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를 화살 받는 것처럼 / 성철스님

2016. 9. 17. 18: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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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를 화살 받는 것처럼 하라


       


   


사람을 보거든 먼저 절하고  


공양받는 일은 나중에 하라


   


성철스님은 자신에게 대단히 엄하고 자기와의 약속에 철저했다.

평소 자신에 대한 인사는 물론 정초 세배도 부처님께 예배로 대신하게 했다.


“정초 시봉하는 대중 세 명의 세배를 드리려 하니 따로 받지 않으셨어요.


부처님께 절하는 걸 세배로 대신 하셨습니다.

단 종정이 되고 하례식 때 전국에서 스님들이 오셨을 때 종정으로서 위치 때문에

세배를 받았지 개인적으로 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것인지 삼천배 안하면 스님을 만날 수 없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것은 영 안 맞는 얘기입니다.

‘부처님께 3000번 절하는 것이 나(성철스님) 만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이다,

절에 온 의미가 더 크다, 절에 온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로 절을 하고

자기관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데서 삼천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법석에 함께 한 진관·만수스님 두 사제도

“우리는 은사의 생신도 몰랐을 정도”라며 은사의 일관된 입장을 회고하면서

은사 성철스님은 생일상만 안 받은 게 아니고 설날 세배 같은 그런 형식적인 인사는

아예 안 받으려고 문을 걸어 잠그기도 했다고 전했다.  


 


성철스님의 맏상좌로 성철문도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해월(海月) 천제(闡提)스님을

부산 해월정사에서 만났다.

스님은 팔공산에서의 설날을 떠올렸다.


   


“성전암에 철망을 두르고 계신 동안 세배하러 온 신도들에게 오히려 기도를 시켰습니다.

가까이에서 오는 신도는 일부러 큰 절에 가라고 하고.

멀리 부산 서울에서 온 이들은 입장을 시켰는데 그 나마 몇 명 안됐습니다.

초하룻날은 가족끼리 설을 쇠고 이튿날은 일가친척

그리고 사흗날 부처님께 세배를 하라고 날짜를 정했어요.

그래서 3일 날 세배 온 사람들은 어렵게 왔으니까

부처님께 세배에 그칠 게 아니라 ‘3일 동안 기도하고 가라’고 하셨어요.

해월정사에서는 지금도 정초 4일 법신진언기도정진 입재를 해서

7일 회향하는 그 일정을 지키고 있습니다.”


 


1953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출가한 천제스님은

1993년 은사 성철스님이 열반 때까지 40여년을 모셨다.

첫 10년은 천제굴에서의 ‘수행행자’로서의 시봉이었다.


 


“그 때 성철스님은 6·25전란 등으로 봉암사 결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던 기간.

그리고 팔공산에서 10년은 봉암사에서 처음 뜻을 냈던

한국불교 중흥을 실천하기 위한 교리정리 등 준비기간

총림방장으로서 해인사에서의 10년은

한국불교를 정통 선종 불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솔선수범했던 기간.

말년 10년은 종정으로서 종단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신 것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40여년이지만 성철스님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 대단히 엄하고 늘 ‘분수’ 지킬 것을 강조했다.

“지금 사회가 혼란한 것도 모두가 자기분수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감당하지 못할 일까지 넘겨보는 그런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천제스님은 은사의 철저한 수행관과 가르침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총림설치법에 따라 방장 추천장 하나, 말씀 한 마디면 주지를 할 수 있던 시절

천제스님은 오히려 평생 주지를 하지 않게 됐다.


 


“성철스님이 ‘내가 방장이고 제 상좌를 주지시키면 대중이 말을 듣겠냐?

 나는 비구 대처 분규 때도 사판의 일이라고 주지소임을 거부했는데

 내 상좌라면 안할 수 없겠느냐’고 해서 해인사 주지를 안 한 거예요.”


 


1980년대 총무원장 녹원스님의 세 차례에 걸친 파견요청으로 맡게 된 ‘종정 사서실장’도

세 가지 약속을 한 후에 수행할 수 있었다.

“첫째, 재산처분에 개입하지 마라. 둘째, 인사문제에 개입하지 마라.

셋째, 큰 절 주지하지 마라.

원장스님이 저렇게 청을 하니 세 가지를 지키려거든 총무원 가서 도와주라 이거예요.”


 


성철스님은 자신에게 엄한 만큼 가까운 이들에게도 엄했다.

그런 면에서 맏상좌 천제스님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하지만 스님의 입장은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스님은 오히려 ‘은사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것 같아 늘 부끄러울 뿐’

이라며 1947년 성철스님이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면서 만든 생활규칙인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법대로 살 것’을 다짐한 결사였다.

무속불교의 타파, 상업사찰의 근절, 사기승가의 정화.

이 세 가지 원칙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나는 지금도 은사스님 말씀이 대단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가자가 사판적인 이익을 탐하는 것은 처음부터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인데 요즘 정치인을 뺨칠 정도의

일부 승가의 모습에서

‘묵은 도적을 밀어내고 새 도적이 들어간다’는 성철스님의 예언이 다시 되새겨지고

그런 말씀을 담은 친필을 소개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다짐하게 됩니다.

성철스님도 자신의 말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평생의 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묻거들랑 나의 친필을 보여주라’는 성철스님의 부촉,

그 계시가 있지 않았으면 친필을 여기에 보관할 이유도 없는 거 아니에요.”


 


스님은 초하루법회 때마다 성철스님의 친필 한 페이지씩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초하루는 마침 설날이라 법회가 없어 불교신문 독자들을 위한 시간이 됐다.

해월정사 달력 6월 쪽에 실린 공주규약의 초안을 펼쳤다.

공주규약에 들어있지 않은 게 몇 줄 있었다.


 


  


성철스님 ‘봉훈관’ 건립…유훈 실현


  


“‘살인강도가 될지언정 어찌 만고의 사표인 불타(佛陀)를 생활도구화 하리오.

부처를 팔아 생계를 꾸리려고 하는 것은 불법파멸의 근본 악폐다.

그래서 기복구명의 무축(巫祝)행위 무속행위는 단연코 금지해야 된다’ 이런 메모가 있고.

그 다음에 지킬 일이 공주규약 그대로 된 거에요. 이 말도 공주규약에는 없죠.

 ‘見人先拜 受供後擧(견인선배 수공후거)’ 사람을 보거든 먼저 절하고 공양 받는 일은

마지막에 하라.

받는 것은 천천히 하라는 것을 초안에 메모해 놨거든요.

그리고 위에 조그마하게 메모해 놓은 것이 ‘罪滅福生(죄멸복생).

죄업이 소멸돼야 복이 나는 것이지 무축행이나 기복을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불공에 대한 성철스님의 마음을 여기에 메모해 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이지만 천제스님 개인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출가 때 성철스님이 받아쓰라고 해서 노트에 적은 글이다

제목은 ‘중노릇’.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섬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는 위대한 인물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내용과‘시주받는 것을 날아오는 화살 받는 것처럼 하라’는 뜻의 ‘受施如箭’(수시여전)

성철스님 친필이다.


 


천제스님은 해월정사를 은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원을 세워

성철스님 열반 10년째인 2004년 건립을 시작해 2008년 10월 봉훈관(奉訓館)을 준공했다.

지상 4층 규모다. 4층은 법당, 3층은 시월전, 2층은 선실로 사용되고 있다.

봉암사 결사가 전쟁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워하셨던 성철스님은

천제굴에서라도 총림의 일과를 지켜야 한다면서

아침예불에는 ‘능엄주’를, 저녁예불 때는 ‘예불대참회’를 했다.

법당에는 예불대참회문에 나오는 88분의 부처님을 모셔놓았다.

시월전(示月殿)은 성철스님의 친필과 소장했던 경전 전시관이다.

일상의 메모나 법문 원고, 경전풀이 등 500여 점이 있다.

일력(日曆) 뒤쪽에 쓰거나 공책의 일부, 원고지 등에 기록한 것들이다.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전시하고 있어 마치 스님 육성을 듣는 듯하다.


 



“성철스님이 부처님을 묻는 사람은 해인사로 가라해도 좋다 했지만

자신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한테는 친필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글 쓸 당시 배경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고 온 후 봉훈관을 건립해냈다.

잔금을 치르지도 못하고 준공식을 한 것을 보면 스님의 표현대로 “신장님 도움”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불교를 위해서는 친필이 지남(指南)이 되어야 하겠구나.

그래, 교시를 받드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하는 칠순 맏상좌의 말에

자리를 함께 했던 두 사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사의 가르침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었고 상좌는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천제스님은 해인사 일주문 주련을 떠올렸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 


 


 천제스님 


[불교신문 2497호/ 2월4일자]




성산대교/청산별곡  


청산별곡 원문과 해석

작자미상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제1연> 


살고 싶구나, 살고 싶구나. 청산에 살고 싶구나.

머루랑 다래를 먹고 청산에서 살고 싶구나.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2연>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여.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새여.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고 있노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3연>


 날아가던 새를 본다. 날아가던 새를 번다. 물 아래 날아가던 새를 본다.

녹슨 연장을 가지고 물 아래로 날아가던 새를 본다.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4연>


이럭저럭 하여 낮은 지내왔지만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5연>


어디에다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돌에 맞아서 울고 있노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6연>


살고싶구나 살고싶구나. 바다에 살고싶구나.

나문재랑 굴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고싶구나.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장대예 올아셔 奚琴(해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7연>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외딴 부엌으로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타는 것을 듣노라.


  가다니 배 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8연> 


 가더니 불룩한 독에 독한 술을 빚는구나.

조롱박꽃 같은 누룩 냄새가 매워 나를 붙잡으니 낸들 어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