 천자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孔安國曰 九黎君號가 蚩尤라.(『사기색은史記索隱』), 應劭曰 蚩尤는 古天子之號라(『사기집해史記集解』), ]라고 하였다.

 

 

 

천자는 용봉龍鳳으로 상징된다.

 

용봉은 ‘상서로운 동물[吉祥物]’로서 천지음양 기운을 상징하는 영물이다. 용은 음을 상징하는 신수神獸이고, 봉은 양을 상징하는 신수이다. 그래서 용은 천지의 물의 조화를 다스리고, 봉은 불의 조화를 다스린다.

 

일월(日月)에 비유하면 용龍은 달의 광명을, 봉鳳은 태양의 광명을 상징한다. 용봉이 음양, 수화, 일월日月을 나타내는 상징적 신물이기 때문에, 용봉龍鳳은 인간 세상에서 천자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예로부터 천자는 통치자이며 스승이었고 신의 뜻을 전하는 대무大巫였다. 우리는 무당을 단골(단군) 또는 당골로 불렀다.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고, 왕검은 통치자의 의미이다. ‘단군왕검’은 정교(政敎)가 합일된 호칭이다.

 

 

 

 

중국으로 전해진 천자문화


금간옥첩(金簡玉牒) 전수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동북아에는 9년 홍수라는 사상 최대의 대재난이 있었다. 당시 초대 단군왕검은 우주변화원리로 무사히 홍수를 다스렸고 순임금은 이를 다스리지 못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때 순의 신하로서 사공司空 우禹가 도산塗山에서 부루 태자에게서 오행치수법(금간옥첩)을 전수 받아 홍수를 해결하게 된다. 그 공덕으로 우는 하夏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데 나중에 죽을 때에도 부루태자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자기를 회계산(도산)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오월춘추』)

 

 

우禹가 전수받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은 치수의 요결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의 도道와 동방 고조선의 정치제도, 문화가 수록된 국가 경영지침서이다. 여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도, 홍범구주의 내용도 실려있었다.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다섯 번째가 황극皇極사상이다. 바로 이 황극으로부터 천자사상이 나왔다. 즉 천자제도의 기틀, 동양문화의 근본정신이 담겨 있는 금간옥첩이 전해짐으로써 단군조선의 천자문화가 본격적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汝后請予(여후청여)하야 以欲導治水土(이욕도치수토)하야 拯救百姓(증구백성)일새 三神上帝(삼신상제)가 悅予往助故(열여왕조고)로 來(래)라


너희 임금(순임금)이 나에게 수토를 다스려 백성을 구해 주기를 청원하니, 삼신상제님께서 내가 가서 도와주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왔노라 (『태백일사』 「번한세가上」)


 

且其五行治水之法(차기오행치수지법)과 黃帝中經之書(황제중경지서)가 又出於太子扶婁(우출어태자부루)오 而又傳之於虞司空(이우전지어우사공)하고 後(후)에 復爲箕子之陳洪範於紂王者(부위기자지진홍범어주왕자)가 亦卽黃帝中經(역즉황제중경)과 五行治水之說(오행치수지설)이니 則蓋其學(즉개기학)이 本神市邱井均田之遺法也(본신시구정균전지유법야)니라.


또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 부루태자에게서 나와 우虞 사공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洪範九疇)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대저 그 학문은 본래 배달 신시 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이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

 

 

 

하·상·주 3왕조는 조선朝鮮의 신하국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교체될 때에도 단군조선의 힘이 작용하였다. 상나라 개국공신인 이윤은 고조선 11세 도해단군 때의 국사國師인 유위자의 제자였다.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궁전, 성벽, 무덤 등이 동북방(단군조선)을 향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단군조선을 상국上國으로 지극히 받들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다음으로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도 그 창업 당시부터 고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병력과 전차를 보유한 상나라 군대를 이기기 위해서 주 무왕은 동이족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무왕을 도운 동이족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강태공이다.

 

주나라도 이전의 왕조와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하였다.『 단군세기』에는 주나라 왕 하가 단군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일, 32세 추밀단군 때 주나라가 번조선에 방물方物을 바친 일등이 기록되어 있다. 하·상·주 중국 3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을 문화의 조국으로 모시던 제후국이었다.

 

是歲冬(시세동)에 殷人(은인)이 伐夏(벌하)한대 其主桀(기주걸)이 請援(청원)이어늘
帝以邑借末良(제이읍차말량)으로 率九桓之師(솔구환지사)하사 以助戰事(이조전사)하신대 湯遣使謝罪(탕견사사죄)어늘 乃命引還(내명인환)이러시니 桀(걸)이 違之(위지)하고 遣兵遮路(견병퇴로)하야
欲敗禁盟(욕패금맹)일새 遂與殷人(수여은인)으로 伐桀(벌걸)하시고 密遣臣智于亮(밀견신지우량)하사 率畎軍(솔견군)하시고 合與樂浪(합여낙랑)하사 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진거관중빈기지지이거지)하시고 設官制(설관제)하시니라.


이 해(BCE 1767) 겨울, 은殷 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치자 하나라 왕걸桀이 구원을 청하였다. (13세 흘달단군)임금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에게 구환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이에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셨다. 이때 걸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보내어 견군畎軍 을 이끌고 낙랑樂浪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빈邠·기岐 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官制를 설치하셨다. 「( 단군세기」13세 흘달단군)


 

 

동방의 한민족은 원래 천자의 나라


열국시대에서 고려까지 대부여를 계승한 북부여는 물론이고 해모수의 후예,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 역시 천자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천자국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이 만주 집안현集安縣에 1,500년 동안 굳건히 서 있는 광개토태왕비문에도 잘 나타난다.

 

비문에는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라는 문구가 있어 그들이 하늘의 자손, 천제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발해) 역시 당나라에 예속된 지방정권이 아니라 당당히 천자국의 위상을 떨친 독립국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발굴된 상경성의 제2궁전지의 전면이 19칸인 사실(당나라 장안성의 함원전은 11칸)과

 

1980년 발견된 정효공주의 묘지명에서 그 아버지인 문왕을 ‘황상皇上’이라 부른 것이다. 왕비의 묘비명에서 황후라는 표현을 쓴 것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고려 역시 출발은 천자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수도 개성을 황도皇都라 일컫고 원구단을 설치하여 천제天祭를 올렸다.

 

甲午三十四年(갑오삼십사년)이라 十月(시월)에 東明國高豆莫汗(동명국고두막한)이 使人來告(사인래고)하야 曰(왈) 我是天帝子(아시천제자)라 將欲都之(장욕도지)하노니 王其避之(왕기피지)하라 한대 帝難之(제난지)러시니 是月(시월)에 帝憂患成疾而崩(제우환성질이붕)하시고 皇弟解夫婁(황제해부루)가 立(입)하시니라.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북부여기 上」)

 

 

時(시)에 下夫餘人(하부여인)이 將欲殺之(장욕살지)어늘 奉母命(봉모명)하사
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여오이마리협보등삼인)으로 爲德友(위덕우)하시고 行至岔陵水(행지차릉수)하사 欲渡無梁(욕도무량)이라 恐爲追兵所迫(공위추병소박)하야 告水曰(고수왈) 我是天帝子(아시천제자)오 河伯外孫(하백외손)이라 今日逃走(금일도주)에 追者垂及(추자수급)하니 奈何(내하)오 於是(어시)에 魚鼈(어별)이 浮出成橋(부출성교)하야 始得渡(시득도)하시고 魚鼈(어별)이 乃解(내해)하니라.

 


당시 동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주몽이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사람과 친구의 의를 맺고 함께 길을 떠났다. 차릉수岔陵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하여 강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오늘 달아나는 길인데 쫓는 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리까?” 하니,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수없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다.(「북부여기 下」)

 

 

 

 

 


 

 

 

 

국통 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3단계씩 세 번에 걸쳐 이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국 → 배달 → 조선으로 3단계, 이어 열국 시대(북부여·동부여·남삼한) → 사국 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 남북국 시대(대진국(발해)·통일신라)로 3단계, 그리고 고려 → 조선 → 대한민국(남한·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다시 3단계인 것이다. 한국사에서 국통은 이처럼 면면히 아홉 굽이를 거쳐[九變之道] 오늘까지 이어 왔다. 한민족의 9천 년 역사는 계승되어 내려온 국가들의 마디만 따져 보아도 삼신의 3수 원리가 그대로 펼쳐진 것임을 알수 있다.

 

 

 

 

 

천자국의 위상이 무너지는 과정


고려의 쇠망
고려 초기에는 천자국으로서 당당히 건원칭제建元稱帝를 하였다. 고려는 예종 때 와서 윤관을 앞세워 여진을 물리치고 동북쪽에 9성을 구축함으로써 고구려의 후예라는 건국이념에 보다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나 동북 9성은 설치된 지 1년 만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친다’는 언약을 받고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된다. 이후 여진은 성장을 계속하여 9성을 환부받은 지 6년째에 금나라를 세우게 된다. 드디어 고려 인종 3년(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유화적인 태도를 거두고 고려에 군신君臣관계를 강요해 왔다.

 

 

전쟁을 두려워한 고려 조정은 금나라에 상표上表를 올리고 칭신稱臣하였다. 고려를 부모로 섬기던 여진족을 이제 고려가 임금의 나라로 섬기게 된 것이다. 유교식 정치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고려는 어느 새 문약에 빠져 버렸다. 이후 금나라, 송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며 사대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말엽에는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황제국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하였고 국왕에 대한 칭호는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었다.

 

그 첫째 왕인 충렬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을 왕비로 맞았다. 이후로 고려는 줄곧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환국, 배달, 조선 이래 줄곧 천자국이었던 우리의 위상이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이암 때에는 원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더욱 강화되어 오잠, 류청신 등이 국호 ‘고려’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일개 성이 되고자 하는 청원을 원의 조정에 제출하였고 원으로부터 ‘원나라의 삼한성으로 한다’는 칙령이 내려오기도 하였다.

 

이즈음 이존비와 이암은 상소문을 통해 자주독립정신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本國(본국)이 自桓檀朝鮮北夫餘高句麗以來(자환단조선북부여고구려이래)로 皆富强自主(개부강자주)하고 且建元稱帝之事(차건원칭제지사)는 至我太祖初(지아태조초)하야 亦嘗行之(역상행지)나
而今則事大之論(이금즉사대지론)이 定爲國是(정위국시)하야 君臣上下(군신상하)가 甘受屈辱(감수굴욕)하고 不圖所以自新(불도소이자신)하니 其畏天保國則誠美矣(기외천보국즉성미의)어니와 奈天下後世之笑(내천하후세지소)에 何(하)


우리나라는 환단.조선.북부여.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를 유지하였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사대事大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있어 군신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 고려국본기」-이존비의 상소문)

 

 

國界(국계)를 不可破也(불가파야)며 民俗(민속)을 亦不可混也(역불가혼야)니이다.
况我國(황아국)이 自桓檀以來(자환단이래)로 皆稱天帝之子(개칭천제지자)하고 行祭天之事(행제천지사)하니 自與分封諸侯(자여분봉제후)로 元不相同(원불상동)이오 今雖一時爲人轅下(금수일시위인원하)나 旣有魂精血肉(기유혼정혈육)하야 而得一源之祖(이득일원지조)하니 是乃神市開天(시내신시개천)과 三韓管境之爲大名邦於天下萬世者也(삼한관경지위대명방어천하만세자야)니이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桓·단檀(환국-배달-고조선)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천제자天帝子, 天子)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뿌리가 같은 조상[一源之祖]에게 물려받은 정신과 육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배달의) 신시개천神市開天과 (고조선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것입니다. 「( 고려국본기」 -이암의 상소문)

 

 

 

조선왕조의 멸망
고려를 계승하여 새롭게 열린 조선왕조는 고려 때보다 더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조선 사회는 철저한 모화사대주의 慕華事大主義 사회였다. 선비들은 말끝마다 명나라를 본조本朝 또는 천조天朝, 성조聖朝라고 했고 조상의 비문에도 항상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고 내세웠다. 유교를 국교로 숭상한 조선은 개국초 태종 때에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를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소각하였다.

 

그 이후 세조에서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사서수거령을 내려 유교 지상주의에 반하는 수많은 사서들을 압수, 소각하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 자기의 역사를 파괴하는 해괴한 행위이다. 이미 국초國初부터 망국으로 가는 비운의 단초가 시작된 것이다. 1910년의 경술국치는 사실상 죽어가는 환자의 숨통을 일본이 와서 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은 이미 정신적으로 한·중합병으로 망한 상태였다.

 

조선의 명운이 촛불처럼 꺼져가던 1897년 고종 임금은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스스로 천자의 보위에 올라 새로운 국호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비록 대한제국은 곧바로 망했지만 이 사건은 끊어진 한민족의 천제문화의 맥을 되살리고 동방의 한민족이 본래부터 천자국임을 만천하에 알린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한·중·일은 역사전쟁 중

바야흐로 동북아는 역사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자국의 교과서까지 왜곡하면서 집요하게 독도 침탈을 노리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통해 만주 지역에 있었던 우리의 고대사인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강탈해갔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빛나는 나라’라고 해서 나라 이름을‘ 중화中華’라고 한다. 그들은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으로 패권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이름 그대로 자기네가 인류 역사의 천자국임을 내세워 앞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넘버원 행세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근본’이라는 일본日本 역시 그들의 왕을 천황天皇이라고 해서 진짜 천자국임을 표방한다. 천자국이 성립되려면 제후국을 점령하여 다스린 역사가 필요하다.「 임나일본부」라는 가공의 역사가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독도 침탈 야욕이 끊이지 않는 것 역시 그 깊은 심연에는 천황제가 자리잡고 있다. 결국 중국과 일본이 천자국 다툼을 벌이는 것은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의 원형 문화인 홍산문화에 대한 소유권 다툼을 벌이는 것과 같다.

 

 


Casa Bianca (White House -언덕위의 하얀집) / VICKY LEAND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