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몰라야 크게 깨달을 수 있다./혜암스님

2016. 10. 2. 20: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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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몰라야 크게 깨달을 수 있다./혜암스님


 



마음을 이리 한번 저리 한번 돌리면 마구니가 덤벼 버립니다.
마구니가 속여 먹을려고 그 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합니다.
하늘을 쑤실 용기가 나고
누구 뭐래도 내가 제일인 것 같은 용기가 막 납니다.
조금 공부를 하다 보면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법담도 나누고 게송을 만들고 싶기도 한데,
그것은 마구니가 시켜서 그런 것이지 내 마음이 아닙니다.

공부는 알아지는 것은 그만두고 들어갈수록 깜깜해져야 합니다.
분명히 몰라야 크게 깨달을 수 있는 분(分)이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있는 사람은 깨달을 분이 없습니다.
힘이 뭉치지 않으니 깨쳐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몰라야 합니다.


아는 것이 있으면 화두가 들리지 않습니다.
화두가 크게 불덩이처럼 뭉쳐지질 않습니다.
안다는 생각이 화두의 기운을 뺏앗아 가기 때문에
화두가 뭉쳐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마구니들이 공부를 못하게 하려고 조화를 부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늘의 별도 보이고, 해도 보이고,
오십 리 밖에서 누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도인줄 아는 사람들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 욕심에 오십 리 밖에서 누가 온다, 무슨 일이 생긴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재미가 있어 써먹고 싶거든요.
조그만 살림살이에 호기심이 생겨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좋겠다,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완전히 마구니 권속이 됩니다.

마구니는 기분 좋게 만들다가도 언젠가는 골탕을 먹입니다.
구덩이에 데려가 떨어져 죽게 하기도 하고,
손가락도 잘라지게 하고, 또 공부하다 보면
마구니가 심통이 있어서 나를 따라 극락세계에 가자고 부릅니다.
마구니의 신통력으로 구덩이 골짜기가 전부 대로로 보인답니다.
낭떠러지가 큰 신작로로 보여 따라가다 죽어 버리게 되는 겁니다.
스승 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토굴에 가더라도
이런 상식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은 공부하는데 장애가 많습니다.
복이 없으며 마장이 생겨 공부도 못합니다.
본인들은 마구니들이 공부를 뱡해하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수행자도 그렇습니다.
이 스님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무서워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
그런 것을 보아 공부를 방해한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마구니들이 시간 시간 우리를 따라다니며
마장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 기분 나쁜 일이 있어 공부하지 못하면
마구니가 방해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안이 망해도 공부하겠다 하고 공부하면 방해를 못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끓는 물 속에는
파리나 모기가 덤비질 못하지 않습니까?
망상을 피우지 않고 화두를 들면
마구니는 물론 염라 국에서도 나를 잡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을 버리는 공부가 화두 공부인데
복을 지었다, 착한 일을 했다는 상(相)을 내면
귀신들의 종노릇을 면치 못하고 자신은 죽습니다.
나고 죽는 괴로움을 면치 못할 뿐더러,
망상으로 살기 때문에 귀신의 권속이 되어 버립니다.
마음을 비워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니 우습습니다.
저 사람도 송장, 나도 송장, 저 사람도 허망하고, 나도 허망하고,
다투는 일도 허망한데 이겨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세상일은 송장들이 시시한 물건을 가지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바깥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을 비워라' 하는데
그렇다면 이 몸을 가지고 살 수 없지 않느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기는 하되 하는 일없이 하라' 그 말입니다.

밥을 먹어도 욕심으로 먹지 말고 공부하기 위해서 먹고,
가도 가는 것 없이 가고, 살아도 공부 하기 위해서 살아야지
도둑놈 도와주어 이익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먹어 봐야 늙기만 하고 똥 쌀 일만 있습니다.
'먹기 위해 돈을 버는데 안 먹고 뭐하느냐?'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도를 닦으려, 주인을 찾으러 왔습니다.
또 반대로, 지난날 지은 죄를 받으려 왔습니다.
그러니 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런 몸을 받아 오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받는 그릇이 몸인데, 어찌 죄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까?
인연 따라 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부지런히 내 마음을 찾는 도를 닦는 일입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하나도 부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굴 잘 생긴 사람,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
유식한 사람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세상 지식을 배워 아는 것은 유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속아 얽혀 살고 있습니다.
죽었다 깨도록 배워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 천(天)하면 하늘이 어떻게 생긴 줄 알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하늘이 하늘입니까?
따지(地), 땅에도 한량없는 이치가 많은데
따지(地) 해서 땅 소식을 어떻게 압니까?
마음 심(心)해서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억만년을 배워도 배워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生命의 法則   

숨을 한번 들이마셔 볼까요?

조금 더 들이마셔 볼까요?

繼續 들이마시면 어떻게 될까요?

큰 일이 나겠지요.

살려면 내쉬어야 합니다.

 

들어오는 것은 收入이고

所有이고 支配입니다.

繼續 들어오기만 하면 破滅합니다.

내보내고 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生命의 法則입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금은 物質文明의 最高點에 있습니다.

物質文明은 膨脹할 만큼 膨脹했습니다.

物質文明을 發展시킨 것은 無限競爭입니다.

競爭은 모든 사람을 滿足시킬 수 없습니다.

 

競爭을 通해서 한 사람이 成功하면

反對便에 있는 사람은 絶望하게 됩니다.

競爭이 甚할수록 두려움과 恐怖心은 늘어나고

破壞로 表現되고 平和는 깨집니다.

 

歷史를 持續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잠깐 멈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천천히 들이마시면

천천히 내쉴 수가 있습니다.

智慧로운 사람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들어오면 나가야 합니다.

들이마시면 내쉬어야 합니다.

고무풍선처럼 너무 마시면 터집니다.

나뭇잎처럼 때가 되면 떨어져야 합니다.,

그 속에 宇宙의 眞理가 있습니다.

宇宙의 生命이 있습니다.

   

- 좋은 글에서

*

크게 차이 있구나! 크게 차이 있구나!

드린 발을 걷고서 천하경계 바라보니!

어느 누가 나에게 깨달은바 묻는다면

불자 들고 입을 쳐 말을 막아 버리리.

 

也大差矣也大差矣

捲起簾來見天下

有人問我解我宗

拈起拂子劈口打

-長慶慧稜-

 

 현사 스님한테 어느 스님이 “여하시불(如何是佛),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진시방세계 시일과명주(盡十方世界 是一顆明珠)라”,

부처고 중생이고, 우주 만유가 바로 한 덩어리의 밝은 마니보주와 같은

보배구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면, 온 세계 만법이 평등무차별한 영롱한

광명의 구슬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구슬과 같은 것이,

온 천지 사바세계요,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