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주는 풍요로움|마음공부 생활수행

2016. 11. 13. 22: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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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주는 풍요로움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 : 법상스님





      아쉬움이 남는 자리

      라디오에서 나오는 좋은 음악을 듣다가
      그 음악이 끝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선율의 아쉬움이 맴돌아
      발을 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를 같이 보낸 뒤에
      가로등 불빛 아래 집 앞에서 손을 놓고
      헤어져야 할 때 우리 마음에는 또 하나의
      아쉬움이 꽃잎처럼 떨어져 쌓입니다.

      좋은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약속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멀어져 갈 때 잘해 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손수건을 적십니다.

      긴긴 시간 동안 한 자 한 자 마음 속 이야기를
      담아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는데
      그제 서야 사랑의 마음을 더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귀가 떠오를 때
      우리는 아쉬움에 몇 번이고
      우체통을 다시 바라봅니다.

      열심히 공부한 뒤 시험을 치르고 답안지를
      낼 때마다 성적의 결과를 떠나 늘 '아차'라고
      후회하는 아쉬움만 정답으로 남습니다.

      이 세상은 아쉬움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에는 아쉬움이 있고
      부족함, 안타까움이 그 사람을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고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출처 : 정용철 《마음이 쉬는 의자》 중에서


      영상제작 : 동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한 스님이 이교도집단의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스님을 본 이교도들은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며 야유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평온한 얼굴로 그들을 위해 염불하였다.
    마을을 벗어나자,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한 나그네가 따라오며 말했다.

    “스님, 스님께 그렇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는 무리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염불을 하시다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지 않소.
    나에게는 분노가 없으니 저들에게 분노를 줄 수 없었고
    마침 내게 조금 있는 자비를 저들에게 나눠준 것뿐이라오.”